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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가 1946년 7월 16일자부터 게재한 여론조사 결과는 사회 현안에 대한 민심의 향방을 나타낸다. 동아일보는 때맞춰 발족한 한국여론협회의 조사결과도 함께 실었다. 1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중간파에 의한 좌우합작이 추진되는 것과 관련한 여론조사 결과가 7월 16일과 23일 실렸다. 2 한국여론협회의 조사에서 신탁통치 논의는 정권수립 후에 하고 우선 좌우합작하자는 여론이 우세했다. 3

 

‘여론은 이렇다’란 제목으로 다양한 여론조사 결과를 전면에 싣고 있는 1946년 7월 23일자 3면.

 

동아일보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좌우합작을 지지하며 신탁통치문제는 정권수립 후에 논의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 이순탁 씨(연희대학)=조선의 현 사태에 있어서 좌의 대표는 공산당, 우의 대표는 한민당이라고 아니할 수 없으니 양당에서 우선 상호이해할 수 있는 인물끼리 즉 서로 이론을 이해하고 색채를 이해하고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비공식 대표가 먼저 우호적으로 합작교섭을 추진시키는 것이 좋을 줄 안다. 당의 정식대표이니 하는 형식에 너무 추도하면 부지불식간에 자연히 고집이 생기기 쉽다. 이 합작의 원칙문제만을 먼저 내세워서는 안된다. 무조건 합작이라야 한다.

 

◇ 홍남표 씨(공산당)=민주주의 진영에서 발표한 삼대 원칙 즉 공위속개 촉진으로 남북통일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민주정부수립, 민족반역자 친일파를 제외, 통일을 분열하고 민주주의 정권수립을 방해하는 반동 테로 단체를 해산하며 그 행동을 근절시킬 것 이상 삼대원칙을 말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투쟁과 공작을 통해서만 완전한 애국적 좌우익의 민족통일의 성과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완전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건립할 수 있을 것이다.

 

◇ 설정식 씨(여론조사국장) 4=합작은 원칙적으로 공위 재개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 되어야할 것, 만일 합작이 입법기관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미군정당국이 좌우 양 진영 세력의 균형적밸런스를 보장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합작에 관련된 삼상회의결정 탁치찬부문제는 이것이 정치기술의 한 방편적 술어에 불과한 것이다.. 좌우는 현재 국제정세를 재인식 재판단하여 거기에 순응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점을 발견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5

 

  1946년 6월부터 추진된 문교부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6

세의대 교수 리학송, 국민후생협회 명□식, 국립박물관 부관장 이홍식, 국립도서관장 리재욱, 중앙고녀 교장 황신덕, 숙명여전 교장 임숙재, 배화고녀 교장 이강래, 동덕고녀 교장 조동식, 덕성고녀 교장 송금선, 경성치과 대학 학장 박명진, 동성중학교 교장 장면이 찬성했다. 조선학술원 리종국, 동국대학 학장 허영호, 휘문중학 교무주임 리치규, 고려대학교장 현상윤, 국립화학연구소 허검이 반대했다. 조선어학회 정인승, 경성약대 교장 도봉섭, 국립과학박물관장 조복성은 ‘말할 수 없다’며 답변을 거부했고 경성여의대 교수 이법용과 리화고녀 교장 신봉조는 ‘모르겠다’고 답변을 유보했다. 7

 

◇ 고려대학교장 현상윤 씨=너무 범위가 넓어서 실제로 운영문제에 적지 않은 지장이 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개편을 하려면 현재의 서울대학은 그대로 두어두고 나머지 단과대학끼리 합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사범부는 따로 구별하는 것이 더욱 좋겠다.

 

◇ 동성중학교 교장 장면 씨=각 전문대학이 분립되어 있는 것보다 통일적으로 운영되어 가면 퍽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봅니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초대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가는 국가수립문제와 함께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국여론협회가 1946년 7월 17일 서울시내에서 벌인 조사에서는 이승만(29%), 김구(11%), 김규식(10%), 여운형(10%), 박헌영(1%) 순으로 나왔다. 8 8개월 전 잡지사인 선구가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승만(431명), 김구(293명), 여운형(78명) 순으로 많이 꼽혔다. 좌우합작 추진 과정에서 김규식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9

 

  동아일보 여론조사국은 이밖에도 첫 8·15 기념행사 내용과 조선정판사의 위조지폐사건에 대한 여론을 조사해 관심을 끌었다. 10 11 12 13




Notes:

  1. 참다운 민성을 환기, 한국여론협회 신발족, 동아일보 1946년 7월 8일자 2면.

