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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61 : 이북답파기(2)-함경도반

Posted by 신이 On 4월 - 30 - 2013

  동아일보의 ‘3·8선 이북 답파기(踏破記)’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기자의 이니셜이 ‘HH’로 바뀌었다. 지역은 함경남북과 강원도라고 한다. ‘3·8선 이북 답파기-함경도반’이란 제목의 르포는 1946년 4월 14일자부터 5회 연재됐다.

  기자가 이용한 교통편은 함경남도 성진에서 하루한번씩 떠나는 남행열차. 기자는 함흥에서 기차를 타고 남으로 오는 피난민들에 섞여 ‘그들의 눈물나는 호소와 참상을 보며 들으며 함께 눈물지으며 이 답파기를 쓴다’고 했다. 기자는 이동사찰대(과거 이동경찰)의 눈을 피해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그곳 실정을 듣는다. ‘만주방면과 함경북도로부터 밀려오는 전재피난민과 인민위원회의 탄압적 행정에 실증을 느낀 백성들의 남부여대한 이사보따리는 날이 따스하여 옴을 따라 성진을 기점으로 하로 단한번씩 운전되는 이 남행열차를 타려고 며칠씩 각지 정거장 대합실에서 굶주려 떨고 있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1946년 4월 14일자 2면) 1

 


동아일보 1946년 4월 14일자 2면, 삼팔선 이북 답파기 함경도반 ①

 

  기자가 기적 소리에 정신을 차려 차창을 내다보니 질소공장으로 유명한 흥남. 기차는 이곳을 떠나 본궁(本宮)공장지대를 서쪽에 끼고 북진하여 함흥역에 닿았다. 철도경비대원과 보안대원들의 경계와 감시를 받으며 승객 전부가 쏟아져 나와 여관과 대합실에서 하루 밤을 지낸다. ‘함흥은 함경남도의 수부(首府)로 해방 초에는 질서는 다소 문란하였다고는 하나 크나큰 감격과 흥분 속에 서울서 중앙정부가 성립될 것을 믿고 조선민족 함남지방위원회를 함흥공회당에 설치하고 학생보안대를 동원시켜 치안을 확보하고 각계 유력자가 회동하여 새 건국을 준비할 애국의 지성을 보이었으나 8월 25일 소련군이 진주하고 군정이 실시되어 야간통행이 금지되고 공산당이 대회를 소집하고 약탈 협박 강간 절도가 횡행하고 총살당하는 자가 생기고 보안대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재물을 박탈하는 일이 연달아 발생하고 공산당의 주장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하는 동안 민중은 해방의 기쁨도, 독립의 희망도 일시에 춘몽으로 돌아가고 모두 공포 속에 휩싸였다.’ (1946년 4월 15일자 2면) 2

 
  3월 11일 발생한 함흥학생사건에 대한 기자의 설명이 계속된다. ‘3월 11일 함흥의전학생들이 ’우리들의 식량은 어디로‘라는 기치를 들고 먹어야만 공부도 한다고 외치면서 가두행진을 한 후 도 인민위원회를 방문하고 식량대책에 대한 책임있는 대답을 구하였으나 보안대의 위협으로 밤에야 해산하고 동 12일에는 함흥농업학교가 궐기하여…13일에는 영생중학을 비롯하여 함남중학 함흥상업 실수(實修)여학교 학생 1천 수백명이 애국가를 높이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다가 화물자동차에 실은 보안대의 난사하는 총에 맞아 즉사 5명 중경상자 수 10명을 내이고 시민 1명이 즉사하면서도 행진을 계속하매 소련군마저 출동하여…’(1946년 4월 16일자 2면) 3

 
  기자는 함흥의 여관에서 자고난 뒤 이튿날 국제시장이라고까지 불리는 유락정(有樂町)시장을 구경한다. 다시 발길을 돌려 반롱산허리에서 5백년 전 지어진 풍패관을 둘러본 뒤 시가를 돌아 정거장에 다다른다. ‘벌써 대합실은 남행여객으로 대만원을 이루고 무장보안대원은 무시무시하게 심문을 시작한다. 날은 저물고 바람조차 쌀쌀하여 피난민들은 어린 것들을 안고 남행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1946년 4월 18일자 2면) 4

