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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58 : 4·19 (3) 운명의 날

Posted by 신이 On 12월 - 4 - 2013

  4월 19일 오후가 되자 서울 시내 중심가의 시위대는 수십만에 이르렀다. 서울신문사가 불타고 이기붕의 ‘서대문경무대’와 국회의사당이 시위군중들에 둘러싸였다. 오후 5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동아일보 사사는 “총탄이 비 오듯 하는 속에서 찍은  이명동(李命同) 기자의 당시 현장사진은 생생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전하고 있다. (사사 2권,1978년, 306쪽)

“ 500여명의 무장경찰은 장갑차의 엄호 하에 전투대형으로 경무대에서 중앙청, 광화문으로 나와 종로 서대문 을지로 방면의 시위대를 향해 또다시 총기를 발사,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밤 8시경 서울 중심가 거리에서의 시위는 잠잠해졌으나 돈암동 안암동 일대에서는 밤늦도록 시위가 계속됐고 경찰은 총격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이명동의 회고.(2007년 10월 29일 인터뷰)

  “4.19는 동아일보가 주도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데모 현장에 다른 신문사 찦차는 얼씬도 못했다. 나오면 데모대가 불태워 버릴 기세였으니까. 동아일보는 찦차가 6대 있었는데 그 찦차만이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찦차에는 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어 즉시즉시 각 지역의 현장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회고는 계속됐다.

 

  “4.19 당일 나는 찦차를 타고 경무대 앞에까지 갔다. 다른 사진기자들은 없었고 AP기자인가 한사람만이 비교적 안전한 천일약국 사장집 담쪽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효자동에서 꺾어 경무대로 가는 길의 미술관 들어가는 쪽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효자동 전차종점에 이르러 잠시 고민을 했다. 틀림없이 학생들이 더 밀고 들어가면 발포를 할 것 같은데 데모대를 따라 더 깊이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멈춰 취재를 할 것인지. 결국 운전기사한테 수첩 등을 유품으로 맡기고 찦차를 돌려보낸 뒤 혼자 라이카 카메라를 메고 데모대를 따라갔다. 데모대가 소방차를 앞세우고 경무대를 향해 나가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발포가 시작됐다. 총탄을 피해 엎드려 있는데 학생들이 마구 내 위로 쓰러져 내렸다. 카메라 렌즈가 가슴에 박힐 정도였다. 학생들을 헤치고 엉거주춤 반쯤 일어나면서 카메라를 치켜들어 렌즈도 못보고 직감으로만 셔터를 눌러댔다. 나중에 현상해보니 생생한 발포장면, 학생들이 무릎을 꿇으면서 쓰러지는 장면 등이 담겼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0일자 조간 2면. ‘학생 데모 화보’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0일자 석간 2면. ‘학생 데모 화보’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0일자 조간 3면, 전 수도의 거리뒤흔든 학생들의 노도(怒濤)
각대학생 약10만명이 합류, 경찰의 폭력뚫고 돌진 또 돌진, 곳곳의 연도에선 시민들 박수치며 성원
국회앞에 일단집결, 〃불법감행한 책임자 부르자〃고

18일의 고대학생『데모』에 뒤이어 19일에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전학생들과 성균관·동국·경기·중앙·연세·홍익대학생등、약십만명이 대대적인『데모』를 감행하여 수도서울을 완전히『데모』분위기속으로 휘몰아넣었다 이들 각대학학생들은 11시 4○분경에 이르러 시청앞과 의사당앞에서 완전합류한다음 동국대학을 선두로 다시『데모』를 전개 세종로중앙청앞을 돌아 경무대쪽으로 전진하다가 적선동 파출소앞에서 경찰의 공포 및 최루탄발사를 받고 일단 후퇴하였다가 다시 전진하여 적선동、통인동쪽으로『코스』를 돌려 마침내 측면에서『국민대학』앞(경찰『바리케이드』후면)을 돌파- 노도처럼 밀려들어 이날하오 1시4○분경 경무대어귀까지 돌진하였다 경관은 본격적으로 실탄과 최루탄을 발사하여 일부학생들이 현장에 쓰러지기시작- 이날 하오 5시경 경무대 어구부터 경찰은『데모』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총격을 개시 수십명의 사망자와 헤아릴수 없을정도의 부상자를 내었다(하오6시현재)