    민족자주독립이란 엄숙하고도 지대한 이 순간에 있어 공중을 기초로 한 여론이 가진 사명은 실로 증대하다 바른 민의와 참된 민성에 의한 여론을 이르키고 그러한 여론을 하루라도 빨리 갓는다는 것이 독립에 얼마나 도움이 된다는 것을 삼천만 겨례는 누구나 다 가습깁히 알고 깨달어야 하겟다 글을 모르는 국민이 태반인데다가 오랫동안의 압박으로 말미아마 귀 눈 입이 막히어 비판과 판단력을 일흔 점도 적지 아니있는 이제 파당을 초월하여 흔락한 언론게를 정화하고저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를 조직하게 되엇다
    이 회는 정치문화 농민부인 등 다음의 8 위원부를 두고 연구조사 보도함므로서 국론진기에 이바지하기로 되어 금후활동이 크게 기대되고 있다
    역원과 부서는 다음과 같다 ▲회장 신성식、서기장 박은성 ▲정치위원회장、장덕수 ▲외교 동(同) 조소앙 ▲재정동(同) 김준연 ▲노농동(同) 한경직 ▲문교동(同) 김관식 ▲사회동(同) 박병래 ▲문화동(同) 양주동 ▲부인동(同) 황기성、위원 홍만길、최혜정 외 6씨

  2. 여론은 이러타, 좌우합작을 지지, 정권수립 후에 신탁은 논의, 동아일보 1946년 7월 16일자 3면.

    문: 좌우합작의 선결조건은 무엇인가? 좌우 합작교섭에 대하야 각 방면의 의견을 들어 대중의 여론은 과연 어떠한가를 독자 여러분에게 알리고저 본사 여론조사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문을 발하야 여론을 조사하엿다.
    심형필 씨
    좌우합작의 성공을 바란다. 먼저 정부 수립한 후에 신탁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안재홍 씨
    좌우분렬의 최대원인이 신탁과 비율문제인데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후에 제기될 문제임으로 신탁여부와 비율문제로 합작을 진행시키고 있는 차제에 화제에 올려 합작의 전도의 저해가 없도록 할 것
    이윤영 씨
    남북을 일관한 합작이여야될 것 즉시 독립을 전제로 한 합작이여야 될 것
    남북을 통해 민주주의적 애국자석방을 조건으로 해야 될 것。
    유억겸 씨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후의 문제이니 지금 신탁에 관한 견해를 고집하야 합작을 지연시키지 말 것이다
    백관수 씨
    한국의 완전 자주 독립을 목표하고 겸허한 태도로 나가면 지금까지 개재한 난관은 용이하게기술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홍성하 씨
    감정을 초월한 행동통일로 리상 실현을 당분간 보유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원칙한 합작을 위한 합작과 각자의 주의 정견을 포기하라는 것을 말함은 아니다. 조국애의 일념으로 원칙을 삼으라는 것이다
    리훈구 씨
    민족과 국가를 위하야 정치적 야망을 버리라 정계의 각 지도자들은 일신의 영예를 위하야 민족을 저버리고 조국을 방기했다는 것을 명기하여야 할 것이다
    이병기 씨
    자주독립 일로로 나가라 일체의 정론은 기술적인 문제로서 잘 조화될 것이다 민의와 가치 민망과 가치!
    백남운 씨
    첫재 반동분자의 제외이다
    김수학 씨
    자당(自黨)의 편견을 시정해야 한다
    김응윤 씨
    친미친소 정신으로 나가야 한다
    구용서 씨
    각자의 편견을 버리고 통일정부수립에 맹진하여야한다
    고찬보 씨
    삼상 결정 리행이라 한다
    안종원 씨
    타력의존사상배제와 정치야욕의 배격을 해야 한다

  3. 한국여론협회조사 신탁문제는 정권수립 후, 합작지지가 다수, 동아일보 1946년 7월 16일자 3면.

