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D-storyⅡ 141 :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별세

Posted by 신이 On 11월 - 27 - 2013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가 1955년 2월 18일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직책은 동아일보 고문이었다.

 

  “1955년 2월 18일에는 동아일보의 창립자요 여러차례 사장도 역임하였던 인촌 김성수선생이 병몰하였다. 해방전에는 교육, 산업, 언론으로써 민족해방투쟁에, 해방후에는 반공, 반독재의 민주수호투쟁에 일생을 바친 선생은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동아의 지면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동아일보 1955년 2월 20일자 1면

 

인촌 김성수 선생, 18일 하오5시 계동 자택서 서거

인촌 김성수선생은 18일 하오5시25분 계동자택에서 형년6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국가민족을 위하여 바친 고 인촌선생의 거룩한 생애-단기4224년9월9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 태생인 선생은 성년기에 달하면서부터 가혹무도한 왜제와의 투쟁속에서 민족정기의 진작 민족실력의 향상을 통한 조국광복을 도(圖)하는 숙명적인 민족의 지도자로서 일관하였다

단기4247년 도일일본 조도전대학에서 수학도중 일제의 마수는 드디어 조국을 병탄하고 말았으니 선생은 여기에 크게 느낀바있어 국가와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는 국민교육과 산업진흥 그리고 언론자유를 가져야함에 착안하여 수학을 마치고 귀국즉후 중앙중학을 인계 민족교육향상에의 첫발을 내딛게한후 4252년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창설하여 민족산업개발의 모범을보 였으며 익년 동아일보사를 창설하여 민족유일의 진정한 언론육성에 전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선생은 민족의 지도육성에는 구미선진국가시찰이 필요함을 느깐나머지 4262년 동여정에올라 3년후에 귀국 현고려대학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계하여 국민교육에 한층더 성심하다가 이땅에 해방이 찾아오자 한때는 미군고문회의장으로 피선되어 어려운세태를 바로잡기에 진력하였으며 익년 한국민주당위원장 동최고위원을 역임 4282년5월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정계는 날로 혼란을 극하여 국민을 위해서 그뜻을 실천하지 못함을 슬퍼히 생각한 남어지 익년 5월 동직을 깨끗히 사임한후 민주국민당고문으로 피선 진정한 정당육성의 지침이되어온바 그후 숙환인 혈전을얻어 병상생활을 계속하든중 18일 하오5시 아깝게도 그거룩한 생애를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고 인촌선생은 오직 국가의 통일과 민주건설을 위한 장래를 영면할 순간까지 걱정하였다 선생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인촌 김성수선생 약력
4224년 9월 9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 출생
4247년 일본 조도전대학 정경학부 졸업
4248년 중앙중학교를 인계경영
4252년 경성방직주식회사 창설
4253년 동아일보사 창설
4262년 구미시찰
4265년 현고려대학전신 보성전문학교 인계경영
4278년 미군정고문회의장 피선
4279년 1월 한국민주당 위원장 피선
4279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피선
4282년 2월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피선
4283년 5월 부통령 취임
4284년 5월 부통령 사임
4285년 11월 민주국민당 고문 피선
4288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별세

  

  논설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던 우승규는 김성수의 별세 소식에 “동아일보 사내(社內)는 깊은 슬픔에 잠겨 마치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회고했다.

 

  “내가 맨처음 논설위원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 이듬해의 일이었다。1954년 2월 18일。 갑자기 인촌 김성수 선생의 부보(訃報)가 날아들었다。그 소식을 전해들은 인촌 선생이 기세했다는 비보를 듣자 당시의 주필이었던 고재욱 전사장은 나더러 추도하는 사설을 쓰라고 지시했다。 처음엔 사양했으나 붓을 들었다。(중략) 나는 인촌 선생의 상중에 두 편의 사설을 썼다。먼저는「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서(長逝)」였고、다음엔「애도,、인촌 선생의 영결」이란 제목으로였다。나는 전후편에서 선생의 생전 인품과 업적 등을 들은대로 본대로 아는데까지 썼다。수(壽)를 누리기 65세。당시로선 오늘의 내나이 보다도 아홉해나 적은 연세였기에 단수(短壽)한 선생을 못내 애도한다고 전제했다。그러고나서 철두철미한 반일항공의 투쟁경력과 우국애족의 일관된 정신、따라서 일평생 멸사봉공하던 행적 등을 들었다。 한마디로 거족적 존경을 받는 참된 애국지사를 잃었다고 애닯은 뜻을 표했다。이러한 찬사가 과했었는진 모르나 설사 내가 다른 신문사에 있었더라도 논조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으리라。”(우승규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나절로만필-인촌 선생의 장서· 동아일보 1976년 2월 18일자 4면)

