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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우편물 교환장소인 개성역으로 옮겨지고 있는 우편물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 1946년 3월 15일자 2면.

 

  해방 후 우편물이 처음으로 교환된 것은 1946년 3월 15일 개성역에서였다. 1 남한의 대표로 우편물을 개성에 가지고 간 사람은 미군정청 체신국 미군 대위와 김선유(金善裕) 우편업무계장. 2 북한의 대표는 소련군 중위와 이두경(李斗經) 평양 체신국 공무소장. 3 이두경 씨는 1·4 후퇴 때 월남해 서울에 정착했다.

 


                                이두경                                                                        김선유

                       

  다음은 1972년 동아일보의 주선으로 26년 만에 재회한  김선유 전 계장과 이두경 전 소장의 증언. 4

 

“나는 체신부의 미군정고문관인 파슨스 대령이 “미소회의에서 이야기가 됐으니 개성으로 이북에 보낼 우편물을 가지고 가라”하기에 동아 조선 자유신문 등 십여 명의 기자들과 함께 날짜는 잊어버렸습니다만 그날 특별열차를 마련하여 개성으로 갔습니다. 그 날짜가 당시의 동아일보를 보니 3월15일이군요。우리일행은 파이첼이라는 미군대위와 미군중사、그리고 우편행낭을 가지고 간 한국인직원 등 5~6명이었어요.”

 

  김선유 전 계장의 계속되는 증언.

 

“조금 기다리니 북쪽에서 우편물을 실은 기차가 들어왔어요. 이 선생이 “내가 북쪽 책임자”라 하시더군요. 나도 영어가 서툴러 겨우 미군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이 선생도 소련말이 서툴러 같이 온 소련장교와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더군요. 파이첼 미군대위가 미소군은 호송임무만이니 인수인계는 한국인끼리 하라 해서 내가 이 선생께 그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 선생은 같이 온 소련 장교에게 그 뜻을 손짓 발짓으로 전달、우편물을 교환했는데 서로 행낭덩이 수 몇 개라고 확인하고 교환에 들어갔지요.”

 

  북측대표 이두경 전 소장의 회고.

 

“나는 사업을 하다가 해방이 돼서 조만식 선생이 영도하는 평남건준 통신부일을 보게 됐습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해방되던 해 8월 29일 소련군이 찾아왔는데 그가 가지고온 큰 대문짝만한 지도에 38선이 빨간 줄로 그어 있더군요. 그 친구가 그 지도를 펴놓고 이북의 교통 체신시설을 체크하자해요. 나는 통신기술자라 소련군과 같이 일하게 됐는데 하루는 클리우킨이라는 소련군통신 장교 중위가 와서는 내일 자기하고 출장가자고해요. 다음날 평양서 기차를 탔는데 화물차였어요. 그 화물차에 우편행낭을 네댓 개 실었습니다. 소군병사 하나가 다발총을 갖고 호송하더군요.”

 

 이두경 전 소장은 화물차를 타고 나서 소련군 중위로부터 우편물 교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 소장의 계속되는 증언.

 

“그때까지 나도 몰랐고 이북에서는 남한하고 우편물을 교환한다는 발표가 도대체 없었습니다. 개성역에 내린 것은 3월 15일 열한시쯤이었습니다. 내리자 남한기자들이 이야기 좀 듣자 해요. 할말이 있어야지요. 남쪽에서 간 미군장교와 김선유 선생、북쪽에서 온 소군장교와 나 넷이서 서로 영어 노어 한국말을 모르니 사각통역을 손짓 발짓으로 해서 우편물을 교환하기로 했지요. 개성역장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우편행정을 해본일이 있어야지요. 교환하자고 했더니 김 선생이 그때 교환협정을 맺자고 합디다.”

 

  협정초안을 만든 것은 김선유 전 계장이었다.

 

“준비해간 것은 아니고 해서 개성역에서 양면괘지를 몇 장 얻어 생각나는대로 적었지요. 이 협정은 그 후 체신부에 내가 복명서를 제출할 때 첨부했는데 6·25 전에 웬일인지 없어졌어요. 그런데 당시 동아일보에 그것이 보도돼있군요.”(김선유) 5

 


남북우편물 교환 협정서 내용을 소개한 동아일보 1946년 3월 16일자 2면.

