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자 박일병(朴一秉)(1893-불명)
창간 당시 논설반 기자 박일병은 사회주의 신봉자이자 열렬한 운동가였다.
1893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와세다대학 문과에 입학한 박일병은 1919년 3월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귀국해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가 됐다. 그러나 얼마 안돼 동아일보를 떠나 사회주의 운동가의 길로 나선다.
보성전문 동기이자 시인인 황석우(黃錫禹)로부터 ‘누가 뭐라 해도 조선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자 이조(李朝) 500년 이후 처음 난 웅변가’ (삼천리 제4권 1932년 4월호)라는 평가를 받았던 박일병은 김명식이 쓴 ‘조선부로(朝鮮父老)에게 고함’과 권덕규(權悳奎)의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捧)’이 논란을 빚어 유림들이 몰려왔을 때 이들을 상대해 설득시켰다고 한다.
“이 놈! 동아일보 놈들아 부유(腐儒·생각이 낡고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라니 웬 말이냐. 공부자(孔夫子·공자를 높여 이르는 말)의 성학도(聖學徒)를.”
박일병은 부유(腐儒)의 뜻을 웅변(雄辯)으로 설시(說示)한 뒤 “그래 당신들이 이런 부유(腐儒)란 말이오?”
도포자락은 더 할 말이 없어 돌아 나갔다. (삼천리 1931년 9월호)
동아일보를 떠난 그의 활동은 본지에 줄곧 소개됐다.
1920년 6월 6일자 3면
고학생과 노동자를 돕기 위한 동경동우회가 조직되다. 동 회는 박일병 홍승로 등이 고학생의 취학과 노동자의 인격 함양을 위한 강습회를 할 계획이다.
1921년 4월 22일자 3면
단군어천(御天)기념
오늘 22일은 음력으로 3월 15일이니 곧 단군의 어천절이라. 가회동에 있는 대종교 남도본사에서는 오전 11시부터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저녁 7시 반에는 수송동 각황사에서 강연회를 여는데 송진우가 ‘조선인’, 박일병이 ‘신시(神市)’라는 제목으로 강연한다.
1921년 11월 3일자 3면
단군항세(檀君降世)의 기념일
작일 대종교 본사의 경하식
조션사람의 잇지 못할 이날
작일은 조선민족의 시조되시는 단군(檀君)끠서 세상에 강림하신지 사쳔삼백칠십팔회의 개텬경절(開天慶節)이라 시내 계동(桂洞)일백일번디에잇는 대종교 남도본사(大倧敎南道本司)에서 성대하게 긔념식을 거행하얏는대 먼저 지석영(池錫永)씨의 사회로 식이 열니매 씨의 간단한 식사가 잇고 정삼(鄭森)씨의 개식원도(開式願禱)가 잇슨 후 내회한 사람 일동이 『한배님 나리심』이라는 개텬가(開天歌)를 부른 후 유진찬(俞鎭賛)씨의 경하사(慶賀詞) 봉독이 잇슨 후 박일병(朴一秉)씨가 『금일은 단군끠서 강세 하신지 사천삼백칠십팔회의 긔념 경절일뿐아니라 강세하신 후 일백이십오년 무진(戊辰)년에 삼천단부(三千團部)중에서 추대(推戴)를 바다 님군의 위에 나가신 날인 즉 이 날은 조선사람된 자는 누구를 물론하고 모다 깁히 긔념하여야 할 것인대 이날이 무슨 날인지 알지 못하고 가로에 다니는사람들은 모다 무심히 지내는 것은 심히 개탄할 일이라는 말로 축사가 맛쳣스며 그 다음은 일동이『검노래』라는 신가(神歌)를 일제히 합창한 후 최익채(崔益采)씨의 원도로 식이 맛치엇는대 당일에는 래회한 사람이 사백여명이나 됨으로 집이 협착하야 학생들은 모다 마당에서 비를 마즈며 식을 치럿스며 드러가는 문어구에는 붉은 깁으로 장식하고 금색이 찬란한 글시로『온누리의 빗』『캄々한 속의 별』등의 문구를 써붓치어서 래회자에게 만흔감흥을 주게 하엿다더라.
1922년 3월 23일자 3면
차부(車夫)의 강연에
차부(車夫)의 만세로
해산된 노동 강연
진남포(鎭南浦)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주최로 박일병(朴一秉)씨를 청하여 지난 십칠일 하오 칠시에 당지 비석리 장로교회당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우리의 희망’이라는 연제로 구보조(久保組) 차부 강일성(康一成)군이 등단하여 강연을 하던 중 청중들의 박수하는 소리는 회장이 떠나갈 듯 한 중 인력거부 박성록(朴成祿)은 그 강연에 어떠한 감동을 받았던지 만세를 불렀으므로 경찰관은 즉시 회의 해산을 명하고 만세 부른 한 인력거부는 즉시 체포되어 방금 취조 중이라더라. (진남포)
그는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때 사촌동생 박순병(朴舜秉)과 함께 체포돼 박순병은 심문 중 고문으로 숨졌고 박일병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그 후 그의 웅변은 다시 들을 수 없게 됐다.
박일병과 박순병은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박일병 (본사 사원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