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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27 : 김성수 부통령 취임과 사임(2)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3

  김성수는 1952년 5월 병석에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김성수의 측근 유진오의 말대로 김성수가 병석에 누운 것은 “헌정파괴 행위가 집권자 자신에 의하여 자행되는 것을 그대로 넘길 수 없어 국무회의에서 고군분투하다 과로와 충격으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1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으로 대한민국이 부산 앞바다로 몰려들어가는 위기는 면하였지만, 전국(戰局)은 치열한데 국정은 난맥을 극해서 국민방위군사건이네 거창사건이네 하는 상식을 초월한 해괴한 범행이 이대통령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나중에는 이박사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헌법개정안을 제출하였다가 그것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또다시 같은 개헌안을 제출해놓고 그 강행 통과를 위하여 낙동강 전선에서 공산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국군의 사단 병력을 부산으로 불러들여 계엄령을 펴려는 반역적 계획이 진행되고 드디어는 국회의원을 무더기로 버스로 실어다가 감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진오, ‘인촌 김성수론’, 미래로 향한 창, 일조각, 1978)

 

  김성수 부통령의 사임서는 신도성이 기초했다. 신도성은 “그것은 단순한 사임서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역사적 고발장이며, 당연한 결과로서 그것은 심히 장문(長文)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2

 

  “나는 밤을 새워가며 초안을 만들고, 몇 번이나 인촌선생에게 읽어드려서 필요한 수정을 가하곤 하여, 이튿날 아침까지에 겨우 긴 두루마리에 정서(淨書)를 마쳐서 국회로 보냈다. 당시 헌법에 의해 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였으므로, 그 사임도 국회에서 수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신도성, 정가의 낙수, 관동출판사, 1977년)

 

  김성수 부통령의 사표는 5월 29일 장문의 사임서와 함께 국회에 제출됐다. 3

 

  “만약 그에게 일편(一片)의 애국심이 있다면 지금이 어떠한 시기이며 우리가 처하고 있는 환경이 어떠한 것이길래 국가의 비운과 민생의 고난도 모르는 척 일신의 영욕(榮辱)을 위하여 어찌 이다지도 난맥(亂脈)의 행동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서 나는 이 이상 단 하루도 이승만 정부에 머물러 있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의 지위가 비록 시위소찬(尸位素餐)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번도 현 정부의 악정(惡政)에 가담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의 변변치 않은 이름을 이 정부에 연(連)하는 것만으로 그것은 내 성명 3자를 더럽히는 것이며 민족 만대에 작죄(作罪)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에 사표를 국회에 제출하며 나를 선거해준 의원 동지 여러분과 국민의 앞에 내가 오늘까지 무위하게 국록을 받았음을 깊이 사(謝)할 따름입니다.
원컨대 앞으로 국가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는 일개 평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전제 군주적  독재정치화의 위협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전 자유세계의 동정과 원조를 획득하여 항구적인 자유와 평화와 복락을 이 나라, 이 겨레에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 대중과 함께 결사 분투할 것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부통령 사임서·1952년 5월 29일)

 

국회는 다음날인 5월 30일 김성수의 사표를 수리했다. 4

 

동아일보 1952년 5월 30일자 1면

 

 동아일보 1952년 5월 30일자 1면

김부통령 사표제출
수리여부는 금일 회의서 결정
김성수부통령은 29일 하오 5시반 국회예 장문의 사임서와 함께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번 김부통령의 사표수리여부에 관하여는 금30일 회의에서 결정될 것이다

 

 

  

Notes:

  1. 유진오, ‘인촌 김성수론’, 미래로 향한 창, 일조각, 1978, 283~286쪽.

