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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김진섭 기자는 탈환한 평양을 둘러보았다. 남북으로 분단된 지 5년 2개월만이었다.

  “그 때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서울 등지서 납북한 7,000여명을 서둘러 학살한 장소인 ‘붉은 거리’에 가보았다. 보통문에서 십리 정도 떨어진 곳인데 가보니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덮인 흙 위로 머리카락이 보이기도 했다.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모두 몰아넣고 총살한 뒤 급하게 흙을 덮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만큼 잔악했다.” (김진섭·2013년 6월 25일 인터뷰) 

  김진섭 기자는 당시 “모란봉에 서서 바라보는 평양시가는 유서 깊은 고적지는 물론 다소의 피해를 잎은 박물관의 일부가 옛 면목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번 전투로 인하여 대동강주변 일대의 주민들 가옥과 교통 통신 그 외 시설이 보잘것없이 파괴됐다”고 보도했다. 1

 


 동아일보 1950년 10월 25일자 2면

 

  “첫째 농촌경제를 통해 경제면을 보면 국영이라 자칭하는 중소공업은물론 개인공장에 이르기까지 군수품 제조에 전력을 다하여 왔다. 주민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상인에 대한 세금부과는 한 점포에 진열된 물품 전체가격을 표준삼아 매 월출을 강요하는데 그 세금액 역시 날이 갈수록 배가되어 결국에는 세금문제로 점포를 닫게 된다는 것이다.

  농촌경제에 있어도 명목은 3?7제라고 하나 실은 성출(誠出) 기타 괴뢰군 원조 부식비 또는 의류품 제출로 그날그날의 식량조차 위협을 당하는 형편이라고 하며 부역이니 무엇이니 하여 농촌의 남자는 대개 농업에 종사할 수도 없고 다만 부인네들이 주로 일을 하여 왔든 것이다.”

  “둘째 교육면에 있어는 군 소재지는 초급 고급 각 중등학교를 원칙적으로 세워져 교육문제보담 당조직생활의 도장으로 전쟁전후로 하여는 입학생모집을 빙자로 모다 괴뢰군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셋째 종교계통은 천도교도가 중심으로 공산도배들의 방조 역할을 취하고 있으며 부수조건으로 기독교 또는 천주교 유교 등속은 시인은 하면서도 그들 종교인들 중 유능한 인재는 암암리에 끌어다가 총살 혹은 행방불명된 사람이 수 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방송시설은 모다 이송한 뒤였고 노동신문사의 건물과 시설은 이곳저곳이 분산소개 또는 파괴된 것도 있다. 그러나 극장과 일반민의 오락장 사교무도장 그리고 최승희가 경영한다든 소위 무용학교도 모다 우리 손에 들어왔다.”

  “끝으로 각 개인들의 생활면을 보면 당원들 중에도 고급간부와 일반시민에 이르기까지 백미한말에 2백50원으로부터 7백원으로 다시 6?25전쟁을 전후하여 25억원을 목표로 최고 2백만원으로부터 최하 1만원에 가까운 전쟁공채를 발행해 부담시키었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25일자 2면)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 탈환에 이어 26일에는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했다. 동부에서도 전세는 압도적으로 유리하여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개마고지를 북상하여 선봉은 혜산진에 이르렀고, 멀리 북단의 청진도 점령했다. 같은 달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시찰을 맞아 국군입성환영 시민대회를 갖게 되자 국민들은 통일의 희망에 부풀었다. 김진섭 기자는 11월 15일 새벽 국군과 유엔군이 평남 대동군에서 함남 고원까지 평원선 전역을 장악했다고 보도했다.