 
  기자가 탄 열차는 함남 정평군 신상역에서 몇몇 승객을 싣고 다시 남으로 진행한다. 잠을 깨니 비 나리는 4월 2일. 도보로 경기도 연천군 전곡에 닿으니 저녁 7시다. 철교 옆에서 소련군이 막사를 짓고 오고가는 사람을 검색한다. ‘일일히 소지품을 검사하고 신체를 다루어보고 기분이 좋아야 건너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소지금을 몰수하고 물건을 빼앗고 이 철교  외에 지름길로서 배로 건너다가는 총살. 정조유린당하는 이러한 살풍경은 아마 세계 어느 나라 국경에도 없을 것이다.’ (1946년 4월 19일자 2면) 5

 
  기자는 “해방이후 남북이 차단되면서도 오직 하나만이 서로 통하고 있으니 이것은 함남에서 발전하여 서울에 송전되어 오는 수력전기로서 전차를 달리게 하고 전등을 켜고 기계를 돌리게 하는 대동맥이 되어 있다”며 “우리도 전기 고압선과 길이 정과 마음과 뜨거움으로써 서로 남북이 어우러져 한줄기 커다란 동선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지 않을 것인가”고 반문하고 있다.

 

 

 

Notes:

  1. 삼팔선 이북답파기 함경도반 ①, 동아일보 1946년 4월 14일자 2면.

    HH본사 특파원, 누대(累代)살든 땅 버리고, 남으로 이동하는 주민군, 부안의 거리에 압살된 언론의 자유
    『삼팔선 답파기의 제2대는 함흥을 기점으로 남으로 오는 피난민 속에 한사람이 되어 그들의 눈물나는 호소와 참상을 보며 들으며 함께 눈물지으며 이 답파기를 쓴다』
    해방의 가을도 지낫고 진통의 겨울도 가고 해산의 봄도 왓것만 □다운 소식을 무궁화동산에  전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에 못내 서러워하는 기자는 오래간만에 함경선열차에 □을 실코 해방이후 처음 함경남북과 강원 등 3도의 실정을 듯고 보고 이 암행(暗行)의 답파기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만주방면과 함경북도로부터 밀려오는 전재피난민과 인민위원회의 탄압적 행정에 실증을 느낀 백성들의 남부녀대한 이사보따리는 날이 따스하여옴을 따라 성진(城津)을 기점으로 하로  단한번식 운전되는 이 남행열차를 타려고 몃칠식 각지 정거장 대합실에서 굶주려 떨고 잇는 정경은 참으로 눈물겨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소련(蘇聯)군이 기게를 또더갓기 때문에 요지음에야 겨우 조업(操業)을 시작하여 일부의 기게를 돌리고 잇다고 전하는 고주파공장을 뒤로하고 성진을 떠난 함흥행 여객열차는 수 천 명의 고단한 천만가지의 시□을 실고 무연탄 연기를 토하며 힌 갈메기 푸른 물결을 히롱하는 동해를 끼고 남으로 남으로 작정된 시간도 없이 천천히 달리는 동안 좌우의 산천을 도라보매 옛 얼골 새롭거늘 이 강산의 주인으로 여러대 조상의 뼈를 뭇고 한식(寒食) 추석(秋夕)에 성묘하든 자손의 정성도 집어치우고 주택과 가재도구도 버리고 잔뼈 굴거진 정든 고향을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하야 떠나는 사람이 늘어감은 이 어이된 일인가?
    또한 이들의 안주의 락토는 과연 어대서 구하게 될 것이며 어떠게 건설되어 갈 것인가?

