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5월 20일 민의원 의원선거가 실시됐다. 건국 후 세번째 총선거였고 처음으로 정당공천제가 실시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 정치파동을 전후로 정당 기반 없는 현실정치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자유당을 조직했다. 이 대통령은 개헌과 재선을 거친 뒤 숙당작업에 들어가 1953년 12월에는 이범석 진헌식 안호상 이재형 양우정 신태악 윤재욱 등 족청계를 추방하고 여운홍 이석기 박제환 등을 제명했다.
야당세력의 주축인 민주국민당은 1953년 10월 12일 전당대회에서 구한국민주당계인 김성수 백남훈 조병옥 서상일 등은 고문으로 후퇴하고 신익희계가 당권을 장악했다.
선거 결과 자유당 114석, 민국당 15석, 대한국민당 3석, 국민회 3석, 제헌동지회 1석, 무소속 67석이었다. 여당은 농촌지역에서 압승한 반면 야당은 대도시의 지식층과 중산층의 지지를 얻었다.
자유당은 개헌선에 미치지 못하자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여 6월 15일 교섭단체 등록시 개헌선인 136석을 확보했고 민국당은 정족수 미달로 교섭단체등록을 하지 못했다.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양원제를 갖게됐으나 민의원의원만을 뽑아 의회제는 여전 절름발이. 54년 5월 20일 건국 후 세번째인 총선거에서 이 박사의 자유당은 처음으로 당공천자를 내세워 온갖 관권과 금력을 동원, 압승을 거두었다. 누대에 걸쳐 고질화된 선거병폐는 깊어지기 시작했다. 자유당 114, 민주당 15, 무소속 68의 세력분포를 보이고 있다.” (동아의 지면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민주주의척도를 측정
‥‥금일총선거투표일‥‥
민주대한의 국운을 좌우할 역사적인 총선거투표일자는 드디어 오늘로 박두하여 전국 8백만유권자들은 오늘아침 7시부터 하오5시까지 사이에 우리가 요망하는 우리의 대변자를 절대비밀리에 투표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 우리의 민주의가 어느정도 진전되었는가를 세계자유진영에 시현하여야할 중요시기일뿐아니라 국내적으로 동란이래 혼선을 걷고있는 정치의 쇄신에있어 그모체가될 민주의회를 구성하는 우리의 주권행사에있어 전국유권자들은 우리의 한표가 직접 국운의 융체를 좌우하고 보다더 우리의 4년간 생활을 좌우하게 된다는 중대한 의의를 재삼 명심하여 모든 위협과 모략 정실과 금권력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자유로운 심경에서 공명하게 투표하여야할것이 요청된다 더욱이 전례에 의하여 이번에도 없지않으리라고 예상되는 투표직전에 횡행되는『모후보는 어제밤 피(被)체 어제밤 사망 오늘아침 포기…』운운의 허위모략선전에는 일체 귀를 기우리지 않아야할것은물론 우리가 행사하는 투표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절대적인 비밀이라는것을 다시 상기하여 공인후보로 투표안하면 구인조(九人組)에서 연대책임을 진다는 등등의 간계에 추호도 동요됨이 없어야 할것이다 앞으로 4년간 이나라정치를 설계하게될 민주의회의 이백삼대변자를 선정하는 책임을 지고있는 유권자들이 일거일동은 바로이날 결정지어질 이나라 정국의 운명과 아울러 내외의 중대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것을 다시금 감명하여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