 

인촌 김성수선생의 장서(長逝) (동아일보 1955년 2월 20일자 1면 사설)

인촌 김성수선생은 숙환으로 와석 3년유여만에、약석의 효험을 보지못하고、드디어 지난18일 향년 65세를 일기로、많은 한을 이땅에 쏟아놓은채 별세하였다。 선생이 운명순간까지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심두에 근심하면서、참아 명목하지 못했을 그애끊는 정지(情地)를 생각할때、우리또한 슬픔이 없을수 없다。
누구나 다아는 바와같이、선생은 일찌기 일본으로부터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서、약관의 몸으로 중앙고보(현 중앙중·고등학교)를 설립했고、계속해서 다시 본보를 비롯하여、경성방직·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등을 창설 또는 인계·경영하면서、교육계·언론계·경제계로 다방면에 걸쳐、실로 범인이 따를수 없을만큼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렇듯 우리민족이 망국의한을 씻는 유일한 길은、인재의 양성과 자급경제의 확립에 있으며、또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면、언론기관이 절대필요하다는것을 간파한 선각자이었다。 그리하여『교육·경제·언론』3대무기를 가지고、선생은 항일의 홰ㅅ불을 높이들어 의연·과감하게 항일투쟁을 끈기차게 계속하였었다。

인촌선생이 그렇듯、안으로는 민족명일의 번영을 위하여 성열을 쏟는한편、밖으로는 암암리에 해외에있는 망명지사들과 기맥을 통하여、광복운동에 또한 단충을 기울였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8·15그날까지、일제총독부가 이나라에서 가장 미워하면서도、매우꺼리고 두려워하는 대상자의 한사람으로、커다란 살촉을 받는가운데서 살아온것이다。 이런점으로 볼때에、지금생각하면、선생이 일제의 독편에 그잔명을 보전하고 해방을 보게된것이、신명의 보우를 받은 하나의 기적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종전전까지 선생의 민족사업과、및 항일투쟁사의 편린(片麟)을 적은데 지나지 못하거니와、해방후에는 더욱 그울발(鬱發)한 애국심、도야된 인격、온축한 지능、웅위한 경륜을 한꺼번에 발휘되어、반공의 기치를 높이들고、한국민주당을 창립하는 한편、신탁통치·미소공동위원회·남북협상등 적색분자와 중간파들의 음모·흉계를 단연 물리치고、민족대의에 입각해서 강의하게 종시일관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반공투쟁사에 찬연한 족적을 남기었다。 그뿐아니라、좌·우합작을 꾀하는『하-지』군정에 대해서도、마찬가지로 그부당성을 지적하면서、『피』의 갈항을 하였다。

그런데 고 성재 이시영옹이 부통령을 사퇴한뒤、국회의 결의로써 제2대 부통령으로 추대를 받았으나、선생은 자신이 적임아니라는것과、또 그시기가 못된다는점을 들어、재삼고사했으나、당시국회의 절체한 요망을 물리치지 못하고 마침내 수락했었다。 그러나 재임1년동안、선생은 난마같은 정치현실에 어찌할수없으매、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국민앞에 그비위를 규탄하면서、거연히 물러나고 만것은、선생의 애국·개세하는 울분이 그얼마나 정점에 이르렸던가를 말하는것이다。
그때를 전후하여、선생은 불행하게도 불치의 병환에 걸리어、이미 병석에 누워버렸으나、선생의 일편애국단충은 언제나 마음가운데서 순시도 떠나지않고、국토통일과 민족의 부활을 위해서 전전반측하였다。 선생이 장병신음3년동안、더우기 손세찰나전까지도 터럭만치나마 사생활이나、유가족에 대한 후려와 및 그유언이라곤  일언·반사도 없었으니、그것은 묻지않아도、선생이、그마음속에 그득히 차고쌓인、국가백년주책과 민족천년계륜을 펴지 못했기 때문에、염불급타했었음이리라。