    피난지 부산에서 인촌이 부통령에 선출되었을 때의 일이다. 진해에 있던 인촌이 부산으로 돌아오던 이튿날 나를 부르기에 갔더니 인촌은 마침 면도를 하면서 몇가지 일을 나에게 물었다. 우선 표결권 없는 부통령이 국무회의에 참석할 것인가의 여부를 나에게 물었다.
    “참석하여야합니다.”
    나는 즉석에서 대답하였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선례도 있을 뿐 아니라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시에 그를 대행하고 대통령이 궐위가 되면 그를 계승하여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 노릇을 하여야하는 사람이므로 언제나 국정의 돌아가는 형편을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하는 까닭에 반드시 국무회의에 출석하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 또 비록 표결권은 없어도 부통령은 국무총리나 여타 국무위원 보다 정치적 비중이 무거운 까닭에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때때로 발언함으로써 국정에 영향을 주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인촌은 하나하나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끝에 가서 내가
    “선생님도 요다음에는 대통령을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남이 대통령 노릇하는 모습도 보아 두셔야지요”
    하고 말했을 때 인촌은 갑자기 면도하던 얼굴을 홱 돌리면서
    “여보 그런 소리 마시오! 그런-”
    하고 내 말을 막았다. 마치 내가 역적 모의라도 하는 것 같이 느낀 표정이었다.
    나는 아첨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이박사가 행정을 몰라 너무나 자주 실수를 거듭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 부흥과 건설 단계로 들어가면 인촌 같은 경세의 수완을 가진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촌의 반응은 그러나 달랐다.

    이박사가 대통령으로 버젓이 있는데 차기 대통령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박사에 대한 불충으로 느끼던 인촌이다. 그 인촌이 대통령 이승만을 밀어 제치고 자기가 국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쨋든 그 인촌은 초대 국무총리 지명에 이박사에 의해 기피되었던 것이다.
    인촌에게 국무회의에 매번 참석할 것을 역권(力勸)한 나의 진언이 잘한 일이었는지 잘못한 일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부통령으로서 인촌이 직면한 정치현실은 그의 경세적 애국심을 펼 수 있는 그러한 국면은 아니었다.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으로 대한민국이 부산 앞바다로 몰려들어가는 위기는 면하였지만, 전국(戰局)은 치열한데 국정은 난맥을 극해서 국민방위군사건이네 거창사건이네 하는 상식을 초월한 해괴한 범행이 이대통령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나중에는 이박사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헌법개정안을 제출하였다가 그것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또다시 같은 개헌안을 제출해놓고 그 강행 통과를 위하여 낙동강 전선에서 공산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국군의 사단 병력을 부산으로 불러들여 계엄령을 펴려는 반역적 계획이 진행되고 드디어는 국회의원을 무더기로 버스로 실어다가 감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헌정파괴 행위가 집권자 자신에 의하여 자행되는 것을 그대로 넘길 수 없어 국무회의에서 고군분투하던 인촌은 과로와 충격으로 병석에 쓰러졌는데, 사태가 이에 이르자 1952년 6월 그는 격렬한 내용의 탄핵서를 이대통령 앞으로 보내고 결연히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2. 신도성, 정가의 낙수, 관동출판사, 1977년, 49~51쪽

