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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선 전역에서 경계선을 돌파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통신시설을 차지한 유엔군 종군기자들이 이 소식을 타전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 신문들은 미 제8군사령부에 도달한 전선보도를 인용해 이를 전했다. 1

 


동아일보 1950년 10월 20일자 1면의 평양탈환 보도.

 

동아일보 김진섭 기자는 미기갑제1사단 보다 국군이 먼저 들어왔다고 기억했다.

 “적도 평양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국군 제1사단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김진섭·2013년 6월 25일 인터뷰)

【평양시 선교리에서 본사 특파원 김진섭 19일 발】공산괴뢰도당의 최후 아성 평양시 탈환작전을 진두지휘하여 동시 중심부 선교리에 제일 먼저 입성 혁혁한 무훈을 세운 제 5816 부대장 백선엽은 대동강교 앞에서 기자와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감격담을 피력하였다.

평양시 탈환으로써 나는 대통령 각하께서 하명하신 임무를 실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전몰장병에 대하여 면목도 서게 되었다. 이로부터는 계속 북진하여 잔여공비를 소탕하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21일자 2면)

  김진섭 기자는 뒤이어 입성한 유엔 종군기자들이 “제2차대전 때 노르망디 작전으로 독일을 무너뜨리던 그 광경과 똑같은 감회가 떠오른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2

  “오후 1시가 지날 무렵 대동강역으로부터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는 탱크부대의 기세는 당당하다. 도착하자마자 “당신들은 어느 부대냐?”고 묻는다. 옆에 있던 장교가 제1사단이라고 했다. 백선엽사단장과 제12연대장 김점곤 대령, 탱크부대 박진석 소령 등이 앞으로 나섰다. 미기갑제1사단장 게이 소장은 점령에 있어 한발 뒤진 것을 유감스러워했으나 태도를 바꾸어 산악 아닌 평탄한 가두를 작전구역으로 삼았어도 선취한 국군제1사단에 그 공이 돌아간 것을 높이 치하한다며 백장군을 위시한 각 지휘관들과 악수를 나누고 선두부대였던 제12연대장 김 대령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뒤이어 유엔 종군기자들이 입성했다. 이들은 제2차대전 때 노르망디 작전으로 독일을 무너뜨리던 그 광경과 똑같은 감회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종군기자 김진섭 종군기,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편), 1987)

 

  그러나 유엔 종군기자들과 달리 한국기자들은 통신시설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기자들은 직접 서울까지 차를 타고 가는 방법을 택했다. 경향신문 이혜복 기자가 ‘풀’기자로 뽑혔다. 3

“서울에 도착한 것이 다음날 새벽 4시 반. 정국은 일행을 내자호텔에 내려준 후 명륜동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인 다음 아침 7시께  신문사로 가서 기사를 써내려갔다. 그 날짜 석간  1면 톱에서부터 2면, 3면 모두 평양탈환 기사로 메워졌고, 평양에 두고 온 두 기자와의 약속도 지켜 중요한 대목은 활자로 찍혀 나온 초교를 ‘풀’하였다.”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회장, 6?25남침과 종군보도, 관훈저널 2003년 여름호)

  동아일보도 이를 보도했다. 4 ‘평양에서 본사특파원 김진섭 19일 발’이었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21일자 1면 보도.

 

 
동아일보 1950년 10월 21일자 2면 보도.

 

 

 

Notes:

  1. 동아일보 1950년 10월 20일자 1면, 괴뢰집단책원지수 붕괴, 미군평양시내 돌입, 평양·연포비행장도 확보

    【재 한국 미 제8군사령부에서 19일발 AP 대한통신】미 제1기갑사단은 19일 평양에 돌입하엿다. 미 제8군사령부에 19일 정오 도달한 전선보도에 의하면 동 사단 2개연대중 일부대가 남방으로부터 평양시에 돌입한 것이다
    【워싱톤19일발USIS】UN군은 3방면으로부터 공산군수도 평양에 육박하여 이미 지호지간(指呼之間)에 도달하였다고 미 국방성은 18일 여좌히 발표하였다.
    한국군 제5816부대는 남동방면으로부터 평양에 돌진하여 28리(12천)지점에 육박하였고 미제1기갑사단은 평양남방으로부터 진격하여 25리(24천)지점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UN군 4개 사단과 호주군과 합류한 영국군 제 27여단은 평양에 집결되어 있다고 한다. 동해안 전투에서는 국군이 함흥, 흥남에 진주하였으며 포비행장을 탈환하였다 한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국군 제7269부대 차를 선두로 함흥북방으로 진격하여 한만국경 일○2리(163천) 남방지점까지 전진하였다 한다. 그러나 주요전투는 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영국제27여단은 미국 24사단과 더불어 진남포로 향하고 있어 남방 급 남서방으로부터 평양에 육박하고 있다 한다. 일변(一便) 미 공군보고에 의하면 평양북방으로 다수 군중이 도망가고 있다고 한다.
    기간 UN군은 7만 명 이상의 공산군을 포로로 하였으며 지난 24시간동안에 잡은 포로만도 5천명이상에 달한다. 그리고 공군수송대가 6월 25일부터 10월 14일까지에 수송한 것은 여객 35,156명 화물구 246톤에 달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20일자 1면, 연내로 북한선거, 유엔의 감시와 충고를 기대, 대통령회견 담
    【서울17일발AP=대한통신】『킹』특파원기=이승만대통령은 17일 서울 입성이후 최초의 기자단 회견석상에서『대한민국 정부는『유엔』으로부터의 여하한 지시도 이를 수락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대통령은 말하기를『유엔』북한에서 선거시 항시에 북한민중들을 좌지우지하느니보다는 그들을 감시 충고하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금년 76세의 이 대통령은 한인공산당이 패배당하였을 적에 대한민국정부의 관할권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협조하는 태도로 나왔다. 대통령은 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권한을 38이남에 국한하려는『유엔』의 동향에 대하여 공분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이『유엔』의 정부는『전 한국을 통한 새로운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지지한 호주제안에 의해서 취해진 것이다』라고 대통령은 □□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17일『북한의 선거는 공산당을 패배시키기 위한 군사작전이 종식한 후 약 1개월 이내에 시행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당지에 와 있는 일『유엔』대표는 말하기를『북한의 선거는『크리스마스』전에 시행될지도 모른다』고 시사하였다. 대통령은『이전에『유엔』연원 중(聯員中) 몇몇 사람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전적으로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본 사람도 있었다라고 언명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대통령은 말하기를『대한민국군은 북한에서 대환영를 받고 있으며 민간으로부터 하등 반대하는 기색이 없다. 과거 3개월간 암흑시대에 남한에서 정부에 반대하여『싸보티지』한 기색은 없는데 이것은 북한에 있어서도 마찬가질 것이다. 이 내말을 명심하기 바란다. 공산군들은 대한민국 정부는 하나의 괴뢰정부에 불과하며 만약에『유엔』이 남북한을 □하여 신선거를 시행한다면 쇄신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20일자 1면, 괴뢰적도 탈환은 한국사변종말(韓國事變終末)을 의미
    【레이크썩세스 19일발 AFP=대한통신】평양탈환은 19일 아침 아직 공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한국사변의 종말이 목전에 와 다른 것을 희망하고 있는데 다수『유엔』대표들에게 놀라웁고도 즐거운 인상을 주었다. 이들 대표는 한국의 통일과 재건계획안이 가까운 장래에 수립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소련측으로부터는 하등의 논평도 없었다.

  2. 동아일보 종군기자 김진섭 종군기, 한국전쟁종군기자, 한국언론자료간행회(한국전쟁종군기자편찬위원회 편), 1987, 332쪽.

