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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12 : 신문용지 싣고 다시 피난길

Posted by 신이 On 11월 - 8 - 2013

 

            
                             김삼규  당시 주필 겸 편집국장                                      조병윤 당시 업무국 직원 

  38선까지 접근한 중공군은 서울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동아일보는 신문제작에 주필 겸 편집국장인 김삼규를 비롯한 7인, 공장에 7인, 업무에 조병윤 외 약간명 등 약 20명을 남기고 각자 피난토록 했다.
 정부가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철수한 것도 1월 3일이었고, 동아일보의 잔류 요원들이 떠난 것도 같은 날이었다.

잔류요원이었던 김진섭 기자가 얘기하는 서울 최종열차에 신문용지를 싣고 떠난 사연이다. 이 열차는 정부 고위관료와 신문기자 그리고 그 가족들을 싣기 위한 열차였다.

“6·25때 부산 피난열차에 신문용지를 실어 나르게 된 경위는 이렇다. 당시 나는 종군기자단 단장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피난열차가 떠나기 30분전쯤인데 서울신문사 사원들이 신문용지를 한 묶음씩 들고 타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보고 아차 싶었다. 을지로 1가 국진만(鞠振晩)씨(국진만씨는 동아일보 전무를 지낸 국태일씨의 집안사람이다) 소유 창고에 쌓아둔 우리 신문용지가 떠올랐다. 서울역장을 찾아서 “이 열차 아무리 늦더라도 내가 올 때까지 절대 출발시키지 마라”고 했더니 당연히 역장은 “정신 나갔느냐”는 반응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모가지다”라고 윽박지르고는 서울철도경찰대장인 이 총경에게도 미군 쓰리쿼터를 반협박으로 내놓게 했다. 급히 동아일보 사원들을 수소문해 국진만씨 창고에 쌓아둔 동아일보 신문용지를 역까지 간신히 실어 날라 1~2연씩 사원들 피난 짐 위에 얹었다. 결국 열차는 예정보다 50분이나 늦게 출발했다. 이 총경에게는 ‘창고에 남은 용지는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는 것을 김삼규 편집국장 명함 위에 써서 줬다. 부산으로 실어 나른 신문용지는 총 22연이었다. 나중에 어느 신문에 서울철도경찰대장 이 총경이 신문용지를 빼내 팔아먹었다고 기사가 나갔는데 내가 김두일 검사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해 해결했다.” (김진섭 기자· 2007년 9월 7일 인터뷰)

1연(連)은 대판 2배 크기 500장 정도의 분량이다. 김진섭은 1964년 동아일보사 사보 ‘동우(東友)’지에도 당시 사연을 써서 기고했다.

“1·4 후퇴 당일(1월 3일의 착오-인용자 주)의 일이다. 정각 10시 최종열차가 서울역을 떠날 무렵이다. 차내에는 흥분과 수심에 가득찬 인사들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그 중에는 각 신문사 친구들의 면면도 적지 않았다. 하부(下釜)하면 어떤 인쇄소를 빌려서라도 신문을 낸다는 것이다. 편집국장 김삼규씨는 그 많은 용지가 괴뢰군에 넘어갈 것을 탄하였다. 나는 신순우 서울역장(현재 무직)에게 달려가 40분간의 연방을 애원하였다. 전시중 무슨 욕심을 부리는가고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수차의 교섭결과 30분간 연발시켜줄 것이 밀약되었다. 그러나 운반이 또 난제다. 그것도 이규형 서울철도경찰대(현재 무직)의 호의로 대원의 보호 밑에 차 한대를 간신히 얻어 공장에 있는 피형(皮兄)을 위시한 몇 사우들이 용지 30연(連)을 약 40분만에 열차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김국장은 남은 용지는 철도경찰에 기증하였고 신 역장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여 하부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월여후 사직당국으로부터 이 철도대장이 동아일보사의 용지를 매각처분해서 착복하였다는 오인으로 구속된 사실과 또한… ” (김진섭· 6 ·25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1964년 당시 서울신문 기획위원, 쇼윈도 밖에서 본 동아, 동우 1964년 1월호, 38쪽)

조병윤은 동아일보 창간 반세기 특집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때를 회고했다.

