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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95 : 김구 국민장

Posted by 신이 On 6월 - 4 - 2013

“해방된 조국의 땅에서 49년 6월 26일 동족의 흉탄에 쓰러진 노대혁명가요 전 임시정부주석 김구선생의 국민장이 온 겨레의 애도 속에 7월 5일 거행됐다. 조국의 「완전통일독립」이 미소의 흥정거리로 되어가자 선생은 민족주체의식에 입각한 남북협상을 들고 나선 것이다. 애국애족의 시행착오라기엔 선생의 뜻이 크고 높았었다.” (동아의 지면반세기, 동아일보사, 1970)

 

동아일보 1949년 7월 6일자 2면, 온겨레의 애도가운데 작일 백범선생 영결식 엄수, 식장의 이구석 저구석 단장의 통곡성, 님이여 고히잠드소서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에는 이른아침부터 모여든 조문객으로 입추의 여지도없게 그득히 들어찻고 장내에 들어오지못한 단체조문객들이 운동장밖에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간소하게 치장한 정면단상에는『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백범김구선생 국민장영결식)』이라고 써붙이고 양쪽으로『74년대업여산위국가동양(大業如山爲國家棟梁)』『삼천만중애루성해실민족지침(三千萬衆哀淚成海失民族指針)』의 두글빨이 붙여있고 영구를 모실 단밑으로 이대통령 이국무총리 김내무장관 신국회의장들에게서 보내온 꽃다발이 놓여있다 중앙정면에는 이국무총리 신국회의장 김대법원장을 비롯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들이 단좌하고 있고 유엔한국위원단과 재한각국사신들이 일찍부터 참석하고 있다 예정보다 늦게 영구는 오후1시50분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단상에 안치되자 흐느끼는 군중의 울음소리도 처량한가운데 오후2시10분 영결식은 박윤진(朴允進)씨 사회로 장엄리에 시작되었다

유난히도 맑은 하늘을 찌르는듯 은은한 십발의 조포(吊砲)에 이어 국기경례애국가봉창과 주악이있었고 장의위원장 오세창(吳世昌)씨의 식사와 유림(柳林)씨의 김구선생의 약사보고(略史報?)가 있은다음남녀학생합창대의 애긇는듯한 조가합창있자 장내는 물을끼얹은듯 고요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간열픈 애국성만이 들려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조완구(趙완구)씨의 분향과 김규식(金奎植)박사의 헌화(?花)가있고 별항과같은 이범석(李範奭)국무총리의 조문낭독이 있고 조사(弔辭)에 들어가 이대령의 조사를 이철원씨가 대독하고 이시영부통령의 조사를 이상기씨 김규식박사 엄항섭씨 등이 차레차레로 고인을 추모하는 애절한 음성으로 조사를 올리고 유엔한국위원단 대표와 재경각국사신들의 조사가있은다음 상주 김신(金信)부처의 분향이있고 고인의명복을 비는 묵상이 있은다음 서울교향악단의 장송곡도 비창한가운데 육군의 장병의 조총(弔銃) 십발로 서울운동장의 영결식은 하오4시넘어 예정의식을 마치고 영여는 경교장출발한 대렬에 영결식장에서 합한 장사의대렬이 일로효창공원묘지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하오5시넘어 동묘지에서 선생의 마즈막의 하관식이 집행되었다

 


동아일보 1949년 7월 6일자 2면, 온겨레의 애도가운데 작일 백범선생 영결식 엄수, 식장의 이구석 저구석 단장의 통곡성, 님이여 고히잠드소서

 

동아일보 1949년 7월 6일자 2면

정든집 떠나기전
경교장서 장의례배회
서울의 기독교도들은 고백범선생의 장송(葬送)을 하기위하여 5일 아침7시반부터 경교장에서 장의예배회(葬儀禮拜會)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참집한신도는 무려2만여명에 달하여 일대성황을 이루었다 한다
예배는 이규갑(李奎甲)목사의 사회로 시작되어 정훈모(鄭勳模)여사의 조악(弔樂)이 있었고 김치선(金致善)목사의 시편낭독、박태준(朴泰俊)씨 지도의 찬송、구세군 황종률(黃鍾律)소령의 기도 최성모(崔聖模)목사의 성경낭독 남대문성가대의 조가(弔歡)합창 박제원(朴濟源)목사의 설교、홍춘화(洪春和)양의 조가독창 박학전(朴鶴田)목사외 1인의조사(弔辭)가 있은후 찬송과 축도(김유순감독(金裕淳監督))로 페회되었는데 예배가 끝난후는 울음의 바다로 페화하여 버렷다