    만주에서의 전재피난민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으로 수농(水農)개척에 무던히 힘써온 보람도 없이 만주인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가족을 일코 쫏겨서 또는 도망처 그래도 고국이 그리워서라고 할가? 초라한 나그네로 3남에 돌아가거니와 이 고장에 뿌리박켜 살든 사람들조차 무수히 삼십팔도선을 넘으려하니 이 백성들의 안탁가운 사정은 무엇이며 사회의 실정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 열차에 편승한 이동사찰대(과거 이동경찰)의 눈을 피하여가며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곳 실정을 들어보건대 작년 8월 15일 일본이 황북하고 그달 하순 소련군이 진주한 이래 과거 좌익(左翼)운동에 관게하였던 실적 잇는 사람들이 소련군을 배경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보안대(保安隊)를 편성하여 행정 사법、치안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공산당과 표리일체가 되어 소련 그대로의 공산국가체제의 확입을 위하야 그 세포(細胞)단체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공산청년동맹 여성동맹 등 가지가지의 새로운 방게조직으로 대중을 파악하기에 힘썻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시게 만연필『트렁크』현금이 가두에서 약탈당하고 밤 통행금지시간 중에는 주택 상점 사무소에 침입하야 70여 탄을 발사한다고 자랑하는『따발총』으로 위협하며 재물을 강탈한 우에 부녀자를 □욕하는 범행이 속출함에 이르러 일반의 불안과 비난은 날로 증대하고 원성과 분노는 날로 놉파감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대표기관으로 자처하면서도 인민위원회와 보안대는 폭행을 저지할 방책을 마련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엄페하고 붉은 군대는 우리조선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므로 무한의 감사를 들여야할 것이라고 피해가측을 꾸짓지를 일수로 하고 18세 이상의 청년으로만 구성된 보안대원의 횡포 또한 자심하여 민심의 리반 되는 거리는 천리라만리라 형용할 수 없게 머러저 가고만 잇는 형편이다. 언론의 자유를 봉쇄당한 현재의 실정으론 정당한 의론도 주장도 불평도 불만도 호소도 애원도 투쟁도 반박도 입을 열어 말할 수 없고 귀를 기우려 드를 수 없게 되였으니 이른바 유구무언이 되고 만세음이다.

  2. 삼팔선이북답파기 함경도반 HH본사특파원 ②, 동아일보 1946년 4월 15일 2면

    환원배급을 약속햇든 성출미는 모두 어디로 갓나? 텅 비인 흥남질소공장은 한일월(閑日月)
    기적 일성에 정신을 차려 차창을 내다보니 질소(窒素)공장으로 유명한 흥남(興南)이다. 해방이후 생산은 국영으로라는 표어를 내여 걸고 일시에 왜적전부를 구축하고 인민공장으로 운영해 보려 햇으나 최대의 노력만을 공급하든 이 땅 사람들에게 너무도 방대한 시설이라 원대한 포부와 세밀한 게획과 우수한 기술의 손이 가기도전에 소련군은 진주하야 박래품(舶來品)기게는 또더가고 창고물건을 훔처내고 이러□동안 진용을 정돈하여 작업을 시작하니 기술의 빈곤과 직공들의 태만으로 겨우 질소비로 비누 양초 카-바이□□의 약간 생산을 제외한 다른 부문의 작업일체는 운영하여볼 꿈도 꿀 수 없다는 것이 동 공장 어떤 직공의 솔직한 고백이다.
    사실 이 공장은 조선의 가장 큰 천연자원이라고하는 장진강(長津江)의 삼십여만 키로 부전강(赴戰江)의 이십만 키로 허천강(虛川江)의 이십여만 키로 독노강(禿魯江)의 이십만 키로와트의 수력전기와 압록강의 백수십만 키로와트의 전력자원을 배경으로 우리조선은 물론 일본 만주 중국 남미(南美) 등지의 시장에 수십 종의 상품을 공급하려고 건설된 것인만큼 압프로  이 공장시설의 운영여하는 조선산업경제의 자주적 발전과 해외무역에 거대한 힘이 될 우리들의 지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기차는 이곳을 떠나 본궁(本宮)공장지대를 서쪽에 끼고 복진하여 함흥(咸興)역에 다으니 삼팔식 장총을 가진 만흔 철도경비대원과 보안대원들의 경게와 감시를 바드며 승객 전부가 쏘다저 나와 혹은 여관으로 혹은 대합실로 모다 우수에 잠긴 얼굴로 또 하룻밤의 사나운 꿈자리에 헤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함흥은 함경남도의 수부로 해방 초에는 질서는 다소 물란하였다고 하나 크나큰 감격과 흥분 속에 서울서 중앙정부가 성립될 것을 밋고 조선민족함남지방위원회를 함흥□회당에 설치하고 학생보안대를 동원시켜 치안을 확보하고 각게 유력자가 회동하여 새건설을 준비할 애국의 지성을 보이였으나 8월 25일 소련군이 진주하고 군정이 실시되어 야간통행이 금지되고 공산당이 대회를 소집하고 약탈 협박 강간 절도가 백주에 횡행하고 총살당하는 자가 생기고 보안대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재물을 박탈하는 일이 연다러 발생하고 공산당의 주장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하는 동안 민중은 해방의 기쁨도 독립의 히망도 일시에 춘몽으로 돌아가고 보다 공포 속에 휩싸였다.

