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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대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하

Posted by 신이 On 5월 - 18 - 2016

 초대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 (1893-1957)-하

 

 언론계에서 누구든지 어느 순간 경영자로서의 길을 밟게 된다고 하지만 그 길을 처음 개척한 사람도 「동아일보」의 이상협이었다. 1921년 김동성이 세계기자대회에 나가 부회장에 당선됐을 때 전국에서 축하광고를 유치했을 뿐 아니라 1923년 일본 본토 광고를 개척해 신문 수익 증가에 큰 몫을 했다.

 

“오늘에도 신문사수입으로 광고 수입 중 동경(東京), 대판(大阪)의 고객이 중요한 것이 되었거니와, 그 당시에도 수지를 마추기 위하야, 애를 쓰면서 광고개척에 당연히 동경(東京) 대판(大阪)이 지목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대가 많었다. 그리다가 결국은 하몽(이상협의 호-필자 주)의 주장으로 내지는 독단으로 그 길을 먼저 개척했다. 바로 신석현(新潟縣)사건 그때 광영전통(光永電通) 사장의 절대한 후원으로 상당한 광고계약을 체결했든 것이 금일의 내지(內地)광고 흡수의 시초이었든 것이다.”(백악산인, 1938,45쪽)

 

“한일합병 이전에는 모든 신문발행이 순전한 정치운동이어서 수지관계는 상관하지 않고, 돈이 있으면 마구 써 버리고 돈이 떨어지면 신문사 문을 닫는 식이었고, 만세 후에 신문을 발행할 때에도 그 유풍이 남아 경영을 소홀하게 생각해 왔었다. 하몽은 그러나 일찍부터 경영에 눈을 떠서 신문논조도 중요하고 폭로와 항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항상 경영을 염두에 두어 많이 팔리고 광고수입이 많이 들어와서 신문사가 큰 손실을 보지 않고 경영해 나갈 수 있는 좋은 신문을 만드는 것을 주장하였다. 신문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고 논조를 굽히지 않으면서 독자들에게 인기가 좋아 잘 팔리는 신문을 만드는 것이 그가 신문을 만드는 기본 목표였다.”(조용만,1992,443쪽)

 

 1921년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출범할 때 이상협은 상무이사였다(중촌자량, 1923).이해 9월 14일 오후 2시, 서울 돈의동 145 명월관에서 열린 창립주주 총회에서 취체역과 감사역을 선출한 결과 이상협은 취체역(이사)중 한사람으로 뽑혔고, 다음날 오후 3시, 서울 계동 130 대주주 김성수 집에서 열린 취체역 회의에서는 사장 송진우, 부사장 장덕수(주필 겸임), 전무 신구범, 상무 이상협(편집국장 겸임)이 선임됐다(동아일보사, 1964,2쪽).

 

 이상협은 송진우 사장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원로언론인이자 학자였던 조용만은 “송진우와 이상협간에는 신문경영과 편집문제를 놓고 자주 의견충돌이 있었다”고 적었다(1992,440쪽).“이즈음에 3ㆍ1독립운동으로 복역 중이던 송진우가 출옥해서 김성수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하였다. 송진우는 취임과 동시에 발행 겸 편집인의 명의를 이상협 대신에 한기악으로 바꾸었다.”발행인 겸 편집인의 교체날짜는 정확하지 않으나 「동아일보」에는 1921년 11월 17일자부터 한기악으로 나온다.

 

 이상협이 1924년 4월  「동아일보」를 떠난 것도 식도원 권총협박 사건에서 비롯됐지만 실제로는 송진우 사장과의 불협화음 때문이었다(동아일보사,1976,232-235쪽).

 

“표면상 이유는 박춘금의 식도원 권총협박사건에서 비롯됐다.‘송진우가 서약서를 썼다는 풍문이 들리자 이상협이 송진우에게 직접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그때 송진우는 서약서를 써 준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며칠 후 송진우가 박춘금에게 써 준 사담(私談)이 사진판으로 게재되어 문제는 다시 시끄럽게 되었다.’(양원모 담)

 

 당시 3시간여에 걸친 감금 협박으로‘사담’이라는 쪽지를 써 주었던 것을 매일신보가 4월 13일자 5면에 사진과 함께‘증서(證書)’라며 보도한 것이다.