    다음날 인촌선생은 나를 병석에 불러서 부통령직을 사임할 뜻을 말씀하고, 그「사임서」의 기초를 명하였던 것이다.
    인촌선생이 장시간에 걸쳐 나에게 설명한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李박사를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으로 믿고 그를 지지해 왔으며, 8.15 이래 그를 구내에 모셔다가 영도자로 받들고 대통령에 취임토록 하는 데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일단 정권을 장악한 후부터 거의 행동은 독선과 고집으로 일관하여 국정을 난맥상태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미증유의 국난에 처한 지금, 오히려 그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평온한 부산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현직 국회의원을 대량 체포하는 위헌. 불법을 저지르고 있으니, 이 사태를 도저히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그런데 현정세하에서 국민 중의 누구도 이박사와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할 형편이 안 되므로 내가 부통령직을 사퇴함으로써 항의의 표시로 삼는 동시에, 그 사임서 속에 李박사의 비정과 불의를 낱낱이 폭로하면, 적어도 국회의원들만이라도 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게 될 인촌선생의 부통령 사임서는 작성되기에 이르렀는데, 경위로 보아 그것은 단순한 사임서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역사적 고발장이며, 당연한 결과로서 그것은 심히 장문(長文)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밤을 새워가며 초안을 만들고, 몇 번이나 인촌선생에게 읽어드려서 필요한 수정을 가하곤 하여, 이튿날 아침까지에 겨우 긴 두루마리에 정서(淨書)를 마쳐서 국회로 보냈다. 당시 헌법에 의해 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였으므로, 그 사임도 국회에서 수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오전 열시가 조금 지나 신익희 국회의장의 사회로 개의된 국회 본회의에서(당시 국회 의사당은 역시 경남도청 구내에 있던「무덕전(武德殿)」이었다) 부통령의 사임서가 상정되어 의사국장이 전문을 낭독하자 만장이 숙연하였으며, 약간의 토의 끝에 그 수리를 보류할 것으로 의결이 되었다. 나는 부통령 관저에서 연방 그 상황을 전화로 보고 받고 있었는데, 의안 처리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나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부터 나는 꼼짝 못하고 관저에 머물게 되었으니, 당시 부통령 관저는 대통령 관저인 임시「경무대」와 인접한 도청 뒤 관사였으며, 20여명의 부통령 경비대가 경호하고 있었으므로, 당국에서도 차마 거기까지 침입해서 나를 잡아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계엄하의 사전 검열 때문에 당시 국내에서는 일체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뉴요크 타임스를 비롯한 외국 신문에는「한국의 부통령이 길이 15피트의 사직서 제출」이라는 표제로 자세히 보도되었다.

  3. 부통령 사임서(1952년 5월 29일)

