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가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공 부인 성명에 대해 1945년 10월 11일 담화를 발표할 때만해도 “조선의 실정에 대한 좀 더 치밀한 조사와 정확한 보고를 기초로 한 공정한 판단이 있기를 충고하여 기대하여 마지않는다.”라며 점잖게 표현했다. 사흘 후인 14일 발표된 성명서부터는 달랐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다. 여기서도 군정장관 고문회의나 김성수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20일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배포된 한 애국자(A Corean Patriot) 명의의 영문팸플릿 ‘The Traitors, And The Patriots(반역자와 애국자)’이 가장 선동적이었다. 영문팸플릿은 10월 11일 담화를 “We earnestly advise you to judge the situation in Corea by accurate investigation yielding honest information, and not on the basis of the mass of falsehoods spread by the nine traitorous Coreans who now serve upon the ‘advisory council’ only that they may advance their own interests.”라고 영역해 군정장관 고문을 ‘the nine traitorous Coreans(반역자)’로 낙인찍었다.
영문팸플릿은 14일 성명서를 “The dog of the Japanese Imperialist, pro-Japs and national traitors, intensified the exploitation and oppression of the Corean nation by their so-called “Loyalization Movement.” With whips and lashes they drove Corean youths into the battle fields, preaching the mott of the Japanese imperialists: “a sacred war” for the liberation of the eastern nations(일본제주의의 주구가 되어 황민화운동으로 조선민족의 착취와 압박으로 강화시키며 일본제국주의 강탈전을 동양민족해방을 위한 聖戰이라 하여 조선청년을 전장으로 채찍질하여 몰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죄악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영역했다.
영문팸플릿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소개한 인물은 김성수를 비롯해 양주삼 이용설 백낙준 구자옥 권상로 장덕수였다. 양주삼은 미군정의 개인고문, 이용설은 군정장관 고문이자 한민당 간부, 백낙준은 경성대학 법문학부장이자 미군정 교육위원, 구자옥과 권상로는 한민당 간부, 장덕수는 한민당 총무부장으로 나와 있다. 영문팸플릿은 한민당이 ‘친일파 민족반역자 당’이라고 공격했다.
한민당 국민당 장안파 조선공산당이 나흘 후인 24일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 1 재건파 공산당은 한민당을 ‘친일파 수령들’로 규정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박헌영 명의로 된 10월 30일자 ‘조선공산당의 주장’은 한민당이 “민족부루죠아지 중에서도 가장 반동적 부분을 대표하는 친일파 수령들”이라는 것이다. 2 따라서 “친일파 반대투쟁을 통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신조선건설을 주장하는 것이 가장 옳은 노선”이라고 했다. 이 같은 박헌영의 한민당에 대한 낙인찍기는 조선공산당 내 일부에서 “도리어 많은 적을 사게 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3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영문팸플릿이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잡지사인 선구가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조선의 지도자’ 여론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재무부장과 문교부장으로 김성수를 꼽고 있다. 4 여운형은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노동부장으로 조사됐다. 송진우가 이 조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아 인공의 ‘벽보내각’ 명단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인공은 우익의 중심인물 송진우를 조각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Notes:
-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10월 24일, 한민당, 국민당, 조공 삼당대표가 회합, 공동성명서 발표.
우리는 대한임시정부의 귀환을 촉진하여 국내 국외의 반민족적 분자를 제외한 민주주의적인 각층 각파와 제휴 연결하여 국민총의에 의한 정식정부의 급속한 수립을 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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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박헌영, 조선공산당의 주장-조선민족통일전선결성에 대해,1945.10.30.;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2권, 역사비평사, 2004,72쪽.
- 정희영(鄭禧泳), 박헌영 동지에게 서한, 1946.1.25 ;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6권, 역사비평사, 2004, 61쪽.
그러나 동무의 원칙론의 부절(不絶)한 되푸리는 도로혀 많은 적을 사게 했다. 동무는 한민당 지도자 송진우, 김성수 일파를 반민, 친일파로서 그들을 규정하고, 소위 “임정”파가 아즉 귀국도 하기 전에 반소 반공적인 나슈날파-스트로 규정하여, 그와의 제휴를 거부는 결의를 갖었는가 하면, 실제에 있어서 송진우 일파와 다같은 이승만이 중심인 소위, 「독립촉성 중앙협의회」에 휘둘이여, 우리 당대표로서의 모욕까지 당한 겄은, 어떠케 생각하는가?(출처 : www.krpi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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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회본부 여론조사부, 조선지도인물 여론조사발표,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45~51쪽.;=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라는 단체가 서울에 있는 105개의 정치, 사회, 문화 단체와 학교에 설문지1,957매의 설문지를 배포하여 626매를 회수하여 집계한 ‘지도자’의 결과.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최현배 7%, 김규식 6%, 서재필 5%, 홍남표 5%. 외 23명;
1. 여론조사의 문제
본회여론조사 제1호 제2호를 1945년 10월 10일 시작하여 동 11월 9일까지로 정하고 만 1개월 두고 좌기와 같은 문제를 제시하였다.
(여론조사 제1호 양식)
우리는 양심적 정치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인물을 찾고자한다. 과거 36년간 자유를 갖지 못한 우리는 인물의 표현방식이 없어 오늘날의 빈곤을 느끼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하지 않는다. 우리는 건국이라는 대창업이 앞에 있으니 반드시 우리를 지도하여줄 인물도 있다는 의미에서 출발하고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지도자를 찾고자하는 이 취지를 양해하사 찬조하여 주심을 바라는 바이다.
추선(推選)되는 인물의 자격
1. 국제정세에 정통하고
1. 조선사정에 통달하고
1. 가장 양심적
1. 가장 과학적
1. 가장 조직적
1. 가장 정치적으로 포옹할 아량을 가질 것1957매의 설문지 978매 회수
<정체> (생략)
<내각>
대통령
이승만 431명, 김구 293명, 여운형 78명, 무기록 176명.
내무부장
김구 여운형 안재홍 허헌 기타 4인 무기록
외무부장
여운형 이승만 김규식 김구 기타 2인 무기록
재무부장
조만식 176명 김성수 98명 정태식 39명 김규식 37명 기타 7명 무기록
군무부장
김일성 김원봉 이청천 김규식 기타 2인 무기록
사법부장
허헌 김병로 최동조 이강국 기타 무기록
문교부장
안재홍 275명 김성수 68명 김창준 58명 기타 6명 무기록
경제부장
백남운 이관술 이(박)헌영 김규식 기타 7명 무기록
교통부장
최용달 하필원 안재홍 기타 10명 무기록
노동부장
박헌영 여운형 기타 무기록<과거 조선 혁명가>
여운형 195명, 이승만 176명, 박헌영 168명, 김구 156명, 허헌 78명, 김일성 72명, 김규식 52명, 백남훈 48명, 최용달 40명, 박문희 19명, 이관술 15명, 최현배 1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