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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63 : 3·8우편물(1)-남북우편물 교환

Posted by 신이 On 5월 - 10 - 2013

  ‘폭악스러운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이 된 후 어언 8삭에야 처음으로 남북조선의 우편물이 개성에서 교환되든 3월 15일 기자는 국경 아닌 국경의 3·8선 장벽을 넘으려고 황해도 청단골에 도착하였다. 이날 개성 역에는 평양으로부터 우편물을 실은 직행열차가 들어왔다. 이 얼마나 모순된 현실이냐.’ (동아일보 1946년 4월 6일자 2면) 1

 

  1946년 3월 15일, 3·8선을 넘어 이북(以北)지역을 취재한 동아일보 기자는 알 수 없지만 같은 날 남북우편물 교환을 취재했던 동아일보 기자는 사회부 김호진, 사진부 최경덕이었다. 2 교환 날짜와 장소는 3월 15일 당시 이남(以南)이었던 개성역으로 일찌감치 정해졌다.

 


                                김호진                                                                      최경덕

 

  사회부 김호진 기자의 1972년 회고. 회고 당시 김호진 기자는 대한적십자사 공보부장이었다.

 

  “하루는 체신부에 근무하는 김선유 씨가 ‘우편물교환 때문인지「윌슨」공보관(미군)이 아침에 지프차에 휘발유를 가득 넣고 어디론지 떠났다’고해요. 그래서 나도 개성에 곧장 출장 갔습니다. 삼팔선 분계선상에 미군과 한국인 경찰의 초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약 1㎞쯤 북쪽의 여현 역 동정을 살폈지만 소식이 없었어요.”

 

  교환 하루 전 날짜로 동아일보에는 우편물교환이 ‘명(明) 15일 오전 10시 개성서’ 있을 것이라는 예고기사가 실렸다. 3 김호진 기자의 회고는 계속된다.

 

  “이틀 지나니까 화차만 여러 개 연결한 기차가 남하하더군요. 미군 MP가 삼팔선에서 세우더니 체크한 다음 그 기차가 개성 쪽으로 떠나려 해요. 아마 미·소군은 개성역과 여현역 간의 철도전화로 연락이 됐겠지요. 그때 남북을 잇는 통신선은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이 기차가 우편물을 싣고 온 기차냐고 그 기차에 타고 내려온 북쪽 사람에게 물었어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 기차를 같이 타고 개성에 왔지요. 개성역에서 교환을 했어요. 남북간의 관계가 정상화 돼가는 첫 일이라 동아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남북우편물 교환 모습과 양측 대표의 말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6년 3월 16일자 2면.

 

  김호진 기자는 개성에서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4 김 기자는 “일행 8명은 약속된 15일 오전 10시를 기하여 개성역 제1홈에서 소련군 체신 대표자들과 만나 악수를 교환하고 각기 가져온 우편물을 교환하였다. 이쪽 행낭을 저편 차로 저편 것을 이편으로 옮겨 오는 그 시각이란 불과 20,30분이 경과치 못하였다. 한 많은 이 철로가 끊기지 앓은 채 교통이 양단된 이  철로를 통하여 제1회 우편물은 이렇게 간단히 교환됐다”고 보도했다.

 

  사진부 최경덕 기자는 당시 개성에서 미군지프차를 타고 서울로 올 때 판문점 근처에서 사고가 났다고 회고했다. 1972년 최경덕의 회고다.

 

  “그 당시는 큰 뉴스가 아니면 사진을 안 썼지요. 지면도 적었고 지질도 아주 나쁠 때입니다. 남북이 우편물을 교환한다니 큰 뉴스였어요. 그래서 사진취재를 해가지고 서울로 오는데 미군지프차를 얻어 타고 내려오다가 판문점 근처에서 자동차 사고가 있었어요. 잘못해 시골 아저씨 한분을 다쳤지요. 그 바람에 지프차도 논두렁에 빠져 혼났습니다. 겨우 서울에 도착, 그 다음날 사진을 보도하긴 했습니다만.”

 

  우편물 교환모습을 취재한 사진은 1946년 3월 17일자에 실렸다. 5

 


남북우편물 교환 모습 사진을 담은 동아일보 1946년 3월 17일자 2면.

 

 

 

Notes:

  1. 삼팔선이북답파기【1】, 동아일보 1946년 4월 6일자 2면

    폭악스러운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이 된 후 어언 8삭에야 처음으로 남북조선의 우편물이 개성에서 교환되든 3월 15일 기자는 국경 아닌 국경의 3·8선 장벽을 넘으려고 황해도 청단골에 도착하였다
    이날 개성역에는 평양으로부터 우편물을 실은 직행열차가 드러왓다. 이 얼마나 모순된 현실이냐 3·8선을 넘으려면 밤길을 거러야 한다. 기에 밤들기를 기다렷다가 열한시가 헐신 지나서야 청단을 나섯다 마침 우차세대에 짐을 실고 방금 주막 압흘 지나는 20여명이나 되는 일행이 있어서 기자도 그 속에 한목 끼웟다 동행중에서 흔이 강도가 만히 난다는 말에 반장을 내고 그 반장의 명령으로 도중에서 일행을 세위 놋고 모조리 몸검사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약간 안심들하고 가슴 설레이는 3·8선으로 3·8선으로 향하였다 것다가는 다시 인원수를 헤여보고 일행중 행여 뒷떠러진 사람이라도 있으면 기다렷다가 인원수를 맞추어 가지고 또 떠나고 바스럭 소리만나도 머뭇거리고 이리하면서 서너시간 동안이나 걸엇슬까 말까 할 무렵에 해주에서 남천으로 가는 장사의 신작로가 눈압헤 가로질린 것이 달밤이라 뚜렷이 보힌다『오!』말로만 듯던 경게선 국경 아닌 국경선 3천만동포가 울부지저도 들은 척도 안는 3·8선 눈에 보히고 손에 잡이는 것도 가튼 3·8선이것만. 등에서는 진땀이 흘른다 이제는 이 선도 무사히 넘으리라고 안도의 기쁨을 안고 그 신작로를 넘어섯다.
    게 서잇거라!
    『서라!』날카로운 명령이 끗나기도 전에 솔밧 속에서 뒤처나온 세 사람의 손에는 각각『피스톱』과『장총』과 곤봉이 번뜩였다. 저들이 강도일까?혹은 보안서원일까?분별키 어려웟다. 우리반장이 압흐로 나가서『우리는 상해에서 도라오는 피난민인데 고향으로 도라가는 길입니다라고 공손히 말하니까『그러면 피난민증명서 가지고 있이까?』라고 황해도 사투리로 반문한다. 좀 까다러이 보히는 듯하다 전재민증명서 가진 사람마는 조사를 쉽사리 맞추고 동과식혀 주었다
    그러나 증명서 못 가진 사람은 일열로 서서 그곳에서 한참이나 마을 어느 집 마당 압까지 끌리워갓다 이 국경 아닌 국경에는 미소량군이 대치하야 각각 직히고 잇는 것은 물논이다. 이외에도 38 이북에는 보안서원도 직히고 또 만흔 청년자위대원들이 밤을 새워 가며 월경자를 검문하는 것이였다 전구 약품 고무신을 가저가든 상인 세 명만 남기고 우리는 해방되였다 그러나 기자가 그러케 쉽사리 빠저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일생처음인 시험문제를 치루고 나서니 어디선지 첫닭 우는 소리가 꿈속같이 들려온다
    산천은 괴괴한데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만이 더욱더 발거름을 재촉하는 듯하였다 논길로 밧길로 날이 밝을 무렵에야 학현이란 곳에 도착하였다 황해선의 일 한촌이든 학현은 38선 덕분에 갑작이 번성하여진 모양이다 역두에는 어제 밤 38선을 넘어온 여객이 구름떼 갓다 이러케 엄엄한 경게선을 넘어가고 오는 소위 월경객이 하루에 수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역에 모인 사람들은 어제밤 고생푸념을 늘어논다

    월경자는 수천명
    지난밤도 강도사건이 세 번 식이나 있었다드니 소련군한테 한 70명이 붓잠혀 해주형무소로 넘어가게 되였다는 등 또 한패는 잽힐 번하다 도망첫다는 등 모다 구사일생의 뭄서리 나는 경혐담이였다 어느 패에서는『국경도 이런 국경은 없을 게야』『우리 땅을 우리가 맘대로 못것구』『그러기에 빨리 우리정부가 드러서야 해』라는 비분과 실망이 얼키고 설켜서 함케 터저 나왓다.
    해주서 사리원 가는 경편열차에는 38을 넘어온 승객으로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처럼 드러찻다. 이 차 속에서도 이동보안서원이 탓다. 특히 그날은 학생들과 상인배들을 심히 조사하였다. 역마다 장총을 멘 경비대원과 청년자위대원들이 서너명식 나와서 경비하고 있엇다.
    기자는『왜 저러케 경게가 심함니까』하고 북도사투리로 여페안즌 손님에게 무르니『내가 아나요 괸히 웃쭐하느라고 그리지요』하고서는 기자가 뭇지도 아니한 말을『저새끼들 꼴보기 실혀서 원.』하고 입맛을 쩍쩍 다신다. 소위 3월 1일의 평양학생동맹휴학사건과 김일성장군 암살게획 사건의 실마리를 찻기 위함과 또는 토지게획문제로 말미아마 대지주의 책동방지를 하기 위하야 수사와 경게가 그러케 엄한 것이라 한다 실로 역마다 경게는 어마어마 하였다.

  2. 조규하 등,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257~258쪽.

