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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31 : 창경호 침몰

Posted by 신이 On 11월 - 26 - 2013

 노후 여객선 창경호(昌景號)가 1953년 1월 9일 밤 10시 20분 침몰했다. 여수와 부산을 오가는 이 여객선은 화물을 지나치게 많이 싣고 있었는데 다대포 앞바다의 풍랑에 침몰하는 바람에 승객 360명이 수장(水葬)됐다.

 

“한겨울의 한파를 헤치고 살아난 사람은 겨우 7명, 우리나라 초유의 해상참극이었다. 국회특별조사단이 파견되는 등 여론이 물끓듯 했지만 김석관 교통부장관의 사임으로 정치적 단락(段落)을 보았다.” (동아의 지면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당시 국도신문 주필이었던 우승규는 여러번 이 문제를 논설로 다뤘다고 한다.

 

“첫째는 선주의 책임을 강경하게 묻고、둘째는 교통부 장관의 기자회견의 담화를 논박 질책했고、세째론 사직 당국의 엄단을 촉구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했건만 뒤끝은 바랐던대로 안되고 흐리멍덩하게 매듭짓고 말았다。김 교통은 이박사의 가장 신임받던 한사람이었다。그러기에 단명으로 일관한 각부 장관가운데서 2년간이나 그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던가。그러한 그가 족벌본위(族閥本位)로 무책임하게 입을 놀려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나 국민의 격분을 샀다는것은、그것도 이 대통령의 인사행정이 그릇됐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실례의 하나다。” (우승규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나절로만필-창경호의 대참극· 동아일보 1975년 11월 27일자 5면)

 

동아일보 1953년 1월 11일자 2면

 

다대포에 대해상 참사
여수↔부산간 여객선『창경호(昌景號)』침몰
이백수십명 승객익사
9일 하오 11시 마(魔)의 해파습내(海波襲來)로
생환자 불과7명
구조작업도 수포、5개의 시체인양

정원초과로 침몰되어 백수십명의 인명을 생케한『초춘호(春號) 및 편리호(便利號)』사건 등이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거니와 연달아 발생하는 해상사고방지책이 한층더 요성되고있는 이때 이번에는 1백5십톤급 대형강철(鋼鐵)정기여객선이 침몰되어 약 2백5십명의 인명을 일시에 바다에 몰아넣은 희유의 대참사가 다대포(多大浦) 압해상에서 발생하였다
즉 부산 – 여수간에 취항하고 있는 대동상선(大東商船)회사(사장 조규환)소속 정기여객선 창경호(146톤)(선장 하량모 기관장 유명만)는 2백수십명의 여객(정원2백4십3명)과 양곡 4백5십가마 등 다량의하물을 심고 지난 9일 하오 2시 여수항을 출발 동7시경 통영항을 경유 부산항을 향하여 『시속』10마일로 운항중『낙동강』하류를 지나 동 10시 40분경 다대포앞해상『거북섬』으로부터 2백메-터 떠러진지점(부산서남방사리지점)에 이르렀을때 돌연 선체는 급좌경(急左傾)됨과 함께 침수하기 시작하여 이삼분도 못지나 침몰되고 말았다 한다

그런데 선장 하량모(46)씨외 3명의 선원과 단 3명의 승객만이 생환(生還)하였을뿐 2백수십명의 여객과 14명의 선원은 선체(船體)와 함께 익사(溺死)하였다 한다 침몰원인은 생환한 선장 하씨의 진술에 의하면 심한파도(세칭『요꼬나미』)로 침몰된것이라 하나 일부 선박전문가측에서는 1백5십톤급 강철선박이 그정도의 파도에 침몰한다는것은 전례없는 일이며 있을리 만무한 일이라고 보고도 있다 이급보에 접한 교통부와 수상경찰서에는 7척의 구조선과 2대의 구조용차량을 급파하여 어제 십일 새벽부터 구조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선박침몰 위치를 발견치 못함으로 인하여 동 12시경에야 그현장를 확인하였는데 구조사업이 용의치 아니함에 교통부에서는 해군당국에 협조를 요청하는한편 부산해사국에 구조본부를 두고 구조작업을 진행중에 있는바 현재 5개의 시체만이 인양되었다 한다

