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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65 : 3·8우편물(3)-북에서 온 편지

Posted by 신이 On 5월 - 10 - 2013

  남북우편물은 1946년 3월 15일 시작된 이후 호열자 때문에 그해 7월 15일부터 10월초까지 약 80일간 중단됐을 뿐 6·25 발발 전까지 계속됐다.
  처음에는 우표가 없어 1 한때 일본우표에 ‘조선우표’ 라고 찍어 사용하다 남북우편물 교환 때 말썽이 일기도 했다. 2 일선 우체국에서는 중앙우체국으로 보내 검열을 한 다음 모아서 개성에서 이북의 우편물과  교환했다. 1947년 1월 11일부터는 이북의 여현으로 가지고 가서 교환했다. 3

 


동아일보 1972년 3월 30일자 4면
‘조선우표’ 라고 찍어 사용한 일본우표. 남북우편물 교환 때 말썽이 있었다. (김성환 씨 소장품)

 

  당시 동아일보 사진기자 최경덕의 증언. 4

 
  “일년쯤 지나니까 편지교환을 이북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 퍼졌습니다.… 또 소문으로는 이북에서 오는 편지는 북로당이 남로당에 보내는 연락편지가 태반이고 이남에서 이북으로 보내는 편지는 남로당관계 아니고서는 중간에 없어져 버린다고 해요. 남쪽에서 보냈던 편지를 북쪽에서는 별로 받아보지 못했다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6·25 직전 체신부 발표에 의하면 이남으로부터 이북으로 간 우편물은 5천432통, 이북으로부터 이남으로 온 것은 7천807통으로 집계됐다. 5

 

  다음은 서울에 사는 윤군현 옹이 대한민국 수립 직후 받아 1972년 동아일보에 공개한 38우편물. 6 이북의 처제 아들 김인환(함경북도 나진 초급중학교 졸업반)에게서 받았던 편지다. 발신일은 1948년 7월 12일, 서울에서 받은 것은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이 있은 지 며칠 후였다. 편지 겉봉 아래쪽에는 ‘Opened by Civil mails’라고 적힌 스카치테이프가 붙어있었다.

 


동아일보 1971년 4월 1일자 4면
윤군현 씨와 북에서 온 편지.

 

  ‘(함북 종성군 화방면 유성동) 남석에 온 편지를 보고 그에 대한 회답을 지금부터 쓰겠습니다.…모두 안녕히 계신다고 하니 모친이 이제까지 밤낮 외시던 말씀도 조금 끊게 되었습니다. 모친은 언제나 동기간이 서로 만나보겠는가고 매일 말씀하고 있습니다…해방 후 우리 형님은 소련에 가 이제 3년이나 됩니다. 금년(1948년)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해방 후에 나진 초급중학교를 통학하고 있습니다. 이제 5일만 있으면 졸업합니다. 졸업하면 고급중학교에 입학할까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호 형님(윤씨의 4남으로 1948년 당시 서울대 공대 재학 중이었음)은 공과대학에 통학하고 영균(윤씨 5남)는 성남중학(서울)에 통학하고 있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옥순(윤씨 셋째처남의 딸) 누배(누님)는 웅기(함북)에서 살림하고 남편은 웅기인민학교선생을 합니다. 귀동녀(윤씨 둘째처남의 장녀)는 집에서 농사를 하고 그리고 귀복녀(윤씨 둘째 처남의 2녀)누배의 남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제 소련서 돌아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옥임(윤씨 셋째처남의 딸)누배는 지금 청진에 가서 살림하고 있습니다.…언제나 남북이 통하면 찾아가서 보려고 생각합니다.…후에 편지를 할 때는 나진시 청계리 인민반 18반 김인환으로 하여 주십시오.’

 

 

 

Notes:

  1. 8·15우표발행, 동아일보 1946년 4월 28일자 2면.

    체신부에서는 오는 8월 15일 해방기념일을 일층 뜻깁게 하고저 기념우표 삼십만장과 남조선 각 우편국 삼십칠 국의 기념스탬푸를 만들고 그림엽서 오만장도 발행키로 되엿다.

  2. 우표 사진설명, 동아일보 1972년 3월 30일자 4면.

    해방직후 준비된 우표가 없어 한때 일본우표에 ‘조선우표’ 라고 찍어 사용했다. 이 우표는 남북우편물 교환 때 말썽이 있었고 곧 해방 후 최초의 우표인 해방기념우표가 사용됐다. 김성환 씨 소장품.

  3. 여현역서 교환, 금후 남북우편물, 경향신문 1947년 1월 15일자 2면.

    북조선과의 우편물 제 20회 교환은 1월 11일 북조선 여현역에서 교환되었는데 앞으로는 매달 제2, 제4 토요일에 여현역에서 교환되리라한다.

  4.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258~256쪽.

