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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59 : 4·19 (4) 희생학생위령탑

Posted by 신이 On 12월 - 4 - 2013

  동아일보 1960년 4월 21일자 사설의 제목은 ‘국가 초난국의 타개와 긴박한 민심의 진정을 위하여’였다. 계엄하 공포분위기를 무릅쓰고 재선거를 요구하는 사설이었다.

 

  4.19 사태는 하도 어마어마해서 장차 행정부나 국회가 이 중대한 문제를 어찌 처리할 것인지 아득한 것이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민심은 극도로 불안에 빠지고 따라서 모든 시민의 생업은 마비상태에 빠져 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한시 바삐 그 수습책이 있어 주기를 목마르게 바라고 있다. 그러하지만, 행정부 당국은 물론 입법부 관계자들도 아직 아무런 긴급조치책의 방안을 보인 것이 없다.

  정부 당국은 계엄령 실시로써 만족하는 듯하고 국회는 여야 협상으로써 어떻게 국면을 타개해 볼까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하도 벌집이 되어 놓은 사태가 뜻밖에도 컸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좀체로 울근불근 민심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두 편이 모두 계획적 단(斷)을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답답한 심정이 후련하도록 풀어주는 것만이 그 근본 해결책이 아닐까 한다.

  즉 행정부는 행정부대로 미안과 관용의 뜻을 먼저 표해야 한다. 그 시비와 곡직이야 차치하고라도 수다(數多)한 젊은 생령(生靈)―이 나라의 ‘미래의 싹’인 유위(有爲·유능)한 청년들이 피를 흘리고 넘어졌으니 마땅히 위정자로서 마음이 아프다는 한마디쯤의 진사(陳謝)라도 있음직하다. 그렇건만 아직 없다. 이것이 민심의 반발을 더욱 북돋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몹시 애달픈 생각이 난다. 물론 교격(矯激·마음이 굳세고 과격함)한 거조(擧措·행동)에까지 이르러 공공질서를 문란, 파괴시킨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피비린내 나는 마산사건을 재빨리 그리고 올바르게 처리했더라면 그런 불상사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평소에도 마산사건의 공정한 처리를 하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마산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증 못한다는 것을 여러 번 경고한 바 있었지만 당국자는 거기에 등한하고 소홀했으며 또 소극적인 태도로 우유부단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곧 큰 탈이었다. 진즉 그 책임자―주동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감싸주면서 내려온 것이 서울의 데모를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아닌가 한다. 더욱이 김주열 군의 그 흉참한 주검, 그리고 고문경관들의 방임 등이 학생들을 격동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직접적인 원인을 따질 때엔 두말할 것도 없이 부정 불법 투성이 인 3.15선거의 무효선언과 함께 공명 자유의 재선거로써 대담 솔직한 아량을 보이지 못한 데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집권당이나 행정부는 거기에 귀를 기울일 척을 않고 3.15선거는 ‘기성사실’로써 ‘합리화’와 ‘합법화’를 끝내 주장, 고집해 왔다. 이것이 곧 오늘에 주권을 침해 박탈당한 민중―특히 청년 학도들의 불만과 불평을 유발시킨 것이란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미국무 당국도 매 대사의 ‘한국 민중의 정당한 불만을 들어주는 것만이 사태수습의 근본’이라는 뜻의 담화를 지지한다고 허터 장관은 또한 발표했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해서 공정치 못한 차별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비난을 했다. 이 모두가 3.15선거의 협잡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허터 장관이 ‘언론자유 집회자유 출판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필요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호소한 것은 저간의 소식을 말하는 것도 되려니와, 우리 정부 당국에 대해서 중대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 우리는 오직 심심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의타적으로 미국 측에 대한 행정부 당국의 반향을 기다린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주독립국가 이니 어디까지나 정부 당국이 자율적으로 선후 조치하기에 더욱 큰 기대를 갖는 것이 원칙일 듯하다. 그렇긴 하나 우리는 이번 4.19사태가 허터 장관의 말마따나 ‘국제적 위신을 손상하거나 또는 자유 민주 동맹국의 입장에서 만약에 고립무원이 된다면 큰일’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칠 때엔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가깝게 말해서 이북 괴뢰집단이나 또는 우리와 호시탐탐하는 대일관계에 있어서나 우리의 지위가 약화될까도 걱정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이들 문제에 있어 어찌 할 것인지, 정부의 두드러진 대책과 뚜렷한 방침을 듣고 싶은 것이 국민 누구나 공통된 궁금증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국회는 어찌할 셈인가. 4.19사태 처리문제에 대해서 먼저 집권 자유당 의원들의 회천(回天)적인 일대 각오와 경각을 촉구하고 싶은 마음 누구에게 보다도 간절하다. 집권 10유 2년 동안 행정 입법을 통해서 그 부패상이란 우리의 붓끝으로 백 천 번을 더 넘게 지적했으니 여기서 새삼스레 할 말이 없다. 멀리는 그만두고 2·4보안법파동, 3.15선거―이 두 가지에서만 근례(近例)를 들어 보더라도 그들 여당 국회의원들의 범과는 비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하지만 선거민―국민 앞에 후안무치하게도 비법(非法)과 부정이 없는 양 버티고 내려왔다. 사실은 초비극적인 이번 사태도 그들―여당의원들이 태반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이대통령의 총명을 가리우고 이기붕 의장을 기만한 결과라는 지탄과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이것이 제4대 민주의정 사상 한 큰 오점을 찍어 놓았다.