  “청천강 전면으로부터 국부적으로 저항하는 적의 병력을 완전히 봉쇄하고 박천 전방 십수천에 진출하는 한편 측면으로는 중부와 동부전선으로부터 향하여 서하하는 우군부대의 급속한 진출로 말미암아 15일 새벽에는 평원선 전역을 완전히 확보하였던 것이다.”(동아일보 1950년 11월 17일자 1면)

  김진섭 기자는 6·25중 직접 전투기를 타고 취재하기도 했다. 평원선 장악 수일 전 무스탕전투기로 정찰비행 중 산화한 박범집 준장과 서한호 중령의 추락사고를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2 

【동북부 전선 상공에서 본사특파원 김진섭】아 공군과 유엔 공군부대의 합동작전의 정찰면을 맡은 박(박범집)준장은 12일에도 계절풍의 내습으로 영하 15도를 강하하며 계속적으로 강렬하여가는 지상풍속 10여 메타에 가까운 악기후를 무릅쓰고 손수 애기(愛機)를 조종 출격기를 지휘하였든 것이다. 2번기에 탑승이 용허된 기자도 전선의 새로운 면의 발견과 국경선을 찾아보겠다는 느낌에 추위를 잊고 기체에 몸을 의지하였든 것이다.…기체와 기체사이에서 작열하는 포탄 포탄 경축의 화화(火花)같이 목전에서 번쩍인다. 적의 기지들 찾은 우리 편대기들은 일시에 대지 공격을 전개하였다. 차례로 기체는 지상을 향해 30여도의 각도로 급강하다 마치 먹이를 찾은 독수리모양으로 따러 내려간다.…다시 새 전투를 위하여 ○○기지로 기수를 돌린 편대기들은 거대한 동해를 안하에 나려다보며 은익을 나란히 돌진하는 양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는 꿈속여행과 같다. 돌연 1번(기장)기는 검은 연기를 뽑으며 기수를 아래로 박고 급강하를 한다. 각 편대기들은 혹시 새로운 적을 발견한 것인가 하여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대지공격 자세로 1번기를 감시하였다. 수십 초 가까워도 1번기는 영기수를 나려 박은 채 올라올 줄을 모른다. 각 편대기는 번갈아 내려갔다. 출발당시 그렇게도 오늘은 좋은 전투를 기자들에 보여주겠다고 어깨를 쓰다듬어주던 그이었건만! 출발 직전의 면면을 다시 상기할 무렵 1번 기체는 한 폭의 흑연에 쌓인 채 지상에 추락당하고 만 것이다. (동아일보 1950년 11월 21일자 2면)

 


동아일보 1950년 11월 20일자 2면

 


 C 공군본부  박범집 준장

 

 

Notes:

  1. 동아일보 1950년 10월 25일자 2면, 초연한 누각고영(樓閣孤影), 산야는 헐벗고 국보는 흐터지고, 적화로 만신창이 된 패성(浿城)

    【평양에서 김진섭 본사특파원 22일발】
    5년2개월이라는 장구한 시일에 걸쳐 철의장막으로 둘러싸인 괴뢰집단의 도심치인 평양이 이제 우리국군과 유엔군의 막대한 공훈으로 말미아마 그 흑막의 굴레를 벗고 기만의죄상이 백일하에 폭로되는 오늘에 있어 과연 그들은 이날 이때까지 어떠한 시책 밑에 정치 경체 문화 치안 종교 기타를 운영하였는가를 일일히 보살펴보며 또한 이날 이때까지 그들의 노예 밑에 사로잡혀 몸소 당하여오든 시민이 말하는 산 경험을 들어 시가의 첫인상과 더부러 이모저모를 더듬어보자
    × ×

    38선 이남의 산야(山野)를 더듬어 전차로 도심지에 들어옴에 따라 기름진 금수강산을 옛 꿈자리에서나 찾아볼 수 밖에 없던 것이 대뜸 눈에 따인다. 대소도시에는 가진 흉악한 분위기를 조장시키는 괴뢰들의 상전인『쓰타린』과『레닌』그리고『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점차로 평양이 가까워오자 서 깊은 자연미와 도시미는 찾아볼 수 없이 흐터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감을 느끼게 한다