○…이날 대학생들의 데모는 사전에 각대학간에 밀의가 있은듯 아침9시를 기하여 일제히 각대학별로 일어났다
먼저 이날아침 9시정각 서울대학교의 문리대·법대·미대·수의대□□□□3천명은□□□□□□□에 모여「대학의양심을 증언한다」는등 격문낭독을 마치고 교문을 나오려고 하였으나 이기미를 알아차리고 미리대기하고있던 1백여명의 경찰관들이 이「데모」대를 제지하려고한데서 쌍방간에 일대충돌□□□□ 한동안 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를 물리치고 교문을 뛰어나와「스크람」을 짜고「데모」에 돌입했다

○…이들은「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타도하자」「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있다」「데모가 이적이냐?폭정이 이적이냐?」는 등등 구호를 외치며 원남동- 종로사가에 이르렀을때 경찰은 곤봉으로「데모」대에 폭력행위를 하자 학생들은 뒷골목에 들어가서 돌을가지고 경찰에 투석하여 경찰이 후퇴후에 다시 대열을지어 종로2가까지 진출하였는데 이때 화신앞부근에서 대기하고있던 경찰관들이 십여발의 최류탄과 연막탄을 발사하면서 그들의 전진을 완강히 저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데모」대는 을지로2가쪽으로 방향을 돌려 내무부앞 시청앞을 거쳐 의사당에 도착 농성에 들어갔다

○…한편 이와때를 같이하여 교문을나선 상대학생 약2천명은 안암동쪽에서 안암동·동대문앞을 통과한다음 종로4가에서 경찰대와조우- 한때 옥신각신이 벌어졌으며 처음에 경찰은 경찰봉으로 폭행을 가하는태세로 나왔으나 원체학생들의 수를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종로네거리、세종로를돌아 의사당앞에 도달- 선착한 문리·법대학생들과 합세하였다

○…이들 학생들이「데모」를 감행하는동안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과「뻐스」속의 승객들은 박수를 보내면서「데모」대를 성원하였다

○…그뒤를 이어 사대학생 약1천여명은 청량리에 있는 그들학교를 출발- 역시 동대문을 거쳐 시내로 돌입했는데 이때 경찰은 세종로와 시청앞·의사당앞에 총병력을 집중시킨관계로 이들 데모대는 아무런 저항을받지않고 계속 전진하다가 종로5가에서 혜화동 방면으로부터 행진하던 성균관대학·동성중고등학교 학생등 약3천명과 합세- 기세를 올렸다

○…11시좀지나 동국대학교에서도 약2천명의 학생들이「데모」를 시작하여 을지로를 꿰뚫고 내려와 미국대사관앞·시청앞·국회앞을거쳐 세종로거리를 북상하여 5대의 소방차와 무장경관의 제지를 무릅쓰고 중앙청앞을지나 경무대쪽을 향한 대열의 선두에 섰으나 적선동파출소앞에서 급증된 경찰·헌병들의 공포·최루탄발사로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농성에 들어갔다

○…한편 건국대학의 22○○명 학생들도 이날아침 1○시3○분 낙원동에 있는 동대학분교에 모여「데모」를 감행키로 결의하고 종로·광화문을 거쳐 국회의사당앞에 이르러 마침 농성중이던 서울대학교 문리대 법대 미대생들과 합류하여 한참동안 기세를 올린다음 다시 행진을 시작하여 남대문 시경찰국앞 한국은행 미도파앞을 거쳐 11시2○분 내무부앞에 이르자『내무장관은 마산학생들을 모두 석방하라』『정의의 싹을죽이지말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주저앉아 농성에 들어갔었다「MI」소총을든 1「추럭」경관들이 급파되고 철책의 내무부 바깥문이 닫히고 잠시동안 그앞은 난장판이 되었었으나 얼마후 동국대학을 비롯하여 서울사대·성균관대학생들과 합세하자 기세를 올리면서 시청쪽으로 전진- 전부터 와있던 학생들과 합세하였다

○…1○시25분경 국회의사당앞에 도착한 서울대학교학생「데모」대는 강력히 제지하는 경찰대와 잠시 충돌하던끝에 의사당 정문앞에도착- 3천여남녀학생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격문낭독과 구호를 외쳤다

○…「이승만박사 물러가라」- 「불법으로 치른3·15선거 다시하자」- 는 구호를 부르며 흥분에 싸인「데모」학생들은 또한『3·15선거를 불법으로 감행한 책임자를 이자리에 불러내자』고 외쳤다

