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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55 : 3.1 운동 기념(2)-갈라진 기념식

Posted by 신이 On 2월 - 27 - 2013

  첫 삼일절 기념식은 해방직후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으나 완전 독립을 앞두고 민족이 분열돼 기념식도 따로 치렀다.

 

 1945년 말 삼상회의지지 여부를 둘러싼 회오리 정국에서 송진우 한민당 수석총무가 피살된 후 그가 추진했던 국민대회는 소집되지 못했다. 1 2대신 삼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안 반대운동에 나선 임시정부가 1946년 1월 4일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했고, 2월 1일 회의에서 최고 정무위원회 설치가 결의돼 국민대표 민주의원 28명이 탄생했다.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은 1월 19일 발기돼 2월 15~16일 ‘과도적 임시국회로서 조선민족의 유일한 정식대표’를 표방하고 결성됐다.

 

 삼일절을 앞두고 기미독립기념회와 3·1기념회가 기념식을 각각 거행할 조짐을 보이자 각 신문 통신사 대표가 나서 통합을 모색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3 우익의 기미독립기념회는 서울운동장에서 대회를 개최했고 좌익의 3·1기념회는 남산에서 대회를 치렀다. 4 남산대회에서는 김광수가 개회사를 하고 이강국이 민전의 3·1기념문을 낭독했다. 독립선언문은 48인중의 1인인 정로식이 낭독했다. 5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 박사는 삼일절 직후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연적 민족지성의 발로로 삼일절 기념식을 거행하는데도 이 사실의 보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언론기관의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6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은 언론계가 정치권과 같이 신탁통치안 반대파와 지지파로 양분된 결과였다. 민족주의로 일관한 동아일보는 반탁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7  

 


동아일보 자료사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초청된 연사들. 가운데가 김구선생(1947.3.1)

 

 

  

Notes:

  1. 김준연(金俊淵), 추억!고하 송진우 선생(상)- 해방후 첫 삼일절을 당하야, 동아일보 1946년 3월 1일자 1면

    선생이 가신 후 첫삼일절을 당하였나이다. 해방후 처음 당하는 이 국경일을 당하야 삼천리강산 곳곳마다 경축하는 우리동포들은 해방의 기쁨을 체험한 것이외다
    수도 서울서는 1일 오전 9시40분부터 개시하야 종로 종각압헤서 축전을 성대히 거행함니다 처음에 종로인경을 일곱번 처서 전국에 라되오로 방송하야 해방의 기쁨을 고하기로 되엇음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개회사를 하시고 오세창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시고 김구 선생께서 경축사를 하시고 김규식 박사의 발성으로 우리 독립을 축하하는 만세를 삼창하기로 되엇음니다 이 회합은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에서 주권하는 것임니다 이승만 박사가 동원 의장 김규식 박사가 부의장 김구 선생이 총리가 되섯음니다
    이만한 진용을 들으시면 민주의원의 성격을 대강 짐작하실 줄 압니다 선생이 가신 후에 1월 10일을 기하야 개최하려고하던 국민대회는 소집되지 못하엿고 2월 1일에 거의 동일한 성격을 가진 비상국민회의가 되었읍니다 그 회의에서 긴급결의가 채택되엇읍니다 한국의 자주적 민주주의의 과도정권 수립과 기타 긴급한 제문제의 해결에 관하야 관계열국과 절충하며 필요한 제조처를 행하기 위하야 최고정무위원회를 치(置)하되 그 원수와 선정은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엇읍니다 이 결의에 의하야 국민대표 민주의원이 성립되엇읍니다 그 구성인원은 28인인대 미소공동위원회가 미구(未久)에 재회 될 것을 생각하고 정권수립 준비에 분망하고 잇는 형편입니다 파란곡절이 만히 있을 줄 생각하오나 정계의 동향은 대체에 있어서 선생의 생각하시던대로 진행되고 잇는 듯합니다 (사진은 송진우선생)