    × ×
    이마 굴속에서 북한동포들은 어떠한 생계를 취하여 왓든 것인가? 1946년 봄 연합군진주와 더부러 철의 장막을 구축하기 시작하며 김일성 도당은 5천년의 긴 역사와 선조『단군』의 뜻을 단상에 우리 모든 민족과 문화는 오로지 소련에 의거하여 거두었으니만치 우리는 이를 본받어야 할 것이라고 하며 온 겨레가 춘추로 상모하든 평남도 강동군에 있는『단군』의 성묘와 무진장 거리에 있는 동명(東明)왕릉을 둘처버려 우리 겨레의 울분을 더한층 자아내게하는 동시에 최후로는 유교(儒敎)탄압을 하였든 것이라고 한다.

    금모란봉에 서서 바라보는 평양시가는 유서 깊은 고적지는 물론 다소의 피해를 잎은 박물관의 일부가 옛 면목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번 전투로 인하여 대동강주변 일대의 주민들 가옥과 교통 통신 그 외 시설이 보잘것없이 놈들의 손으로 파괴 혹은 시설을 의송한 채 주인 일흔 류각뿐이 남어있을 뿐이다 첫째 농촌경제를 통하일바 경제면을 보면 놈들은 국영이라 자칭하는 중소공업은물론 이 개인공장에 이르기까지 헐조흔 점포 간판은 무슨 상점이니 무슨 공장이니 표방하고 있으나 실은 6.25 전쟁을 전흥하였있는 내부는 군수품제조에 전력을 다하여 왓고 상인들은 모다 모리간상배라는 명칭 밑에 노아젓든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주민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상인에 대한 세금부과는 한 점포에 진렬된 물품 전체가격을 표준삼아 매월출을 강요하는데 그 세금액 역시 날이 갈수록 배가되어 결국에는 세금문제로 점포를 닷게 되는데 매일 페점 신고를 하면 세관리가 와서 전체물품의 배가한 추가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진열되었든 물품은 모두 몰수되는 것이고 다소의『콤미슌』이 있다면 그 경우에 따라 가감하여 준다는 것이다

    은행의 거래상태는 외무리 예금액이 많더라도 지불되지 않으며 한폇 대부에 있어는 반납기간은 2개월도 제정되고 시일까지 반납치 않으면 원측으로 재산몰수를 당하게 되는 것이고 기타 세금문제로 매월수입에서 생게도 힘드눈 것이라고 한다 한편 농촌경제에 있어도 명목은 3、7제라고 하나 실은 성출(誠出) 기타 괴뢰군원조 부식비 또는 의류(衣類)품 제출로 그날그날의 식량조차 위협을 당하는 형편이라고 하며 1946년 이래의 부역이니 무였이니 하여 농촌의 남자는 대개 농업에 종사할 수도 없고 다만 부인네들이 주로 일을 하여 왓든 것이라고 한다 둘째 교육면에 있어는 군(郡)소재지는 초급 고급 각 중등학교를 원측적으로 세워저 교육문제보담 당조직생활의 도장으로 전쟁전후로 하여는 입학생모집을 빙자로 모다 괴뢰군으로 데러갖다고 한다