    ▲崔慶德씨(현 서울시 갈현동 거주)=그 당시는 큰 뉴스가 아니면 사진을 안썼지요。지면도 적었고 지질도 아주 나쁠 때입니다。남북이 우편물을 교환한다니 큰 뉴스였어요。그래서 사진취재를 해가지고 서울로 오는데 미군지프차를 얻어 타고 내려오다가 판문점근처에서 자동차 사고가 있었어요。잘못해 시골 아저씨 한분을 다쳤지요。그 바람에 지프차도 논두렁에 빠져 혼났읍니다。겨우 서울에 도착、그 다음날 사진을 보도하긴 했읍니다만。
    그런데 내가 보기엔 처음부터 우편물교환이 순조로울 것 같지가 않더군요。이북에서 가지고온 편지숫자가 적어요。일년쯤 지나니까 편지교환을 이북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 퍼졌읍니다。이쪽에서 보낸 편지를 북쪽에서는 변조해서 수신인에게 배달하기도하고 북쪽에서 편지를 보내면 북한공산당의 검열하는 사람들이 내용을 바꾸어 가짜편지를 만들어 가지고 보낸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나중에는 이북에서 온 편지는 한결같이 잘산다고 선전하는 문구가 들어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또 소문으로는 이북에서 오는 편지는 북로당이 남로당에 보내는 연락편지가 태반이고 이남에서 이북으로 보내는 편지는 남로당관계 아니고서는 중간에 없어져 버린다고 해요。 남쪽에서 보냈던 편지를 북쪽에서는 별로 받아보지 못했다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5. 어떳소!잘있소!남북간 우편물교환, 동아일보 1950년 5월 15일자 2면.

    체신부 발표에 의하면 4279년 3월 15일이래 매주 목요일마다 계속 실시하고 있는 삼팔 남북간 우편물 교환을 지난 11일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금번 이제 1백59회로서 이남으로부터 이북으로 간 우편물 총수는 5천432통(通)이라고 하며 이북으로부터 이남으로 온 총수는 7천807통이라고 한다. 

  6.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261~264쪽.

    소주 한 병 주고 통행증 얻어
    46년 봄부터 38우편물의 교환이 시작된 후 수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냈고 편지회답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2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편지를 보관해오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다행히 尹君鉉씨(75·현재 서울성북구 안암동 104에서 침술원자영)가「북」의 친척들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낸 끝에 겨우 받았던 1통의 회한(回翰)을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 그때의 절실했던 감정을 전하고 있다。
    윤씨는 그 편지를 받은 후 2년도 채 못돼 6·25사변이 발발、남과 북의 장벽이 더욱 두터워지고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숨구멍마저 끊기자 그 마지막 편지를 더욱 소중히 보존、두고 온 친척들과의 옛일이 회상될 땐 친척의 얼굴을 대하듯 그 편지를 꺼내본다고 술회하고 있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담。
    -내가 해방직후 월남하게 된 것은 진주해온 소련군의 만행이나 공산당의 학정 때문만은 아니었읍니다。내가 해방을 맞은 것은 당시 일본인경영의 제일생명보험 서울지사에 근무하다가 그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어 동만주 도문(圖們)에서 간도지부장으로 있을 때였읍니다。 나는 보험회사에 근무하기 8년 전 일본정부의 내무성관리로 있으면서 당시 만주벌판에서 활동하던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나남에 있던 일군 19사단의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이 만약 드러나면 붙잡혀 죽을까봐서 월남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나는 고향(종성군)을 들르지 않고 바로 나남금융조합에 근무하던 장남과 도청에 다니던 3남을 만나보고 함흥친구 집에서 일주일을 묵은 뒤 함흥에서 함흥소주 한 병을 주고 사귄 소련군장교로부터 통행증을 얻어 20여일만인 9월초 서울에 도착했읍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그 소련군 대위에게 내가 함흥에서 가져온「함흥소주」를 권하면서「러시아」말로『이워드카(소련의 술이름)는 함흥에서 제일 좋은술』이라고 말하자 혹시 독이 들어있지 않나 해서인지 나보고 먼저 마셔보라고 하더군요。내가 먼저 마셔보고 난 뒤에야 그는 소주를 달라면서 대신 나를 자기가 타고 있던 평양행 지프차에 동승시켜줬어요。그러나 당시「러시아」군사령부의 증명이 없이는 서울 가는 차표를 살수가 없었지요。그래 다시 이 소련군에게 부탁을 해서 통행증을 얻어 무사히 서울에 오게 된 것입니다。

