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2. 창간 편집감독 양기탁(梁起鐸)

Posted by 신이 On 4월 - 29 - 2016

창간 편집감독 양기탁(梁起鐸) (1871-1938)

 

 또 다른 편집감독 양기탁은 뒤늦게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고 신문발간보다 독립운동에 힘을 더 기울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창립 주창자들은 구한말 대표적 항일 민간지인 「대한매일신보」 ‘총무’였던 양기탁으로부터 신문제작 실무를 배우기보다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한 것이다.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Ernest Thomas Bethell)은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할 때 양기탁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배설이 외국인으로서 각종 외풍을 막는 역할을 한 가운데 양기탁은 한글판 국한문판 영문판을 총괄하면서 경영에서는 사실상 전무로서, 편집에서는 주필이자 편집국장으로서 활약했다. 그는 국채보상운동과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를 이끈 핵심인물이기도 했다(정진석.항일 민족 언론인 양기탁.기파랑. 2015.7~8쪽).

 

 한일강제병합이후 일제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조작했다. ‘신민회 사건’ 또는 ‘105인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양기탁은 4년간 옥고를 치르고 1916년에 만주로 망명했으나 중국 천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고국으로 압송됐다.

 

 「동아일보」 창립 주창자들이 1919년 하반기 창립 준비에 열을 올릴 때 양기탁은 전라남도 고금도에서 유배생활(거주제한)을 하고 있었다. 주창자 중 한 사람인 장덕준이 그해 12월, 2년간의 거주제한이 해제된 양기탁을 맞이하러 고금도를 찾아갔다(장도빈. 양기탁 씨를 방문함. 서울. 한성도서.1920.2. 51쪽).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하던 양기탁의 「동아일보」에 대한 기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동아일보」 창간호에 양기탁 이름으로 ‘아는가 모르는가? (知아 否아?)’라는 논설이 실렸으나 논설기자 이승규가 대필한 것이라고 한다. 창간 기자 유광렬은 양기탁에 대해 ‘수척한 얼굴, 근심에 싸인 듯한 얼굴, 범할 수 없는 국사(國士)의 얼굴이었다.’고 기억했다. “선생이 테 넓은 밀짚모자에 고의적삼 바람으로 신문사에 올 때면 필자도 편집국 전원과 함께 경의를 표하고 두 손을 맞잡고 섰으면 고요히 “어서 일들 하게”하고는 별로 말이 없던 근엄한 모습이 회상될 뿐이다.” (기자반세기. 서문당.1969. 237~241쪽)

 

 

 그해 5월 권덕규의 ‘가명인두상(假明人頭上)의 일봉(一棒)’이라는 글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로 박영효 사장이 사임한 6월 1일, 양기탁도 「동아일보」를 그만 둔 것으로 나온다(「동아일보」 사내소식지 동우(東友). 1964년 9월호). 「동아일보」 사내분위기와 관련해 유광렬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것은 김명식이나 권덕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때의 그 사의 간부이던 모씨는 어떤 30여세의 시골사람이 와서 소년이나 청년의 교육도 문제이나 40세 이상의 성인(成人)들의 계몽도 문제이라 하니까 모씨는 경솔하게 하는 말이 그까짓 40세 이상은 다 죽어야지 하는 말을 태연히 하였다.

 

 이 말을 할 때에 그의 나이 26세이므로 나이 40 이상이 된 사람은 시대의 진운(進運)을 담당할 자격이 없다고 보는 동시에 말하는 자신은 언제까지나 40 이상의 나이 먹은 사람이 되지는 아니하리라는 착상을 가졌던 것이다.

 

 사내에서는 이 청년들의 경박한 반기(叛旗)에 대하여 유근만이 고요히 웃으면서 청년의 전진기상에 동조하였고 평생을 투쟁으로 일관한 양기탁까지도 가볍게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기자반세기. 135쪽)

 

 ‘부로(父老)에게 고(告)함’이란 논설로 사태를 ‘악화’시킨 김명식은 “그 필자를 퇴사시키지 않으면 자기가 퇴사한다는 선배 두 분이 있었는데 그 두 분이 자퇴했다”고 회고했다(1934, ‘필화와 논전’, 「삼천리」,제6권 제11호, 32-40쪽).그러나 양기탁이 「동아일보」를 사임한 진짜 이유는 통천교를 창립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1921년 5월 30일자). 양기탁이 「동아일보」의 논조나 사내분위기와 관련해 다른 간부들과 왈가왈부할 정도로 신문제작에 관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양기탁이 통천교를 창립한 목적은 종교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정진석.항일 민족 언론인 양기탁. 321쪽). 양기탁은 그해 1월초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였던 한성도서의 출판부장 장도빈(1888-1963)에게 자신의 종교관을 설파했다. 양기탁은 고금도에서 올라와 같은 신문 사원 출신 이교담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양기탁에 따르면  종교는 사람을 도덕으로 수련시키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는 각 종파가 대립해 도덕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진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양기탁 씨를 방문함. 서울. 1920.2. 52쪽).