 

 식도원 사건이 있은 후, 이상협이 서약서를 써 주었느냐고 물었을 때, 송진우가 이를 부인한 것은 그가 써준 것이 서약서가 아니었고, 또‘사담’이라는 쪽지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은 박춘금 무리의 행패를 모면하기 위하여 탈출 방편으로 써준 개인적인 문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협이 송진우를 공격한 것은 그동안 두 사람 사이가 원활하지 못하였던 데 좀 더 큰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상협은 당시 신문계의 1인자로 스스로도 “조선에서 신문을 아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그 성격도 날카로워 편집에서 영업에 이르기까지 송진우와는 가끔 의견이 상충했다. 창간 동인 진학문도 이상협의 독주로 3개월 만에 사퇴했다. 이상협의 이런 독주는 그가 신문에 쏟는 열정이 컸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협에게는 신문제작에 대해 잘 모르는 송진우 사장의 지시가 마땅찮을 때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신문제작과 경영은 다른 것이요, 큰 기구를 이끌어 가려면 신문제작 면에서만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애로가 또한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이 송진우와 충돌을 빚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듯 두 사람의 의견이 상충하여 이상협은 동아일보를 떠났다.”

 

 이상협과 「조선일보」에서 함께 일했던 김을한도 이상협과 송진우가 성격이 정반대였다고 회고했다(1971,62-66쪽).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고하(송진우의 호-필자 주)이고, 편집국장은 하몽이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못하여, 대주주인 인촌(김성수의 호-필자 주)을 사이에 놓고 항상 으르렁거리고 있던 판에 전기 서약서로 인한 食言 문제가 대두되니 분규는 더욱 크게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하몽 이상협은 그 당시 ‘조선에서 신문을 아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는 자부심이 남유달리 강하였으니, 그것은 순성(진학문의 호)과의 관계를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순성은 일찌기 일본에서 제일가는  「오오사까-아사히(大阪朝日)」신문의 기자로 있으면서 명성이 전 일본에 떨치던 니시무라(西村天囚) 주필의 지우(知遇 ․ 남이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을 알고 잘 대우함)를 얻어서 신문에 관한 지식을 제일 많이 배우고 연구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하몽은 ‘우물 속 개구리’가 하늘 넓은 줄 모르듯이 이른바 유아독존의 생각에서 순성도 문제를 삼지를 않았었다.”

 

 이상협은 「매일신보」이후 많은 신문기자를 양성했다.“오늘의 신진기자라는 기자도 어느 점으로던 하몽의 기자적 지도계류가 간접적으로나마 물들은 이가 많으리라고 보아 큰 틀림이 없을 것이다.즉 취재란 것은 편집이란 것은 어떤 것이냐 하는 기자적 활동의 체재를 갖추기에 그 훈련이 맹렬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의 말이 하몽의 칭찬을 받기 힘들었든 것을 누구나 말한다. 또 어떤 명령이 내리는가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여 방심치를 못 하였다고 한다.”(백악산인,1938,45쪽)

 

 창간기자로 창간호에 ‘태형(笞刑) 마침내 폐지’란 기사(사진)를 썼던 이서구는 이상협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하몽은 처음 보면 대리석 위에 냉수를 붓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차차 알수록 그 대리석에는 온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며 그 흐르는 물에는 단맛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때인가 주석(酒席)에서 태형 폐지 힐문(詰問)시의 추회(追懷·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그리워함)를 하며 하몽의 쌀쌀한 것을 이야기했더니 그때 하몽은 웃으며 ‘내가 그렇게 굴지 않았더라면 신문기자 꼴이 박히기나 했겠느냐’며 웃었다.”(1928,67쪽)

 

 

태형(笞刑) 마침내 폐지
4월1일부터 대신 징역이나 구류

  있던 것이라도 없애지 않으면 안 될 때에 새 법령을 정하여 일반을 곤란케 하고 내외국인에게 비상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재정이 부족하다느니, 시기가 이르다느니, 별 핑계를 다하며 폐지를 아니하려하던, 조선에서도 조선 사람에게만 한해 쓰이던 태형제도도 변천하는 시세가 당국자를 몰아서 드디어 금일부터는 폐지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총독부 미즈노(水野) 경무총감은 폐지에 따른 시설, 감옥과 간수를 많이 늘려 태형 대신 구금을 시킨다고 말했다.