    한국여론협회에서는 김(金) 여(呂) 량 씨의 좌우합작교섭에 대하야 여론을 조사하고저 지난12일 서울 시내 통행인 7709 인에 대하야 다음과 같은 설문을 발하였다는데 그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신탁논의는 정권수립 후에 하고 우선 좌우합작하자는 데 어떠케 생각하는가
    절대찬성 3825 50%
    실효가 없을 것이다 196 2%
    몰으겟다 3688 48%
    2 삼상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원책을 세워야한다는데 어떠케 생각하는가
    탁치는 천만부당 2726 35%
    탁치지지 704 9%
    김(金) 여(呂) 양씨에게 일임 591 7%

  4.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2, 1946년 6월 11일, 각도 공보과장회의 개최(6.10-11).

    各道 公報課長會議는 10·11일 양일 軍政廳에서 개최되었다.
    제1일인 10일에는 美人課長과 朝鮮人課長 동석 하에 오전 9시에 개회되어 먼저 러취軍政長官의 훈시가 있은 다음 公報部長 李哲源의 훈시가 있고 與論調査局長 薛貞植의 연설로 일단 휴식, 오후에는 뉴맨大佐의 公報連絡, 스루워트少佐의 與論調査와 新聞報道의 必要性 及 連絡防止, 미라少佐의 講演局 公報局長, 朴鐘萬의 公報部와 中央放送局 視察 등에 관하여 각각 지시가 있었다.
    제2일인 11일에는 朝鮮人課長만이 모여 9시부터 그린中佐의 惡評檢討에 관한 연설과 공보에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담당 제씨로부터 설명 훈시가 있은 다음 하오 3시부터는 美國人과 朝鮮人課長이 합석하여 정보문담을 하고 동 30분부터는 원탁회의를 개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회의를 끝마쳤다.
    서울신문 1946년 06월 12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5. 좌우합작의 방법은 무엇?, 상호 리해가 급무, 무조건 합작이 통일의 원칙, 1946년 7월 23일자 3면.

    ◇이순탁 씨(연희대학) 일 조선의 현 사태에 있어서 좌의 대표는 공산당 우의 대표는 한민당이라고 아니할 수 없으니 량 당에서 우선 상호리해할 수 있는 인물끼리 즉 서로 리론을 리해하고 색채를 리해하고 감정을 리해할 수 있는 비공식 대표가 먼저 우호적으로 합작교섭을 추진시키는 것이 조흘 줄 안다 당의 정식대표이니 하는 형식에 너무 추도하면 부지불식간에 자연히 고집이 생기기 쉬읍다. 이 합작의 원칙문제만을 먼저 내세워서는 안된다 무조건 합작이라야 한다 이러한 후에 우리는 민족통일완성을 천명하야 미소공위 속개를 요구하여야 그때에 우리는 공위와 가치 신탁을 논하고 정책을 론하는 것이 정로인 동시에 타당한순서일 줄 안다.
    ◇박효삼 씨(연희대학) 일체의 문제는 정부수립 후로 연기하고 우선 정부수립에 일치 협력해야한다 원칙문제이니 친일파반역자 처분문제도 우리 정부 손으로 해야 한다 미소공위속개를 추진시키려는 차제에 민족상극은 서로 피하여야하니 무엇보다도 좌우합작이 무조건 필요하다

    ◇설정식 씨(여론조사국장)
    일、합작은 원칙적으로 공위 재개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 되어야할 것
    일、만일 합작이 입법기관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미군정당국이 좌우 양진영 세력의 균형적바렌스를 보장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일、합작에 관련된 삼상회의결정 탁치찬부문제는 이것이 정치기술의 한 방편적 술어에 불과한 것이다 좌우는 현재 국제정세를 재인식 재판단하야 거기에 순응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점을 발견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김오성 씨(인민당)
    우리 국가가 해방된 것은 국가적 힘에 의하야 되였으며 우리의 자주독립도 국제적 약속으로보장하고 있다 그러니 민족통일도 국제적 약속을 서로 이행하는데서만 가능하다

    ◇김옥천 씨(의사) 열광적이든 민중의 환희와 흥분은 이제는 다 식고 다못 우리 정부를 우리 힘으로 세우기만 갈망하고 있다 양익(兩翼)이 합작이 되지 못하는 원인은 신탁문제에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일제시대에 좌우의 별이 없이 한테 뭉처 투쟁하든 그 정신으로 우리 정부수립 목적 하에 호양(互讓)정신으로 합작해야 한다.