 

  “이남에서는 우편물교환을 신문이 보도해서 국민이 주지했기 때문에 편지가 많았겠습니다만 이북에서는 알리지도 않았고 또 공산당이 우체국의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편지검열을 벌써 시작한 후였기 때문에 이북 내에서도 편지를 잘 이용 안하던 때였습니다. 잘못 편지에 불평을 늘어놓거나하면 아오지 탄광이나 흥남비료에 보내버리거든요.
그해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됐고 또 3월 5일에는 토지개혁이라 해서 지주와 부유층들을 축출하고 할 때니 편지를 보낼 만큼 안정이 돼 있지를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북대표로 남북우편물교환에 참여했지만 나 자신도 편지를 이용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사람들이 또 장난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두경) 6

 

  “남쪽에서도 검열을 했지요. 편지를 받아오면 지금 증권거래소에 있던 미군CIC로 보내 검열을 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미소공위도 열리고해서 남북의 장벽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후에도 4、5회 우편물교환을 위해 갔는데 점점 더 줄어들더군요. 그래서 전망이 별로 신통하지 않구나 생각했습니다.” (김선유)

 

  “나는 그때 처음 우편물 교환에 참여하고 그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이 대표로 나갔습니다. 그 후에 평양서 들은 얘긴데 이남에 편지는 보낼 수 있다지만 무서워서 못보내겠다고들  하더군요. 아마 일반사람들은 월남가족이 있다는 것이 밝혀질까 봐 이용하지 못했을 겁니다. 공산당 사람들은 많이 이용했어요. 어찌나 통제가 심한지 보통 생활하는데도 전전긍긍하는 판에 편지를 자유스럽게 쓸 수 있겠습니까. 공산당관계 연락에 이용됐지요.” (이두경)

 

  “또 한 가지 문제는 우표문제였지요。처음에 일본우표에 조선우표라고만 찍어 썼는데 그쪽에서 말썽이었습니다. 또 나중에는 저쪽에서 갱지 같은 형편없는 종이에 색도도 형편없는 우표를 만들면서 거기다 김일성 사진을 넣은 그런 선전적인 것을 사용했거든요。남쪽에서 보낸 편지가 또 안들어간다는 소문도 있고요. 이런 저런 말썽은 있었지만 대한민국수립 후에도 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해서 계속했습니다만 6·25바람에 중단돼버렸습니다.” (김선유)


 

 

Notes:

  1. 민족의 비극! 이 삼팔의 철문!, 동아일보 1946년 3월 9일자 2면.

    우편물=어언 반개년을 두로 막헛든 삼팔이북과의 우펀물의 교환은 오는 십오일부터 실시를보게 되엇다 이에 대하여서는 이미 수차 본보에 보도한 바와 갓치 우펀물 교환장소는 개성역(開城驛)구내로 지정되엇고 교환종목은 제 일종 봉서(封書)와 제이종 엽서(葉書)만에 한하며 잡지와 신문 그리고 서류우펀은 교환치 않는다.
    남조선 각 지방국으로부터 보내는 우편물은 시내 서울 중앙우편국에서 전부 모아서 개성으로 보내는데 제일차로는 행낭(行囊) 이백 개를 교환한다. 이속에는 이내 서울중앙우편국에서 취급한 편지 팔십이만여통과 소포 그리고 서류 일만 오천여통에 달한다.
    이것을 실은 첫열차는 십사일 하오 오시 사십오분 경성역을 출발하여가지고 십오일 아침에 개성역 구내에서 교환하게 될 터이다.
    교환회수는 정식으로 통고는 업스나 십일에 한번식하는 방법과 일주일에 한번식 교환하는 방법 중에서 채택키로 되여 근일중으로 결정될 것이며 우편물도 양 곳에서 검열을 하게될 것이고 5도로 가는 편지는 평양으로 일단 보내어 그곳에서 각지로 분배케 될 것이다.

  2. 북행하는 ‘청조’ 삼십만, 어제 밤·교환지 개성에로, 동아일보 1946년 3월 15일자 2면.

    삼팔이북에 갈 잠자든 우편물 구십이만여통 중 제일차로 박구어질 보통 봉서엽서 이십구만이천팔백륙십이통 서류우편 구천삼백사십칠통 행낭 일백오십칠개는 마침내 십사일 하오 오시 사십분 서울역발 북행열차로 우편물 교환장인 개성으로 향하얏다. 그런데 우편물 교환을 떠난 남조선대표는 체신국 통신과 보조관 타이철 대위와 동 우무게(郵務係)장 김선유(金善裕)씨 등이다.(사진은 차에 실은 우편물 행낭)

  3. 팔 삭 만에 삼팔선 넘는 우편물, 미소 체신대표의 극적인 수교광경, 저 편서 가저온 행낭 사개, 개성 역에서 20분간에 교환, 동아일보 1946년 3월 16일자 2면.