    세째 종교게통은 천도교(天道敎)도가 중심으로 공산도배들의 방조역활을 취하고 있으며 부수조건으로 기독교 또는 천주교 유교 등속은 시인은 하면서도 그들 종교인들 중 유능한 인재는 암암리에 끌어다가 총살 혹은 행방불명된 사람이 수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방송시설은 모다 이송한 뒤었고 노동신문사의 건물과 시설은 이곳저곳이 분산소개 또는 파괴된 것도 있다 그러나 극장과 일반민의 오락장 사교무도장 그리고 최승희가 경영한다든 소위 무용학교도 모다 우리 손에 들어오 것이며 이곳에 종사하든 진도들은 속속히 우리 치안대손에 체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모든 분야들 각각 걸토하여 볼 때 이모든 시설은 일견시민들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기관인 뜻 싶으나 실제 무지한 시민을 이곳에 유인코 그들의 감시와 암암리에 심사를 받게 되는 조흔 심사장이 것이라고 한다 끝으로 각 개인들의 생활면을 보면 당원들 중에도 고급간부와 일반시민에 이르기까지 백미한말에 2백50원으로부터 7백원으로 다시 6、25전쟁을 전후하여 25억원을 목표로 최고 2백만원으로부터 최하1만원에 가까운 전쟁공채를 발행코 부닥시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만 입성할 국군의 진주를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 오늘의 이 광경을 당한 것이라고 하며 우리국군의 손으로 이번 영어(囹圄)의 몸으로 해빙된 동포가 683명인데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먼저 조(조만식)선생의 안부였고 둘째로는 서울서 끌려왓다가 총살 혹은 수일 전까지도 몰려들어 오든 애국동포들의 행방을 국군에 의뢰하는 것이었다

  2. 동아일보 1950년 11월 17일자 1면, 평원선전역 완전장악

    (서북전선에서 15일 본사특파원 김진섭 발)
    14일 정오 행동을 개시한 아 공군부대는 서북부전선을 위시(爲始)로 중부동부 각 전선에 긍한 전면적인 공세를 전개하였다.
    각 전선 대부분의 지역은 계절풍으로 인해서인지 한랭한 악기류로 작전상 다소의 지장을 주었으나 아 신예기(新銳機)들은 이를 극복하고 용전(勇戰)하여 패주하는 적의 후방 ‘루트’를 차단하는 동시 아 국군 지상부대와 UN군과의 긴밀한 연결을 취하여가며 한편으로는 UN공군부대들과 호응코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이날 저녁에는 청천강 전면으로부터 국부적으로 저항하는 적의 병력을 완전히 봉쇄하고 박천전방(博川前方) 십수천에 진출하는 한편 측면으로는 중부와 동부전선으로부터 향하여 서하하는 우군부대의 급속한 진출로 말미아마 15일 새벽에는 평원선 전역을 완전히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동서양면으로 진출한 아 국군 각부대의 방어진과 아울러 공육 일체의 입체전으로 보일보 국경선(步一步國境線)을 목표로 전진을 보이고 있는데 공군 대변인의 말에 의하면 중공군은 이미 퇴각을 시작하였고 오직 괴뢰군만이 강경지구를 거점으로 패주병으로 재편성을 하고 있을 뿐인데 아직까지 별다른 적의 준동(蠢動)은 보이지 않으며 적기의 출현도 없다고 한다.
     
    동아일보 1950년 11월 21일자 2면, 박(朴) 서(徐) 전사 경위, 직접 작전지휘 중, 가석!애기와 자폭
    (동북부 전선 상공에서 본사특파원 김진섭)
    아 공군과 유엔 공군부대의 합동작전의 정찰면을 맡은 박(박범집)준장은 12일에도 계절풍의 래습으로 영하 15도를 강하하며 계속적으로 강렬하여가는 지상풍속 10여 메타에 가까운 악기후를 무릅쓰고 손수 애기(愛機)를 조종 출격기를 지휘하였든 것이다. 2번기에 탑승이 용허된 기자도 전선의 새로운 면의 발견과 국경선을 찾아보겠다는 느낌에 추위를 잊고 기체에 몸을 의지하였든 것이다.
    2만 피트에 달하는 상공에는 각별한 추위를 맛볼 수 있다. 적기와의 공중전을 전개하였으면 하는 감도 없지 않아 있으나 실상 공포감도 소사오른다. 지상은 빙설로 뒤덮이고 일대를 헤치며 용감히 전진하는 우리 지상 용사들의 행동이 간신히 보인다. 함경선을 따라 북상하는 도중 산악도처에서는 피아 격전을 말함인지 화염이 충천하고 있다. 길주(吉州)를 통하여 만탑산에서 관모봉을 지나 서하하며 허전강 부근에 이르니 기류는 더욱 악화하여 시계(視界)는 편대기까지 몰라볼 지경이다. 그러나 적들의 대공사격은 더하여 가고 있다. 기체와 기체사이에서 작열하는 포탄 포탄 경축의 화화(火花)같이 목전에서 번쩍인다. 적의 기지들 찾은 우리 편대기들은 일시에 대지(對地)공격을 전개하였다. 차례로 기체는 지상을 향해 30여도의 각도로 급강하다 마치 먹이를 찾은 독수리모양으로 따러 나러간다.