  또 한편으론 야당 의원들의 그토록 유약하고 미온적인 태도를 문책 않을 수도 없다. 4.19사태 전에도 그러했지만 이번 사태 발생과 동시에 한마디 국민 앞에 있음직하건만 없다. 더구나 민주당인 경우에서는 그의 당 대표 최고위원의 지위로나 국가 부원수의 자격으로, 응당 자기 일신상 또는 당 태도에 대한 공식성명이 있어야 될 터인데 그것을 오늘에까지 못보고 있음은 극히 유감 된 일이다. 국민들은 신구파를 가릴 것 없이 식어빠진 민주당 태도에 실망하고 있는 것이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끈덕지게 국민의 기대와 지지를 받아온 민주당으로서 취할 바 태도이겠느냐 하고 분개하는 실정이다.

  어쨌든 20일의 여야 협상으로 명22일부터는 국회를 열기로 합의되었다 한다. 그러면 이 국회에서 이번 사태를 국민이 안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국회다운 기능을 십이분 발휘할 수 있겠는가가 우리의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대통령도 20일 특별성명에서 “급선무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여 계엄령의 필요성이 없게 되게 하는 것이다…만약 불평의 주요 원인이 있으면 다 시정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사태의 시급한 수습을 바란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여야는 당을 초월, 모름지기 우선 계엄령을 해제하도록 하고 다음엔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만전의 대책을 짜내서 때를 놓치지 않는 적절하고 타당한 대행정부 건의와 편달이 있어야 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들의 국회에 대한 여망이 오늘처럼 큰 시기는 없다. 그리고 경찰 당국의 보복행위는 이것을 절대 삼가야 될 것으로 믿는다.

 

1960년 4월 22일 4.19 희생자들을 위한 위문금품 접수를 사고로 게재했다.

 

 
 ‘4·19사상자 위문금품’ 모집 현황 (4월 23~26일자 석간 2면)

 

  1960년 4월 24일에는 희생학생위령탑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 3.15 불법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개한 애국동포들의 피의 투쟁은 영원히 청사(靑史)에 빛날 것입니다. 특히 이 불의에 대한 불퇴전의 항쟁에서 귀중한 생명을 던진 분들은 민주주의 소생의 지주로서 길이길이 우리 민족의 존숭(尊崇)의 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분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그 숭고한 피의 기록을 영겁세(永劫世)를 통하여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본사에서는 애국동포 제위의 찬동을 얻어 위령탑을 건립하기로 하였습니다. 자세한 방안은 추후 발표하겠거니와 오늘 서울에서 희생된 분들의 합동위령제를 거행하는 날, 우선 이 계획을 발표하는 바입니다. 지금 접수중인 ‘4.19사상학생위문금품’은 연일 답지하여 관계자들을 감격케 하고 있는바 위문에 사용하고 여분이 있을 경우에는 상기 계획의 비용 일부로 충당할 것을 아울러 알려 드립니다.”
1960년 4월 24일

 

  동아일보 사사는 “비상계엄 하에서의 이 같은 조치는 사운(社運)을 거는 결단이었다.”고 기록했다.(사사 2권,1978년, 312쪽)

  “5·16 후 이 사업은 당국의 종용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의 4월 학생혁명 기념사업과 합동으로 하게 돼 그동안 모금한 2700여만 원과 본사가 기부한 1300여만 원, 예금이자 50여만 원 등 4100여만 원 중 설계도 및 기타 경비를 제외한 3890여만 원을 재건국민운동본부에 이양했다. 지금 수유동에 서 있는 위령탑의 건립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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