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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47 : KNA기 납북

Posted by 신이 On 12월 - 3 - 2013

동아일보 1958년 2월 18일자 1면

 

여객기의문의 월북, 괴뢰기지에 착륙 확인, 승객 28명·승무원 4명등 태운채

16일 상오11시38분 부산을 출발한 K·N·A(대한국민항공사)소속 쌍발정기여객기(DC=3형)는 승객28명과 승무원3명 그리고 미공군중령 1명 도합 32명을 태운채 종착공항인 서울여의도공항에 도착예정시간을 24시간이 경과된 17일  하오 1시까지 그 기영을 나타내지 않고있다
그런데 17일 상오9시30분 미군으로부터 대한국민항공사에 연락된 정보에 의하면 전기여객기는 휴전선을넘어 괴뢰군기지에 착륙한것으로 알리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동여객기가 28명의 여객을싣고 휴전선을넘게된 동기에 대하여서는 아직 확인된바 없다고 한다

 

사건진상보고, 삼부장관、경무대에

16일의 KNA여객기월북사건을 보고하기 위하여 17일 상오10시 문교통·조외무·내무등 삼부장관과 장공군총참모장은 경무대로 이대통영을 방문하고 이시각까지 판명된 사건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이대통령은 보고를 청취한다음『만약 KNA비행기가 사실상 월북하였다면 사람과 비행기를 곧 찾아와야 할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기체등 반환을 요구, 『유엔』군사、공산측에

「유엔」군사령부에서는 17일 상오 월북한 KNA소속 DC=3여객기가 16일 하오 휴전선북방에 착륙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공산측에게 즉시 비행기와 승객 및 승무원들을 송환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동사령부에서는 32명중 미국공군중령「하워드·마크레린」씨가 포함되었다는것도 밝혔는데 전기비행기의 이북착륙지점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막크레린」중령은 한국공군고문단의 일원이며 자기의 비행기록을 늘이기위해 이날KNA여객기에 탑승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유엔」군당국에 의하면 KNA여객기는 16일 상오11시35분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는도중 오산비행장까지도 비행장통신대와 연락이 있었다 하는데 이사실로 밀우어 이북으로 넘어가게된 흉계는 서울근방에서 일어난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군사정전위 개최, 18일、『유엔』측 제의로

「유엔」군사령부는 17일 상오 공산측에 대하여 한국군사정전위원회본회의를 개최하자고 요구-18일 열기로 합의하였다
동회의에서는 16일 이북으로 넘어간 KNA여객기와 탑승원의 즉시송환을 정식으로 요구할것이다

 

제지불능했다, 국방부 견해 표명

국방부당국과 공군당국은 17일 상오 지난16일 KNA정기여객기가「레이다」에 포착된 채 월북하게된데 대하여 이를 제지하지 못했느라냐는 책임추궁에 대하여 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즉 민간정기수송기는 비무장인 까닭으로 이를 어느 적대적인 국가에서도 격추할 수는 없는 것이며 이는 국제법에 의해 마땅히 반환되어야 하는 것으로 우리측에서도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을뿐만아니라 또한 어떻게 제지하는 방법도 없는것이라고 말하고있다
그런데 공군당국은 동비행기가 착륙한 지점 기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일절의 언급을 회피하고 있고「유엔」군사령부 또한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동기가 월북한 것을 명백히 하고있다

 

KNA기 월북 사건의 의미,

대한국민항공사소속여객기(DC=3형)가 지난 16일 국회의원과 공군 정훈감을 포함한 28명 승객과 3명의 승무원과 1명의 비공식승무원인 미공군중령등 도합32명을 실은채 월북한것은 중대한사건이 아닐수 없다。 지금까지 비행기와 배등이 월북한일은 여러건이 있었기는 하였지만 여객기가 월북한것은 이번이 처음이며、특히 동기에 탑승한 손님중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홀홀하지않은 분들도 끼어있는만큼 초조와 불안을 금할수 없는것이다。
동기의 월북이 승무원들의 실수에 의한것인지?혹은 잠복해 있던 공산분자들의 계획적인 강도행위인지?지금 단정할수 없으나 만일에 북한측이 그비행기와 그탑승원들을 남으로 송환하지 않는다면 공산분자들의 계획적인 강도행위로밖에 다른해석은 나올수 없는것이다。 지금까지의 월북사건들은 거의다가 공산분자들의 계획과 지령에 의한 것으로 보지않을수 없는것들이었기때문이다。

더욱이、한국에 원자·유도무기등 도입된것이 북한공산분자를과 중공측에 심대한 충격을 준 것은 상상 이상의 것이있으며 이에 대하여 어떤보복책이 공도들에 의해서 취해지리라는것도 짐작하기 어렵던것이 아니었기는하지만 주은래가 평양에와서 김일성과 무엇인가를 획책하고있는 이때를 골라서 이러한「공중강도」질을 감행하였다고 하면 중대한 의미가 여기에있다고 하지않을수 없는것같다。