    당시 가장 반공 반소적이었던 동아일보는 우편물 교환이라는 국민적 뉴스를 보도하기 위해 김호진 최경덕 두 기자를 개성에 특파했었다.
    ▲金浩鎭씨(현 대한적십자사 공보부장)=당시 동아일보는 반공 최일선에서 싸웠읍니다。또한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지면을 아끼지 않았지요。남북우편물이 교환된다고 해서 그것을 특종보도하기위해 애를 썼읍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편물이 교환된다는 발표는 없었고 해서 동아일보 개성지국 기자를 개성역에 상주시키다시피 했읍니다。하루는 체신부에 근무하는 김선유 씨가 “우편물교환 때문인지 윌슨공보관(미군)이 아침에 지프차에 휘발유를 가득 넣고 어디론지 떠났다”고해요。그래서 나도 개성에 곧장 출장갔읍니다。삼팔선 분계선상에 미군과 한국인경찰의 초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약 일㎞쯤 북쪽의 여현역 동정을 살폈지만 소식이 없었어요。
    이틀 지나니까 화차만 여러 개 연결한 기차가 남하하더군요。미군 MP가 삼팔선에서 세우더니 체크한 다음 그 기차가 개성쪽으로 떠나려해요。아마 미·소군은 개성역과 여현역간의 철도전화로 연락이 됐겠지요。그때 남북을 잇는 통신선은 이것밖에 없었읍니다。나는 이 기차가 우편물을 싣고 온 기차냐고 그 기차에타고 내려온 북쪽 사람에게물었어요。그렇다고 하더군요。그 기차를 같이 타고 개성에 왔지요。 개성역에서 교환을 했어요。남북간의 관계가 정상화 돼가는 첫 일이라 동아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읍니다。
    ▲崔慶德씨(현 서울시 갈현동 거주)=그 당시는 큰 뉴스가 아니면 사진을 안썼지요。지면도 적었고 지질도 아주 나쁠 때입니다。남북이 우편물을 교환한다니 큰 뉴스였어요。그래서 사진취재를 해가지고 서울로 오는데 미군지프차를 얻어 타고 내려오다가 판문점근처에서 자동차 사고가 있었어요。잘못해 시골 아저씨 한분을 다쳤지요。그 바람에 지프차도 논두렁에 빠져 혼났읍니다。겨우 서울에 도착、그 다음날 사진을 보도하긴 했읍니다만。

  3. 삼팔남북의 우편물교환, 명 십오일 개성서, 동아일보 1946년 3월 14일자 2면.

    삼팔이남과 이북 우편물 교환은 기보한 바와 가치 십오일 오전 십시 개성(開城)에서 교환키로 되엿다.

  4. 팔 삭 만에 삼팔선 넘는 우편물, 미소 체신대표의 극적인 수교광경, 저 편서 가저온 행낭 사개, 개성 역에서 20분간에 교환, 동아일보 1946년 3월 16일자 2면.

    (개성서 김호진 본사특파원 전화) 8·15해방의 고함소리와 함께 완전히 금족되엇든 남북 삼천리의 우편물은 어언 팔 개월 만에 한 만흔 삼팔선을 넘게 되엇다. 지난번 미소회담이 협정한 항목에 의한 제1회 우편물교환은 15일 아침 열시 개성역흥에서 미소 양군측 체신대표에 의하야 실로 세게역사에 일즉이 업는 극적인 장면 속에 교환이 된 것이다
    팔삭 만에 길이 터지는 십오일 이른 아침 륙시 사십분 소련군 측의 특별 군용열차는 엄엄한 속에 개성역 구내에 다다럿다 여기에는 소련군측 대표로 크리켈 중위 호위병사 한명 그리고 저편 체신국 대표로 이두경(李斗京) 씨와 수원 이명이 우편물을 실코 도착된 것이다 이들을 마지 하고저 전날 밤 서울을 떠나 개성에 도착한 미군대표 파이체을 대위 병사 이명 체신국  김우무 케장 대리의 사명 일행 팔명은 약속된 십오일 오전 십시를 기하야 동역 제일흥에서  소련군 체신대표자들과 만나 악수를 교환하고 각기 가저온 우편물을 교환하였다
    이쪽 행낭을 저편 차로 저편 것을 이편으로 옴겨 오는 그 시각이란 불과 이、삼십분이 경과치 못하였다 한만흔 이 철로가 끈끼지 앓은 채 교통이 양단된 이 철로길을 통하여 제 일회 우편물은 이러케 간단히 교환된 것이인데 이날 저편에서 넘겨준 우편물은 행낭 사개로 그 내용은 봉서 팔천구백 통 엽시 오천오백 통 서류 이백륙십 통 도합 일만사천오백륙십 통이고 이편에서 가저간 것은 봉서、엽서 합해서 이십구만이천팔백육십이 통 서류 구천삼백사십칠 통 도합 삼십만이천이백구통으로 행낭 일백오십칠 개다.

  5. 고대튼 편지왓군?, 검열하야 일주일 후에 분전(分傳), 동아일보 1946년 3월 17일자 2면.

    고대튼 편지는 왓는가. 한나라 한 지역에서 소식조차 몰라 궁금튼 북조선의 편지는 십오일 개성역 교환 장소에서 평양으로부터 오는 편지 행랑 사개가 당일 하오 사시 오십분 개성역 발 열차로 서울중앙 우편국에 도착되엇는데 검열이 잇슬 모양으로 이 수속이 끗나는대로 일주일 전후하여 일반에게 배달될 것이다. (사진은 우편물 교환하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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