    차침 소련군을 배경으로 공산당의 진출이 적극화하여 각종 세포단체가 조직되고 함남독립국가로의 성격을 표명하는 이십개조의 도 인민위원회 선포문(宣布文)이 공포된 후 농지(農地)의 매매는 정지되며 소련군표(軍票)가 시장에 나오면서부터 물까는 오르기 시작하야 대중의 경제생활위협을 바덧다 한편 미곡공정가격을 배로 올리고 성출을 종가에 호소하야 삼십여만 석을 집하하여 이것을 도회지의 소시민층과 공장의 노□대중에게 종전의 2홉 3작을 대인소인 구별 없이 3홉 3작으로 증배를 단행하여 한동안은 배불리 먹고 풍년송을 노래해스나 소련군이 쌀섬과 벼섬을 자동차로 어데로인지 수없이 나르자 3월 1일부터 농가에 환원(還元)배급을 약속하고도 실행 못할 뿐 아니라 배급량을 훨신 주리고 보안대를 동원하야 취체를 강행하엿기 때문에 미곡의 암매가격은 시각을 다투어 폭등하니 다른 물까도 이에 따르지 안흘 수 없게 되고 보매 도회 농촌 곰장지대를 막론하고 생활고의 아우성소리는 노파만 가게 되었다 때마침 3월상순 토지개혁 법령의 실시를 보게 되매 지주 자작농 소작농 등 직접 농토에 관게 잇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에 준 충동과 불안은 날을 더하여 심각하여 가든 중 마침내 우리들의 기억에 새로운 함흥학생사건을 비저 내어 유혈의 처참한 비극까지 보게 되였으나 언론 집회결사 출판 통신 신앙의 모-든 민주주의 원측에 의한 자유를 일흔 이 지방사람들이 다 그 애달푼 심정 호소할 곳이 없었다.

  3. 삼팔선이북답파기 HH본사특파원 함경도반 3, 동아일보 1946년 4월 16일 2면.

    쌀 달라는 학생행렬에 실탄총을 난사, “함흥학생사건”의 진상
    학생사건은 이미 신의주(新義州)와 평양(平壤)에서 일어나 다수한 히생자를 내이고 또 함흥에서 이 일을 듯게 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3월11일 함흥의전(醫專)학생들이『우리들의 식량은 어디로』라는 기치를 들고 먹고야만 공부도 한다고 웨치면서 가두행진을 한 후 도 인민위원히를 방문하고 식량대책에 대한 책임잇는 대답을 구하였으나 보안대의 위협으로 밤에야 해산하고 동 12일에는 함흥농업학교가 궐기하여 역시 시가행진을 한 후 도 인민위원회를 차저 왜놈들에겐 4홉식 배급하여주면서 웨 우리들에게는 20여일채 아무런 배급이 없느냐? 그리고 왜놈들은 웨 빨리 보내게 하지안느냐고 질문하였으나 또 간부 측에서는 지난 겨을동안 함흥시내에서만 일본인 사망자 1만 3천명을 내이게 되어 소련군사령부에서 특히 미곡배급을 증배한 것이므로 우리들의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자 학생들은 격분되어 우리들도 굶어죽어야 쌀이 나올 것인가라고 웨치며 질문을 연발하여 형세 자못 급박하게 되었으나 역시보안대의 위협으로 밤늣게 해산하였다
    다음 13일에는 영생중학(永生)을 비롯하야 함남중학 함흥상업 실수(實修)녀학교 학생 1천 수백명이 애국가를 노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다가 화물자동차에 실은 보안대의 란사하는 총에 마저 즉사 5명 중경상자 수 10명을 내이고 시민 1명이 즉사하면서도 행진을 게속하매  소련군마저 출동하여 따발총을 상점가에 란사하는□에 유리창의 파편이 비산하야 안면파손에 부상을 밧은 학생이 만허 할 수 없이 해산하게 되니 시민의 울분도 함께 폭발하야 소련군복을 모방한 보안대원정복을 입은 자와 왜병군복을 입은 자는 닥치는대로 란타하여 십 수 명의 부상자를 내이고 날이 저□□ 보안대와 소련군에게 붓잡혀 교화소(敎化所) 형무소와 교화장 유치정에 수용된 학생이 4백여명에 달하여 모다 □□한 취조와 고문을 밧으면서도 애국가를 불러가며 서로 격려하였고 아직도 십수명을 유치중이라 한다