그들이 감행한 그러한「공중강도」는、물론、비행기 그것에 욕심이난것도 아닐것이고、또한 탑승객들중에 꼭납치하여갈 필요가있는 인사가 있는 까닭도 아닐듯싶으며、미국을 필두로한 자유국가군으로하여금 한국에대한 원조열을 냉각시키자는것을 노린것일 것이다。 뿐만아니라、미국등이 오랫동안 공산측이 원하고 있는 통일방안을 배척하여왔거니와、정상회담과 이를위한 예비회담에서 미국이 고집하여 온 통안)을 완화시키자는데 그러한「공중강도」질을 백화에 범행한 진의가 있을것이다。
공도들이 이번에「공중강도」을 계획·강행한 이유가 그러한것이라면、미국을 비롯한 자유국가군은 이를 결기로하여 원조를 약화시킬것이 아니라 강화시켜야 할것이고、통한안과 외군철수문제에 있어서 더욱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여야 할것이니、만일에 그렇게 하지않는다고하면 이야말로 공도들의 계책에 넘는것이 될것이다。

 

1958년 2월 16일 KNA기가 납북됐다. 탑승자는 32명이었고, 3월 6일 범인 등을 제외한 26명이 판문점을 통해 18일만에 송환됐다.

 

동아일보 1958년 3월 8일자 1면의 관련 기사

납북기 탑승자 26명 수(遂) 귀환, 인수증의 문귀(文句) 싸고, 일시는 결렬 선풍(旋風), 옥신각신 끝에 하오 7 시 서명
(판문점에서 리기웅 특파원 발) 납북된『KNA』려객기 탑승객들은 륙일하오칠시정각 이곳 판문점 회담장소앞 광장에서 공산괴뢰측이『유엔』측에 인도함으로써 만 18일만에 자유의 품안으로 송환되었다
이날 송환된 랍북인사 이십륙명은 미국인 이명과 서독인 이명 그리고 한국인 이십이명으로서 그 중에는 한때 송환이 불가능하리라고 추측되었던 유봉순 민의원·김기완 공군정훈감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동 일행은 이날下하오 십시십분「유엔」군측에서 제공한「뻐스」편으로 서울에 귀환하였다.

 

“58년 2월 16일 KNA소속 서울~부산을 왕래하는 DC3형 쌍발여객기 한대가 승무원 3명 등 모두 32명을 태운 채 간모 김택선(당시 31세)에 의해 강제납북됐다. 이 여객기에는 전봉형 의원, 김기완 공군정훈감 등이 타고 있었다. 전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이 사건은 3월 6일 범인등을 제외한 26명을 돌려 보내줌으로써 일단락지었지만 기체는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동아의 지면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탑승자들은 이틀 후인 3월 8일 귀환보고 대회에 참석했다. 이중에는 공군대령 김기완, 동아일보 기자 출신 김진섭, 민의원 유봉순이 있었다. 김기완 대령은 성김 주한미국대사의 부친이다.
김진섭 전 동아일보 기자는 “55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끔찍했던 악몽 때문에 2월 16일만 되면 온 몸이 아파온다”고 회고했다(2013년 6월 25일 인터뷰).

 

동아일보 1958년 3월 9일자  3면, 귀환자들이 폭로하는 괴뢰의 흉계, 〃무엇보다 간첩없애야 초라한 평양시민·당원들만 비대〃, 시청앞서 귀환인사 보고 대회 성황

KNA여객기에 탓던 탑승인사들의 귀환을계기로 적색괴뢰들의 흉계와 만행이 속속 폭로 되고있는 가운데 팔일 상오 열시반에는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납북인사 귀환보고대회가 문총 주최로 개최되어 다시한번 괴뢰들의 내막이 폭로되었다
동「귀환보고대회」는 당초 이날 상오 구시 시내「시공관」에서 개최되었었으나 너무 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어 장내질서를 잡을 수 없어 서울시청앞 광장으로 개최장소를 옮겼던 것이다
약 삼만명가량의 청중이 모인가운데 시작된 이날 대회에는 먼저 경찰악대의 주악연주가 있었고 곧이어「문총」최고위원 문 교통부장관등 각계로부터「귀환인사」들에게 보내는「꽃다발」증정이 있었다
이날 동보고대회에 참석한「귀환인사」는 유봉순 의원을 비롯하여 김기완 공군대령 김진섭 이광순 윤종필 송순애 지룡인 씨등 칠명이 참석하였는데 이들의 보고 내용요지는 다음과같다 (괄호안은 보고제목)

▲김기완(金基完)대령(간첩은 살아있다)-우리가 납북된것도「간첩」들의 소행이려니와 지금 간첩들은「비행기납북」이상의 흉계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간첩들을 전국민이 협력하여 잡아없애야한다
▲김진섭(金鎭燮)씨(북한은 이렇다)-평양에 주로 있었는데 그곳 주민들의 생활은 참으로 초라했다 옷은 남루했고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를 안내해주던 소위 당(黨)간부들은 옷 입은 것도 괜찮았다
▲유봉순(兪鳳淳)씨(고행의 십팔일)-비행기에서 간첩들이 범행을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들은 극도로 자유를 제한받았다
같은「납북인사」들끼리의 대화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부녀자 등 몇명을 제외하고는 독방에 연금되었으며 가끔 영화관에 데리고 갔으나 이것은 모두 공산당을선전하는 영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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