    ◇홍남표 씨(공산당) 민주주의 진영에서 발표한 삼대 원칙 즉 공위속개 촉진으로 남북통일좌우합작에 의한 임시민주정부수립 민족반역자 친일파를 제외 통일을 분렬하고 민주주의 정권수립을 방해하는 반동 테로 단체를 해산하며 그데로 행동을 근절시킬 것 이상 삼대원칙을 말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투쟁과 공작을 통하야서만 완전한 애국적 좌우익의 민족통일의 성과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완전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건립할 수 있을 것이다.

  6. 국대안반대운동(國大案反對運動), 한국사기초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정의: 1946년 국립대학안(國立大學案)에 반대하여 일어난 동맹휴학사건.
     
    발단: 1946년 6월 19일 미군정청은 경성대학과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수원고등농업학교 등을 통합하는 국립대학안을 발표하고, 8월 23일 <군정령>으로 국립서울대학교의 신설을 강행하였다. 이에 좌경 교수와 학생의 주동 아래 대상 학교의 학생회는 반대투쟁을 결의하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경과: 반대투쟁 이유는 국립대학안이 고등교육기관의 축소를 의미하고, 총장 및 행정담당 인사를 미국인으로 한 것은 운영의 자치권을 박탈하는 것이며, 통합의 조처가 각 학교의 고유성을 해친다는 것 등이었다. 즉 경성고등공업학교 재경 학생회는 양적인 증대로 인한 질적 저하와 교수의 부족 등을 이유로 반대하였고, 다른 관계학교 교수와 학생들도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9월 2일에는 광업전문학교 교수들이, 9월 5일에는 5개 전문대학 학생회와 이공학부 교직원들이, 7일에는 사범대학 학생회와 의학부 직원이 각각 성명을 발표하였다. 11월 초부터는 서울의 다른 대학에서도 등록 거부 등 동맹휴학에 돌입하고, 12월 초에는 서울대학교 9개 단과대학에서 일제히 반대운동을 일으키자, 미군정당국은 상과●공과●문리과대학에 각각 3개월 동안 휴교조처를 취하게 하였다. 1947년 1월 30일 문교당국에서 2월 3일의 개교일까지 등교하지 않는 학생은 제명하겠다고 공포하자, 반대운동은 절정에 이르러 2월 3일에는 상과●법과●공과●문리과대학 등이 동맹휴학하였고, 그 뒤를 이어 서울여자의과대학●연희대학●한양대학●동국대학●국학대학 등도 동맹휴학에 들어갔으며, 차차 중등학교와 인천●개성●춘천●대구 등의 지방학교로까지 파급되었다. 당시 동맹휴학한 학교 수는 57개교, 인원은 약 4만 명에 달하였다. 이와 달리 사건의 확산과 학교 전체의 마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전국건설학생연맹과 애국여학생회를 조직하여 국대안 지지운동과 동맹휴학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과: 반대운동과 지지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1947년 5월 12일에는 동맹휴학생 총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4,956명이 제적되었고, 총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교수 380여 명이 해임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5월 말에 국립대학안에 관한 수정법령을 공포함으로써 반대운동은 가라앉기 시작하였으며, 8월 14일에 제적학생 중 3,518명에 대한 복학이 허용되어 국대안반대분규는 1년만에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7. 여론은 이렇다, “국립 서울대학 개편은 찬성인가? 반대인가?,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이번 문교부당국의 획기적인 조치로서 관립대학전문학교를 통합개편하야『국립서울대학교』 란 새로운 종합대학을 창설할 바를 발표하였다. 이 신 제도의 확립과 운영 여하는 우리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는 바로써 본사에서는 이번 관립대학전문교의 개편에 대하여 교육 계급 문화 각 방면인사의 견해를 듣기로 하고 다음과 가튼 설문으로서 문답을 하였다.답은 선착순
    설문 ‘국립서울대학교’의 창건을 위한 관립대학 전문교의 종합개편은 찬성인가 반대인가?

