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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43 : 인촌과 몽양 (4)-충돌 그리고 삐라

Posted by 신이 On 11월 - 30 - 2012

 “그게 어떻게 된 것이오. 유 선생 기억에 없소?”

  군정장관 고문회의 의장이 된 인촌 김성수가 예고도 없이 영문팸플릿을 가지고 보성전문으로 측근 유진오를 찾아 건넨 말이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이 영문팸플릿 ‘The Traitors, And The Patriots(반역자와 애국자)’가 집중적으로 배포된 1945년 10월 20일 토요일로 보인다. 백낙준이 10월 16일 경성대학 법문학부장으로 임명된 사실이 이 영문팸플릿에 실린 것으로 보아 17일 이후인 것은 분명하다.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민공화국 부인 성명이 문제였다. 미군정은 계속 인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 중장은 16일에도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고 성명서를 발표한데 이어 아놀드 군정장관은 18일 여운형을 불러 인공을 해산하라고 권고했다. 1

 

 군정청은 이날 오전 라디오를 통해 인공의 연합군 환영대회를 갑자기 금지했다. 2 종로거리는 혼란에 빠졌다. 3 군정청은 이날 오후 한민당 총무 조병옥을 군정의 경무부장에 임명했다. 정확히는 조병옥이 하지중장에게 경무부장직 제의를 받아들이겠고 밝혔다. 4 

 

  10월 20일 우익이 마련한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조병옥의 환영사에 대해 하지 중장은 ‘감사하다’며 16일 귀국한 이승만을 등장시켰다. 이 대회 개최가 처음 추진될 때 부위원장은 김성수였다.

 

  이날 같은 장소에서 인공승인을 호소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전단이 돌풍처럼 몰아쳤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이날 대회에서 19쪽짜리 이 영문팸플릿이 배포됐다고 보도했다. 이 영문팸플릿은 인공 부인 성명을 발표한 아놀드 군정장관을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미군정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자문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인공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군정장관 고문회의 의장인 김성수에 대해서는 3쪽을 할애해 김성수가 1943년 11월 5일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했다는 연설문을 영문으로 실었다.

 

  김성수는 “아까 미국사람들이 갑자기 이것을 내밀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는데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 수 없어 그저 알 수 없다했다”고 유진오에게 토로했다. 5 김성수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는 전단이 거리에 나붙고 있었다. 6

 

 

 

Notes:

  1.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11월 22일,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 개최.(자유신문, 1945. 11. 23.)

    10월 18일 여운형이 군정청에 출두하여 아놀드 군정장관으로부터 권고적 내용의 공문을 수교 받았다. 그 내용은 1국내에 2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으니 38도 이남 조선에 있어서는 군정청이 유일한 정부인즉 조선인민공화국정부는 해소함이 마땅하니 즉시 해소하고 정당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중앙위원회는 이 보고에 접하여 토의하였지만 반만년의 혁혁 역력한 역사와 민족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진 조선으로써 해방된 후에 정당한 자주독립에의 능력과 의사표시로써 인민총의의 집결체로 그 인민과 국토를 보유하여 성립된 조선인민공화국정부를 해소한다 함은 실로 중대한 문제인지라 翌日에 토의를 속행하기로 하고 각위원이 정부가 존재할 수 있는 논거를 신중연구하였다. 그 결과 법리논상으로 볼지라도 국제법상으로 보아 통치권을 가진 군정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 민족자신의 정부가 존재할 수 있으며 또 역사상으로 보아도 전승국의 점령 하에 있는 전패국가에 있어서도 망명정부가 의연히 국외에서 정부로써 활동하고 있었다. 또 1개국 안에 주장을 달리하는 둘 이상의 정부가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있었음에 비추어 중앙위원회는 이 정당한 주장을 군정장관에게 통고하기로 결의하고 呂運亨씨는 10월 29일에 이 결정을 군정장관에 전달 강조하였던 것이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2. ‘인민위원회의 서울시민대회 불허’, 자유신문 1945년 10월 19일자 2면.

    서울시 인민위원회 영도하에 18일 오후 1시부터 개최예정이었던 연합군 환영 자주독립촉진 시민대회는 미군헌병 당국의 돌연한 금지로 말미암아 부득이 중지되었다. 이날 정각 전 정오부터 각 단체와 학교 등을 위시하여 다수한 시민이 집회장인 서울운동장에 집합하여 3천여명에 이르렀었는데 돌연 수십명의 미군헌병대가 이 민중을 해산시키자 운동장과 대로에 넘친 민중들로 한때 혼잡을 이루었다.

