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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창간기자 한기악(韓基岳)

Posted by 신이 On 5월 - 23 - 2016

 창간 기자  한기악(韓基岳)(1898-1941) 

 창간 기자 월봉 한기악(月峰 韓基岳 · 1898~1941)은 소설가 현진건, 시인 이상화와 함께 ‘경성의 3대 미남’으로 꼽혔다.

   “희고 둥글납작한 얼굴, 빚어 붙인 듯한 코, 조붓한 입, 웃으면 하얗게 드러나는 호치(晧齒)를 가졌었다. 그는 여기다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까지 가져 당시 경성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설가 · 전  조선일보 기자 최상덕)

   미남자 월봉 한기악 선생은 그러나 외유내강한 사람이었다.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3·1 독립운동을 전후해 시베리아로,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상해에서 ‘파벌과 자리’ 때문에 며칠씩 싸우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그는 어느 날 회의석상에 뛰어 들어가 ‘내 비록 나이 어린 사람이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며 통곡, 일갈하고 귀국했다. 국내에 들어와 모교인 중앙학교, 보성전문을 찾아간 것이 인연이 돼 동아일보의 창간 멤버가 됐다.

   “그 무렵에는 학교 숙직실에서 기거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월봉은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만주 시베리아 중국 대륙을 방황하다가 귀국하여 중앙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때가 있었는데 그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20대의 혈기왕성한 시절이었으니 자연히 우리들의 이야기는 조국이 처해 있는 현실과 앞으로의 독립 방안 등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일류 인물들이 거의 신문사로 모이게 되었으니 지식인들이 일제의 총독부에 취직하지 않으려면 민간신문 밖에는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월봉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인촌 김성수 댁에 모여든 것은 물론이려니와 인촌의 뜻에 많은 공감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따라서 월봉이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한 것은 물론이다.” (한글학자 이희승)

   기자로서 그는 전형적인 지사형(志士型)이었다. ‘조선의 신문은 사회의 명경(明鏡 · 밝은 거울)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한갓 유류기반(留聲器板 · 그릇에 담겨있는 소리)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언론관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의 요구가 어디 있으며, 시대의 의식이 무엇인지를 밝혀 보고 살피어 비판적 태도와 지도적 책임, 중대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신문기자이면서도 술은 못 마시고 상에 놓인 안주의 국물만 혼자서 다 마시는 통에 ‘한 국물’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초창기인 만치 모든 것이 미비하였습니다. 그 중에도 기자들이 기자로서의 경험이 없어서 우스운 삽화를 남기는 일도 있고 격분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기억에 사라지지 아니한 것은 창간 당일에 외근기자로써 출동하였던 모 기자가 경기도청을 돌아왔을 때에 사회면 편집자 이상협 씨가 무슨 재료를 얻어왔느냐 하고 물을 때에 그 기자는 주머니 속에서 ‘도지사의 동정’이라고 하는 것을 꺼내놓았습니다. 그 옆에서 이것을 보는 나로서는 말할 수 없는 격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사람의 돈을 모아 신문 경영을 하는데 도지사의 동정이 무슨 필요가 있나 하고….” (‘창간호 박든 그때 세월도 빠르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자 부록 5면)

   “은행을 맡았던 한 기자는 홍안의 미청년 – 언젠가 섣달그믐께로 기억된다. – 연말 인사로 은행 측으로부터 30원을 받고는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몰라 어떡하면 좋으냐고 얼굴까지 붉히며 쩔쩔매던 순진스런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마 그 돈은 편집국 동료들의 소주 값으로 소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진학문,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9월호>

   “둥그스름하게 말하면 개인이나 단체나 할 것 없이 무슨 일을 할 때 말만 떠들썩하게 벌려놓고 아무 실행이 없는 것, 처음에는 웅장히 내세우다가 나중에는 아무 효과도 보이지 않는 것, 다음으로는 무슨 일에나 분쟁 많고 단합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가증스럽고 보기 싫으나 그 예를 똑바로 잡아내어서 들기까지는 그만 두겠다.” < ‘세상에서 제일 미운일, 못 실행(實行) 못 단합(團合)!’, 별건곤(別乾坤) 1927년 11월호>

   “일기를 쓸 것, 건강을 위하여 일찍 일어나 등산하는 것을 계속할 것, 독서를 게을리 말 일.” <‘신년에 결심한 것’, 신동아 1936년 1월호>

   유광렬 선생은 “50여 년 기자생활을 하며 몇 사람의 편집국장과 일을 같이 하였으나 주야로 나라를 생각하는 이로는 월봉 뿐 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925년 편집국장 대리를 끝으로 시대일보로 옮겼다. 1928년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이 됐으나 당시 조선일보는 극도의 경영난에 빠져 친일파의 손에 넘어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하루라도 결간(缺刊)하지 않으려고 신문용지 값으로 차고 다니던 시계까지 내 놓기도 했다.

   “그는 신문인으로서 동분서주하였는데, 그것은 곧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당시의 언론인은 지사요 독립운동가로서, 월급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하늘이 준 의무라고 생각하여 불평 없이 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월봉은 본질적으로 독립운동가였고 교육자였으며 지사적인 감각의 언론인이었고 기독교인이었으며 논쟁에 말려들기를 신중하게 회피한 도덕가였다. 그는 사색인인 동시에 행동인이었다.” (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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