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D-storyⅡ 126 : 김성수 부통령 취임과 사임(1)

Posted by 신이 On 11월 - 25 - 2013

  1951년 5월 16일 국회에서 이시영의 후임으로 김성수를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했을 때 그의 직함은 동아일보 고문이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이 내세운 김성수는 여당계인 신정동지회의 이갑성 후보를 3차 결선투표 끝에 물리쳐 2대 부통령이 됐다. 1 진해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김성수는 사양했으나 진해로 찾아온 민국당 간부들과 동아일보 주필 김삼규의 권고로 이를 수락했다. 2

  김성수는 후에 사임서에서 수락한 것은 ‘공의를 위하여 사아(私我)를 굽힌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부통령 취임을 굳이 사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교섭하러 온 국회의 대표 제위는 나의 이 뜻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나의 사퇴로 말미암아 부통령 선거를 재차 행하게 된다면 혼란한 정국을 일층 혼란하게 할 따름이라고 하여 심지어는 국민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선임한 것을 거부함은 곧 민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여 강권하므로 부득이한 사세(事勢)를 이기지 못하여 장시간의 논의의 끝에 공의를 위하여 사아(私我)를 굽히고 결국 이것을 수락하였던 것입니다.”

 

 
1951년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 임시수도 관저에서  김성수 신임 부통령 접견했다. (국가기록원 소장사진)

 

  부통령에 취임한 김성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국무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대통령이 출석하지 못할 때에는 이를 주재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정치조직법상 부통령은 국무회의의 구성원이 아니어서 발언은 할 수 있어도 표결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국정을 바로잡자는 성의에서 열심이었고, 여러 가지의 제안을 통해 특히 공무원의 처우개선을 역설했다. 부정부패를 근원적으로 막는 데는 그것이 제1 요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6월 26일 국방부장관 재임 중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 등으로 물의를 빚은  신성모를 주일대표에 임명한다는 이 대통령의 결정에 크게 실망한 김성수는 도저히 그와 더불어 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됐다.(동아의 지면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Notes:

  1. 仁村 金性洙傳, 재단법인 인촌기념회, 1976년, 614~616쪽.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은 국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퇴를 고집하여 1951년 5월 13일에 수리되었고, 2대 부통령의 선거는 5월 16일로 예정되었다. 부통령 후보로 여당계인 신정동지회(新政同志會)는 이갑성(李甲成) 의원을 내세웠고, 야당계에서는 인촌을 내세웠다. 그러나 인촌은 진해로 찾아간 당 간부들의 권고를 마다하고 고사하였다.
    “생각을 해 보시오. 성재(省齋·이시영) 선생이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물러난 자리에 내가 들어앉아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요. 나를 찾아오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으시오.”
    명리(名利)에 담백한 인촌은 일찍이 어떤 자리에 앉는다면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앉았지 허명(虛名)을 위해서 앉은 일은 없었다. 부통령이라는 허울 좋은 허명은 그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 간부들의 생각은 달랐다. 허명일망정 행정부에 거점(據點)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거듭되는 실정(失政)을 시정하는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정당정치의 장래를 생각할 때 제2인자로 인촌의 영상(映像)을 굳혀 두는 것도 중요한 일로 판단되었다. 또 당면문제로 여당계의 후보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인촌을 두고는 다시없기도 하였다. 인촌의 고사(固辭)를 무릅쓰고, 그의 동의도 없이 선거공작(選擧工作)을 추진하면서도 민국당 간부들은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 민국당 의석은 39석뿐이었고, 이보다 앞서 3월 9일에 실시된 국회 분과위원장 선거에서도 참패한 경험이 있었다. 10여개 분과위원장 중에서 민국당은 겨우 1석을 차지한 데 불과하였다. 인촌 자신의 동의를 얻지 못했으니 선거공작에 필요한 자금도 없었다. 다만 믿는 것은 인촌의 덕망과 그의 출중한 인격이었다. 2대 부통령선거는 5월 16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장택상(張澤相) 부의장의 사회로 열린 국회에서 실시되었다. 출석의원 151명 중, 제1차 투표 결과는 인촌이 65, 이갑성 53, 함태영(咸台永) 17, 장택상 11, 이청천(李靑天) 2, 김창숙(金昌淑) 1표로 아무도 헌법에 규정된 재석의원의 3분지2표를 얻지 못했다. 이어서 2차 투표를 실시하였는데 인촌이 68, 이갑성 63, 함태영 10, 장택상 5, 이청천 2, 김창숙 1표로 나타났다. 역시 정족표수에 미달하여 최고득점자인 인촌과 차점자인 이갑성의 결선에 들어갔다. 12시 30분 투표가 끝난 후에 들어온 이용설(李容卨) 의원이 투표한 다음 개표에 들어가 오후 1시 15분 이를 완료하였다. 결국 인촌이 78표, 이갑성이 73표를 얻어 부의장 장택상은 최다득점자인 인촌의 부통령 당선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2. 부통령 취임인사(1951년 5월 18일)

    경애하는 의장 및 국회의원 여러분! 금반 비재천식(菲才淺識)한 이 사람에게 부통령의 중책을 맡겨주신데 대하여서는 여러분의 호의에 충심으로 감사하는 한편 이 중책을 능히 감당하여 여러분의 기대에 부합될 수 있을까 실로 우구(憂懼)를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국민을 대표하신 여러분의 결정은 곧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이며 여러분의 결정에 순종하여 공복으로서의 최선을 다함은 또한 국민 된 의무가 아닐 수 없으니 우둔한 이 사람이 금후 노력하려는 기본방침을 여러분에게 명확히 하려 합니다. 그것은 일언으로 폐언하면 공산주의를 격멸하기 위하여 우리와 더불어 싸우고 우리를 원조해주는 여러 우방과의 제휴와 친선을 촉진시키는 한편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확보하여 확고부동한 민주주의를 이 나라에 확립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이 길은 그러나 이제 새삼스레 거론할 것도 없이 이미 경애하는 국회의원 제씨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추구되었고 현재도 정진하면서 있는 바로 그 길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노력에 의하여 거두어진 성과는 실로 막대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에 의하여 여러 민주 우방과의 친선이 촉진되고 상호간의 제휴가 더욱 공고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민의를 반영하고 중지를 결합하여 허다한 과오가 시정되었고 민주화를 지향하는 여러분의 불퇴전의 용기는 이 나라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화와 수백만의 전재민과 인플레에 기인한 민생고는 더욱 정력적인 노력과 분투를 여러분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도 공복의 한 사람으로서 위로 대통령을 돕고 여러 국회의원과 더불어 여러분이 용왕매진하는 그 광영 있는 길이 더욱 순조롭게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과실을 스스로 깨닫기가 어려운 것이니 행정부의 과실이 있으면 서슴지 마시고 지적해 주시면 그것을 광정하기에 최선을 다하겠으며 이러한 노력에 의하여 행정부와 입법부가 표리 일체가 되어 이 비상시국을 무난히 극복하고 이 나라의 민주건설이 소기의 성과를 얻게 되기를 충심으로 소원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경애하는 국회의원 여러분의 끊임없는 편달과 지원이 있기를 바라는 동시에 여러분의 건강을 비는 바입니다.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