    경애하는 의장 및 의원 여러분!
    작년 5월 국회에서 불초(不肖)한 나를 부통령으로 선거하였을 때 처음 나는 그것을 수락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현 정부의 일원이 되어 무슨 유익한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현 정부의 수반인 이 박사는 충언과 직언을 염악(厭惡)하고 아첨만을 환영하며 그의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된 중에도, 자기의 하료(下僚)조차 항상 시기의 눈으로 보아 모든 국사를 그 자신이 일일이 직결하려 하고, 자신이 임명한 장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의 심복인(心腹人)을 차관에 배치하고, 차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심복인을 국장에 임명하는 것과 같은 수단으로써 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과거에 대한민국 정부는 거족적인 열망과 민주우방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직껏 아무런 건설적인 시정을 한 일이 없이 민생을 도탄에 몰아넣었고 더욱 사변 발발 직전에는 국민을 기만하여 적의 마수 하에 남겨둔 채 무질서한 도주를 감행하여 저 무수한 애국자를 희생시킨 천추의 통한사를 저질러 놓고도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국민의 앞에 사과하는 자가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마치 구국의 영웅이나 된 양으로 권력을 남용하여 민주국가에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중대한 인권유린을 감행하였으며 또 국가동량의 재(材)가 될 다수의 귀중한 자질(子姪)들을 소위 국민방위군이라는 명목 하에 기한(飢寒)에 병들게 하고 참혹하게 폐사(斃死)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무능과 부패는 이미 고맹(膏盲)에 사무치었으며 그것은 나의 전임자이신 성제 이시영 선생의 고덕과 지성으로써도 만회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 자리에 앉아본 들 이것을 광구(匡救)할 아무런 자신도 성산(成算)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것은 내 일신에 불명예로운 오점을 가져올 뿐이리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예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부통령 취임을 굳이 사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교섭하러 온 국회의 대표 제위는 나의 이 뜻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나의 사퇴로 말미암아 부통령 선거를 재차 행하게 된다면 혼란한 정국을 일층 혼란하게 할 따름이라고 하여 심지어는 국민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선임한 것을 거부함은 곧 민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여 강권하므로 부득이한 사세(事勢)를 이기지 못하여 장시간의 논의의 끝에 공의를 위하여 사아(私我)를 굽히고 결국 이것을 수락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나는 도로(徒勞)에 끝날 줄 알면서도 다소라도 국정을 바로 잡아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여 보려고 국무회의에 나가게 되었고 내가 참석한 최초의 국무회의 석상에서 나는 일정한 소관사항을 가지지 않은 자유로운 입장에 있어 국민의 질고성(疾苦聲)을 비교적 용이하게 들을 수 있으므로 장차 이와 같은 민정(民情)과 민의를 국정에 반영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을 나의 직분으로 삼겠노라고 선언하여 나의 결의를 표명하였으며 그 후 실지로 그렇게 행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여 내가 국무회의에 참여하자 직시(直時) 봉착한 문제는 전 국방부장관 신성모의 주일대사 임명문제이었습니다.
    천하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성모는 가장 비민주적인 권모와 술수로써 국정을 혼탁케 하여 온 장본인으로 서울 철수 시에는 애국시민을 적의 호구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한강을 건너려는 자를 총검으로 방해하였으며 군용금을 횡령하여 사적 정치자금으로 유용하는 등 그가 국가민족에 끼친 해독은 실로 죄당만사(罪當萬死)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하거늘 그에게 징벌을 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외교의 요직에 등용하여 국가를 대표하게 한다는 것은 민족의 정기를 살리기 위하여서나 정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하여서나 또는 대외적인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나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의 부당성을 고창하고 그 임명을 철회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끝내 고집하여 결국 신성모를 일본에 파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나는 국운의 기울어져 감을 목전에 보고 일제 이래 수 십 년간 흉중에 울적(鬱積)된 심화(心火)가 일시에 충천하여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나는 몇 번이나 사표를 제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의 주위에서는 국사(國事)가 어지러움은 아무 권한도 갖지 못한 부통령의 소치가 아닐 뿐 아니라 남은 임기도 머지 아니한 지금 새삼스러이 사직을 함은 도리어 평지에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허물을 입게 된다고 하여 만류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금일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후인들 우리나라의 정세는 어찌 나로 하여금 병석에 안와(安臥)할 수 있게 하였으리요.
    정부에서는 여전히 위헌, 위법 부당의 처사를 거듭할 뿐 아니라 소위 신당운동을 일으키어 우리나라의 애국적인 민주주의 세력을 분열 약화시키기에 갖은 책략을 다하였고 이 박사는 그 자신이 과거 4년간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왔으므로 모든 실정의 책임은 마땅히 그 자신이 져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을 남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의 대통령 재선을 꾀하고 국회를 무력화할 노골적인 의도 하에 소위 대통령 직선제 및 양원제 개헌안을 제출하였습니다.

    국회에서는 이것을 143표 대 19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폐기하고 반대로 우리나라에 진실로 민주주의적인 책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국무원 책임제 개헌안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개헌 문제에 관해서는 나는 평소부터 국무원 책임제만이 우리나라의 국정(國情)에 적합한 제도라고 믿어 왔으나 최근의 사태는 나의 이 확신을 더욱 굳게 하였습니다. 내가 부통령에 취임한 후 ‘각하’라는 칭호를 폐지하기로 국무회의에서 정식 결정되어 널리 공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구두 혹은 서신으로 ‘각하’를 붙이는 자가 뒤를 끊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극단한 예로는 ‘부통령 폐하’라는 존칭을 써서 나에게 송한(送翰)해 온 자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 웃지 못 할 사실에 접하고 나는 우리 국민을 급속히 민주화하기 위하여서는 한 사람이 거의 황제에 가까운 강대한 권한을 쥐고 있는 현행 대통령제를 개변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는 것을 통감하였던 것입니다.
    영국과 같이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에 있어서도 정부의 독재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책임내각제를 채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야당의 수령에게 국무총리와 동일한 대우를 주고 또 그만큼 야당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와 같이 민도가 낮고 권력의 발호가 자심한 곳에 있어서랴-.