    (개성서 김호진 본사특파원 전화) 8·15해방의 고함소리와 함께 완전히 금족되엇든 남북 삼천리의 우편물은 어언 팔 개월 만에 한 만흔 삼팔선을 넘게 되엇다. 지난번 미소회담이 협정한 항목에 의한 제1회 우편물교환은 15일 아침 열시 개성역흥에서 미소 양군측 체신대표에 의하야 실로 세게역사에 일즉이 업는 극적인 장면 속에 교환이 된 것이다
    팔삭 만에 길이 터지는 십오일 이른 아침 륙시 사십분 소련군 측의 특별 군용열차는 엄엄한 속에 개성역 구내에 다다럿다 여기에는 소련군측 대표로 크리켈 중위 호위병사 한명 그리고 저편 체신국 대표로 이두경(李斗京) 씨와 수원 이명이 우편물을 실코 도착된 것이다 이들을 마지 하고저 전날 밤 서울을 떠나 개성에 도착한 미군대표 파이체을 대위 병사 이명 체신국  김우무 케장 대리의 사명 일행 팔명은 약속된 십오일 오전 십시를 기하야 동역 제일흥에서  소련군 체신대표자들과 만나 악수를 교환하고 각기 가저온 우편물을 교환하였다
    이쪽 행낭을 저편 차로 저편 것을 이편으로 옴겨 오는 그 시각이란 불과 이、삼십분이 경과치 못하였다 한만흔 이 철로가 끈끼지 앓은 채 교통이 양단된 이 철로길을 통하여 제 일회 우편물은 이러케 간단히 교환된 것이인데 이날 저편에서 넘겨준 우편물은 행낭 사개로 그 내용은 봉서 팔천구백 통 엽시 오천오백 통 서류 이백륙십 통 도합 일만사천오백륙십 통이고 이편에서 가저간 것은 봉서、엽서 합해서 이십구만이천팔백육십이 통 서류 구천삼백사십칠 통 도합 삼십만이천이백구통으로 행낭 일백오십칠 개다.

  4.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253~255쪽.

    다음은 26년만에 동아일보의 알선으로 재회한  김선유 이두경 두 분의 회고담이다.
    ▲金善裕=반갑습니다。월남하셨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읍니다。나는 체신부의 미군정고문관인 파슨스 대령이 “미소회의에서 이야기가 됐으니 개성으로 이북에 보낼 우편물을 가지고 가라”하기에 동아 조선 자유신문 등 십여 명의 기자들과 함께 날짜는 잊어버렸읍니다만 그날 특별열차를 마련하여 개성으로 갔읍니다。그 날짜가 당시의 동아일보를 보니 3월15일이군요。우리일행은 파이첼이라는 미군대위와 미군중사、그리고 우편행낭을 가지고 간 한국인직원 등 5~6명이었어요。
    조금 기다리니 북쪽에서 우편물을 실은 기차가 들어왔어요。이 선생이 “내가 북쪽 책임자”라 하시더군요。나도 영어가 서툴러 겨우 미군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이 선생도 소련말이 서툴러 같이 온 소련장교와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더군요. 파이첼 미군대위가 미소군은 호송임무만이니 인수인계는 한국인끼리 하라 해서 내가 이 선생께 그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 선생은 같이 온 소련 장교에게 그 뜻을 손짓 발짓으로 전달、우편물을 교환했는데 서로 행낭덩이 수 몇 개라고 확인하고 교환에 들어갔지요。

    ▲李斗經=나는 사업을 하다가 해방이 돼서 조만식 선생이 영도하는 평남건준 통신부일을 보게됐읍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해방되던 해 8월 29일 소련군이 찾아왔는데 그가 가지고온 큰 대문짝만한 지도에 38선이 빨간 줄로 그어 있더군요。그 친구가 그 지도를 펴놓고 이북의 교통 체신시설을 체크하자해요。나는 통신기술자라 소련군과 같이 일하게 됐는데 하루는 클리우킨이라는 소련군통신 장교 중위가 와서는 내일 자기하고 출장가자고해요。다음날 평양서 기차를 탔는데 화물차였어요。
    그 화물차에 우편행낭을 네댓 개 실었읍니다。소군병사 하나가 다발총을 갖고 호송하더군요。클리우킨 중위가 오늘 남한하고 우편물을 교환하러 가는 것이라고 그제사 이야기 해 줍디다。그때까지 나도 몰랐고 이북에서는 남한하고 우편물을 교환한다는 발표가 도대체 없었읍니다。개성역에 내린 것은 3월 15일 열한시쯤이었읍니다。내리자 남한기자들이 이야기 좀 듣자해요。할말이 있어야지요。남쪽에서 간 미군장교와 김선유 선생、북쪽에서 온 소군장교와 나 넷이서 서로 영어 노어 한국말을 모르니 사각통역을 손짓 발짓으로 해서 우편물을 교환하기로 했지요。개성역장실이었읍니다。그런데 나는 우편행정을 해본일이 있어야지요。교환하자고 했더니 김 선생이 그때 교환협정을 맺자고 합디다。

    ▲金=그래서 내가 협정초안을 만들었읍니다。준비해간 것은 아니고 해서 개성역에서 양면괘지를 몇 장 얻어 생각나는대로 적었지요。이 협정은 그 후 체신부에 내가 복명서를 제출할 때 첨부했는데 6·25 전에 웬일인지 없어졌어요。그런데 당시 동아일보에 그것이 보도돼있군요。

  5. 양측 체신 대표담, 동아일보 1946년 3월 16일자 2면.