 

동아일보 1949년 7월 6일자 2면, 거룩하신 발자취 길이길이 받드오리다

5일은 생애를 조군광복에 바치신 고백범 김구(金九)선생의 유해를 모시는 날이었다-소리쳐 울어본들 무엇하리요 땅을 쳐통곡한들 무엇하리요 유명(幽明)의 길이 달라 가시는선생 구원(原)의 험난한 길가시는 선생아, 통한은 부진루(不盡淚)로 영구는 만연 유택(幽宅)에 드시다
억조창생이 단녀가는 그길이라 할지라도 선생의 가심은 더한층 이땅 모든 겨례의 슬픔이외다|선생의 영이(靈이)는 드디어 오늘로써 종천(終天)의 길을 떠나신다 하더라도 가시는것은 그형해(形骸)뿐이요 설사선생의 영령은 더욱 새로운 훈화(薰花)로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하생을 계속하실것이다 영혼의 전당이 소연(소然)히 환멸(幻滅)하는 이른바 쌍림(?林)의 애(哀)에 누군들 비할데없는 기막힘을 느낄때 복바쳐오르는 애모(哀慕)의 적성이 각각 손끝으로모여 기약지아니하고 다투어 붙드는것이 저|만수(萬手)의 인불(引불)이니 이줄은 실로 선생과 대중사이의 마지막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한줄의 끈이나 결코 장송(葬送)의 경의만이 아닐것이다 70여년간의 선생의 생애가 애국의 지성이라 할진데 선생의 다보탑이던 유체를 붙들고 부르르 떨리는 애처로움으로써 안보내지 못하여 보내는지정을 스스로 주저하지 못한가운데 일대의심게(心契)가 있음을 누가 모르랴|선생이 전형적인 의인(義人)이며 성인(誠人)이며 철인(哲人)이며 이 3자우에선 위대한 인격 형체적인 성공이 있는것같지 아니하것만은 생(生)하여 일대의 중망(重望)이 치우쳐부러지고사(死)하여 만인의절통이 저절로 그에게 기울리어 포의광전(布衣曠前)의 성의로서 궁천(窮泉)의 길을 꾸밈이 초삼절백(超三?百)한인격적치화(熾火)의 반영임에 틀림없다 옥성금강(玉成金剛)된 그인격은 길이 민족과 더불어 빛날것이다 이제 선생의 영해를 덮으면서 새로히 우리의 감모(感慕)를 금할수 없는것은 애국애족의 단성이니 마음의 기둥을 쓸쓸한 우리민족의 마음뜰에 세워주고 가신것이 무엇보담 거룩한 우리에게 좋은선물임을 느끼자!한인으로 오셔서 한인으로 계시다 한인으로 돌아 가시는 선생앞에 이땅의 민족은 무릎꿇어 합장하여 선생의 명복을 기리빌자!그리고 우리는 단군성조가 기르신 민족본연에 태도로 몰아가 남북통일과업완수의 새로운 단결을 맹서하자

 