 

폐지에 따르는 시설
감옥과 간수 많이 늘려 태형 대신 구금 시킨다
재소자 증가

  태형 폐지의 결과 재소자 수가 증가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최근 3개년 간 평균 태형 받은 수효를 계산하면 재판 사건과 범죄 즉결사건을 합하여 1년에 5만7,324명이, 집행한 태형의 대수는 재판사건 1인 평균 71대, 즉결사건 1인 평균 37대란 것을 고려해 계산하면 267만8,520대나 된다.

  이를 형기(刑期)로 환산하면 267만8,520일이 되나 이 중에서 태형을 집행키 위해 태형 집행 전에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구금한 일수가 6만9,528일이 있으므로 이 일자를 제하면 그 나머지 일자 260만8,992일은 태형 폐지로 새로 감옥에 구금할 일자 수효다.

  그러나 형기 30일 미만의 수형자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집행하고 감옥에 보내지 않으므로 전기 일자 중에서 다시 이 일자와 단기 수형자에 대한 형기를 빼고 보면 실제 1년간 감옥에서 집행할 일자는 241만4,700일이다. 이것을 1년 365일로 나누면 6,607명이 태형 폐지 때문에 하루 평균 증가하는 셈이다.

 

감옥 확장

  감방의 부족은 죄수를 수용하는 데 큰 문제다. 재감자 구금의 표준은 감방 1평에 평균 2인 이하를 두는 것이 적당하다고 한다. 대만 등지의 감옥이 감방 1평에 평균 1사람씩 구금하는 것을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의 1919년 말 현재 감방 총평수는 겨우 2900여 평이다. 최근 3년간 평균 재감자 수는 1만1,626명이고 감방 1평당 평균 구금 인원은 4명 이상이나 된다. 범죄의 성질 성격 등에 따라 분류 구금하는 실제 상황을 보면 1평에 흔히 평균 8, 9명이나 돼 구금인수를 늘 초과하였다. 이러한 현상이니까 태형 폐지로 인하여 증가할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요, 더구나 단기 자유형(自由刑) 집행의 폐해를 없애고 형벌의 집행을 적절히 하자면 감옥의 설비는 극히 완전한 규모와 계획으로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재정관계도 있으므로 현재 상태의 감방에 평균 4명씩을 둘 예정으로 제반 계획을 하고 기왕 설치한 분감(分監) 5개소를 본감(本監)으로 확장하고 기타 본감, 분감 13개소에 감방과 공장을 임시로 증축하고 새로 분감 4개소, 출장소 3개소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새로 설치할 본감 출장소의 위치에 대하여는 수용관계를 생각하여 정할 것은 물론이나 위치를 선정하는 데 대하여는 위생 작업 풍습 등 기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으므로 아직은 발표되지 않았다. 건축비는 1919년 중에 20만원을 지출, 임시 확장 공사를 하고 그 외 대부분은 20, 21년 양 연도의 계속 공사로 한다. 총비용은 250여만 원이나 들며 또 이로 인하여 매년 경비가 이전보다 80만 원 이상 들며 감옥의 관리를 446명이나 늘린다.

 

<참고문헌>
김을한(1971), 「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 일조각.
동아일보사(1964),「동우(東友)」 1964년 9월호, 2쪽.
동아일보사(1974),「동아일보사사」, 동아일보사.
백악산인(1938), 복면객의 인물평, 권토재래의 이상협 씨, 「삼천리」 제10권 제12호(1938년 12월), 42-48쪽.
이상협(1934), 명기자 그 시절 회상(2), 동경대진재때 특파, 「삼천리」 제6권 제9호(1934년 9월), 80-83쪽.
이서구(1963), 명사(名士) 제씨(諸氏) 만나기 전 생각과 만난 후의 인상-이상협 씨,「별건곤」 제11호(1928년 2월), 65~67쪽.
——————(1963),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3년 8월호,12쪽.
조용만(1992),「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중촌자량(中村資良)(1923년),「조선은행회사요록(朝鮮銀行會社要錄)」(1923년판),동아경제시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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