  2. 김준연, 추억! 고하송진우선생 (하)-해방후 첫번 삼일절을 당하야, 동아일보 1946년 3월 2일자 1면

    삼일운동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선생의 말슴하시던 것이 지금 이 삼일절을 당하고 보니 기억이 더욱 새로워집니다 잡지 태양에 의하야 세계의 새기운을 짐작하게 된 선생께서는 발서 그 전년 하추간(夏秋間)부터 삼일운동을 준비하섯던 것이지요 중앙학교를 책원지로하여 가지고 최모(崔某)와의 내왕(來往)이 빈번하엿고 상윤씨로 하여금 파수를 보게하면서 숙직실에서 밀의를 거듭하엿드라지요 최모를 통하야 천도교의 손병희선생과 연락을 취하게 되고 다시 유성용씨를 통하야 박영효씨와 연락을 취하게 하엿드라지요 평북으로부터 이승훈선생이 오시게 되어서 야소교(耶蘇敎)와의 련(連)□는 긴밀하게 되엇드라지요 이 반년간의 주모(籌謀)□책에 그 엄밀한 경찰하에 □설되지안코 진행되엇다는 것을 참 기적이라하겟읍니다 선생은 삼일운동의 한 장본인이요 한 발단자이엇던 짐작됨니다 그로부터 28년 오날 이러케 삼일절을 마지하게되니 선생을 생각하는 마암이 더욱 간□됨니다
    중일전쟁이 나고 이어서 미일전쟁이 발발하야 12월 8, 9일에 진주만이 격파되고 영국의 동양함대가 분수될 때에 나의 실망 낙담은 퍽 커짓습니다 이때에 나의 위안처을 선생과 창낭형(滄浪兄)이엇나이다 8월15일 전후하야 여씨와의 합작이 나를 통하야 제의되엇을 때에 선생은 단연 거절하엿나이다 나는 선생의 정하신 노선을 따라서 나가며 한국민주당을 위시(爲始)하야 여러 동지들도 그대로 나가고 엇나이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야 분투하고 잇나이다 동아일보로 고투하고 잇사오며 국민대회준비회도 □즉 남아잇나이다 선생은 우리 마암속에 항상 살어 게십니다 (끝)

  3. 삼·일 행사 통일하자, 기미 삼일 량준비회에 제의 권고, 십삼 신문、통신 대표들이 결의, 동아일보 1946년 2월 27일자 2면

    전 국민이 다가치 감격의 성전을 올려야할 국경일 삼일절을 압두고 이 식전 거행을 주최하는 단체가 기미독립선언 기렴준비회와 삼일기렴준비회의 두 단체가 대립되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것을 륭합시키고저 재경신문인들은 드듸어 궐기하였다
    즉 이십오일 오후 삼시 서울신문사 중역실에서 시내、13개 신문 통신사 대표가 회합하여 다음과 가튼 통일안을 결정하고 교섭위원으로서 리관구(서울) 리상호(중앙) 고재두(인민) 리종모(조통) 장인갑(동아) 오씨를 선정하여 26일 오전에 양 준비회에 전달한 후 단시간 내에 회답을 요청하였다. 그런대 만약에 이 통일안을 거부하는 단체에 대하야는 금후 삼일 기념에 대한 일체 기사보도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4.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체험(1), 한길사, 2003년, 252쪽. 그 후 좌익은 남산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삼상회의 지지대회, 반탁궐기대회 등을 벌였는데 나는 이미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게 되었다.

  5.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2, 1946년 3월 1일, 기미독립기념회와 3·1기념회가 3·1절기념식을 각각 거행.

    3·1記念全國準備委員會에서는 오늘 행사시간 및 주의 사항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입장을 완료하고 동 11시부터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하여 추도식을 거행하고 정오부터 3·1기념시민대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는데 식이 끝나면 시위행렬을 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시민과 각단체에서는 태극기와 단체기 및 플래카드 등을 가지고 11시까지 남산공원 광장으로 집합하기 바라며 외국기는 필요없다고 하며 행진순로와 식순은 다음과 같다.

    南山公園-南大門-朝鮮銀行-和信前-鍾路三丁目-黃金町三丁目-黃金町六丁目(解散)
    獨立運動犧牲同志 追悼會順
    1) 開會(奏樂) 1) 國旗揭揚 1) 愛國歌合唱 1) ?想 1) 追悼文朗讀 1) 追悼歌(奏歌) 1) 閉會
    3·1運動 27周年記念 市民大會順
    1) 開會 1) 國旗揭揚 1) 愛國歌合唱 1) 開會辭 1) 開會行事에 대한 經過報告 1) 獨立宣言書 朗讀 1) 3·1運動史 報告 1) 各國代表 祝辭 1) 祝辭 1) 記念植樹 1) 萬歲三唱 1) 市街行進에 대한 注意 1) 行列開始
    (서울신문, 1946. 3. 1)