생환자명부
1、하량모(46)선장
2、유정식(35)동선갑판장 3、김영도(男)갑판원 4、이기백(27)갑판원 5、조상진(18)男 부산시 남부민동 67번지 부산상업학교 이학연 6、이길록(29)서울사범학교생도 7、김일권 공군80항공대 이등중사

 

13시간만에 현장확인, 갈매기만이 떠도는 눈물의 바다, 마의 침몰지점

전기대참사의 급보를 받은 교통부에서는 작 십일이른 아침부터 김교통장관을 비롯한 김 부산해사국장등 관계직원이 급거 침몰현장으로 추척되는 다대포방면으로 출동하여 현장조사에 노력하였으나 간밤의 일대불상사를 화ㄱ인할 아무런증거를 찾아볼수없이 그대로 부산해사국 구조본부로 귀환하였다
□□□편 동일전기 창경호의 조난을 뒤쫓아오면서 목격한 조선기선회사 소속 장구호의 첫보고로 이사실을 입수한 경남경찰국에서는 즉시 부산근해의 선박을 동원코 구조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어두운밤과 자취조차 감추어버린 선체의 발견을 못하고 침몰현장조차 작10일 상오 11시 현재까지 판명되지않고 있었는데 뒤이어 박 경남경찰국장이 직접지휘하는 수사선에 의하여 작일 상오 12시경 비로소 전기침몰현장이 발견되었는데 수사선이 현장에 도착한때에는 귀중한 인명 2백수십명을 감쪼ㄱ같이 삼켜버린 해상사상 초유의 일대불상사를 상기케할 아무런 흔적조차없이 햇빛에 빤짝이는 기름만이 잔잔한 바다위를 감돌고 있었으며 수중의 고혼을 위무하는듯 몇마리의 갈매기가 푸른물결위를 스쳐가고 있었다

 

대성통곡하는 유가족, 비보듣고 운집한 부산부두광경

창경호침몰의 비보를 들은 부산시내에 있는 승객의 가족들은 이른아침부터 부산부두에 운집하여 그가족돌의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돌어오는 소식마다 전원사망이라는 슬픈소식뿐 구조선에 의하여 작일 12시경 비로소 인양된 5개의 시체가 부두에 닫자 가슴조리던 가족들은 대성통곡하며 익사된 회생자의 이름을 소리소리부르는등 번잡한 부두는 통곡의 울음소리로 뒤덮이고 있다

 

인양작업은 2、3일후, 수심20『메-터』、선체위치확인

한편 『해군구조대』『해양구조대』에서는 어제 십일 하오3시 각각 구조선을 파견하고 구조작업에 착수하였다는데 동5시에야 선박의 침몰위치를 완전학인하였는바 그위치의 수심(水深)은 2십메-타라고 한다 해사당국자의 말에의하면 수심 이십메-타까지는 잠수부(잠水夫)의 화ㄹ동이 가능하다고하며 십일 십이 양일간은 주로 배수(배水)착업등 노양기초착업을 하고『노양선』사정도 있어 2、3일후에야 본격적인 노양이개시될것이며 완전노양에는 적어도 1주일을 요할것이라 한다

 

피해자 처리문제, 관계당국서 협의, 김교통장관 담

교통부장관 김석관씨는 십일 하오 3시 왕방한 기자에게 어제 3시부터 부산해사국에서 사회부경찰교통부 3당국에서 피해자의 시체처리 및 구조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고 말하는 한편 이번 창경호사건은 해운당국에는 실책이 없고 천재지사고이기 때문에 교통부로서는 그유가족에게 위자료를 지불치 안을것이며 선주(船主)로 하여금 위자료 및 장의비를 지불토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선장등 구속문초

수상경찰서에서는 10일 생환한 하량모 선장외 3명의 선원을 구속 엄중문초중에 있다

 

순간적으로 발생, 생환자학생 조군의 담

승객대부분이 익사한 불상사 가운데에서 구사일생으로 그생명을 잃지않고 생환한 부산상업학교 2학년생 조상진군은 전기선박소속회사인 대동상선회사에 찾아와 사고발생당시의 광경을 극히 단편적으로 다음과같이 전하였다
돌연『탁-』하는 소리와 함께 그소리를 도리켜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선체는 급속도로 경사하기 시작하기에 나는 덮어놓고 바다로 뛰어들어 해염치기 시작하였읍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나자신으로서도 도무지 기억이 아니납니다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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