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팸플릿 ‘The Traitors, And The Patriots(반역자와 애국자)’는 민중에게 당장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완전히 묻힐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주한미군이 공식적으로 발간한 ‘주한미군사’는 1945년 10월 셋째주에 인민공화국(인공)에 의해 이 영문팸플릿이 서울에서 배포됐다고 기록했다. 1 특히 이 영문팸플릿이 군정장관 고문으로 일하는 친일파들을 폭로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미국의 한 명문대학에서 1952년에 나온 박사학위논문에서도 김성수의 연설문이 영문팸플릿 ‘The Traitors, And The Patriots’에 실려 널리 인용됐다고 쓰고 있다. 2 또 이 논문은 김성수를 일제시기 총독부 학무국장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김성수가 미군정 수립 직후 학무국 교육위원에 위촉됐기 때문에 생긴 오해로 보인다. 또한 이 논문은 공산주의자들과 여운형이 우익 및 중도파와 함께 인공을 수립하면서 김성수와 같은 친일 민족반역자를 제외시켰다고 주장했는데 이 부분도 사실과 다르다. 3 인공에서는 김성수를 중앙인민위원에 이어 내각 문교부장으로 발표했다.
일본에서 1967년 출간된 D W 콘데의 ‘Korean Crime 1945~50(해방조선의 역사)’는 “많은 미군이나 미국직원은 팸플릿을 읽고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역할을 처음으로 깨달았다”며 문제의 팸플릿에 주목하고 있다. 4 이 책이 소개한 고문회의 의장 김성수의 이력은 만주총영사에서부터 부산대학학장까지 어느 것 하나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 없다. 5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가 연설문으로 둔갑해 ‘거의 낙인과 같이 되어’버린 결과였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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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quarter, U.S. Armed Forces in Korea(USAFIK),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HUSAFIK) V.2 (‘주한미군사’ 영인간행, 돌베개, 1988),10쪽.
During the third week in October a pamphlet entitled “The Traitors and the Patriots” was printed by the People’s Republic and distributed in Seoul. It replied to a strong statement made by General Arnold to the press on 10 October. The pamphlet “exposed” the alleged pro-Japanese, anti-American Koreans, who were acting as advisors to the Military Government, by quoting from statements they may or may not have made against the Americans during the Japanese rule of Korea. -
Paul Timothy Chang, Political Effect of World WarⅡ o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Policies of the United States(Ph.D. dissertation), Notre Dame University, 1952, pp.84~85.; 폴 티모시 장, 한국에 끼친 세계 2차 대전의 정치적 영향 : 미국의 정책을 중심으로(박사학위논문), 노터데임대학교, 1952, 84~85쪽.
When finally the tyranny of the Japanese Empire was brought to its knees in Korea, There existed excellent tools with which machinery could have been constructed to fill the political vacuum. There, despite the military power that the Red Army displayed in Manchuria and North Korea, and despite persistent rumors of the Red Army’s arrival in Seoul at any moment, the communists took part in creating the People’s Republic in cooperation with the rightist groups and the cenralist groups under the powerful leadership of Lyuh Woon-hyung, one of the most popular moderate leaders In Korea.(마침내 일본 제국주의가 무릎을 꿇었을 때 정치적 공백을 채우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할 뛰어난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에서 펼치고 있는 군사적 힘과 곧 소련군이 서울에 도착하리라는 끊이지 않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온건한(moderate)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여운형의 지도력 아래 우익 및 중도파와 협력해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데 참여했다.) - Paul Timothy Chang, Political Effect of World WarⅡ o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Policies of the United States(Ph.D. dissertation), Notre Dame University, 1952, pp.84~85.; 폴 티모시 장, 한국에 끼친 세계 2차 대전의 정치적 영향 : 미국의 정책을 중심으로(박사학위논문), 노터데임대학교, 1952, 85쪽 각주.
The rightist groups here do not include those accused of being traitors and pro-Japanese collaborators who were then left at large and were subsequently patronized by th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For instance, one time director of the Japanese controlled Bureau of Education in Korea, Kim Sung-soo, was appointed as the chief of Advisory Council under the military government. One of his speeches allegedly delivered before the Korean recruits of the Japanese Army in 1943 in which he called upon them to die “to make Korea part of our Empire (Japan)”, was extensively quoted in the pamphlet The Traitors and the Patriots. No word of protest was lodged against the accusation.(여기서 우익들은 그때 광범위하게 남겨져 미군정의 보호를 받던 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한때 한국에서 일본 지배 아래 학무국 국장을 역임했던 김성수는 미군정아래 고문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1943년 일본군 지원병 앞에서 행해졌다고 주장되는 그의 연설문 중의 하나에서 그는 지원병들에게 “한국을 일본제국주의의 부분으로 만들기 위해 전사하라”로 요구하고 있는데 이 연설문은 ‘반역자와 애국자’라는 팸플릿에 실려 광범위하게 인용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난에 대해 아무런 반박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
D. W. Conde, Korean Crime 1945~50(해방조선의 역사), 태평출판사, 동경, 1967,46쪽.
회의 멤버의 협력자·범죄자로서의 경력은, 10월 13일, 하지 장군과 군정부 수뇌에 명확하게 되었다. 그 날, 인민공화국은 ‘배신자와 애국자’라고 이름붙인 영문 팜플렛을 발표 배포했다. 회의에 뽑힌 조선인 및 다른 높은 행정직에 임명된 조선인의 상세한 기록을 폭로한다면, 이 추잡한 정보는 서울의 군정부 ? 군 보도기관의 미국인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 것이다(그러나 이 이야기는 대부분, 정말 싫다고 해도 좋을 만큼 외부에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많은 미군이나 미국직원은 팜플렛을 읽고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역할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
D. W. Conde, Korean Crime 1945~50(해방조선의 역사), 태평출판사, 동경, 1967, 44쪽.
국가고문회의의 의장은 부유한 지주이고 동시에 자본가였던 김성수로, 그는 후에 이승만의 지지자가 되고, 죤 M 장(장면)이랑 송진우와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립했다. 조선 국내에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일족은 만주에 몇 개의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일본 식민지에의 투자는 그가 서울 주재 만주총영사에 임명되기 위해 승인된 것이다. 일본군을 위한 1943년 모병운동에서 그는 이렇게 학생들에게 말한 일이 있다. “이 성전(聖戰) 때에 군무(軍務)에 나서지 않으면 제군의 개인적 생명은 보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군의 형제자매의 운명은 극히 비참한 것이 될 것이다. 주저하고 번민할 필요는 없다. 제군의 주저함 따위에 전혀 상관없이 신동아(新東亞) 건설은 이 순간에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놓치면 조선민족은 신동아 건설로 생기는 이익을 받지 못할뿐더러 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침략에 큰 공헌을 한 보상으로 김성수는 부산대학 학장이 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인민공화국과 그 강령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한국민주당의 조직화를 돕고, 미국인이 1945년 9월에 도착하자 이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로부터 약 1년후, 일찍이 일본에 협력한 그의 경력은 모두 알려져 있었으나 미군정의 섭외국은 적어도 한번 신문발표를 통해 김‘박사’를 칭찬하고 부산대학 학장으로서의 그의 수완에 감사했다. 일본에 의해 임명된 이 지위를 그는 미 점령군 당국 아래서도 보지(保持)하는 것을 허락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