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8일 서울 부산 청주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에서 오후 1시경 고려대생 3000여명이 ‘민주 도적 몰아내자’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왔다. 대학생 시위는 고대생들이 처음이었다. 고대생들은 유진오총장의 설득으로 오후 6시 45분경 학교로 되돌아가다 종로4가에서 100여명의 폭력배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40여명의 학생과 6명의 기자가 중경상을 입었다. ‘고대생 피습사건’이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19일자 석간 3면. 톱기사로 ‘고대 데모대 깡패단 습격으로 유혈소동’을 다뤘다.
4월 18일 부산시위를 취재했던 사진기자 박용윤(朴容允)의 증언(2007년 8월 27일 인터뷰). 목숨을 잃을뻔한 아찔했던 순간을 증언했다.
“4월 18일 오전 부산 동래고 학생들 1,300여명이 온천동 방면과 부산시내 쪽으로 데모를 벌였다. 나는 그 때까지 마산에서 취재 중이었는데 급히 부산으로 가라는 본사 지시를 받고 지프차로 내달렸다. 자유당 말기 경향신문이 폐간되어 당시 가장 강력한 야당지는 동아일보 뿐이었다. 신문사 차량에는 모두가 앞 범퍼 양쪽에 신문사 깃발을 휘날리고 다녔다. 부산지사 지프차에도 빠짐없이 동아일보 사기(社旗)를 달고 있었다. 그 때 동래고 학생들의 데모를 취재하러 마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내가 탄 지프차도 마치 마라톤 취재차량처럼 멀리서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도록 아주 큰 사기를 차량 뒤에 매달고 서면 쪽으로 달려갔다. 훤히 뚫린 길(당시는 지금처럼 자동차가 많지 않았다)을 달려가는데 서면로타리 너머 정면에 커다란 빌딩이 눈에 띄였다. 운전사가 ‘새로 지은 서면경찰서 건물’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예감이 이상해서’ “차를 세우라”고 고함쳤다. 차가 급정지하자 쫓기듯 밖으로 뛰쳐 나오는 순간 간발의 차이로 “쨍그렁” 하며 총알이 유리창을 뚫었다. 총알은 오른쪽 유리창 중앙을 뚫고 내가 앉았던 앞자리 시트를 뚫고 뒷자리의 나지막한 등판, 지프차의 뒤 차체, 차 뒤에 달린 철제 스페어통을 차례로 관통하고 스페어 통안에서 멈췄다. 만일 몇초라도 늦게 차 밖으로 뛰쳐 나왔다면 내 가슴에 총알이 관통했을 것이다. 아마도 경찰은 서면경찰서 옥상에서 동아일보 사기를 보고 지프차를 조준사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