  3. F. 샤브시나 꿀리꼬바, 역사비평 계간 25호, 1994년 여름;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8권, 역사비평사, 2004.

    다행히도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서울의 민주단체들은 10월 18일(1945년)을 시위의 날로 정하고 이를 라디오로 알렸다. 그러나 점령당국은 라디오를 통해 시위를 금지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민중들은 종로거리에 모였다. 반동들은 이를 이용하여 같은 장소에서 급조된 집회를 열어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민위원회와 좌익세력에 대해 반감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사람들은 잠잠해졌다. 야비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10월 20일 설욕전이 벌어졌다. 이승만이 국민들 앞에 ‘등장’하는 환영식 행사로서 의도한, 군정청이 조직한 시위가 그 정반대인 대대적인 항의행동으로 일변했던 것이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인민공화국을 승인하도록 호소하고, 그 건설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의 중요 과업은 독립된 민주조선 국가 건설과 인민의 생활향상이라는 것을 알리는 전단이 돌풍처럼 몰아쳤다.

  4. 조병옥, 민국 정부수립과 나, 동아일보 1958년 8월 15일자 4면.

    그런데 10월 17일「하지」장군의 고문인「윌리암스」씨의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 씨 방문을 계기로 원서동 비밀회의를 열게 되었고 그 석상에서「윌리암스」씨는『미군정은 조직을 다 마쳤으나 가장 중요한 경무부장 자리는 반공 필요성에 비추어 미군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반공에 철저하고 역량 있는 인물을 추천해 달라』는「하지」장군의 요청을 전달해왔다。이에 한민당 수뇌부의 공론에 의하여 나는 군정당국의 요청으로서 마침내 경무부장의자리에 취임하였던 것이다.

  5. 유진오(兪鎭午), 인촌선생추념기, 고대신보 1956년 2월 20일자 1면.

    해방이 되자 인촌 선생은 미군정(美軍政) 최고 고문으로 취임하셨다. 나는 학교에 남았고 K청년의 이름은 좌익단체의 명단 위에 나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인촌선생이 갑자기 자동차를 몰아 학교로 오셨다. 안색이 좋지 않으시다. 내 방으로 오셔서 영문으로 된 크다란 책자를 책상위에 내던지시며 “그게 어떻게 된 것이오. 유 선생 기억에 없오?”하시었다. 의아하여 책자를 집어보니 TRAITORS AND PATRIOTS라는 제목 하에 당시 우익에 속하는 인사들은 모조리 반역자로 몰고 좌익에 속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애국자라하여 그 증거로 그들의 이름으로 발표된 글을 모아 영역(英譯)한 것인데 우익인사의 글은 모조리 일제하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쓴 것들이고 좌익사람의 글은 모조리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시대의 용장발자(勇壯潑刺)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맨 첫머리에 인촌 선생의 글이라하여 매일신보에 실렸던 K의 집필로 된 글이 실려 있는 것이다. “아까 미국사람들이 갑자기 이것을 내밀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는데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 수 없어 그저 알 수 없다했는데 그 글이 어떻게 된 글인지 유선생 모르시오?” 나는 그것이 K의 글임을 설명하였다. K가 써서 인촌 선생의 이름으로 발표한 글을 K가 거(居)하는 단체가(또는 K자신이) 영어로 해역(解譯)하여 정치적 공격에 이용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인촌 선생은 글을 쓰신 일이 없다. 인촌 선생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인촌 선생을 욕보이기 위한 유일한 재료로 이용된 글은 욕하는 사람 자신이 쓴 것이었다.

  6. 이중재 고려대 1회 졸업생,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인촌을 생각한다, 추모집 간행위원회, 2005, 74쪽.

    광복 직후 좌익들은 ‘친일파 김성수, 한민당 김성수, 민족반역자’라고 쓴 삐라를 전봇대마다 붙인 적이 있다. 그들은 의도를 가지고 정치 공작을 벌였던 것이다. 상대 정당을 치려면 그 대표인 김성수를 공략해야 하고, 그러려면 친일로 모는 게 대중에게 가장 어필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민은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선전에 동요하지 않았다. 인촌이 친일파라면 그런 행적은 해방공간에서 다 밝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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