    太極旗 춘풍에 나부끼어 장안을 수놓고 萬歲歡呼聲 천지를 震?하여 連綿하는 중에 3·1運動 27주년 기념대회의 盛典은 南山公園 大會場에 各政黨, 社會, 文化, 大衆 等 백여단체와 各町市民 무려 30여만의 參集裡에 장엄 성대히 거행되어 先烈의 英靈과 함께 이날을 축하고 자주독립의 길을 驀進하는 民族의 意氣를 發揚하였다.
    시민대회는 羅車旭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먼저 先烈 鬪士에게 묵상을 드리고 愛國歌 제창과 함께 許憲의 國旗揭揚이 있은 다음 해방의 노래의 제창이 있었고 다음으로 음악동맹으로부터 동 동맹의 신작 「3·1記念의 노래」 빛나는 인민의 나라 빛나는 우리의 나라의 장래를 축원하는 기념가의 합창이 있어 이 記念市民大會에 다시 그 감격과 흥분을 더 하였다. 다음 식순에 들어가 金光洙로부터 기념행사에 대한 경과보고와 함께 開會辭가 있었고 48인중의 1인 鄭魯湜의 獨立宣言書 낭독이 있은 다음 朴相俊으로부터 3·1鬪爭史 보고가 있었고 별항과 같은 民主主義民族戰線의 3·1記念文을 李康國이 낭독하고 끝으로 鄭魯湜의 선창으로 萬歲를 三唱하여 民主主義 새 朝鮮建設의 氣焰을 유감없이 토로하고 해방후 제 1회의 3·1기념대회를 끝마치었다.
    (서울신문, 1946. 3. 1)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6. 김규식 박사 담화 발표, 비통한 태도로 신문계에 경고, 삼일기념 행사보도에 대하야, 동아일보 1946년 3월 4일자 1면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 박사는 민주의원 회의실에서 한 시간에 걸처『내가 잘못이라면 무릅을 꿀코라도 호소하겠다』고 비통한 태도로 신문인에게 경고를 하였다.
    기자와의 회견은 오늘이 처음이다 기자단으로부터 여러번 요청이 있었으나 그동안 이것을 회피해 온 것도 사실이다 내지에 도라와 가장 섭섭한 것은 이저버린 주권을 찻고 새 국가를건설하는 이 마당에 언론기관이 정확한 기사를 보도하여야하는데 부정확한 것이 만턴 사십년동안 왜적의 압박에서 별안간 해방이 되여 그럴지도 몰으겟으나 그러나 고의로 발표해야할 것을 아니하는 것은 삼천만 민족의 이름으로서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신문인이분렬를 조장하는 것은 통일이 되지 못한 것도 분한테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대신문이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도구엿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키 까닭에 제2차 전쟁이 진행되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될 때 안전 평화의 기구를 확립하기 위하여 언론기관 대회도 잇엇고 또 결의도 잇엇다 그러므로 세계는 정확 진정 공평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잇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비록 적은 나라일지라도 아름답게 건설하려는 이때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실을 발표하지 안코 또 없는 사실을 조하여 발표하는 것은 언론기관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삼월일일로 말하면 우리가 이팔년 전에 그 어려운 환경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불러 왜적의 총칼에 생혈을 뿌렷는데 도탄 가운데에 잇다가 이팔년만에 비로서 이칠 주년의 기념을 하는데 좌우가 불통일하엿다는 것은 유감된 일이다 그러나 다가치 민족적 량심에서 삼일절을 기념한 것은 사실이다 남산에서 좌익이 행사한 것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또 탑동공원의 행사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좌익분자가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좌익이 되여도 조타 또 우익분자의 요구가 독립이 아니라면 우익에 반항하여야 할 것이다 서울운동장에는 가위 전시민이 총동원하였다할 수 있으며 외국인 기자는 이것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하여 분주하였고 또 미군정 당국이 행정을 지금 우리 손에 맛기는데 난색을 보이면서도 행사에 여러 가지로 물질적 원조를 하여 주는 것이 우리의 독립을 원하는 단적인 증거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신문의 대부분이 이 자연적 민족지성의 발로를 기사자료로서 거부하였다는 것은 그 의도가 나변(那邊?어디)에 잇는 것인가 그것이 독립을 지원하는 것이라면 별문제이다 그러나 임이 범한 착오를 이 자리에서 숙시숙비(熟是熟非)하고 십지는 안타 비록 착오를 범하였다 하드래도 그 태도틀 고치기만 한다면 우리도 과거에 범한 일을 그 이상 추구하지 안컷다 그러나 만일 반성하지 안코 게재치 아니한 뉴스를 어데까지나 거부한다면 우리도 역시 허심탄회하게 발표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에 경고하는 동시에 만일 나에게 비(非)가 있다면 무릅을 꿀코 호소하겠다.

  7. 최준, 한국신문사, 일조각, 1960, 353~354쪽.

    이것(찬탁데모)을 계기로 공산당에 대한 민족적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갔다. 종래의 좌익지들도 공산당의 성명에 따라 삼상회의지지, 즉 오개년 신탁통치안을 지지하여 신문계 역시 정당과 똑같이 반대파와 지지파로 양분 대립되었다. 그리하여 일찌기 보지 못하던 강력 치열한 좌우의 이대주류는 신탁통치문제를 에워싸고 열렬한 필봉의 불꽃을 난사케 되어 이를 지지하는 좌파지는 반대지를 ‘반동신문’이라 불렀고 반대지는 또한 이를 지지하는 신문을 ‘매국신문’이라고 서로 응수 반복하여 한국신문사상 처음으로 신문계는 좌우대립의 양 세력으로 구분되는 뚜렷한 현상을 노정하였다.(중략) 당시 서울시내 각사의 오개년 신탁통치안문제를 중심삼아 이를 찬부 양파로 색별하면 다음과 같았다. (일구사륙년 사월 현재)
    <반대파>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성일보 대동신문 대한독립신문 민중신문 민주일보
    <지지파>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서울신문 중앙신문 현대일보 독립신문 중외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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