    우리는 이미 대통령제의 산고(酸苦)를 충분히 체험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번의 보결선거와 지방선거에 나타난 관권의 압박을 볼 때 우리나라에 있어서 대통령 직접선거라는 것은 곧 현 집권자의 재선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가 재선되면 장차 국회는 그의 추종자 일색으로 구성될 것이며 그 후에 그는 3선 4선을 가능하게 하도록 헌법을 자재(自在)로 고칠 수 있을 것이니 이처럼 하여 종신 대통령이나 세습 대통령이 출현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을 희망하는 자라면 누구나 대통령 직선제를 반대하고 국무원 책임제를 지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박사는 대통령 직선제를 압도적 다수로 부결하고 국무원 책임제를 재적의원 3분지2의 연명(連名)으로 제안한 국회를 ‘민의배반’이니 ‘의회독재’니 ‘반민족적’이니 하여 험구욕설(險口辱說)할 뿐 아니라 무지각한 일부 정상배(政商輩)를 선동하고 관력을 이용하여 소위 소환운동, 국회의원 규탄운동을 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시하의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도처에 소요를 일으키어 국민을 불안 공포에 빠트리고 적비(敵匪)의 도량(跳粱)을 심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난도(亂徒)들은 나의 거주(居住)를 포위하고 ‘국회를 타도하라’ ‘국회의원을 총살하라’고 규환(叫喚)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단순한 정당방위사건에 지나지 않는 서민호 의원 문제를 구실삼아 암암리에 국회와 군부를 이간 반목케 함으로써 폭력행사에의 길을 닦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일련의 행동은 가장된 민의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건전한 이성을 말살하고 절대 권력을 장악하려는 전형적인 독재주의 노선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태를 와석방관(臥席傍觀)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나의 울분과 안타까운 심정은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나는 이때까지도 아직 대한민국의 최고 집정자가 그래도 완전히 사직을 멸하려는 반역행동에까지 나오리라고는 차마 예기치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돌연 비상계엄의 조건이 하등 구비되어 있지 아니한 임시수도 부산에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소위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누명을 날조(捏造)하여 계엄 하에서도 체포할 수 없는 50여 명의 국회의원을 체포 감금하는 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국헌(國憲)을 전복(顚覆)하고 주권을 찬탈(簒奪)하는 반란적(叛亂的) 쿠데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만약 그에게 일편(一片)의 애국심이 있다면 지금이 어떠한 시기이며 우리가 처하고 있는 환경이 어떠한 것이길래 국가의 비운과 민생의 고난도 모르는 척 일신의 영욕(榮辱)을 위하여 어찌 이다지도 난맥(亂脈)의 행동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서 나는 이 이상 단 하루도 이승만 정부에 머물러 있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의 지위가 비록 시위소찬(尸位素餐)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번도 현 정부의 악정(惡政)에 가담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의 변변치 않은 이름을 이 정부에 연(連)하는 것만으로 그것은 내 성명 3자를 더럽히는 것이며 민족 만대에 작죄(作罪)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에 사표를 국회에 제출하며 나를 선거해준 의원 동지 여러분과 국민의 앞에 내가 오늘까지 무위하게 국록을 받았음을 깊이 사(謝)할 따름입니다.
    원컨대 앞으로 국가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는 일개 평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전제 군주적  독재정치화의 위협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전 자유세계의 동정과 원조를 획득하여 항구적인 자유와 평화와 복락을 이 나라, 이 겨레에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 대중과 함께 결사 분투할 것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4. 동아일보 1952년 5월 30일자 1면

