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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초대 정치경제부장 진학문(秦學文)-상

Posted by 신이 On 5월 - 20 - 2016

초대 정치경제부장 진학문(秦學文)(1894-1974)-상

 

 「동아일보」 창립 주창자인 진학문도 장덕준이나 이상협과 마찬가지로 신문기자 경험이 있었다. 그는 3․1 독립운동 당시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 서울지국 기자로 만선판(滿鮮版)을 만들고 있었다. 진학문은 최남선을‘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고 역시 최남선의 측근이었던 이상협과는 같은 보성중학 출신이었다.

 

 진학문은 「동아일보」 창간 40주년 기념 좌담에서 3․1독립운동에 당황한 총독부의 내부방침으로 하세가와(長谷川) 총독 때 민간지 발간을 허가하기로 했고 이를 눈치 챈 한국인들이 나섰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60.4.1.). 그 자신이 총독부 우사미(宇佐美) 내무국장에게 직접 문의한 결과 한국인들이 합쳐서 발간 신청할 것을 암시했다고 회고했다(「동아일보」 1970.4.1.) 구체적으로 사이토(齋藤) 총독 때 총독부 관리들이“당신도 민족주의자이니 같은 민족주의자인 이상협, 장도빈 씨와 같이 신문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창립 주창자가 됐다는 것이다(진학문, 1973,200쪽)

 

“만세 부르기 전에는 조선사람 기자는 총독부 출입을 못했거든요. 은행 사회는 물론이고… 그때 재등(齋藤)이가 오기 전에 장곡천(長谷川)이가 총독으로 있었고 산현(山縣)이가 정무총감으로 있었고 우좌미(宇佐美)가 정무장관으로 있었습니다.

 

 그 우좌미가 실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럼으로 해서 그때 만세에 대한 책임이 사실은 일본정부에서…총독부에서 지는데 총독하고 정무총감이 아주 사이가 나빠서인지 산현이가 승격해서 총독 되려고 운동을 했고 그래서 산현이가 총독이 되면 우좌미가 정무 총감되기로 결정되었어요. 그리고 장곡천이는 군인이니까 군인이 정치 못한다고…그리고 그때는 무단정치가 심하니까 조선 사람에게도 다소 무엇을 좀 주어야지-해서 그런 기미로 나와서 그래서 여러 군데에서 신문하자는 것이 신입이 되었는데 장도빈씨라는 분도 신문을 하나하자…그래 일본‘조일신문’에서‘조선판’이라는 것을 냈기 때문에 조선의 국문으로다가 조선말로 신문을 발행하자는 것이 대판 조일신문에서 얘기가 되었고 또 유근 선생과 몇 분이 하자고 했고 또 송병준 일파도 하려하고… 또 누구도….”(「동아일보」 1960.4.1.)

 

“당시 일본에 출장 온 총독부 내무국장 우좌미(宇佐美)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신문을 허가할거요 안할거요’라고 물었더니‘글쎄요’하더니‘다 같이 합쳐서 하면 좋을텐데’그런단 말이야. 그래서 아하 이 자들이 허가할 의향이 있구나고 생각했지. 그래서 우리말 신문허가는 하세가와(長谷川)총독 때 내정돼 있던 것이 사이또(齋藤)총독에게 사무 인계된 게 아닌가고 알고 있었는데 최근 당시 경무국 보안과장이던 시라가미(白上佑吉)가 한 녹음을 들으니 약간 다르더군. 사이또가 부임해 온 뒤 신문허가문제를 놓고 논의할 때 국장들은 한결 같이 반대했는데 유독 시라가미만이 ‘문화정책’을 표방한 총독부가 신문을 허가하지 않는다니 말이 되느냐고 우겨 결국 신문을 허가해주는 방향으로 낙착됐다는 거야.”(「동아일보」 1970.4.1.)

 

“재등 총독으로 들어서면서 문화정책이란 이름의 유화책(?)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총독부를 출입하는 터라‘신문사나 하나 허가해 달라’고 의사를 떠보았더니‘당신네들 다 같은 조선인들이니 같이 신문을 하는 게 어떠냐’고 되돌아 왔다. 알고 보니 총독부측에서는 신문허가를 신청한 한국 인사들을 셋으로 구분을 하고 있었다. 그 첫째가 내지연장주의자 민원식이었다. 그는 내선일체식의 구상을 하고 있는 자로 훗날 양근환에 칼 맞아 죽은 사람이다. 그에게 허가한 것이 「시사신보」였다. 둘째는 자치주의를 표방하던 송병준에게 허가가 떨어졌는데 그것이 「조선일보」였다. 셋째는 그들의 비위에 제일 거슬리는 인간들, 즉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총독부 당국자들은 나를 보고 ‘당신도 민족주의자이니 같은 민족주의자인 이상협, 장도빈 씨와 같이 신문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탄생한 것이 「동아일보」였다. 이상협 군은 그때 「매일신보」에 있었다. 이렇게 하여 새 신문이 탄생했다.”(진학문, 1973,200쪽)

 

 창간준비는 발기인 대표 김성수의 집에서 이뤄졌다. 신문에 관해 활자 호수며 광고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는 이상협이 지휘했고 진학문도 12월 오사카아사히 서울지국을 떠나 창간준비에 합류했다. 진학문은 50년 후 “그때 인촌(김성수의 호-필자 주)댁 사랑방은 정말 가관이었어. 마침 인촌이 상배한 뒤라 혼자였거든. 방도 넓고 해서 노상 술도 마시고 떠들어댔지.”라고 술회했다(「동아일보」 1970.4.1.)

 

 진학문은 이상협과 함께 신문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기자였다. 창간기자인 유광렬은 진학문과 이상협이 쌍벽을 이룬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1969,126쪽). 따라서 신문사의 직제와 부서도 대개는 이상협과 진학문이 먼저 의논한 뒤 또 다른 창간 주창자인 장덕준과 김성수의 동의를 얻어서 결정했다.「독립신문」이후 언론계 원로 유근과 양기탁을 감독으로 추대한 것을 위시해 한국 언론계에서는 처음으로 논설반을 설치한 것도 그들의 발의로 이루어졌다(김을한, 1971,39쪽).

 

 

<참고문헌>

김을한(1971), 「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 일조각.
유광렬(1969),「기자반세기」, 서문당.
진학문(1963),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동우(東友)」, 1963년 9월호, 11~12쪽.
 ——— (1973), 나의 문화적 교유기,「세대」, 제11권 통권118호 (1973년 5월) 196-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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