동아일보 1949년 7월 6일자 2면

구슬픈 장렬맞아
연도(沿道)를 메운 시민은 오열
이날 서울의 장안은 애도의 슬픔이 넘처 흐르고 있다 거리에 나부기는 조기의 파도|철시한거리는 쓸쓸하기 짝이없다 연일나려쪼이던 초복의 모진햇발도 이날 상오 더욱 구슬피하는듯 낮은 구름이 가리워진 침울한 날씨는 더한층 만군중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였다 선생의 마지막길을 장송하려는 헤일수없는 많은군중은 여름옷도 희게 단장한 옷채림으로 경교장부터 서울운동장에 이르는 연도에 백포를 두른듯 인파쌓고 비빌틈없이 꼬자논듯한 시민으로 거리는 메워젓다남녀노소 어린이 학생숨을 죽이고 행렬을 기다리는 시민은 누구나 할것없이 모두 기뿜과 웃음을 잊은 구슬퍼하는 표정으로 잠겨있고 물을 끼언진듯한 조용한 거리에는 교통을 정리하는 순경들의 호각소리와 힘차게 달리는 경비자동차들의 엔진의 소음、이속에섞여 이따금 들리는 기마대의 말굽소리|
숨을 죽이고 서있는 군중의 눈동자에는 한줄기 슬픔의 눈물을 어리게한다
이윽고 상오10시반이 넘어 마지막의 경교장을 떠날 선생의 영해의 행렬이 보이자 옷깃을 가다듬어 행렬을 마지한다 썻던모자도 누구의 호령도없이 벗기여진 가운데 선두에선 기마경찰의 의장도 엄숙히 군중에 앞을 지낸다
이어 단장을 애끊는듯한 구슬픈 장송곡의 주악이 귀결을 스칠때 소리없이 흑흑느껴우는 조곡의 우름소리만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좌익의 특공대
작야일제검속(昨夜一齊檢束)
김 경찰국장 담
좌익의 흉게를 미연에 탐지하고 일망타진하여 5일 집행되는 고백범선생의 장례식을 무사히 집행하게된데대하여 5일 김(金)경찰국장은 기자에게 다음과같이 말하였다
작4일오전9시부터 초비상경게에 돌입한 본경찰국과 관하각경찰서에서는 작아일제검색을한결과 시내각처에서 불온『삐라』와 불온문서급 벽보등을 압수하는한편 야외(野外)에서 비밀회의를 하는것을 습격하여 사전에 일망타진하였다
소위 좌익에서 특공대를 조직하여 각연도에 집중한 군중속에 잠입시키어 민심을 소란케할게획이었으나 이도역시 미연에 탐지되어 좌절되고 말았다
공산당에서는 금번 국민장례식을 계기로하여 적극적으로 치안교란에 노력하여왔으나 그역시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부에서 물심양면으로 최선의원조로 받들으매 고인백범선생을 보내는 시민여러분께서는 정부에 협력하여 문짜그대로 국민장례식을 엄숙히 보게되었다 끝으로 본관은 시민제위로부터 협력하여 주신데대하여 감사의뜻을 거듭표하는바이다

 