    사실을 소군(蘇軍)에 호소하면 반동분자혐의로 역효과를 초래
    20여일 간 식량배급을 밧지 못하고 미곡의 자유반입조차 금지된 중에서 굼주려 □□□요구하다가 마침내 히생자를 내고 학교는 중초등 전부 휴학되고 선생은 파면되고 나종에는 ▲식량요구▲토지개혁법 실시반대▲반소(反蘇) ▲인민위원회의 불승인 등 혀구의 사실를 만들어 자기들의 정당성만 내세우려하고 학생들의 배후에는 자본가 지주와 서울방면에서 파견된 테로단이 있은 것이 판명되어 그들을 체포하야 취조중이라고 한다
    함흥시민들은 이 학생사건이 이러난 다음날부터 적으나마 피흘린 갑스로 응급식량배급과 자유반입이 허락되어 입에 풀칠을 하면서도 히생당한 학생들의 부모형제에 애도의 말조차 전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도와 시 보안서□이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한 소련군 현지당국에 현하의 실정과 민심의 동향 등을 정당하게 이해하도록 하기에 노력하면 반드시 조흔 시책이 있으련만 사실을 위곡하야 까닥하면 반동분자라!친일파라!반소운동이라고 고자질을 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마저 소련군의 신일을 일는 결과를 가저오고 있으며 왜놈들이 이 틈을 이용하야 미인게(美人計)로서 소련군에 아부하며 조선사람을 중상하는 것으로 일삼는다고 하니 뜻 있는 자 가슴을 두드리지 안흘 수 없는 애달본 현실에 처하여 있다 한다.

  4. 삼팔선이북답파기 HH본사특파원 함경도반 (4), 동아일보 1946년 4월 18일자 2면

    범람하는 “붉은 군표(軍票)” 물건 사는 이는 모다 소군(蘇軍)
    함흥여사에서 하루 밤을 쉬면서 여러 가지 사정을 듯고 이튼날 국제시장이라고까지 불러오는 유락정(有樂町) 시장을 구경하니 위선 물건보다도 장사꾼이 만흔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장은 소련군이 진주한 뒤로부터 활기를 따기 시작하야 처음에는 왜놈들옷감과 기구가 터저 나와 소련군에게 반가운 선물이 되엇고 요지음에는 조선사람들 중에서도 과거의 부자들의 예금(預金)이 동결되고 토지는 무상으로 몰수당하고 수입은 없고 지출은 늘어가고 하야 경제적으로 몰락한 것과 삼팔선을 너머가 살려는 사람들이 가산정리로 말미암아 별별 물건이 다 나오게 되어 소련군은 갑의 고하를 막론하고 붉은 군표를 아깝지 않게 내여 밀어  조흔 물건을 한아름식 사가지고 히색이 만면하여 돌아간다. 중년부인들이 의복감을 팔에 걸고『수시수시』(여보시요)하면서 소련군의 손목을 연다려 잡어 나꾸곤『호로쇼 호로쇼』(조흔 것입니다)하면 또한「니나-더」(실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또 서로 무엇이라고 떠드러 대이는 풍경은 해삼위(海蔘威)를 연상케 한다.

    전기 다마 하나에 1백60원『쌀』한 섬에 4천원『광목』한 필에 3천 3백원 싱거 재봉기는 1만 3천원 양복지 1착에 8천 원 등으로 하도 비싸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끼 있는 손님은 소련군과 그들의『색시』들뿐이다 작년 9월 군사 점령후 곳 가족부대가·도착하야 이 땅 주인을 모라내고 만은 주택을 차지하였으니 새살림의 터를 닥기엔 여러 가지 물건이 소용될 것이며 부대의 이동에 따라 본국에『푸레센트』로 가지고 가는 것도 한 두 가지가 안일 것이  짐작된다 그러는 통에 이 땅에 뿌려지는 붉은 군대의 군표야말로 경제게에 중대한 문제의 씨(種)를 뿌려 대중은 불안을 늣기고 있다.
    붉은 돈이 지금까지 얼마나 박어내었는지 그는 붉은 군대 사령부의 군사점령이 끗날 때까지 이 필요에 따라 작정될 것이려니와 발서 시장에서는 조선은행권이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랏고 붉은 군표만이 정상적 화페로 유통되고 있다. 다시 발길을 돌려 반롱산(盤龍山)허리에이트니 5백년전 건물로 단하나 박게 남지 않엇던 웅대한 풍패관도 소련군의 난폭한 손에 반이상이 허므런진 잔해를 남기고 다른 주택과 건물 고적 등에 만은 상처를 입히어 좀더 조선 사람을 사랑하고 원조하는 아랑이었으면 하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원이다
    시가를 돌아 정거장에 다가니 발서 대합실은 남행여객으로 대만원을 이루고 무장보안대원은 무시무시하게 심문을 시작한다. 날은 저물고 바람조차 쌀쌀하여 피난민들은 어린 것들을 안고□며 남행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게속)

