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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62 : 이북답파기(3)-르포기자는 누구?

Posted by 신이 On 4월 - 30 - 2013

  남북이 분단된 지 8개월 만에 3·8선을 넘어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르포한 동아일보 기자는 누구였을까. 결론적으로 어려서 러시아지역에 살았고 해방 전에는 만주에서 생활했던 기자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그 후에도 회고담 같은 데서 이에 대한 얘기를 토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평안도지역을 찾은 기자는 ‘본사특파원 KK생’이라는 이니셜을 쓰고 있고 함경도지역을 르포한 기자는 ‘HH본사특파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두 사람인 것 같지만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KK생’라는 기자는 1946년 3월 15일 밤 걸어서 황해도 청단을 출발했고, ‘HH’라는 기자는 4월 2일 역시 걸어서 경기도 연천군 전곡에 도착했다. 동아일보는 4월 6일자부터 이 르포를 게재하면서 “3·8 이북에 특파한 본사 기자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북조선을 답파하고 이제 돌아왔으므로 이 답파기를 ‘평안도편’부터 여기에 실리기로 한다”고 밝힌다. 기자가 ‘이제’ 막 돌아왔다는 뉘앙스다.

 
  기자는 황해도 해주 학현 역에서 사리원으로 가는 경편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 열차는     3·8선을 넘어온 승객으로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처럼 붐볐다. 기자의 눈에는 정거장 플랫폼 마다 역명 간판에 피보다 더 붉게 써 있는 소련글자가 유난히 들어온다. 무표정한 소련철도사령군의 기다란 외투자락에서 금시라도 시베리아바람이 몰아오는 것만 같다고 느낀다.

 

  ‘가는 곳마다 소련군인들뿐 만아니라 소련사람들까지 해바라기 씨를 깐다. 기자는 26년 전 부모를 따라 로령(露領) 염포(鹽浦)에 가서 사는 동안 저녁마다 바다건너 고향의 산천을 그리며 해바라기 씨를 까던 생각이 났다. 야릇한 정취를 감춘 해바라기 씨 누구를 찾아 이곳까지 흘러왔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다.’ (1946년 4월 7일자 2면)

 

  해방을 평양에서 맞았다는 양명문  전 이화여대 교수의 증언.

 

  “그러던 중 8월 26일로 기억된다. 이날 마침내 소련군이 평양에 몰려들기 시작했다.…물론 전쟁에 시달리어 남루하고 거칠어지기도 했겠지만, 우리들의 신경으로는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추잡하고 우악스러웠다.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도 노상 해바라기 씨를 연신 씹으며 다녔다. 해바라기씨를 입에 넣자마자 껍질을 뱉어버리는 묘한 기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소련군대가 지나간 거리바닥은 온통 해바라기껍질이 너저분히 깔리는 것이었다.”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출판국 편, 조선일보사, 1982, 53~54쪽) 1

 

  신의주에서 압록강 철교를 바라보며 “여기가 국경이었는데”라며 탄식한다. 소련군은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 동안 만주의 공장기계를 헐어 이 다리를 거쳐 실어갔다. 기자는 만주에서 피난 나왔을 때 이 사실을 목격했다. 기자는 지난해 11월초에 신의주를 떠났다.

 

  ‘기자는 만주에서 피난 나와 작년 11월초에 신의주를 떠났다. 그때는 기계 실은 차량이 신의주에서부터 평양까지의 각연선(各沿線)에 들어찼더니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1946년 4월 12일자 2면)

 

  신의주까지 갔던 기자는 돌아올 때 함경남도 함흥에서 남행열차를 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하루 꼬박 걸어 전곡을 거쳐 돌아왔다.
  평안도편 르포는 기자가 서북조선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생생한 이야기지만 함경도편 르포는 함흥을 제외하면 열차에서 주민들을 취재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기적 일성에 정신을 차려 차창을 내다보니 질소공장으로 유명한 흥남이다. 해방이후 생산은 국영으로라는 표어를 내여 걸고 일시에 왜적 전부를 구축하고 인민공장으로 운영해 보려 했으나 최대의 노력만을 공급하든 이 땅 사람들에게 너무도 방대한 시설이라 원대한 포부와 세밀한 계획과 우수한 기술의 손이 가기도 전에 소련군은 진주하야 박래품(舶來品)기게는 뜯어가고 창고물건을 훔쳐내고 이러는 동안 진용을 정돈하여 작업을 시작하니 기술의 빈곤과 직공들의 태만으로 겨우 질소비로 비누 양초 카-바이트의 약간 생산을 제외한 다른 부문의 작업일체는 운영하여볼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이 동 공장 어떤 직공의 솔직한 고백이다.’ (1946년 4월 15일자 2면)

 

  전 북한 문화성 부상 정률(카자흐스탄 알마티 거주)의 증언.
 “1946년 봄 소련군정이 흥남비료공장을 몽땅 뜯어 소련으로 보낸 후 흥남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흥남비료공장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소유’라며 설득했습니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한울, 2008,139쪽) 2

 

  기자는 르포를 쓰면서 ‘자신이 넘은 삼팔선보다 더 넘기 어려운 삼팔선이 남북정치계에 가로놓여 있다’는 신의주에서 만난 K군의 말을 생각한다.

 

  ‘이제 서북조선을 주마식으로 달리고 나서 눈을 감고 생각하매 아물아물 이국의 풍경처럼 이국에서 고생하는 동족들이나 만나고 온 것처럼 그 땅의 동족들의 오늘이 가여워 우는 맘을 억누르기 어렵다. 내 맘뿐 아니라 이 민족의 가슴을 에는 삼팔선이여.’ (1946년 4월 13일자 2면)

 


동아일보 자료사진
1946년 당시 3·8선. 동아일보는 1946년 봄 이북으로 기자를 특파해 ‘이북답파기’ 르포를 실었다,

 

 

Notes:

  1. 양명문, 소련군의 만행,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출판국 편, 조선일보사, 1982, 53~54쪽

    그러던 중 8월 26일로 기억된다. 이날 마침내 소련군이 평양에 몰려들기 시작했다.이들은 소만국경을 넘어 청진 나진 함흥 원산을 거쳐 들이닥친 대부대와, 또한편으로는 만주의 길림 할빈 봉천 안동을 거쳐 신의주로 해서 평양에 들어온 부대도 있었다.…물론 전쟁에 시달리어 남루하고 거칠어지기도 했겠지만, 우리들의 신경으로는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추잡하고 우악스러웠다. 그들은 길을 걸으면서도 노상 해바라기 씨를 연신 씹으며 다녔다. 해바라기씨를 입에 넣자마자 껍질을 뱉어버리는 묘한 기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소련군대가 지나간 거리바닥은 온통 해바라기껍질이 너저분히 깔리는 것이었다.

  2.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한울, 2008,139쪽.

    북한 문화성 제1부상을 지낸 정률(카자흐스탄 알마티, 1991.10.18)과의 인터뷰. 계속해서 정률의 증언을 들어보자.
    1946년 봄 소련군정이 흥남비료공장을 몽땅 뜯어 소련으로 보낸 후 흥남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흥남비료공장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소유’라며 설득했습니다.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1947년 뜯어갔던 기계 등의 시설을 다시 흥남으로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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