동아일보 1949년 7월 6일자 2면

국기로 덮인 영구(靈柩)
군중의 눈물을 헤치며
육해군악대적낙인도(陸海軍樂隊吊樂引導)로 발인
말없는 칠흑관속
겨레의 배웅을 아시는가

5일아침 경교장 현관앞으로 모셔놓은 김구선생의 영구(靈柩)는 국기로 덮인채 통곡하는 군중들에게대하여 아무런 대답도없이 다만 지나간날의 선생의 위대한업적만이 빛나는듯하였다 상오9시50분 영구는 매달려우는 군중을 뿌리치고 근친들에게 받들려 경교장을 떠나니 유복친、무복친과 근친자들은 그뒤를 따르고 말없는 경교장만의 선생의 명복을 빌면서 있는것 같았다
이때부터 충정로(忠正路)는 일체교통이 두절되었고 선생의 마지막 장송을 목도조위하기위하여 모여든 애국남여들은 거리를 묻어버렷다。
이윽고 정각10시반이되자 육해군 국악대의 조가(吊歌)취주를 신호로 엄숙한 행진은 시작되어 연도 좌우에 도렬한 군중의 눈물어린 시선을 체치면서 영구는 일로 서울운동장으로|||
오직 조국광복에 7십평생을 한결같이 바처오다 적아닌 겨레의 총탄에 쓸어진 고 백범김구(白凡金九)선생의 국민장(國民葬)은 참변십일째인 5일 전국민의 서름과 슬픔가운데에서 경건하고도 엄숙하게 집행되었다
마지막길 떠나는 전날인 4일밤 납덩어리에 눌린듯한 슬품에잠긴 경교장에는 선생을 사모하여 경향각지에서 줄지어 찾아든 조객들의 모습은 더한층 애처러웠으나 그들의 미우(미宇)에는 오직 조국통일의 앞날이올것을 믿음으로써 명복을 비는것같이 보였다
그옛의 그빛나던 눈과 왜제국주의와 싸우던 힘찬힘과 열의주인은 이미 한낯칠흑의 널관속에 말없이 누어있을뿐-조심성스러히 모시는 주상을 비롯한 측근자들에 에워싸이여 하로밤을 새이고 한많은 이땅과마지막 하직하는날을 맞는것이였다
서울을 비롯한 3천만애국동포들은 이날 이른아츰부터 가가호호에 조기를 내걸고 철시(撤市)를 하였으며 영결식에 참열한이나 못하는이나 다함께 마음으로써 우러나오는 애도와 선생의 명복을기리비는것이었다
이어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동지들이 드린 생화(生花)에 뒤덮인 영여(靈輿)는 이날일시 유복친(柳福親)과 측근자들만의 간소한 영결에 뒤이어 무거운 거름거리로 환국이래 기거하던 경교장을
동10시50분경 출발하여 종로인경(人경)앞을 지나 독립운동의 발상지인『빠고다』공원을 빗겨보며 의장대에 선도되여 애모절절한조악(弔樂)과 조가속에서 일로연도에도열한 겨레의 배웅을 받으며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으로 사랑하는겨□와의 최후의 작별을 나누고자 운구되는것이었다
하늘은 선생을 우리겨레와 유명의 다른길로 인도하였으나 천만은 선생의 유지와 유업을 따라 조국에 새로운빛을 가저오도록 힘쓸것을 우름과 슬픔속에 다시한번 맹서하는것이었다

114건국실천원어깨에
령여(靈輿)는 일로(一路)영결식장으로
이날 발인의순서는 6명의 기마경찰대를 선두로 12명의 경찰간부가 4렬종대로 느러섰고 그뒤에는 16명의 진명여중(進明)생도들이 태극기를 받들었으며 그뒤를 육해군합동군악대 전구의장병(前驅儀仗兵)으로 군대가 동원되었고 영차의장대(靈車儀仗隊)로 대학생 백명이 느러선 뒤를 이어 선생이 일상타고다니시던 영차(靈車2331번)가 정태훈(鄭泰勳)전속운전수의 마지막운전으로 땅에부터 고요히 미고러지듯 굴어가고 바로 그뒤로 선생의 비서 도인권(都寅權)선우진(鮮于鎭)양씨가 배종(배從)영차후장대(靈車後仗隊)로 각대학생 백명이 따렀고 그뒤로 사진전구의장대(寫眞前歸儀仗隊)로 중학생백명 십이명의 삼균(三均)청년회원□받들려선유화(油??백□)로된 선생의영정(影정)이 뒤를 따른다
또 그뒤로 선생의 측극자 엄도해(嚴道海)김우전(金祐전)양씨가 배종(배從)그뒤로는 사진후구의장대로 중학생 백명 그뒤로는 시청악대 조가대가 달렸고 그뒤로는 자동차로 오세창김붕(吳世昌金朋)□ 김규식(金奎植) 엄항섭(嚴恒燮) 조완구(趙琬九) 조소앙(趙素?) 리인(李仁) 전탁연안재홍(全度演安在鴻)제씨가 따르고 있다 그뒤로 장의위원이 따르고 다음은『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백범김구지구)』라고쓴 붉은명정을 건국실천원양성소 남녀동지들이 모시고 나가고 그뒤로는 선생의영구(靈柩)를 모신 영여(靈輿)가 114명으로된 건국실천원양성소동지들의 어깨로 고요히 움지기고 있다 영구외면은 선명한 태극기로 고히 덮었으며 흰바탕에 남색테두리를 한 앙쟝(仰帳)이 높이 구름을 덮고 있었다
영구주변으로는 들국화、백합꽃、사철나무 그리고 푸른풀잎으로 깨끗이 장식되었다 영구뒤는 영구후구후워그뒤로 상주(喪主)굵은배옷에 두건을 쓴 신(信)내외가 따렀으며 유복친(有服親)친척이 그뒤에 이였으며 한국독립당중앙지방당부의 기빨이 백여개나 휘날리고 그뒤로는 유지청년단체등이 뒤를이였다
장의대열은 신문내(新門內)교회앞을 선두로 서대문로|타리까지쭈|ㄱ연결피었는데 아츰부터 흐린날씨에 백만장안의 조객들은 거리거리에 인산인해를 이루어 선생을 장송하는 경건한 장면이 곳곳에 버러지었다 이리하여 행렬은 정오경 종로보신각앞을 지나 영결식장으로 움지기고 있었다 행열이 종노3정목에 이르렀을때 한독당중앙당부당원 백여명의 조문이 있었고 영여는 하오2시10분에야 겨우 서울운동장영결식장에 도착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7월 6일자 2면

