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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창간기자 염상섭(廉尙燮)

Posted by 신이 On 5월 - 23 - 2016

  창간기자 염상섭(廉尙燮)( 1897-1963)

  ‘표본실의 청개구리’ 작가 염상섭(廉尙燮 · 1897-1963) 도 동아일보 창간 기자였다.

   일본 게이오(慶應) 대학 휴학 중이던 그는 ‘3·1 만세사건’에 충격을 받아 1인 명의의 ‘3·19 조선독립선언서’를 작성, 배포하다 체포됐다.

   ‘삼천리강토를 헛된 산하로 하지 말고, 장엄한 산하를 맹금악수(猛禽惡獸)의 소굴로 삼지 않도록… 3월 19일 오후 7시 정각, 만사 제폐(除廢)하고 천왕사(天王寺) 공원 육각정 전(前)에 집합할 것을 열루(熱漏)를 흘리며 희구하건대 내(來)하라!’ – ‘재(在) 오사카(大阪) 조선노동자 일동 대표 염상섭’

   ‘1인 독립운동 사건’은 오사카 신문에 보도되었고 그의 재판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변호인도 없이 재판정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히 주장, 그 지역 언론과 재판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일본인 재판장은 22세 조선 청년의 당당함과 논리에 감탄, “출소하면 법률을 공부해 훌륭한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다”는 충언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처음 보기는 일본신문의 공판기사에서였다. 그는 유창한 일본말로 세계 정세와 동양의 정세를 비판하면서 조선이 독립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보도되고, 소쇄한 양복에 검은 테 안경을 쓴 새 시대 청년으로서의 모습을 대부분 동정적으로 보도했다.” (유광렬의 회고)

   그는  옥중에서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 니시무라(西村天囚) 편집고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조선 민족의 독립투쟁은 정의로운 것이다.’

   ‘어째서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논리 정연하게 편 것이었다.

   니시무라 편집고문은 그 논리의 품격을 높이 평가하면서 염상섭의 편지를 조선인 기자 진학문(秦學文)에게 보여줬다. 염상섭의 필력과 용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진학문은 그 후 동아일보 창간작업에 참여하며 그를 창간 동인(同人)으로 발탁했고 그 뒤에도 일생의 동반자로 함께 했다.

   창간 기자 염상섭의 첫 임무는 일본의 저명 정치가, 학자, 경제인, 현직 고위 관리들의 축하 휘호와 축사를 받아오는 일로 1920년 4월 1일 세상에 나온 동아일보 창간호에는 염상섭이 동경에서 취재해온 기사가 반 이상의 지면을 차지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3·1운동 때 조선인의 입장을 비교적 이해해 주었던 기독교 사회주의자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와세다대학 교수, 3·1운동 당시 조선인의 여론을 들은 바 있는 일본학사회(日本學士會) 이사장이며 귀족원 의원이었던 사카타니 요시로(坂谷芳郞), 조선경제사 개척자의 1인인 도쿄고상(東京高商) 교수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일본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중의원 의원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시마다 사부로(島田三郞), 오사카아사히신문 사장 무라카미 류헤이(村上龍平), 와세다대학 학장 히라누마 요시로(平沼淑郞), 게이오의숙장(慶應義塾長) 가마다 에이기치(鎌田榮吉), 그리고 와세다대학 교수 우키타 가즈오(浮田和民) 등 당대 일류 명사들의 축사 축전들이 염상섭의 교섭으로 창간호에 게재되었다.” (사사 1권, 105~106쪽)

   성공적인 동경 취재로 그는 경무국 출입기자가 돼 전용 인력거까지 제공받는 배려를 받았으나 그를 동아일보에 소개시켜준 진학문이 동아일보를 떠나게 되자 함께 떠났다.

   짧은 동아일보 기자생활(6개월여) 중 그는 두 가지 남다른 일을 했다.