 

 양기탁은 1922년 만주로 탈출하면서 장남 효손(1911~6․  25 때 납북)을 「동아일보」 대주주 김성수에게 맡겼다. 효손은 김성수의 장남 상만(1910-1994)과 함께 중앙학교의 후신 중앙고보를 다녔다. 상만이 중앙고보에서 야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난데 비해(「동아일보」 1928년 5월 1일자, 5월 21일자) 효손은 글과 글씨를 잘 쓴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 1927년 9월 10일자, 1928년 1월 1일자). 상만은 일본 중앙대 예과에 입학했다가 1933년 가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효손은 같은 대학 법학과에 다녔다.

 

 김성수의 장남 상만(해방 후 동아일보 사장․ 왼쪽)과 양기탁의 장남 효손(해방 전 동아일보 기자). 양효손의 딸 양준심 씨가 제공한 사진이다.  

 

 효손은 재학 중 1933년 12월 부친 양기탁으로부터 밀령을 받고 일본유학생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려다 발각돼 조사를 받았다(「동아일보」1934년 6월 17일자; 海外不逞鮮人と連絡策應狀況.『朝鮮獨立運動』2, 1935). 양기탁은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출돼 재임(1933~ 1935년)중이었다. 효손은 1938년 대학을 졸업한 뒤 다음해 10월부터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로 활약했으나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 사직했고 해방 후에 한민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음은 창간호에 실린 ‘知아 否아?’라는 논설을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약소국인 벨기에가 강대국인 독일이나 스페인으로부터 굳건히 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벨기에 사람들의 독립심과 애국심, 상호부조와 조합운동을 우리의 본보기로 소개했다.

 

 

아는가 모르는가? (知아 否아?)                           

                                                     양기탁(梁起鐸)

  전 세계에 범람한 대조류가 아(我·우리) 조선반도에 파급함에 아(我) 민족의 정치적 운동이 대기(大起)하여 도(到)하는 처(處)에 정치혁신 생활개조를 절규하여 경천동지의 향(響)이 1개년 유여에 긍하여 금일에 지(至)하였으니 차(此)가 곧 축수금구(머리를 움츠리고 입을 다물어 말을 하지 않음)에 반사기(半死氣·거의 죽은 기운)를 향소(向甦·차차 살아나게 함)하고 명목장담(明目張膽·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과감하게 말함)에 신(新)활기를 신전(伸展·늘려 펼침)하는 바이라. 차(此)로 인하여 제반 집회와 결사와 언론과 출판 등 시설이 울연(蔚然·무성한 모양) 발흥하여 흡연히 학음호한(습기가 마르고 얼어붙는 심한 추위)을 경(經)한 초목이 춘풍이 일취(一吹·한번 붐)하매 만록이 제줄(齊茁·가지런히 싹이 남)하는 관(觀)을 정(呈·보임)하니 하인(何人·어떤 사람)이든지 차(此)에 대하여 흔쾌의 감(感)을 유(有)치 아니한 자-기유(豈有·어찌 있으리) 하리오마는 여(余·너)는 독(獨·홀로)히 중야방황(中夜彷徨·한밤중에 헤맴)에 수조(數條·여러 가지)의 의문을 포(抱·품은)한 이 유(有)하노니

1. 국민운동의 목표가 하(何·어디에)에 재(在)한가

2. 차(此) 운동의 배경에 상당한 이상과 지식이 그 후원(後援)을 작(作)하는가

3. 기(其) 목표를 도달함에 확호불발(確乎不拔·단단하고 굳세어 흔들리지 않음)하는 결심이 유(有)한가 함이 시(是)라

 대양 면에 범범(汎汎·떠 있는)한 선박이 일정한 방향을 지시하는 나반침(羅盤針)이 무(無)하면 완전히 목적지를 도달키 불능함과 여(如·같이)히 오인도 금일 세계의 홍파거랑중(洪波巨浪中·큰 파도 큰 물결 속)에 입(立)하여 일정한 목표가 무(無)하고야 어찌 요원한 경로에 진행한다 하리오. 결국은 오리무중에 방황하는 폐해가 생할지니 오인은 반드시 현대에 최선량하고 최적합한 자를 택하여 일정한 표치(標幟·표지)를 작(作·만들어)하여 문화 진운에 순응함이 가(可)할지오.

 전쟁의 종식을 반(伴·맞추어)하여 인류 사상계에 신국면을 전개하여 14세기 이전에 비하면 엄연히 격세(隔世)의 관(觀)이 유(有)하니 시고(是故·이런 이유)로 국제적 민중의 대 운동이 신기(新起)하여 사회주의이니 노동주의이니 하는 언론이 동서에 미만(彌滿·가득 참)하니 오인은 다만 부화뇌동함으로 능사를 작(作)지 말고 반드시 신(新)이상 신(新)지식으로 인성의 선미(善美)한 방면을 발달하여 인류 공존의 대의에 기(基)하여 인생의 개조를 성취할지니라.