    양측 대표는 신문기자에게 다음 가치 담화를 발표하엿다.
    오직 성의로서, 미군체신대표 파이첼 대위 담
    우편물의 교환에 대하야서는 오직 이쪽에서 성의를 다할 뿐이다. 금후일은 나로서는 모르겟다.
    이번은 평양것만, 소군 체신대표 크리켈 중위 담
    나는 북조선 사령으로 우편물을 가지고 왓슬 뿐이다. 이번에 가저온 것은 평양에 있든 것만인데 금후는 북조선 각지의 것을 모라서 보낼 터이나 다음 교환은 이달 29일 오전 십이시로 결정하였다
    다음 교환은 금월이십구일
    이날 양 대표는 금후 우편물교환에 대한 협정을 하야 현장에서 발표하엿는데 다음번 교환은 오는 이십구일 오전 십이시이고 협정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제 1조 우편물은 일종 이종 급 보통우편 서류로 함
    제 2조 교환 장소는 개성 역으로 함
    제 3조 다음 교환시일은 삼월 이십구일 정오로 함
    제 4조 우송방법은 자동차로 함
    제 5조 체신책임자는 양국대표 한사람식으로 함
    제 6조 구분방법은 각 도별로 함
    제 7조 행낭교환 방법은 이 다음으로 함
    제 8조 사고가 발생하는 시는 쌍방에 서로 문의한다.

  6.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255~256쪽.

    ▲李=이남에서는 우편물교환을 신문이 보도해서 국민이 주지했기 때문에 편지가 많았겠읍니다만 이북에서는 알리지도 않았고 또 공산당이 우체국의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편지검열을 벌써 시작한 후였기 때문에 이북내에서도 편지를 잘 이용 안하던 때였읍니다。잘못 편지에 불평을 늘어놓거나하면 아오지 탄광이나 흥남비료에 보내버리거든요。
    그해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됐고 또 3월 5일에는 토지개혁이라 해서 지주와 부유층들을 축출하고 할 때니 편지를 보낼 만큼 안정이 돼 있지를 못했거든요。그래서 이북대표로 남북우편물교환에 참여했지만 나 자신도 편지를 이용할 생각을 못했습니다。그래서 소련사람들이 또 장난하는구나 생각했읍니다。

    ▲金=남쪽에서도 검열을 했지요。편지를 받아오면 지금 증권거래소에 있던 미군CIC로 보내 검열을 했읍니다。나는 처음에는 미소공위도 열리고해서 남북의 장벽이 터지는 줄 알았읍니다。그런데 나는 그 후에도 4、5회 우편물교환을 위해 갔는데 점점 더 줄어들더군요。그래서 전망이 별로 신통하지 않구나 생각했읍니다。

    ▲李=나는 그때 처음 우편물 교환에 참여하고 그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이 대표로 나갔읍니다。그 후에 평양서 들은 얘긴데 이남에 편지는 보낼 수 있다지만 무서워서 못보내겠다고들  하더군요。아마 일반사람들은 월남가족이 있다는 것이 밝혀질까 봐 이용하지 못했을 겁니다。공산당 사람들은 많이 이용했어요。어찌나 통제가 심한지 보통 생활하는데도 전전긍긍하는 판에 편지를 자유스럽게 쓸 수 있겠읍니까。공산당관계 연락에 이용됐지요。

    ▲金=일주일마다 몇 번 교환했다가 나중에는 여현으로 교환장소를 욺겼읍니다。그 이유는 소련군이 타고 온 기차는 화물차인데 추우니 화로를 만들어 석탄을 피워 쬐고 오거든요。 그런데 개성역에서 한발자국도 밖에 못나가게 미군 MP가 지키니 불평이었지요。또 소군병사에게 초콜렛이니 럭키스트라이크니 담배를 주면 소군이 좋아해요。이것이 말썽이었읍니다。그래서 교환장소를 삼팔이북인 여현으로 옮겼지요。또 한가지 문제는 우표문제였지요。처음에 일본우표에 조선우표라고만 찍어 썼는데 그쪽에서 말썽이었읍니다。
    또 나중에는 저쪽에서 갱지 같은 형편없는 종이에 색도도 형편없는 우표를 만들면서 거기다 김일성 사진을 넣은 그런 선전적인 것을 사용했거든요。남쪽에서 보낸 편지가 또 안들어간다는 소문도 있고요。이런 저런 말썽은 있었지만 대한민국수립 후에도 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해서 계속했읍니다만 6·25바람에 중단돼버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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