    국회의원수난사건전말진상명백화
    〃통수권(統帥權)에 속하는 문제다〃
    장총리 어제 하오 국회에 출석답변

    국회본회의
    29일 국회 상오회의에서는 전일의 결의에 의하여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 공보처장 및 국무총리의 출석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도 출석치않아 수난사건을 토의치 못하고 있다가 12시50분 장국무총리가 출석하게되어 비로소 토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총리는 수난사건에 관하여 이는 통수권에 속하는 문제이고 또 계엄하에있어 총리기능은 국부적(局部的)으로 정지되어있는만큼 동 사건에관하여는 직접책임자들에게 물어달라고 말하여 역시 성과를 얻지못하고 또한 하오 회의를 열고 관계책임자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즉 이날 회의에서 이종현(무속)의원은 장총리에 대한 질문으로서『25일 비상계엄이 선포된후 국회의원수난사건이 일어나 국내국외적으로 일대파문을 던지게되어 국회는 행정부관계책임자를 불러 이를 규명하는 동시에 잘한일이면 표창을 하고 못한일이면 이를 발본새원(拔本塞源)하여 차후에 그런일이 없도록 할려고 결의까지 하였던것이나 책임자는 연2일동안 기다려도 출석치 않으니 도대체 언제까지 출석케 될것이며 또 이번 일연(一聯)의 수난사건이 만약에 위법이라면 총리는 어떻게 처치할것인가 그리고 이번 수난에 관한 수난의원들의 보고를 총리가 들었드라면 감짝놀랫을 만하였었는데 계엄사령관보고는 그와는 격등한 차이가 있으니 어떻게된 영문인지 장총리는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는 답변을 하여주기 바란다』고 질문하자 장총리는 다음과같이 답변하였다
    즉 국방장관이하 공보처장등 국회에 출석토록 노력하였으나 어떤사고가 생겻는지 출석을 안하고 있으며 공보처장은 출석하라고 과격한 말을 하였더니 오늘은 어디가고 보이지도 않으니 오늘중으로 행방을 찾아 나오게 하겠다
    그리고 수난사건은 본직으로서는 통수권에 관한 일인만큼 하등답변할 힘이 없으니 직접관계자에게 물어주기 바라며 국회『뻐스』사건은 여러분과같이 통체히 느끼고 있음으로 말하지않아도 여러분이 잘알것이고 과오자를 처단운운은 역시 통수권에 관한만큼 본직은 권리가 없다 그리고 이의원이 깜짝놀랄만한 보고라고 하였으나 깜짝놀랄일이 하두많아 이제는 만성이 되어 놀래지도 않는다 이와같은 답변에이어 김정식(삼우장파(三友莊派))의원는『수난사건에 대한 일본방송은 한국정부와 유엔과의 의견차이 운운하고 있고 국내정국이 불안상태에 놓여있이니 장총리는 관공이단속등 지섭문제(枝葉問題)보다도 좋더 근본적문제인 정부대국회의 완화를 실현시킬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장총리는『계엄하에 있어 총리의 직능은 국부적으로 정지되어 요즘은 한산하다고 말하면서 일본방송에 대하여는 일본은 언론자유가 있는 나라이고 또 계엄이 선포되어 있지 않다는것을 기억하여 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첨가하여 중앙방송국부인방송건은 유엔관계 모중위가 한것이아니고 어떤『써전』일사병이 한것으로 금후그런일이 없도록 단속하기로 타협이 되었으나 중앙방송국은 작전수행관계로 8군의 감독하에 있다는것을 알아달라고 말하였다

     