○…서울대학교 문리대·법대학생들의「데모」가 한창 진행될 무렵인 1○시55분경 2천여명의 남녀상과대학생들이 도착되고 이어 건국대학교학생 1천여명이 도착 합류되어 금시 의사당앞의 학생「데모」대수는 5천을 넘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와 학도호국단노래 그리고 3·1절노래등을 부르며「데모」행진을 감행하자고 외치는 동「데모」학생들중 건국대학교학생들은 대법원으로 향해 몰려가고- 남은학생들은 의사당앞 건너편에있는 서울신문사방향으로 바꿔앉고는『전우의시체를 넘고넘어』란 노래를 부르며 다시 세종로방향으로 향해 행진을 계속하였다

○…11시35분경- 주먹을 불끈쥐고 횐 수건을 이마에맨 학생들- 특히 하얀「까운」을 입은 서울대학교의과대학생과 약학대학생들을 선두로 중앙청으로 향해「데모」를 계속-

 

〃김군시체는 내가유기〃, 손서장이〃적당히 처리하라고〃지시, 전 마산서 경비주임, 박종표、지검에서 자백

【마산에서 강인환·한성관 부산분실기자발】김주열군의 시체유기자를 수사중에 있는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사건특별수사진에서 18일 하오 임의구속되어있는 전 마산서 경비주임 박종표가 김주열군의 시체유기는 내가 했다고하는 자백에따라 당시 유기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찦차운전수 이 모를 수배중에있다

18일 하오 부산형무소에서 한옥신 부장검사가 지휘하는 수사진의 이에관한 질문에 드디어『김군의 시체를 유기한자는 바로 본인입니다』라는 자백을 하게 되었다 한다 박은 3월15일밤 시청앞에서「데모」군중을 향하여 최루탄을 발사한 사실을 시인하고 그날밤 1○시경 남전지점앞에서 시체1구가 최루탄이 박혀 쓰러져있는것을 발견한후 전손서장에게『시체처리를 어떻게하리까』라고 상의하였던바 손서장은 적당한방법으로 처리하라는 언질을주기에 찦차의 호로를 벗기고 시체를 실어 마산세관 앞바다에다 유기하였다는 것이다

 

데모선언문을 준비, 민주당 경북도당서

【대구발】지난12일「3·15부정선거규탄데모」가 잔학한 경찰폭력에 의하여 저지당하였다고 하는 민주당경북도당부에서는 또다시「데모」를 감행하기 위하여 발표할 선언문을 인쇄하는등 시내각핵심 당부간부및 도당간부로 조직된 9인계획인원들을 둘리싸고 맹렬한 암약을 전개중에 있다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데모대 구호,
한편 이날 학생들이「데모」시에 외친「구호」는 다음과 같다

◇구호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타도하자』『대한민국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있다』『민주위한 학생「데모」총칼로써 저지말라』『학원자유보장하여 구국애족선봉되자』『이놈 저놈다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권력에 아부하는 간신배를 축출하라』『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허용하라』『경찰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지말라』『정부는 마산사건에 책임지라』『부정공개투표의 창안집단을 법으로 처단하라』

 

경찰、바리케이트구축, 적선동서 저지당해 일단 주춤

○…11시5○분경「데모」대선두가 적선동「국민대학」앞까지 이르렀을때 경찰은 약3○발의 위협발포를 했다 주춤해진「데모」대가 잠시 후퇴하여「적선동파출소」앞 중앙청뒷문에 다다르자 미리 대기했던 소방차에서는 일제히 빨강물을 들인 물을「호스」로 끼얹기 시작했다 다시「데모」대는전진- 「국민대학」까지 가자 경찰은「최루탄」수발을 쏘았다 12시- 학생들은 후퇴를 시작했다
중앙청앞 광장에서 동국대학생 1명이 총탄에 맞아 피를 흘렸고 근처 이태리병원에 입원되었다 이곳에서 헌병이 다시 공포를 쏘자 학생들이 투석、하얀「까운」을 입은 서울의대학생들은 안국동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경찰은 국민대학앞길에「바리케드」를 쌓았다(12시15분)학생들은「전우가」를 높이 부르고「뻐스」「추럭」으로 헌병과 경찰이 대량으로 집결해왔다
학생들의 투석이 심해지고 문교부 유리창이 깨졌다 경찰은 다시 최루탄을 발사했다

