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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초대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중

Posted by 신이 On 5월 - 18 - 2016

 초대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 (1893-1957)-중

 

 「동아일보」창간 직후 이상협의 직함은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다. 사장이 있었으나 인쇄인 이용문과 함께 신문에 관한한 실질적으로 「동아일보」를 대표했다. 따라서 자작 윤덕영이 보도와 관련해 명예훼손으로 「동아일보」를 고소할 때도 이상협이 피고소인이 됐다(「동아일보」 1921.7.31.; 1921.9.23.). 

 

 편집국장으로서도 이상협의 활약은 눈부셨다. 1922년 7월 말 일본 니이카타(新潟)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상협은 특파원으로 직접 현장에 갔다(「동아일보」1922.8.6.). 니이카타현 시나노카와(信濃川)에 있는 신월전력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학살한 이 사건은 외신을 통해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동아일보」는 외신을 인용해 ‘일본에서 조선인 대학살’이란 제목으로“강물을 막아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하루 17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이곳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현지 공사청부업자들은 도망가는 조선인을 발견하면 바로 총살하고는 시체를 강물에 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지금까지 최소한 조선인 1백여명이 총살당해 강물에 버려졌다고 한다.”(1922.8.1.)고 기사화했으나 신문은 압수돼 발매 금지됐다.

 

 총독부 경무국은 이를 부인했다. 후속보도는“경무국에서 이 사실에 대하여 동경 내무성에 조회한 결과 ‘신문지에 보도된 것과 같은 사실은 전혀 없다’는 회답이 왔다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 동경 내무성의 당국자가 일본전보통신사 기자에게 말한 것이라고 경성에 도달한 전보를 보면,‘조선인 노동자 두 명이 그곳에서 도망하다가 병이 들어서 죽은 일이 그와 같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는 내용이었다(1922.8.4.). 그러나 이 기사 역시 압수돼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이상협은 8월 중순“이번 사건의 문제를 일으킨 현장의 비밀을 탐험하여 가련한 동포와 위험을 같이하려한다”며 현장에 도착해 취재를 시작했다. 현장을 찾은 언론인은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이상협이 유일했다. 그러나 일본경찰과 공사 관계자들의 교묘한 방해와‘조선인에게는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일본 언론의 비협조에 맞닥뜨렸다(1922.8.17.; 1922.8.20.).

 

 이상협은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생생한 르포기사를 현지에서 우송해 인간이하의 조건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 6백여 명의 참상을 전했다(1922.8.23.-9.4).‘신석(新潟)의 살인경(殺人境) 혈등답사기(穴藤踏査記)’란 제목의 이 르포기사에서 이상협은 △인신매매나 다름없는 사기수법의 조선인 노동자 모집 과정 △포로수용소 같은 ‘지옥실’안에서‘망중지어(網中之魚)’처럼 감시당하는 수용 실태 △탈주하다 잡혀 쇠갈고리로 찍히는 처형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1년여 뒤 간토(關東)대지진이 났을 때도 이상협이 특파원으로 나섰다. 대지진의 비보가 「동아일보」 편집국에 날아들었을 때 이상협은 “우리 심리를 지배한 것은 동경 천지가 불속에 들었으니 거기 있는 백의동포의 생사는 엇지 되었을고, 전조선 각지로부터 들어간 수만의 유학생들은 엇지 되고 부모처자를 내버리고 노동으로 들어간 고단한 노동자의 운명은 엇지 되었는고 함”이라고 회고했다(이상협, 1934,81쪽). 이상협은 대지진 발생 10년 뒤인 이 회고에서 1923년 9월 1일 당일 호외를 발간했다고 밝혔으나 이 호외는 남아있지 않고 9월 4일자 호외가 압수된 것으로 보아 날짜를 착각한 것으로 추축된다.

 

 당시 일본인 사망자가 9만3000여 명에 이르는 등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민심 수습을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 때문에 무차별 학살이 촉발됐다. 이상협이 오사카(大阪)에 도착했을 때“가슴을 놀래는 여러 가지 소식이 있는 한편”이라고 한 것은 이 같은 참상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이상협, 1934,82쪽). 이상협은“내가 할 일은 살아 있는 조선동포에게 의식(衣食)을 줌에 있다”고 생각하고 「동아일보」 본사에 전보를 쳐 본사 주최 재외동포위문회를 위해 모금했던 돈 2천5백 원으로 긴급한 물품을 사서 다시 도쿄로 출발했다(이상협, 1934, 82쪽;「동아일보」1923.9.6.).

 

 「조선일보」에서 이상협과 근무를 같이한 김을한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971,38-49쪽).“그 때는 동경에서 서하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반대로 서쪽에서 동경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또 길이 막히고 위험해서 갈 수도 없었는데, 하몽은 대판까지 와서 기차로는 동경에 갈 수가 없음을 알게 되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으로 대판 항으로 달려가서 가기 싫다는 선장을 억지로 졸라서 조그마한 기선을 한 척 차타해서 해로로 동경만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상협은 현지에서 계엄사 내무성 경시청 등을 순방하면서 학살진상을 알아보는 한편 습지야(習志野)등지의 조선인집단수용소를 방문해 ‘비극의 순간’과 ‘학살의 현장’을 취재해 송고했으나 ‘학살사건에 자극 받은 민중이 봉기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총독부는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는 것을 막아 제대로 게재할 수 없었다(표 참조).