    ▼세의대(世醫大) 교수 리학송 씨-이런 개편으로서 종합대학의 기능을 좀더 발휘할 수 잇지안흘가한다. 그러나 금후 그 운영 여하에 달려잇다 이상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므로 잘 운영하여나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할 것이다
    ▲국민후생협회 명□식 씨-이번 개편이 최선의 안이 될는지는 좀더 검토가 필요할 것이로되 지금 상태 아래에서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잘 운영하도록 조선사람 자신이 더 노력하여야 하겟다
    ▼조선학술원 리종국 씨-종합대학반대 리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 조선을 건설하는 도정에 잇서서 가장 존중시하여야할 학원의 자유를 구속 혹은 말살하야 관료적이요 중앙집권적인  리사회를 구성하야 완전한 통제기관으로 개편한다는 것은 반민주주의적인 동시에 량심적 진보적 교수들의 발전을 저지시키는 것이다
    ▼조선어학회 정인승 씨-나로서는 아직 말할 수 없오.
    ▼경성여의대 교수 이법용 씨-일、모르겟오
    ▼동국대학 학장 허영호 씨-개편할 필요를 느끼지 않소
    ▼경성약대 교장 도봉섭 씨-말할 수 없으나 현재의 형편으로는 개편하여도 안하여도 일장일단이 있다고 본다
    ▼국립과학박물관장 조복성 씨-말할 수 없다 개편 후 성과를 보지않고 절대 또는 미려부터 찬성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국립박물관 부관장 이홍식 씨-찬성한다 각 대학이 독립적으로 선다면 첫재 교수진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종합개편을 하게 되면 전극적으로 박학한 학사들의 권위있는 강의를 듯게 되니 더조흐리라고 밋는다
    ▼동덕고녀 교장 조동식 씨-찬성、동일한 시설을 가치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교수도 공통으로 쓸 수 있는것
    ▼덕성고녀 교장 송금선 씨-찬성、목적과 취지는 찬성이나 그 운영방법이 의문
    ▼휘문중학 교무주임 리치규 씨-반대 학교와 학교 사이에 조흔 점에 경쟁심이 없이 저발전성이 없올 것이오 학교에 특색이 없어질 것
    ▼국립도서관장 리재욱 씨-찬성、이유는 리사회를 잘 운용하면 큰 효과를 내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학교시설 교수진 등으로 미루어 보드라도 종합개편하는 것이 퍽 유익하리라고 밋습니다
    ▼배화고녀 교장 이강래 씨-찬성 과거 일제시대에는 우리들이 필요한 대학을 세워달라고 애걸을 해도 들어주지 안코 관리양성소 같은 전문학교만을 설치하였는데 이번에 각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어 종합개편을 단행함에 대하야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
    ▼리화고녀 교장 신봉조 씨-잘 모르겟다 전문이상의 교육방침에 대해서는 연구한 일도 없으며 아모된 지식도 엄지 못햇다.
    ▼중앙고녀 교장 황신덕 씨- 개편에 찬성할 점이 만타 반대할 리유는 적다
    ▼숙명여전 교장 임숙재 씨- 찬성뿐이겟소 교육게로서 이우에 더없는 기쁠으로 생각함니다  그러나 이상은 실현화해야 하는 것으로 이번 종합개편에 있어도 실천적으로 나아가야 될 것으로 밋는 바입니다
    ▼고려대학교장 현상윤 씨-대체로 반대다 그 이유는 너무 범위가 넓어서 실제로 운영문제에 적지않은 지장이 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개편을 하려면 현재의 서울대학은 그대로 두어두고 나머지 단과대학끼리 합하는 것이 조켓다 그리고 사범부는 따로히 구별하는 것이 더욱 조켓다
    ▼경성치과 대학 학장 박명진 씨-찬성한다 전체로 보아 반대할 리유가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본교로서는 기왕에 관립을 희망하고 있든 만큼 적의한 조치하고 생각한다
    ▼동성중학교 교장 장면 씨-일、찬성, 이、각 전문대학이 분립되여 있는 것보다 통일적으로 운영되여 가면 퍽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봄니다
    ▼국립화학연구소 허검 씨-불찬성이다 장래의 조선을 위해서 보드라도 한 학교로 통합한다는 것은 조치 못하다 외국의 례를 보드라도 불찬성이다