    줄기차게 뽑는 지상포화 그리고 기총소사 ‘스핑’급상승 자유자재로 운동하는 기체의 충격에 기내에서는 막 기가 찰뿐이다. 이 같은 전투가 수 십분이 경과하였다 그러나 가끔 출현한다는 적기의 그림자도 찾어볼 수는 없다 그러자 ○조종사는 급작히 고도를 유지하며 스핑으로 기체를 넣고 공중전투태세를 갖춘다. 오늘은 좋은 싸움이 또 버러지려나?하면서 기총에 손을데인다 무엇인가 번개같이 날러드는 것이었다. 불과 전방 백야트 떠러진 곳이다 이것역시 전투자세이다. ○조종사는 헤를 채이며 적기가 아니고 우군 ‘젯트’기다 편대장기(박준장)로부터 공중신호이다. 역시 적기가 아니고 우군 유엔기가 틀림없다
    또한 아러 차럿는지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낸다. 기자는 이때야 비로소 안도감에 숨을 길게 내뽑았다. 조종사는 뒤를 도라 보며 무기미한 미소를 보여준다. 이같이 악기류 속에서도 적과 우방기의 식별 또는 지상에 있는 적방과 우군의 식별 등 날카로운 신경은 늘 공중 근무자들의 또한 전투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오 3시경 기장으로부터 오늘의 동해안전선일대에 거친 적의 대항도 미온하고 지상부대에 의하여 전하여진 보고에도 별다른 소득을 었지 못한 편대기들은 은익을 공중에 나부끼며 오늘의 성스러운 임무를 마치고 다시 새로운 전투에 코스를 돌려 출격하는 것이다. 편대기로부터 침묵에 잠긴 기장(機長) 박(朴)준장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손을 들어 신호를 전하며 다시 동하하는 것이다. 적은 이곳으로부터 80마일 떠러진 ○○방면에 그 패주병들을 중심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새 전투를 위하여 ○○기지로 기수를 돌린 편대기들은 거대한 동해를 안하에 나려다보며 은익을 나란히 돌진하는 양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는 꿈속여행과 같다. 돌연 1번(기장)기는 검은 연기를 뽑으며 기수를 아래로 박고 급강하를 한다. 각 편대기들은 혹시 새로운 적을 발견한 것인가 하여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대지공격 자세로 1번기를 감시하였다. 수십 초  가까와도 1번기는 영기수를 나려 박은 채 올라올 줄을 모른다. 각 편대기는 번가러 나려갓다. 출발당시 그렇게도 오늘은 좋은 전투를 기자들에 보여주겠다고 어깨를 쓰다듬어주던 그이었건만! 출발 직전의 면면을 다시 상기할 무렵 1번 기체는 한폭이 흑연에 쌓인 채 지상에 추락당하고 만 것이다. 주인 잃은 이 편대기들은 추락당한 현장을 우회하며 서글픈 마음을 억제하면서 동해안에 피로 물들인 노 조인(鳥人)의 전사를 슬피 ○○기지에 착륙하였던 것이다
    12일 동해안에서 전투를 지휘타가 전사당한 고 박(박범집)준장과 서(서한호)중령의 유골은 각각 전우들의 품에 안기어 18일 하오 4시 공로로 서울비행장에 안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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