 무릇 사업을 영위하는 자는 반드시 확호불발(確乎不拔)하는 결심이 유(有)하여 비록 천백(千百·수천)의 지장이 내(來)하드라도 능히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전진하는 보조를 퇴축(退縮·물러나 움츠림)치 아니하여야 능히 기(其)목적을 도달하나니, 만일 차(此) 결심이 무(無)하고 일시 감정에 폭발하여 수화(水火)를 불피(不避) 하다가(물불을 가리지 않다가) 시이사왕(時異事往·세월과 사물이 변함)하매 이연(그에 따라 자연히)히 권피(倦疲·게을러지고 지침)하여 분호(分毫·아주 작음)의 기력이 무(無)하면 도연(徒然·헛됨)히 실패자 지위에 입(立)하여 유시무종(有始無終·시작한 일의 끝을 맺지 못함)의 초(꾸짖음)를 면치 못하리니 어찌 오인이 맹연(猛然·엄함)히 반성할 바 아니리오.

 대저(大抵·무릇) 동포 연대 결합의 감정은 인생 지정(至情)의 산물로서 세간하인(世間何人·세상의 어떤 사람)이든지 차(此)에 대항치 못하나니 그러한 고로 약자의 운명이 강자의 세력권 중에 흡입이 되지 아니하고 의연히 존재할 뿐 아니라 문명의 전기 사회의 혁신 인생의 개조에 대한 약자의 역(力)이 현전(現前) 당면의 문제로 일방 강자의 세력이 쇠망의 운명에 함(陷·떨어짐)함과 공히 타방 약자의 지정(至情)으로부터 출(出)한 대 운동이 기(起)하여 강자 계급에 대공황을 여(與)하니 현시 노동자가 연대 결합의 감정을 국제적으로 확대하여 호상부조하며 연락하며 통모(通謀)함이 기(其) 일례를 시(示·보임)함이니라.

 우리 민족도 또한 약자 계급에 재(在)한 자로서 세계 진운에 반하여 점차로 두각을 노(露·드러냄)하여 정치적 운동의 각 방면에 출현하는 바이라, 연(然)하나 정치 운동과 사회 운동은 밀접한 관계가 유(有)한 자로서 사회를 이(離·떼어놓음)하여 정치를 의논하는 자는 필경 허위 우매에 함(陷·빠짐)할 뿐이니 하등 실익이 유(有)하리오.

 근세 구라파 제국 중 약자 계급에 재(在)한 자로서 우리에게 지대한 모범을 수(垂)한 자는 백이의(白耳義·벨기에) 국민이니 호상부조의 도덕을 구체적으로 경제상에 실행하여 중세기 이래로 정치상 약자의 위치에 입(立)하여 독일 서반아 포도아(葡萄牙·포르투갈) 제 강국이 압박을 수(受)함에 차(此)에 대항하는 약자의 수단으로 지방조합을 공고히 하여 제도 풍기 전통의 자유를 주장하더니 근대에 지(至)하여는 차(此) 자치를 산업상에 응용하여 소비 생산의 조합과 금융의 시설과 민중의 교육상에 호상부조하는 도덕이 주밀히발달하여 백이의 각 촌리에 임립(林立·죽 늘어섬)하니 백이의 국민의 독립심과 애국심이 실로 차(此) 도덕의 사(賜)한 자이라, 그러하므로 백이의 인(人)이 차(此) 발달로 인하여 최근에는 독일의 폭학에 굴(屈)치 아니하고 자유 독립의 백이의 혼을 실철(實徹)함은 오인이 경앙하는 바이라.

 고로 정치의 완성은 사회 각 세력의 종합 발달한 결과라 위(謂)할지니 피(彼·저) 백이의 사회 발달은 기국(其國·그 나라)정치에 완전한 성적(成績)을 여(與)한 바이니 오배(吾輩·우리)도 정치 운동에 신 면목을 성(成)코자 하면 먼저 사회개조의 신 발달을 도(圖·꾀함)할지라,  시문(試問·시험하여 물음)하노니 우리 약자 계급에 재(在)한 민족이 강자를 대항하는 운동의 목표는 하여(何如·어떠함)하며 이상은 하여(何如)하며 결심은 하여(何如)하뇨.

 차호(嗟乎·슬프도다)라, 여(余·너)가 십년 이전(以前)에 보관에 신(身)을 이(離)하여 수수결설(囚首結舌·머리가 갇히고 혀가 묶인 상태)에 감히 일기(一氣)를 토(吐·밷어냄)치 못하였더니 금(今)에 세고(世故·세상의 이런 저런 일)를 열력(閱歷·경험)하여 수발(鬚髮·수염과 머리털)이 창연(蒼然·푸른 모양)한데 본사 창간의 기회를 이용하여 권권(삼감)한 심회(心懷·마음속의 생각)가 오히려 민멸(泯滅·아주 없어짐)치 아니하므로 참솔(주제넘음)을 불규(不揆·헤아리지 않음)하고 일언을 진술하노니 독자는 기(其·그것을) 양해할진저.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