우리는 사적으로본 개인인촌선생이 돌아간것을 비창하다는것 보다도、공적으로본 국사 김성수선생을 잃은 분통이 더욱 큰것이다。선생이 이땅에끼친 커다란업적과、이겨레에게 남긴수많은 공로는 영원히 청사에 빛날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대할수없는 선생의 면영이 무척 그립기도 하려니와、그보다도 앞으론 다시 찾을수없는 선생의 우국·애족의 그단성이 더욱더 보고싶다。 선생이 생전에 터전 닦아놓은모든 사업은、길이 이나라에서 이겨레에게 그 그윽한 향기를 풍기려니와、좀더 연수를 하여 보다더 금상·첨화적인 업적을 남꼈더라면、그얼마나 국가의 다행이며 민족의 복리이었을것인가。
그렇지만 선생은 그정명이 그것뿐이었는지 이미 타계로 왕생하였으니、울고슬퍼한들 무엇하랴。 오직 우리는 선생의 남긴뜻을 받들어、나라를 사랑하는 법도와、겨레를 애끼는 도리를 배우는것으로써、우리의한계잠을 삼으면、그것이 선생을 애도하는 본뜻이된다 할것이다。

 

 애도 인촌 선생의 영결 (동아일보 1955년 2월 24일자 1면 사설)

오늘 1955년 2월 24일로서 인촌 김성수 선생의 유해는 전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이 세상을 마지막 하직하신다. 선생의 부보(訃報)가 한번 전해지자 조야(朝野)와 당파를 가릴 것 없이 통석(痛惜)함을 말지 않으면서 선생의 위덕(偉德)과 거업(巨業)을 추모하는 찬사가 연연하게 끊이지를 않는다. 그것이 곧 ‘국민장’이란 성의로 나타나서 선생에게 서후(逝後)나마 가장 큰 광영을 갖게 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뜨거운 감루(感淚)가 어린다.
선생이 재세(在世)시에 65평생을 ‘나라’와 ‘겨레’밖에는 그 마음속에‘사념(私念)’이나 ‘아욕(我慾)’이란 터럭만치도 없이 담담 결결하게 살아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생의 가지가지의 찬연한 업적이 말하는 것이니 선생 일개인으로서는 그만하면 할 일을 다 했다 할런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통(至痛) 지한(至恨)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생이 좀더 연수(延壽)를 했었더라면 국리(國利)로 보아서나 또는 민복(民福)을 위해서나 얼마나 이바지하는 바가 더욱 컸을 것인가’하는 것이다. 선생의 향수(享壽)가 65라면 인생으로서 결코 단수(短壽)라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그러나 민족의 여망을 받는 선생의 경우에서 볼 때엔 보다 더 오래 생존했어야만 되었을 일이다.

그것은 선생이 평일에 포회(抱懷)하였던 그 구구절절한 우국심과 및 그 연연필필(戀戀泌泌)한 애족심의 폭원(幅圓)을 따질 양이면 묘망한 해·양과도 같이 광대할 것인데 그 대지(大志)를 품은 대로 다 펴지 못한 채 영면했으니 우리가 연년익수(延年益壽) 못한 것을 못내 구슬퍼하는 까닭은 실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선생에겐 이미 정명(定命)이 그것뿐이었음인지 이젠 유명(幽明)의 길로 갈리어 타계의 몸이 되었으니 여기서 아무리 애달파하면 무엇할 것이냐.
강의(强毅) 영발(英拔)하고 원대 심오한 지개(志槪)가 모든 사업을 만년반석 위에 올려놓게 한 기틀이 된 것이지만 그보다 그다지도 국민 전반의 추앙과 회모(回慕)를 받게 된 주요 이유는 선생의 중후공겸(重厚恭謙)하고 관인현자(寬仁賢慈)한 그 덕성에서 언제나 ‘공(公)’을 먼저 하고 ‘사(私)’를 뒤로 하는 ‘성근(誠勤)하고 충실한 동포에의 봉사심’으로 그 파란 많은 일생을 바쳤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선생은 ‘공(公)’을 빙자(憑藉)하면서 ‘사(私)’를 영위하는 위선 사업가나 가면 정상배의 그러한 불순성은 호말(毫末)도 없고 범백사(凡百事)에 있어 오로지 애국 애족의 봉공열(奉公熱)로 시종일여(始終一如)하였다.

이대통령도 “…우리나라의 중망을 지닌 지도자 한 분을 잃어서 민중과 정부가 다같이 애통한다…왜정 밑에서 압박이 극심했을 때에 이 분이 전 재산을 기울여서 교육사업을 시작했으며 일면으로는 신문을 내어서 일정에 반대해 왔으니 이것만으로도 그분이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인정치 않을 수 없다…”는 요지의 추도담화를 발표하였거니와 그렇듯 비범 특출한 영도자의 한 분을 상실한 우리는 마음이 아프도록 비감이 북 바치고 뼈가 저리도록 애상(哀想)이 치밀어 오름을 견딜 수 없다.
더욱이 오늘을 최후로 영결종천(永訣終天)하는 날을 맞게 되매 우리의 구비치는 슬픔이 한층 더하여 한숨 속에 또 한숨이 쌓이고 눈물 속에 또 눈물이 고여 참으로 처창하기에 이를 데 없다.