  8. 초대 대통령은 누구?,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한국여론협회(경성일보사 삘딩 내)는 회장 신성식 씨 서기장 박은성 씨를 중심으로 발족 이후 일반의 여론을 조사하고 인는데 일부 어떤 사람은『몰으겟다』하고 우리의 참다운 대중의 여론을 조사하는데 협력해 주지 안는 것은 실로 유감이라고 한다.
    지난 17일 서울시내 종로 남대문、종로 4정목의 3개소 통행인 6671인에 대하야 다음과 같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하엿다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문) 제1차 대통령은 누구인가?

    이승만 박사 1916인 29%
    김구 주석 702인 11%
    김규식 박사 694인 10%
    려운형 씨 689인 10%
    박헌영 씨 84인 1%
    기타 110인 2%
    물으겟다 2476인 37%
    문 미가방지에 대한 방법은 무엇?
    공정가 폐지 1863인 28%
    식량정책개정과 배급기구의 정비 225 17%
    모리배 단속 476 7%
    물으겟다 2503 38%
    기타 323 11%

  9. 선구회본부 여론조사부, 조선지도인물 여론조사발표,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45~51쪽.

    1. 여론조사의 문제. 본회 여론조사 제1호 제2호를 1945년 10월 10일 시작하여 동 11월 9일까지로 정하고 만 1개월 두고 좌기와 같은 문제를 제시하였다.(여론조사 제1호 양식)우리는 양심적 정치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인물을 찾고자한다. 과거 36년간 자유를 갖지 못한 우리는 인물의 표현방식이 없어 오늘날의 빈곤을 느끼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건국이라는 대창업이 앞에 있으니 반드시 우리를 지도하여줄 인물도 있다는 의미에서 출발하고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지도자를 찾고자하는 이 취지를 양해하사 찬조하여 주심을 바라는 바이다. 추선(推選)되는 인물의 자격.1. 국제정세에 정통하고1. 조선사정에 통달하고1. 가장 양심적1. 가장 과학적 1. 가장 조직적1. 가장 정치적으로 포옹할 아량을 가질 것. 1957매의 설문지 978매 회수.<정체>…(중략)…<내각> 대통령. 이승만 431명, 김구 293명, 여운형 78명, 무기록 176명. 내무부장. 김구 여운형 안재홍 허헌 기타 4인 무기록. 외무부장. 여운형 이승만 김규식 김구 기타 2인 무기록. 재무부장. 조만식 176명 김성수 98명 정태식 39명 김규식 37명 기타 7명 무기록. 군무부장. 김일성 김원봉 이청천 김규식 기타 2인 무기록. 사법부장. 허헌 김병로 최동조 이강국 기타 무기록. 문교부장. 안재홍 275명 김성수 68명 김창준 58명 기타 6명 무기록. 경제부장. 백남운 이관술 이(박)헌영 김규식 기타 7명 무기록. 교통부장. 최용달 하필원 안재홍 기타 10명 무기록. 노동부장. 박헌영 여운형 기타 무기록. 과거 조선 혁명가. 여운형 195명, 이승만 176명, 박헌영 168명, 김구 156명, 허헌 78명, 김일성 72명, 김규식 52명, 백남훈 48명, 최용달 40명, 박문희 19명, 이관술 15명, 최현배 12명.;[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라는 단체가 서울에 있는 105개의 정치, 사회, 문화 단체와 학교에 설문지 배포. 1,957매의 설문지를 배포하여 626매를 회수하여 집계한 ‘지도자’의 결과.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최현배 7%, 김규식 6%, 서재필 5%, 홍남표 5%. 외 23명.

  10. 동아일보 1946년 7월 30일자 4면.