○…「문교부」옆 전차정류장근처에 주저앉은「데모」선두대는 그칠새없이 밀려드는 수만명의 학생들의 환호성과 고함에 더욱 용기를 얻고「전우가」와「6·25의 노래」를 부르면서 쉴새없이 소충돌을 야기하였다

○…이무렵 총탄에 쓰러진 학생은 약3명이 된다고 하나 미확인중에 있다
애당초 3○여발의「최루탄」과 수십발의 실탄과 위협발사를한 경찰은「국민대학」앞에 철통같은「바리케이드」를 하고 무장경찰관들이 발사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데모」선두와 경찰「바리케이드」의 간격은 약3○「미터」-

○…수만명의「데모」학생들이 뒤끓는 가운데 최루탄、공포발사는 이날 하오1시2○분 현재까지 계속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19일、광주서도 류혈극, 광주고교생 제지 당해 분산 데모

【광주발】19일 낮12시15분경 광주고교 3년생 약2백명이「3·15선거는 무효다」「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나와 구보(驅步)로 시내에 들어와「중앙국민교」후문에 이르자 백차로 급거출동한 경찰관들이 곤봉으로「데모」학생들을 무차별 강타하여 유혈소동을 일으켰다
경찰제지에 의하여 산발적으로 해산된「데모」대는 각기분산적으로「데모」를 일으키면서 다른 각학교에 가서『너희들도 궐기하라』고 외치고 있는데 다른학교학생들도 이에 호응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
(12시반 현재)

 

부산서도 사상자 발생 데모 계속

【부산분실지급전】19일 상오11시55분 약2천명의 부산상고학생들은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나와 약천명은 가야동쪽으로 약천명은 범일동쪽으로「데모」를 감행하고있다 또한 11시 정각부터는 경남공교학생 약7백명이「데모」에 들어갔는데 11시45분경 해산하였다
또한 시내 좌천동에 있는 금성고교생들은 이날 상오1○시반경「데모」에 들어갔으나 약5○「메타」지점에서 경찰측의 공포로 골목에서 저지되었다

【부산발】19일 상오 일단 해산되었던 당지의 경남공고학생들과「대려사」여중고사 약2천명은 12시45분부터 다시「데모」에 들어가 첩첩히싸인 경찰방위선을 돌파하여 돌팔매질로 범일동에있는 자성동파출소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는데 이때 경찰발포로 인하여 경남공고3년생 이수영군은 즉사하고 외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시가로 향하여 좌천동파출소 유리와 동부산서 유리등을 파괴하는등 2시4○분경 부산 소방서앞에 도착하였다
소방차를 배치하고있는 소방관들에게 투석하여 그들을 후퇴시킨후 소방차에 발동을걸고 호수로 소방서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중앙청 근처서 농성을 시작, 경찰과 20미터 사이 두고 대치

○…12시2○분 1○○○여명 욋과대학생은「한국일보사」앞길에 주저앉았고 중앙청앞에는 약2、○○○명의 서울대학생이 농성- 동국대학생이 선두에 앉아있다 적선동파출소앞에는 약1、○○○명의 학생이 노래합창- 「이승만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과「데모」선두의 거리는 2○「미터」-

○…한편 일부「데모」대 약2、○○○명은 서대문 이기붕의장집으로 행진 12시25분「데모」대는 이의장집앞 약5「미터」까지 육박- 『이의장이 문앞까지나와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외쳤다 경찰은 빨간물을 뿌렸으나 학생들은 벽돌로응수 경상자를 내자 적십자병원에 운반- 가료시키고있다

○…이날 하오4시2○분경 태평로파출소에서는 순경3명이 달려드는 군중에게 실탄을쏘아 2명을 즉사시킨후 군중들의 분격이 격심해지자 정복을 벗고「샤쓰」바람으로 총만들고 소공동에 있는 육군특무대안으로피신하였는데 흥분한 군중들은 특무대 앞으로 몰려덮쳐『살인경관을 인도하라』고 외쳤으나 특무대에서는 총격으로 응대하여 1명의 중학생이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사망자명단

▲손중근(사대국문과3년 23세)
▲17세가량의 소년(순화병원)
▲서대문이의장택전2명즉사▲태평로파출소전2명즉사

 