“1·4후퇴때의 그긴박한 사태아래서도 사원들은『어디가든 신문은 내야겠다』는 사명감에 차 있었으며 이때문에 그들은 총망중에도 시간을 내어 반도호텔 앞에있던 종이창고에서 저마다 한 뭉치씩종이를 꺼내 등에 지고남행열차에 올랐던 것이다。” (조병윤 회고,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3면)

 또다른 잔류요원 최흥조 기자는 ‘최백락’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무기는 한 자루 붓이니 우리가 쓰던 이 붓을 총인 양 꼭 걸머지고 또 우리가 쓰다 남은 용지를 짊어지고 철수하는 정부를 따라 갔다.”고 수기를 남겼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제 다하고 떠났다. 정든 우리의 수도 서울 그리고 우리들의 일터와 살던 집과 우리가 아침저녁 거닐던 거리와 작별하여야 하는가…지축을 흔드는 포격이 은은히 들려오는 1월 3일 하오 3시 30분 우리들 동아일보 잔류 동인 일행 20명은 쓰다 남은 용지들을 등에 지고 서울 최종열차에 몸을 실었다. 기적이 운다, 슬프다는 소리냐 억울하다는 소리냐 무섭다는 소리냐 무섭지 않다는 소리냐…기차는 떠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세기적 비극임에는 틀림없으나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아니하고 내 목에서 명인(鳴咽)이 터져 나오지 아니 하는 가운데 잔류 정부 및 각 기관 요원을 만재한 서울 최종열차는 객차 17량을 끌고 승리를 향하여 남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아 처절한 이 광경! 병든 늙은이들까지 지금 지팡이로 동결한 한강 어름판 위를 두들기며 남으로 향하고 있고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은 아낙네들이 한 손으로 큰 아기를 잡아당기며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판단한 정세에 비추어 크리스마스인 25일을 기하여 비상태세를 취하기로 하였다. 최소한도의 필요 인원을 잔류시키고 나머지는 선발대로 부산에 파송하여 동아일보 속간 준비에 착수케 하는 한편 동인들의 가족도 소개(疏開)시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잔류 동인들이 최종의 순간 철수할 차량의 준비가 되지 아니하여 도보로 남하하기로 계획한 당시 전원 잔류는 오히려 지혜로운 처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잔류도 명령, 선발도 명령, 명령에 의해서 잔류 부대는 25일 선발대와 결별하고 합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세는 다시 긴박해졌다. 서울 각 일간신문 통신사들은 협의하여 27일부를 최종호로 남하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사실 서울시는 이미 공허화하여 독자의 수는 격감하였으며 1월 1일 현재 조사에 의하면 42만 명에 불과한 정세에 있었다. 그러나 서울 사수의 결의가 가장 공고해 보인 내무부장관 조병옥 씨의 간곡한 요청에 응하여 각사들은 더 체경(滯京)하기로 하여 쓸쓸한 서울거리에서 낡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29일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포성은 새해에 접어들자 2일 밤이 새도록 치열해 갔다. 또 아공군의 활동도 맹위를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는가? 드디어 ‘철수’령이 나린 것이다. 가자! 승리를 향하여 일시 뒤로 물러가자.
 우리의 무기는 한 자루 붓이니 우리가 쓰던 이 붓을 총인 양 꼭 걸머지고 또 우리가 쓰다 남은 용지를 짊어지고 철수하는 정부를 따라 가자.
 서울 최종열차는 한강을 도하하여 영등포역에 이르렀다. 황혼이 깃들어 어두워 캄캄해진 영등포역에는 수만에 달하는 피난민이 언제 떠날런지 모르는 기차를 타려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서울 최종열차는 밤을 새워 이튿날 새벽 5시 30분에 대전 역에 도착하였다. 캄캄한 밤 눈 내린 경부국도를 남하하는 전용차들의 헤드라인은 마치 땅 위를 흐르는 별인 양 찬란하다.
 남으로 남으로 뻗치는 자동차들의 불빛을 벗 삼아 서울 최종열차는 다시 부산을 향하여 달렸다…” (동아일보 1951년 1월 10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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