     10월 18일(19일의 착오-인용자 주) 정오가 지나 적도 평양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는 아직 광적으로 발악하는 괴뢰들의 총성이 끊일 사이 없으나 이곳에 속속 들어오는 장병들은 모두가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후 1시가 지날 무렵 대동강역으로부터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는 탱크부대의 기세는 당당하다. 도착하자마자 “당신들은 어느 부대냐?”고 묻는다. 옆에 있던 장교가 제1사단이라고 했다. 백선엽사단장과 제12연대장 김점곤 대령, 탱크부대 박진석 소령 등이 앞으로 나섰다. 미기갑제1사단장 게이 소장은 점령에 있어 한발 뒤진 것을 유감스러워했으나 태도를 바꾸어 산악 아닌 평탄한 가두를 작전구역으로 삼았어도 선취한 국군제1사단에 그 공이 돌아간 것을 높이 치하한다며 백장군을 위시한 각 지휘관들과 악수를 나누고 선두부대였던 제12연대장 김 대령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뒤이어 유엔 종군기자들이 입성했다. 이들은 제2차대전 때 노르망디 작전으로 독일을 무너뜨리던 그 광경과 똑같은 감회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3. 이혜복 전 대한언론인회장, 6·25남침과 종군보도, 관훈저널 2003년 여름호,34~35쪽.

    진격준비를 갖춘 1사단은 10월 11일 고랑포(高浪浦)에서 38선을 돌파, 북진을 계속하여 북한군 17기갑연대 일부 병력을 사미천(沙尾川) 부근에서 격파하고 계속 북상, 다음날 구화리(九化里) 근변에서 동북진해온 제1기병사단 예하연대와 조우했다. 여기서 평양을 향해 진격의 선후를 다투게 됐는데 백 사단장은 미군부대가 먼저 진격하는 대신 미군탱크 21대를 1사단에 배속하도록 타협한 후 미군과는 달리 1사단의  진격로를 산간 협로로 택해 평양으로 육박했다. 주야겸행으로 공세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1사단은 한발 앞서 10월 19일 오전 평양의 관문 선교리(船橋里)에 돌입, 적의 수도에 태극기를 높이 올릴 수 있었다.
    18일 아침 1사단이 평양 동남쪽 상원(祥原)으로 향하고 있을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신막(新幕)을 탈환, 평양에 접근  중이었으며 영연방군 27여단 선봉부대는 황주(黃州)를 점령, 계속 북진 중이었다. 18일 정오 상원을 탈환한 1사단은 적 탱크부대의 저항을 무찌르고 10월 19일 상오 10시  40분쯤 그 주력부대가 대동강변 선교리에 도달했다. 강 건너 본 평양을 향해 포격을 개시할 무렵, 건물 속에 숨어 앉아 반격을 시도하는 적들을 소탕하는 시가전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처럼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하고 국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애물 철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감격적인 장면이 벌어진 지 10여분이 지났을 때 황주쪽에서  올라온 미 제1기갑사단 ‘게이’ 소장이 선교리에 도착, 백 사단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서야 미군에 종군한 외신기자들이 평양 돌입 상황을 우리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 역사적인 승전보를 빨리 보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는  꽉 찼다. 그래서 군 당국에 특별차편을 간청, 지프 한 대를 배정받았을 때 두 김(金)기자는 평양진격을 지켜본 후 기사를 ‘풀’하는 대신, 나는 서울로 먼저 가서 평양탈환 첫 보도를 ‘풀’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해질 무렵 서울행 지프가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 차에는  정국은(鄭國殷·당시 朝日신문 특파원)과 그를 보좌하던 정모씨, 그리고  나 세 사람만 탔었다.…서울에 도착한 것이 다음날 새벽 4시 반. 정국은 일행을 내자호텔에 내려준 후 명륜동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인 다음 아침 7시께  신문사로 가서 기사를 써내려갔다. 그 날짜 석간  1면 톱에서부터 2면, 3면 모두 평양탈환 기사로 메워졌고, 평양에 두고 온 두 기자와의 약속도 지켜 중요한 대목은 활자로 찍혀 나온 초교를 ‘풀’하였다.