향훈(香燻)에 잠긴 영정
애통한 두경(讀經)으로 밤을 새우다
경교장의 최종야(最終夜)

7월4일 경교장의 밤!
이밤은 고백범선생이 마즈막길을 떠나시는 밤이었다 70)평생을 외로운 돗대에다 의탁하고 거치른파도를 억세게 건느시다가 지척을 앞두고 사나운풍랑에 한을품고 쓸어지신 선생!양같이 순한겨레들은 오늘밤 선생의 최후의 감축에 안기우고자 벌떼같이 모여들었다
느껴우는 오열、목놓아우는 통공성!파도와같이 터저나오는 울음은 번실을 사정없이 흔들었고 선생의 약력을 알리는 울음석인『마이크』의 음향은 수천조객의 가슴을 두드리고 힘없이 허공에 살아진다
영전에는 한쌍의 촛불이 휘황하게 꼬리를 젓고있으며 붉은가사(袈裟)를 입은 승려(僧侶)네사람이 단정히무릎을 꿇고앉아 선생의 명복을비는 독경의 애수만이 깊어가는 여름밤을 더욱 구슬푸게 하였다
『일제를 모라내고 4천년빛나는 우리나라를 열어주신 위인은 가섰으니 슬프다 부모를잃은 어린겨례는 어찌하리?』(일제개민국탁호사천재(日帝開民國卓乎四千載)) 위인망부모실(偉人亡父母失)시 구애재삼천조적자(龜哀哉三千兆赤字))문소(聞소)김창숙씨의 만장과 각계에서 드린 팔파(把)의 생화(生花)는 타오르는 향훈(香薰)에 잠겨 날이샐것을 원망하는듯 번실중앙에 안치된 선생의영정(影정)을 지키고 있을뿐이었다
애통에젖은 이밤!
깜빡이든별들도 얼굴을 가리우고 반쪽으로 여인조각달조차 참아이슬픔을 정시하지 못함인가 눈물에 젖은채 월훈(月훈)속으로 자최를 감추고말았다
만뢰(萬뢰)는 잠들어가는데 회황한 전등밑에서 고요히 깊어가는 이밤!
이밤이새이면 선생은 영원히 돌아오지못할 명부의길을 떠나게된다 이속에서 시간은 구슬픈 역사를 맺으면서 이애통을 모르는듯 끊임없이 흘렀다 밤12시!경교장을 둘러싼 검은수목(樹木)들은 침묵속에서 머리를 숙여 선생의 최후를 조상하는듯 날나무로맨든 단채의 상여는 백포(白布)로 몸을싸고 문앞에서 날새기를 기다린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염불소리와 함께 마즈막 이한밤은 침묵과 비애속에서 새어갔다

교통은 총스톱
교외전차만 운전
김구선생장의 당일인 5일 아침10시경부터는 시내전차는 거의 전부 운전을 정지하고 다만 마포、왕십리、청량리등 주변전차만을 운전하였다하며 한편 홍수같이 밀려단니던『택씨』까지도 일체정지되어 시내교통은 일시 두절될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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