 

   (표)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압수기사 목록


                                                                                                                           출처: 동아일보사,1975,484쪽

 

 「동아일보」는 ‘군경의 보호로 생명을 보전하나’라는 사설에서 생명을 보전한 조선인들도‘제일 간절한 것은 남과 같지 못한 설움이었다’고 상황을 전하려했으나 신문은 압수됐다(「동아일보」 1923.9.19.). 10년 후 이상협은 “미국뿐 아니라 중국 이태리 등 웬만한 나라에서는 군함이 아니면 하다못해 기선 한 척이라도 보내었다. 모두 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앗기기를 실로 금싸라기같이 한다. 가히 그럴 일이다. 나는 이 군악 소리를 들으며 요코하마(橫濱)부두에 첫 발자국을 옮겨 디딜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름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계속해서“나는 흐르는 데로 그냥 내버렸다. 눈물은 자꾸 흐른다.”(1934,83쪽)고 썼다

 

 한국인들에게 이상협은 ‘외교관’이상이었다(김을한,1971,38-49쪽).“하루는 청천백일만지홍의 중국 국기를 단 자동차가 한대 경찰서 뒷마당에 닿더니 한참 만에 경찰서장이 우리들이 수용된 큰 감방으로 들어와서 ‘여러분 중의 중국인은 이리로 나오시오’라고 하여 수명의 중국 사람을 골라내어서 자동차가 있는 데로 데리고 갔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것은 동경에 있는 중국공사관에서 영사가 와서 자기나라 국민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문득 주인 없는 개를 연상하였다. 개가 주인이 없으면 야견으로 몰려서 박살을 당하는 것과 같이, 사람도 나라가 없으면 누가 죽인대도 아무도 말해 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따라서 얼마 후 동아일보의 이상협 특파원이 찾아와서 우리들을 석방시켜 주었을 때에는 무슨 구세주를 만난 듯 참으로 반가웠으며, 그 때의 우리들이 믿고 의지할 곳은 오직 신문사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끼었다.(1923년 관동대지진 때 동경의 어느 경찰서에 보호 검속되었던 한 교포)”

 

 이상협은 2-3천명의 한국인이 수용된 집단수용소에서“볏집으로 자리를 하여 깐 그 집안의 광경 잔디밭 위에 누어 고향 생각에 수심 가득한 그 얼굴들”을 마주하고 “내가 가지고 간 삼천원은 カタペン(땅땅한 식빵)과 옷을 사서 다만 한사람에게 한 벌씩 돌아가도록 모두 나눠 주었다”(1934,83쪽)고 기억했다. 또 참상을 전하는 기사는 압수당했으나 생존자 명단은 겨우 신문에 게재했다(「동아일보」1923.9.21.호외;「동아일보」 1923.9.24.).

 

 이상협은 「동아일보」 지령 100호인 1920년 7월 25일자로 시작된 ‘횡설수설’의 고정 필자로 필명을 날렸다. 창간직후 4월 10일자부터 실린 ‘휴지통’도 만들어 직접 집필했다.

 

 “그 당년의 횡설수설은 실로 그 당시 독자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신랄한 필치가 어느 기사 어느 신문보다도 실로 독보적이었다. 그 필자가 즉 당시 편집국장 하몽(이상협의 호-필자 주)이었든 것이다.”(백악산인,1938,44쪽)

 

“하몽이 집필하는 ‘횡설수설’이라는 단평은 인기가 높아서 독자들은 신문이 나오면 먼저 보는 것이 ‘횡설수설’이었다. 이와 반대로 총독부 검열당국은 총독정치의 아픈 곳을 찌르는 이 ‘횡설수설’ 때문에 몹시 골치를 앓았다.”(조용만,1992,439쪽)

 

 이때 신문 검열은 경무국에서 했다. 창간기자 이서구에 따르면 검열관은 니시무라(西村)로 한국말 잘한다고 뽐내던 자였다고 한다(1963,12쪽).

 

 “어느 날인가 ‘휴지통’에 모조리 깡그리라는 말이 실렸다. 물론 하몽 선생이 쓴 글이다. 이날 전화가 왔다. 니시무라이다. 하몽선생을 찾는 것이다. 또 무슨 트집을 잡나 했더니 니시무라가 허허 웃으며 하는 말이
 ‘내 십여년 조선말을 다루어 왔으나 모조리 깡그리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들었소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좀 압시다.’

 

 항상 거드림 피던 니시무라도 하는 수 없이 하몽 선생에게 고개를 숙이고 만 것이다. 니시무라를 아니꼽게 보신 하몽선생인지라 그는 언제나 휴지통을 집필할 때마다 궁벽하고 까다로운 말을 골라서 턱없이 잘난척하는 니시무라의 기를 꺾던 일이 생각난다.”

 

 “2월부터 최근까지 본정관내 밀매음 적발건수가 63명인데, 그 63명이란 것은 ‘모조리 깡그리 알뜰살뜰스럽게도 전부가 일본양반’이라며, ‘무엇이던지 많은 것이 좋고 없는 이보다도 있는 편이 좋을는지는 모르겠다만은 꼭 이것 한가지만은 조선사람 중에 없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동아일보」 1923. 8. 27).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자

 

<참고문헌>

김을한(1971), ‘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일조각.
동아일보사(1974),「동아일보사사」,동아일보사.
백악산인(1938), 복면객의 인물평, 권토재래의 이상협 씨, 「삼천리」 제10권 제12호(1938년 12월), 42-48쪽.
이상협(1934), 명기자 그 시절 회상(2), 동경대진재때 특파 「삼천리」 제6권 제9호(1934년 9월), 80-83쪽.
이서구(1963), 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3년 8월호, 12쪽.
조용만(1992),한국언론인물사화, 대한언론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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