   하나는 ‘노동운동의 경향과 노동의 진의(眞意)’ (동아일보 1920.4.20~26)라는 논문을 7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는 이 글에서 노동운동은 ‘인간 고(苦)의 자각에서 시작된 것으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의 평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은연 중 시사했다.

   “이는 그가 얼마나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는가를 증언하고 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쓴 바 있다. (‘횡보 문단 회상기 1’, 사상계 통권 114호) ‘조선 독립도 사회주의 운동과 힘을 합해야만 가능하리라.’라고.” (김윤식, ‘20세기 한국작가론’,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년, 52쪽)

   다른 하나는 조선을 이해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동양대학 철학과 교수)를 동아일보 지면에 처음 소개한 것.

   염상섭은 야나기의 ‘조선인을 상(想)함’(1920.4.12~18)과 ‘조선 벗에게 정(呈)하는 서(書)’를 번역, 동아일보(1920.4.19~20)에 실었을 뿐 아니라, 야나기의 부인 야나기 가네코(柳兼子)의 독창회를 동아일보 창간 두 번째 행사(첫 번째는 단군영정 현상 모집)가 되게끔 주선했다.

   이 독창회(1920.5.4, YMCA)는 서양음악이 조선에 들어온 이래 열린 첫 개인음악회로 1300여 명의 청중이 운집, 당시로서는 엄청난 성황을 거두었다.

  ‘일제의 암울(暗鬱)’을 술로 달랬던 그는 해방 후의 혼란, 6·25의 비극 등 시대의 고통을 참고 넘는 유일한 탈출구로 술을 벗 삼았다. 하루 저녁 100잔의 대포를 마신 말술로 양주동(梁柱東) 선생 외 누구도 그와 대작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호 ‘횡보(橫步)’도 늘 취해 갈 지(之)의 모습이 연상된다고 해 신문사 동료들이 붙여준 것인데 그는 ‘횡보(橫步)’라는 호칭을 즐겨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신문사 생활(시대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문, 만선일보, 경향신문) 중 한번도 마감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술로 인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주장을 굽힌 적이 없는 ‘반골 기자’의 표본이었다.

   “불기불군(不羈不群 · 구속받지 않고 메이지 않음)의 자존심이 강해서 한번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경골한(硬骨漢)이었다.” (김을한)

   “호탕하고 호협하지는 못했으나 뇌락(牢落 · 마음이 넓고 비범함)하고 큰 사람이었다.” (월탄 박종화)

   “비판 안(眼)이 밝았을 뿐만 아니라 예의 밝았고 한 잔만 들면 다 털어 놓고 끝장을 봐야 되리만큼 맘이 컸다.” (양주동)

    “겉으로 보기엔 동작이 민첩하지 못하고 굼뜬 편인데다가 숙취미성(宿醉未醒)인듯해 보이나 실상은 결코 느림보가 아니었다. 한번도 횡보 때문에 그날 신문이 늦어본 일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김팔봉의 회고)

   그는 ‘일제하 기자’라는 직업을 ‘극무(劇務 · 힘들고 바쁜 일)요, 속무(俗務 · 속된 일)’라며 ‘극무, 속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속되고 악하고 사람으로서나 예술가로서의 양심이 마비되는 것은 아니다.’ (철필 1931년 2월호)고 했다.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그는 춘원 이광수의 가치관을 비판하는 글을 써 김동인(金東仁)과 논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김동인도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1921년)가 발표되었을 때, 김동인은 “강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인직의 독무대를 지나서 춘원의 독무대, 그 뒤 2, 3년은 또한 필자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 필자는 상섭의 출현에 몹시 불안을 느끼면서도 이 새로운 ‘햄릿’의 출현에 통쾌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을 이루었던 횡보 염상섭. 이 다작(多作)의 작가는 장편 28편, 단편 129편에 평론 101편을 발표하며 우리 근대문학의 뼈대를 세웠다. 남북을 통틀어 ‘최대의 작가’로 꼽힌다.” (동아일보 2005년 8월 30일자 A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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