사람이 ‘생의 진의’를 찾는다면 대내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거나 대외적으로는 세계와 인류를 위해서 많던 적던 창조적인 공헌을 하는 데서만 그 보람이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도표일진대 인촌 김성수 선생이야말로 전자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의 가장 표본적인 거인이 아닐 것인가.
또한 우리가 선생의 영면을 남달리 비통호곡(悲痛呼哭)하면서 ‘국민장’으로 받들어 모시는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누구나 다 아는 바처럼 선생은 일정말기에 소위 총독부당국자들이 혹은 감언이설로, 또 혹은 위협공갈로써 끊임없이 유혹 또는 강압을 했으나 금석(金石)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그 지조와 절의를 사수(死守)하면서 끝끝내 민족혼을 추호도 더럽히지 않고 또 애국심을 미진(微塵) 만치도 깎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순결 담백’그대로 고이고이 간직했다가 해방이 되자 이 나라 이 겨레 앞에 풀어 헤쳐 내놓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또한 선생의 고매한 인격을 우러러 흠앙하면서 다시금 추념 애곡(哀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다시 뵈려야 뵈올 수 없는 선생의 ‘자성(慈性)과 위덕(偉德)’이 안타깝게도 다시금 그리워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운명인 데야 어찌하랴.
오직 우리는 선생이 영결하시는 이 날을 당하여 경건한 묵념을 못내 올리면서 선생의 명복을 길이길이 빌려 한다.
그리고 선생은 희게 태어나서 희게 살다가 희게 돌아갔으니 명계(冥界)에서도 또한 그 깨끗한 영혼이 희게 영생할 것으로 믿는다.

 

 

 

3 Comments »

  1. 친일파로 다 알고 있는데… 동아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건가?

    Comment by 친일파 — 2014/12/19 @ 1:59 오후

  2.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김성수 선생을 수록했고 정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같은해 그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반민특위가 일제시기 반민족행위와 관련해 문제 삼은 대상자에 김성수 선생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2002년 항일독립운동원로들의 모임인 광복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김성수 선생의 이름은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친일파 청산’이 사회적 아젠다가 된 것은 김대중 정권 시절인 지난 2002년 2월, 김희선 당시 민주당 의원이 대표로 있던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며 708명의 명단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이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김희선 의원이 발의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2004년 5월 국회를 통과했고, 2005년 5월 이 법에 따라 ‘친일규명위’가 출범했다.” (박효종, [논단] ‘친일’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시대정신’ 2010년 봄호)

    김성수 선생의 친일논란은 그의 사후 수십년이 경과하고서부터입니다. 새로 친일의 증거가 발견된 것도 아닙니다. 김성수 선생이 학병지원을 독려했다는 주장의 자료는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날조한 기사들이고, 친일단체의 간부를 역임했다는 자료는 일제가 제멋대로 이름을 도용한 결과입니다.

    “D-storyⅡ 141: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별세”는 1955년 2월 18일 김성수 선생이 타계했을 때 동아일보 지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김성수 선생의 장례는 2월 24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치뤄졌는데,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은 다음과 같은 조사를 했습니다.

    “고 인촌 김선생의 국민장 의식을 거행함에 임하여 대법원장 김병로는 사법부를 대표하여 삼가 조사를 드리나이다.… 왜정의 혹심한 간섭과 폭압을 받을 때마다 비분과 번뇌를 가인하기 어려운 시기였던 실정을 회상하면 선생의 애국애족의 정열과 기개는 태양과 같은 천부를 가진 선각자이며 지도자이심을 소연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이면에 있어서 해내, 해외 애국지사들과 항상 통신연락을 기도하여 3·1운동을 비롯한 모든 항일운동에 있어서는 선생의 참협과 원조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

    사법부를 대표해 현직 대법원장이 “누구나 다 아는 바”라고 국민들에게 공언했던 이 사실이 바로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동네역사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by 신이 — 2015/01/08 @ 4:05 오후

  3. Depression…

    D-storyⅡ 141 :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별세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트랙백 by Depression — 2015/04/02 @ 11:11 오후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