  5. 삼팔선이북답파기 HH본사특파원 함경도반, 동아일보 1946년 4월 19일자 2면

    이동하는 물자와 기계 남북의 부모상봉은 언제?
    열차는 신상(新上)역에서 몃몃 승객을 실코 다시 남으로 진행하는 동안 그들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엇다.
    얼마 전부터 소련군은 이 지방에다 굉장히 넓은 비행장을 건설하려고 6개 리의 농촌부탁에서 주민의 철퇴를 명령하여 왓으나 춘경기를 압둔 농촌에서 거대한 면적의 농토를 일코 정든 주택을 빼앗기고 어데로 가려느냐고 소련군사령부에 진정을 하엿더니 사령관은 우리 붉은 군대는 세게의 모-든 약소민족을 해방시키려고 하로에 10만 이상 병원(兵員)의 상실되는 신고를 격그면서 끗끗내 승리를 어더 조선의 해방을 가저온 은헤를 생각할지라도 자진하야 주택과 농토를 내여 노코 다른 곳으로 물너갈 것인데 이 무슨 진정이냐고 하야 모다 눈물을 먹음고 해여젓다고 한다
     해방이후 얼마 아니되여서부터 평원선을 거처 원산으로 또는 함흥방면으로 날마다 어데서날너오는 철재(鐵材)인지 산같이 실흔 화물차가 수십량식 소련군의 감독하에 수송되여 갓고 현재도 만흔 철재와 기게□속이 이동되며 각 정거장에 잠자고 있는 것도 상당하다고하니 과연 지나간 8개월간 실어나론 기게와 철재는 과연 어데서 뜨든 것이며 또 어데로 간 것인지  따라가 본 사람이 없는 이상 무엇이라 억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기자는 다만 그것이 조선을 복되게 하는데 전부가 씨워질 것을 바랄뿐이다

    잠을 깨니 비 나리는 4월 2일 도보로 전곡(全谷)에 다으니 □ 일곱시 백오십리길이란 쉬운 것이 아니였다 두 다리에 맥은 시게태엽이 □니듯 좀더 갈내도 갈 수 없이 되는 하로의 노 정(路程)이다
    강물은 여전히 구비처 흐르고 산 모양 또한 의구하야 푸른 빗슬 더하는 봄이언만 이 길을 것는 자 가슴에 어름이 얼고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게 되니 죄재어천(罪在於天)이다
    소련군이 절교여페 조고만 막을 짓고 매일 만여명을 헤아리는 오고가는 사람들을 검색하는데 잡지나 신문 등 인쇄을은 질색이다 일일히 소지품을 검사하고 신체를 다루어보고 기분이 조와야 건너보내고 그러치 안흐면 소지금을 몰수하고 물건을 빼앗고 이 철교 외에 지름길로서 배로 건느다가는 □□ 정조유린당하는 이러한 살풍경은 아마 세게 어느 나라 국경에도 없을 것이다 미소양군이 호시탐탐 강을 지음처 대치하고 공동위원회를 여러 정부수립을 의론하고 민족은 패가 갈니어 무러뜻고 하니 남북에 갈나진 무모형제들은 언제나 단락하게 지내일 날을 바라리오?
    해방이후 남북이 치단되면서도 오직 하나만이 서로 통하고 있으니 이것은 함남에서 발전(發電)하야 서울에 송전되여 오는 수력전기로서 전차를 달리게 하고 전등을 켜고 기게를 돌니게 하는 대동맥이 되여 있거니와 우리도 전기고압선과 길이 정과 마음와 뜨거움으로써 서로남북이 어우러져 한줄기 크다란 동선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지 않을 것인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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