    떠돌이장사꾼 통해 편지
    서울에 온 즉시로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월남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당시 남한으로부터 도문 나진 등지까지 다니던 아는 장사꾼들을 통해 보냈읍니다。이들 장사꾼들에게는 여비에 보태 쓰라고 당시 돈4、5백원 씩을 주어가면서 다섯 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한번밖에 받지 못했다고 하더군요。아마 첫 편지를 받아보고 나서 바로 남양이란 곳으로 이사를 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내가 월남한지 7개월 뒤인 이듬해 3월초 하룻날 아내와 4남 5남이 함께 내려왔고 이어서 손자 며느리들까지 모두 내려와 20여 우리가족은 다 내려오게 된 셈이죠。
    이렇게 해서 북에 남아있는 가족은 한사람도 없었읍니다。그 후 얼마 있다가 미소공위의 합의에 따라 그동안 끊겨왔던 남북우편물교환이 실시된다는 소문을 듣고 북한에 사는 친척들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지요。지금 기억으로는 몇 통을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처남(종성군 화방면 유성동)과 나보다 세살위인 둘째형님(경흥군 풍해면 거주)그리고 6촌 동생(윤관현·회령군 거주)에게 각각 한통씩을 보낸 것으로 기억됩니다。편지내용도 이쪽의 자랑이나 저쪽을 비난하는 것이 있으면 전달되지 않을까봐 되도록 조심해서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안썼지요。
    우리가 남쪽에 와서 어떻게 지낸다、아이들은 어느 어느 학교에 다니고 누구는 어디에 취직을 했다는 등 월남한 후의 우리들의 안부와 북에 남아있는 친척들의 소식을 묻는 게 주된 내용이었지요。그러나 아무리 기다려 봐도 답장이 오질 않아 처남에게 다시 편지를 띄웠지요。역시 답장이 없었읍니다。그러다가 48년 여름 나진초급중학교에 다니는 처조카로부터 편지가 왔읍니다。그러니까 내 처제의 아들인 셈이죠。정말 뜻밖이었읍니다。
    아마 인환(처조카)이가 종성에 있던 내 처남(인환으로는 외삼촌)집에 들렀다가 내가 부친 편지를 보고 그 주소로 답장을 쓴 것 같습니다。편지는 틀림없는 내 조카의 필적이었으며 위조된 것 같지는 않았읍니다。그 편지를 받고 온 가족이 돌려가면서 몇 번이고 읽었읍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내 아내는 자기 친동생의 아들이 쓴 편지라서인지 그 편지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지요。다른 편지는 아무렇게나 버리면서도 지금까지 24년 동안 장롱 깊숙이 간직해오면서 동생이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곤 하지요。조카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본 즉시 곧장 답장을 썼지요。통일되면 가족들이 서로 왕래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후 아무런 회답도 받지 못한 채 6·25사변이 터졌읍니다。
    이 편지의 발신일은 48년 7월12일、그러나 윤씨가 그것을 받은 것은 48년 8월15일 정부수립기념식이 있은지 며칠 후의 일이다。 말하자면 한 달 이상이 걸린 셈이다。편지 겉봉 아래쪽에는「Opened by Civil mails」라고 적힌 스카치테이프가 붙어있어 편지가 남한에 도착하자 미군정당국이 이를 검열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편지에 붙여졌던 북한의 우표는 몹시 회귀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던지 받자마자 곧 윤씩의 손자가 떼서 없어졌다고 한다。

    언제나 서로 만날까…
    이 편지에서는 웅기인민학교니 인민반이니 하는 낯선 어휘들이 등장하고 있어 서로 헤어진 지 3년 만에 몰라보도록 굳혀진 공산체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편지의 서두는『남석에 온 편지를 보고 그에 대한 회답을 지금부터 쓰겠읍니다』고 돼있어 윤씨가 이 편지의 발신인인 김인환 집안에 보냈었던 편지는 받지 못한 채 함북 종성군 화방면 유성동「남석」에 살고 있던 윤씨 처남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회신을 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편지는『해방 후 우리 형님은 소련에 가 이제 3년이나 됩니다。금년(48년)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읍니다。저는 해방 후에 나진(함북)초급중학교를 통학하고 있읍니다。 이제 5일만 있으면 졸업합니다。졸업하면 고급중학교에 입학할까고 생각하고 있읍니다。영호 형님(윤씨의 4남으로 48년 당시 서울대 공대 재학 중이었음)은 공과대학에 통학하고 영균(윤씨 5남)는 성남중학(서울)에 통학하고 있다고 말씀을 들었읍니다。
    그리고 지금 옥순(윤씨 셋째처남의 딸) 누배(누님)는 웅기(함북)에서 살림하고 남편은 웅기인민학교선생을 합니다。 귀동녀(윤씨 둘째처남의 장녀)는 집에서 농사를 하고 그리고 귀복녀(윤씨 둘째 처남의 2녀)누배의 남편의 소식을 들었읍니다。 언제소련서 돌아올는지는 모르겠읍니다。그리고 옥임(윤씨 셋째처남의 딸)누배는 지금 청진에 가서 살림하고 있읍니다』고 적혀있어 대부분 가족과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는 남북분단에 대한 비탄을 감지케 하는 대목이 있어 시선을 끌고 있는데 그것은 편지 첫 부분에서는『모두 안녕히 계신다고 하니 모친이 이제까지 밤낮 외시던 말씀도 조금 끊게 되었읍니다。모친은 언제나 동기간이 서로 만나보겠는가고 매일 말씀하고 있읍니다』고 쓰고 있고 끝머리에서는『언제나 남북이 통하면 찾아가서 보려고 생각합니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윤씨에게 편지를 보냈던 당시의 나진초급중학 졸업반 학생 김 군은 2년 후에 북괴가 남침전쟁을 도발함으로써「38우편물」제도가 무산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 편지 추기에『후에 편지를 할 때는 나진시 청계리 인민반 18반 김인환으로 하여 주십시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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