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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창간기자 고희동(高羲東)

Posted by 신이 On 5월 - 23 - 2016

 창간기자 고희동(高羲東)(1886-1965)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 재직기간 1920.4-1923.12) 선생도 동아일보 창간 동인(同人)입니다.

  ‘내 나이 스물두 살 때, 국가의 체모가 말할 수 없게 돼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 이것저것 심중(心中)에 있는 것을 다 청산하여 보려고 그림의 세계와 주국(酒國·술에 취하여 느끼는 것 같은 딴 세상)에로 갈 길을 정했다.’는 고희동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동경미술학교(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 서양화과에 들어가 5년 과정을 졸업하고 1915년 돌아와 중앙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게 된 것이 인연이 돼 동아일보 창간 멤버가 됐습니다. (‘나와 조선서화협회 시대’, 신천지 1954년 2월호)

 입사 후 그의 첫 작품은 1920년 4월 1일자 창간호 1면 도안이었습니다.

 웅비(雄飛)하는 용(龍)틀임을 형상화한 동아일보 창간호 1면 도안의 상징성과 균형미는 어떤 신문 창간호에서도 보기 어려운 걸작입니다.

  “복판에 네모지게 난간을 하고 제목은 그 위에 가로 쓰고요. 네모진 난간 속에 창간사를 넣었습니다.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된 벽화 속의 용 같은 것을 모두 모아 만들었습니다.” (‘민족과 함께 반세기 – 동아일보 창간 45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1965년 4월 1일 동아방송, 고희동 증언)

  고희동 화백은 고구려 강서대묘 벽화들의 이미지를 종합, 꽉 차면서도 균형 잡힌, 새로운 세상을 향해 승천(昇天)하는 용의 꿈, 민족의 희망, 동아일보의 갈 길을 한 폭의 도안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당대의 명필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선생이 쓴 ‘東亞日報’라는 제호(題號)는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자 이후 시대에 따라 무궁화, 한반도 등 배경 도안의 변화는 있었지만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배경 도안은 창간 이후 모두 14차례 바뀌었습니다.

  1938년 2월 10일자 부터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될 때까지는 일제의 강압으로 무궁화 배경이 없는 제호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옥이라야 화동 한 모퉁이의 낡은 한식가옥 – 짤가닥거리는 평판인쇄기에서 찍혀 나오는 어설픈 신문이었지만 거기에는 줄기찬 뜻이 있었고 또 정열이 있었다. 신문사 운영은 아직 괘도에 오르지 못해 적자투성이인데다 걸핏하면 압수다 삭제다 정간이다 하는 바람에 박봉이나마 받지 못하고 외상 길조차 막혀 허덕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불평보다는 분노와 투지가 앞을 섰었다. 우리들은 제각끔 선각자라는 긍지와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일했었다. 왜경이 마치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갖은 위협과 압력을 다하며 성가시게 굴었지만 항일의 완강한 붓은 끝내 꺾지 못했다. 명월관에서 열린 창간축하연 때의 일이다. 술에 취하여 흥이 한창 도도해졌을 때 누군가의 선창으로 당시 유행하던 ‘독립운동의 노래’를 거리낌 없이 합창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초창기를 말한다’, 고희동, ‘동우(東友·동아일보 사내보)’ 1963년 7월호 9쪽>

 3·1독립운동 관련자 48인의 재판을 앞두고 동아일보는 48인의 사진을 모두 실어 거족적 관심을 표시한다는 대담한 기획, 통 큰 편집을 기획하고 사진을 모았으나 한용운 선생의 사진만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난처한 순간을 넘기게 해 준 사람이 K화백, 고희동 선생의 기지(機智) 였습니다.

  “한용운의 사진 한 장 만이 미비하여 나는 쩔쩔 매는데 K화백(고희동)이 어떤 단단하게 생긴 청년 얼굴에 그럴듯이 화이트를 칠해주면서 한용운이라고 한다. 내가 반색을 하면서 물으니 K화백(고희동)은 웃기만 하였다. 48인 중에 그 때 신문에 나타난 한용운의 사진은 가짜인 것을 말하여 둔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진학문(창간 당시 정경부장, 학예부장, 논설반 기자 겸임) = 월급에 대해서는 처음에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3단계로 나눠서 100원 80원 60원 이렇게 3단계로 나눴어요. 그랬다가 나중에 장덕수 군이 주간으로 되었으니까 장덕수 군 만 그때 120원을 받았지요. 그리고 100원 짜리가 셋인데 이상협(편집국장, 사회부장, 정리부장 겸임) 이운(영업국장 겸 경리부장) 나하고…

 고희동 = 나하고 염상섭이하고 80원…

(동아일보 1960년 4월 1일자 4면, 창간 40주년 기념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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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희동은 13세 때 프랑스어 학교인 한성법어학교에서 4년간 프랑스 말을 배운 앞선 사람이었고 일본으로 유학 간 최초의 미술지망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됐으나 1927년 이후 동양화가로 변신했습니다. 귀국(1915년) 직후 그가 그린 동양화 풍(風)의 서양화 ‘청계표백도(淸溪漂白圖)’가 지금의 청계천, 어디쯤엔가 있었을 법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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