  4. 동아일보 1950년 10월 21일자 1면, 괴뢰 질서 없이 산주(散走), 김일성 도당은 희천에 도망

    【평양에서 본사 특파원 김진섭 19일 발】
    아 공군정찰에 의하면 괴뢰 김일성 집단의 최후 아성 평양시에 집결하였던 공산괴뢰군의 주력은 노도와 같이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한국군과 UN군의 예봉을 저지 못하고 이미 평양에서 개천 강계방면의 산악지대로 붕괴된 병력을 재편 분산시키고 있는 듯하며 한편 평양시에서 포로된 괴뢰군 장교 및 이곳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괴뢰군은 이미 19일 이전에 소위 그들의 군사령부를 순천으로 또 괴뢰 집단의 수반기관을 희천으로 이전하였다한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21일자 2면, 모란봉에 휘날리는 태극기, 환희에 넘친 평양시민·국군을 환영, 실지(失地)회복 성전(聖戰) 일단락, 월남동포 환향 조속 주선, 신 국방장관담화, 전몰 영령에 면목 섰다, 백(白)부대장 평양 대동강 교상(橋上)서 감격서(感激書), 치욕의 오개 성상도 종언!, 필승의 신념을 새롭게함도 이때, 누성에 자유종성도 높다, 백(白)부대장 게이 소장 대동강변서 상봉 악수, 작전상 대전환 초래, 정(丁)참모장 전도 낙관 경고.
    충용한 국군과 『유엔』군에 의하여 괴뢰 수도 평양을 탈환한 것은 앞서 동네안의 요지 원산을 탈환함과 아울러 실지 회복을 위한 성전에 있어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국경선까지 완전 제압하기에는 적지 않은 고난을 각오하여야할 것이니 일반 동포는 물론 장병 각위가 일층 긴장하여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분투하여 주기 바란다. 역사적인 평양 완전 반환에 있어 앞서는 것은 십만 영령에 대하여 동합의 눈물을 참키 어려운 바이다. 우리는 괴뢰정권의 독한 시점에 오년간이나 신음하여 온 북한동포를 따뜻이 보호할 것이며 재차 남북한 동포도 조속한 시일 내에 본고향으로 찾아가게 주선할 것이며 전 국민을 일심전력하여 통일된 대한민국의 국기를 튼튼히 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누리도록 도모하여야할 것이다.

    【평양시 선교리에서 본사 특파원 김진섭 19일 발】공산괴뢰도당의 최후 아성 평양시 탈환작전을 진두지휘하여 동시 중심부 선교리에 제일 먼저 입성 혁혁한 무훈을 세운 제 5816 부대장 백선엽은 대동강교 앞에서 기자와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감격담을 피력하였다.
    평양시 탈환으로써 나는 대통령 각하께서 하명하신 임무를 실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전몰장병에 대하여 면목도 서게 되었다. 이로부터는 계속 북진하여 잔여공비를 소탕하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북한 괴뢰집단의 최후의 아성 평양(平壤)은 급기야 용감무쌍한 우리 국군 작전에 탈환되었다. 19일 평양 연포(連浦) 양 비행장은 우리 국군이 확보하였다는 쾌보에 접한 서울시민은 늦가을 비 축축히 소리쳐 나리는 가운데 거리에는 전재에 파무친 우울도 어데로 명랑과 환히의 만세소리가 거리를 진공하였다. 능라도 그림폭 같은 산자수명한 평양의 모란봉 위에는 치욕 5년의 괴뢰군의 모습이 사라지고 태극기가 휘날리며 자유해방의 평화 성종의 우렁차게 울리어 나올 것을 생각하니 그 어찌 국민의 감개인들 적으리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철리는 □□ 적도 평양을 탈환한 이 자리에서 다시금 깨달음을 얻으니 과거 구십일에 시달린 남한의 전 국민은 오늘의 이 감격을 위하여 생지옥살이를 하며 살아온 것이다. 우리는 지금 평양이 탈환되었다고 전승에 도취되어서는 아니된다. 아직도 우리는 이 삼천리 강토에서 최후 발작으로 날뛰는 괴뢰를 한 놈도 남김없이 완전 소탕할 때까지는 전승에 날뛰어서는 아니 되겠다.