    여론의 여론
    조선의 자주성 확보코 좌우익이 종래의 아집을 버리라
    설 일、우익 측에 부탁할 말은 무엇?
    문 일、좌익 측에 부타할 말은 무엇?
    ◇고려대학교장 현상윤 우리의 최고 목표는 민족전체의 번영과 행복에 있다。그러무로 우리의 태도는 동포 상애해야할 것이오 따라서 상호간에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구체적 문제로 하야서는 좌측에서는 계급 의식의 철저와 공산제 실시에 대한 주장을 버릴 것이오。우측에서는 봉건적 특권적 생활에 대한 구몽을 완전히 각성하고 나아가 근로대중으로 더부러 동고동락하는 균등생활을 영위할 결의를 굿게 할 것이다。그리하야 대체에 있어서 좌우가 다 사회 민주주의적 방향을 취하야 영국노동당에서 취하는 정책을 따라 나아가면 조선문제는 국제적 세력균형미 밋 해결될 줄 알며 이곳에 좌우합작의 가망도 있다。(중략)
    ◇이강국 씨(민전) 일、삼상회의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므로써 공위속개 촉진운동을 전개하야 남북통일의 민주주의정부수립에 매진할 것
    이、친일파、민족반역자 친 팟쇼 분자를 완전히 배제하며 토지개혁을 위시한 민주주의과업완수에 정진할 것
    삼、테로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투옥된 민주주의애국지사의 즉시 석방을 위하야 노력할 것 (후략)
     
    행사는 통일로, 여론협회의 조사, 동아일보 1946년 7월 30일자 4면.
    한국여론협회에서는 지난 28일 서울시내 5개 처 통행인 3678인에 대하야 다음과 같은 설문을 발하야 여론을 조사하였다는데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일、(설문) 좌파는 고집을 버리고 민족적 성의에 입각하라 2407인
    이、좌파의 합작오대원칙을 지지한다 568인
    삼、우파는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바란다 2196인
    사、우파는 좌파와 협조하야 나가기를 바란다 523인
    (설문) 8·15 기념행사는 통일하고 간소하게 하라 2569인
                                            포기 957인

  11. 비록 기념탑이 억천이라도 무용, 동아일보 1946년 7월 30일자 4면.

    문 팔·일오 기념행사에 거족적으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역도근로단 경기도지부장 서상천 씨-각 방명에 딸아 행사자체에는 달음이있어도 구지탓할 것이 없다 다만 어떠한 행사에도 애국심을 기우린 애국운동이 아니면 않될 것이다 즉 위선 조선독립을 촉성하는 운동이 않이면 않된다 이 비결은 오측 국민 각자의 봉사에만 있을 것이다
    ▼한국여론협회 박은성씨 일、해방전후의 감격과 희망을 새롭게 하여 전민족이 백지로 도라가 동일한 시각에 완전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적인 행사를 거행하였으면 합니다.(후략)

  12. 공판소동은 반민주적, 예방대책을 강구안한 당국에도 실책, 동아일보 1946년 8월 6일자 3면.

    설문 위폐공판 소동에 대하야 어떠케 생각합닛가
    ▼경기공업학교 교원 정규필 씨 담- 도대체 법치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괴사다 만일 사실무근한 일이라면은 그 재판에서 무죄라는 것이 백일하에 뚜렴하게 나타날 것이 아닌가?나는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선량한 인민의 행위라고는 볼 수 없다
    ▼경기고녀 교원 서기영 씨 담-불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오 그 소란은 어떤 당에서 햇던 큰 죄악이다 그런 단체에 대해 경찰당국은 철저히 감시하여 이 다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후략)

  13. 한국여론협회조사, 8원칙 지지가 다수, 위폐공판 소동은 공산계의 모략,동아일보 1946년 8월 6일자 3면.

    합작의『열쇠』인 좌우합작원칙에 대하야 민중은 어떠케 생각하고 있는가? 또 법원 개설이래 최대의 불상사인 위폐공판정의 소동에 대한 여론은 어떤가? 또 려씨 피습사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어떤가? 한국여론협회에서는 지난 3일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시내 3개처(종로、서대문、본정 입구)에서 통행인 1960인에게
    일、발표된 좌우합작 원칙에 대한 가부
    이、위조지폐사건 공판소동을 어떠케 보느냐?
    삼、려 씨 피습사건을 어떠케 보느냐?는 설문을 발하야 여론을 조사하였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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