    해산을 대통령에 재삼요청(再三要請)
    종내『뻐|스』는 끌려갓다
    신 의장 보고

    지난 이십오륙일에 걸처 발생한 국회의원난사건에 관하여 모든정보를 종합하고 있던 신익희 의장은 28일 국회 하오회의에서 그동안의 경과를 국회의 결의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25일 서민호의원이 돌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태영 국방장관에게 그 사유를 물은즉 신장관은 그것은 서의원을 체포한것이 아니고 서의원의 신변이 위험하므로 그신변을 보호하기위하여 잠시동안 모셔간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신장관에 서의원을 석방한것은 판결이 어떻게될지는 몰으나 판결되는 그시간까지 국회자유로히 출석하여 민의를 대표하리는 의미에서 헌법에 의하여 석방된 것인즉 국회가 열리어 이 문제가 논의될 그때까지 조곰도 신변에 이상이 있어서는 안될것이니 그때까지 장관이 책임을 지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익26일 상오5시 또다시 4의원(양병일 장홍염 이석기 정헌주)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여러 의원들과 토의한끝에 여하간의사당(如何間議事堂)에 모여서 토의하기로 하고 될수있는대로 의사당에 집합하도록 총장에게부탁한것이 국회정문 안에서『뻐스』가 봉변을 당하게 된것이다

    나는 그때 헌병들의 힐난을 보고 곧 대통령과 타협하려고 하오1시경 양 부의장과 함께 대통령을 방문하고『뻐스』사건을 세세히 말하고 즉시 해제하여 국회를 개회하도록 명령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회서 종내해온일이 민의에 맞지않는 잘못한일이 많을뿐 아니라 민중들로부터는 지금 국회의 해산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쇄도하고있으니 나로서는 해산는 안할것이나 국회라는것이 하늘을 쓰고 도리질을 하는 아무런 일도 다하는줄 아는것도 같으나 그렇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것을 알아야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이어 국회의원이 사람을 죽여서도 내노라고 석방결의를 하는일이 어디있소하고 말하기에 나는 대통령만 민의를 존중하는것이 아니라 국회에서도 그보다 더 민의를 존중하고 있는데 법치국가에 있어서는 법률앞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등한 처지에 있는것인즉 서의원의 석방은 무죄석방이 아니라 판?결전에 그동안 국회출석을 위하여 법률에 의해서 석방한것이며 만약에 행정부에서 힘으로서 국회를 간섭 억압하는것이 있다면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어떤영향이 있을것 아느냐고 반문한즉 대통령은 의장이 선포하시오 의장이 선포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재삼해결명령을 요구한즉 대통령은 나두 할말이 있어야 할것인즉 또 들어가서 손들을 들고 무슨 결의를 하지 않도록 의장이 잘하시오 하기에 나는 의장은 행정부의 대통령과 같이 마음대로 할수있는 것이 아니고 회의만 질서있게 진행시키면 다수 의원으로서 결정하는것이라고 한즉 대통령은 그래도 의장이 잘하면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재차 해결을 명령하도룩 요청한즉 대통령은 그러면 국회에서 종래해온일이 민의를 들어보니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의사표시를 하면 일이 잘될것 아니오 하기에 나는 그것도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해보아야 할것아니오 하고 말하였더니 그때는『내 명령을 내리리다』하고 허락하기에 그대로 귀환한 것이다 그러나 그후 아무런 조치가 없었고 하오 2시경 드디어 국회차를 통채로 번쩍들어가는 연극이 벌어신것이다 그후 다시 대통령에게 연락하려하였으나 대통령은 없고 비서도 없다하여 연락은 못하고 그날밤 몇?의원은 이를 대기하다가 의장부의장실에서 철야까지 하였다 27일 아침9시경 공보처장에게 물어본즉 공보처장은 어제밤 대통령이 석방을 명령하였는데 아직 않나왔느냐고 깜짝 놀랐다고 하기에 다시 총장을시켜 헌병대에 알아보았더니 그런명령을 받은일 없고 아직 조사가 안끝났다고 말하였다 한다 이에 앞서 25일 신국방장관이 서의원을 변보장상 잠시 모셔갔다고 할때에 옆에있던 어느의원이 그러면 앞으로 국회의원중에서 또모셔갈 사람은 없소 하고 무른즉 그런일은 절대 없을것이라고 거듭 언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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