    『평양 대동강변에서 본사특파원 김진섭 19일 발』적의 아성 평양으로 평양으로 노도와 같이 맹진을 거듭하던 아국군은 유엔군과의 협력 작전으로 19일 상오 10시 반 거울장 같이 맑게 흐르는 대동강변에서 국군 제 5816 부대장 백선엽 준장과 미 제1기갑사단장『게이』소장과의 역사적인 감격도 새로운 한미 양군 인사 하에 신중한 악수가 포연에 싸인 가운데 교환되었다. 이날 비발같이 포만이 나르는 전진 속에서 적도 탈환의 의기도 굳게 한미 양 장성은 □□을 보여주는 검푸른 얼굴에는 전승 장군의 기개를 높게 더욱더 진격을 굳게 맹서하는 듯하였다.

    적도 평양을 완전 탈환한 것은 작전상 획기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으나 수도탈환 지역의 확장보다도 더 중요한 작전상의 요구는 화근이 되는 공산수뇌자와 그 수속을 말살함이 유일한 요구임으로 이 목적달성에는 전도낙관을 허하지 않을 뿐더러 배가의 탈투가 요망되는 바입니다. 급전즉하로 축소되어 가는 제척의 교차점은 멀지 않았으니 일반 국민은 차기의 중대작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돌적심적으로 제반준비를 한층 더 굳게 하여 주길 바라는 바입니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21일자 2면, 먼저 국군이 돌입, 전사상 경이(驚異)작전, 평양탈환 작전경위
    【평양대동교에서 본사특파원 김진섭 19일발】상원(祥原)을 점령하고 18일 하오 평양으로 향하는 공로를 북진 중이던 아국군 제 5816부대는 18일 하오 12시경 평양남방 20간 지점 구릉지대에 의거하여 완강한 저항을 시도하던 적의 방위선을 돌파하고 19일 조조 6시부터는 공륙(空陸)호응하는 맹공격을 개시한 여 탱크부대를 선두로 후퇴이산(後退離散)하는 적을 급박 드디어 동일 오전 10시 반 기선봉부대의 일부가 평양시 동변공장지대 돌입에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동정 오전 12시 반 동 부대주력은 대동강남안 평양시 중심부인 선교리에 도달 대동강 도하점인 대동교를 완전 확보하여 적도 평양시 탈환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동일 전투에 있어 직접 진두지휘를 하야 곤연탄우(困煙彈雨)를 무릅쓰고 부하장병과 같이 시중심부로 돌진하던 부대장 백선엽 준장은 국군부대보다 약 40분 뒤늦게 선교리에 도착한 미 제1기갑사단장『게이』소장과 대동교전에서 감격적인 악수를 교환하였다. 선교리에서 습격한 한미양군은 대동강의 철교 및 인도교가 모다 적에게 폭파되었음을 확인하고 도하작전을 위하야 우선 대동강북안적진지에 맹포탄을 개시하였다.
    국군 제 5816부대의 일부는 동일 정오 평양시 동방에 있는 비행장을 탈환하고 여적을 소탕 중에 있으며 또 일부부대는 대동강상류를 도하 동일 오후 2시 평양시 북단에 돌입하였다. 이로써 동남북 삼 방면으로 평양에 입성하였으며 서방은 기남포 방면으로부터 진격해온 UN군에 의하여 봉쇄되고 있다. 적은 평양시 고수를 기도하였음인지 시가 주요도로에는 50m 간격으로 올가마니를 싸 올리고 시가전을 준비한 형적이 있으나 동시에 진입한 국군부대의 진격이 너무도 급했기 때문에 도주할 기회를 노친 소수패전한 병들의 발악적 저격을 받았을 뿐 아군은 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유유히 시가중심부까지 도달하였으며 시민의 열광 환호리에 감격적 진주를 행하였다. 현재 전투상황으로 보아 20일 오후까지는 평양전시의 패잔병이  완전 소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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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전오피

    D-storyⅡ 108 : 종군기자 김진섭(4)-평양탈환보도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트랙백 by 대전오피 — 2017/12/04 @ 2: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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