부상자

▲이진면(29=아현동85의 39○왼쪽넓적다리관통)
【순화병원】

▲나용주(25=홍대미술과)▲박원배(연세대정외과4년생)▲전대길(동대2년생타박상)▲이동인(동대법과2년생 넓적다리관통상)▲고영수(22=서울대미대2년생파편찰과상)▲이회백(27=의대4년생 다리관통상)▲박장엽(연세대의과4년생 총상)▲김정만(동성고3년생총상)
【세브란스병원】

▲김재덕(21=서울사대)▲양병옥(16=관철동246)▲기영린(20=강문고교)▲임화연(19=대경상고)▲박광일(19=금곡동265)▲김신운(20여=서울사대)▲박홍규(21=동대생)▲박원대(21=성신대생)
【수도의대제2병원】▲이용준(건대3년생다리총상)▲오광식(18=흥국고2년 다리총상)

 

고대데모

○…한편 18일에「데모」를 한「고려대학교학생 2천여명은 이날 또다시「데모」에 돌입. 상오 11시 교문을 나선「데모」대는 안암동 지점에서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폭력경찰과의 사이에 한동안 소동을 야기하였으나 마침내 저지선을 돌파하고 시내를 향하여「데모」행진을 감행 이날 하오 1시 반경 세종로까지 다달았다

 

인천서도 공고생들

 【인천발】19일 오전 11시경 인천시 주암동소재 인천공업고등학교 1,2,3 학년 학생약 300명이 수업중 학교교문을 박차고 인천 수봉산을 넘어서 무언의「데모」를 감행하고있는데 이를 탐지한 경기도 경찰국은 인천、동인천、수상경찰서 직원들을 비상소집하여「데모」를 막기 위해서 인천시 승의동에서 충돌. 동인천 경찰서 경무계장「탁흥진」씨는 돌에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다.

 

〃선거무효판결하라〃, 건국대 학생들, 구호 외치며 경무대 쪽으로, 연세대도 데모대에 합류

이날 낮 12시반경 건국대학생 6백여명은 대법원에 몰려들어『대법원은 현정부에 아부하지말라』『3·15선거 무효판결하라』는등의 구호를 일제히 외치고 대법원장을 면접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못하자 경무대쪽으로 향하였다.

 

○…한편 延世(연세)대학교학생五(오)천명은 이날정오 新村(신촌)종점에 합세하여「데모」행진에돌입|阿峴(아현)동고개에서 약二(이)○명의 경관들의제지를 받았으나 이제지망을뚫고 계속행진|西大門(서대문)에서 南大門(남대문) 시경앞을통과한다음 동화백화점쪽으로향하여 다른학교학생들과합류하였다

 

중앙대도

○…중앙대학교 학생 약 사천명은 이날 낮 12시 5분경『학생은 폭력에 굴하지않는다』는「푸라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뛰어나와 국회의사당쪽으로 향하였다.「데모」대원들이교문을 나오자  영등포경찰서에서는「백차」와「추럭」에 약 30명의 경관을 동원하여 이를 제지하였으나 학생들은 투석하면서 경찰대에 돌진행진을 시작하였으며 노량진에서 재차 영등포소방차 4대를 동원 이를 제지하려하였으나 또다시 학생들의 투석돌진으로 실패에 돌아가고「데모」대원들은 용산·서울역으로 행진하여 중앙청 앞에서 학교「데모」대원들과 합류하였다

 

시민들 성원노골화, 감격적인 포옹까지

이날 서울시내 도처에서수만명의「데모」학생들이거리를행진하자 시초에소극적인성원과박수를보내던시민들은 차츰 노골적으로「데모」에환호성을 보내기 시작, 각 대학 및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을지로 입구에서 합류하고 미대사관앞을 거쳐「서울시청」광장앞에 이를무렵에는一(일)만여명의 군중이「만세!」소리와함께 경찰저지선을뚫고「데모」대에 완전합류|쌍방에서 박수와성원 심지어 감격적인포응까지하면서「애국가」를합창하기도하였다. 화신앞 동대문근처에서는 다수 시민들이「뻐스」「전차」안에서도 박수를 쳤고 특히 동대문서옆「로타리」에서는 다수의 부녀자들과 소년들이 손수건을 혼들었으며 일부 부녀자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고 밤 10시 중무장한 1개 사단 병력이 시내에 진입했다. 신문은 계엄 당국의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0일자 석간 3면.톱 제목은 ‘서울에 밤10시 기해 중무장군대 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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