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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민중에게 친일의 증거로 제시될 김성수의 행적은 없었다. 따라서 연희전문 출신 시인 김상훈이 1945년 11월 잡지 민중조선을 창간할 때만해도 김성수를 ‘친일 민족반역자’로 꼽지 않았다. 이 잡지에 ‘교육문화계의 학병관계 같은데 죄 지은 자’로 13명을 나열했으나 김성수의 이름은 없었다. 1 김상훈은 일제 말 학병 대신 징용을 갔다 온 좌익시인이었다.

 

  김성수가 송진우의 뒤를 이어 1946년 1월 한민당 수석총무에 취임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 박학보는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찾아들었다”며 “관후한 씨를 위요(圍繞)하고 서식(棲息)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2 김성수의 한민당 수석총무 취임 직후 발표한 글에서다. “김씨는 타인이 말하는 그의 지위, 그의 재산, 또는 민족반역자 같은 낙인을 무서워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다”고 단언했다. “또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한다면 내 동생 내 친구라도 관계없다. 허나 이것도 완전독립이 되고 민족통일이 된 이후래도 무엇이 그다지 성급히 할 것이냐(?)하는 신념이 김씨에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박학보의 ‘김성수’ 인물론이다. 3

 

  당시 북한지역 4 에서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얘기할 때면 김성수 김연수 백관수 장덕수의 이름이 자주 거론됐다. 5 김성수 등이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금지대상이었다. 6

 

  이어 김성수가 학병을 권유했다는 시가 나왔다. 민중조선을 창간했던 김상훈이 갑자기 1947년 7월 신문에 이 같은 내용의 시를 기고한 것이다. 7 보성전문 출신이 아니라 연전 출신이 쓴 시였다. 낙인찍기 전술의 결과였다. 8 이에 앞서 김상훈은 같은 신문에 박헌영 9 을 찬양하는 시를 발표했다. 10

 

 

  

Notes:

  1. ‘벽력사(霹靂士), 단두대(斷頭臺)’, 민중조선, 민중조선사, 1945년 11월(제1권 제1호 창간호), 84~85쪽.

    고문실(拷問室) 제1회 발표.(한상룡 박춘금 등등 ●●할 수 없는 죄상을 가진 자가 적지 않으나 시간관계도 있고 해서 우선 교육계라든지, 일반문화, 더구나 학병관계 같은데 죄지은 자부터 독자 여러분과 함께 심의하여 보기로 하겠으나 여기엔 그 중의 일부분이 논의되는데 지나지 못한다.) (1) 이동치호(윤치호) (2) 향산광랑(이광수) (3) 무영헌수(엄창섭) (4) 금천관(박관수) (5) 하산무(조병상) (6) 동원연섭(정연섭) (7) 목호경삼(박상현) (8) 옥강선진(옥선진) (9) 금촌용제(김용제) (10) 현영섭 (11) 안인식 (12) 금촌성 (13) 이영준

  2. 박학보, 인물론 김성수론, 신세대 1946년 7월호, 45쪽.

    거기에는 김씨에 대하야 세가지 요소가 내포되어 잇스니 그 세가지 요소라는 것이 퍽으나 미묘하다.
    첫째의 요소는 김씨는 훌륭한 양반계열에 서지는 못하는 누대실권한 낙향(落鄕)의 양반이나 하서 김인후 공이란 명조(名祖)를 그 계통으로하고 잇서  요약하고 무세력한 양반층을 대표하도록 된 것과 둘째요소는 계씨(季氏)의 재벌적인 배경과 셋제는 갈 곳 업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관후한 씨를 위요하고 서식(棲息)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말로 하면 보수적인 것과 반동적인 본존으로 되고잇다. 그러나 한국민주당도 그러코 김씨도 이것을 부정하랴고하고 여기에서 탈각하랴고하는 것만은 수처에서 규지(窺知)할 수 잇다. 그러면 김씨는 처음부터 이런 미묘한 위치에 한국민주당과 자기의 지위(位地)가 그러케 될 것을 몰랏는가하면 그럿치도 안타. 허나 역시 현 단계에 잇서 이런 미묘한 지위(位地)에 잇스면서 그대로 추진하고 또 이것을 비약지키어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랴고 하는 것도 속일 수 업는 실정이다.

  3. 박학보, 인물론 김성수론, 신세대 1946년 7월호, 47쪽.

    여기에 김씨는 신념의 인이다. 나는 절대로 악의가 업다. 지금 단계는 민주주의혁명이다. 그러타면 재래나 지금이나 가장 민주주의의 생각과 가장 민주주의적인 생활을 해은 사람은 나 이외에 과연 몇사람이나 잇느냐(?)하는 신념이 김씨에게 전혀 업다고 할 수 업는 것이다. 또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한다면 내 동생 내 친구라도 관계업다. 허나 이것도 완전독립이 되고 민족통일이 된 이후래도 무엇이 그다지 성급히 할 것이냐(?)하는 신념이 김씨에게 전혀 업다고 할 수 업다. 김씨의 꼭담은 입 김씨의 빗나는 눈 김씨의 온후하고 날카로운 성격은 이 신념을 고 송진우씨 보다 못하지 안게 갓고 잇다고 할 수 잇다.

  4. 서용규 전 노동당 고위관리(가명·현재는 망명해 유럽 거주),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하권-김일성과 북조선 건국의 숨겨진 이야기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1994, 114쪽.;=서용규는 몽양 여운형이 1946년 4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나눈 대화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북 지도자들은 인촌이 1920년대에는 민족자본가로서 역할한 것을 인정했지만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요. 그러나 몽양은 조목조목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하도 몽양이 인촌을 옹호하자 김일성도 결국 ‘선생님께서 김성수와 합작할 수 있다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반대하겠습니까’라며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5.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226쪽.

    여운형의 이 같은 입장은 북조선공산당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김일성은 북조선공산당에 지시해 당 내부적으로 몽양 의견에 동의하여 김구·김성수와의 합작도 고려한다는 방침을 갖지만 일반 주민교양사업에서는 이들을 비판하던 방침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라는 조치를 내렸다. 즉 적극적 반탁론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소극적 반탁론자들을 임시정부 참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입장이 정착된 것이었다. 당시 여운형은 한민당 내 장덕수나 김약수 등 중요 간부들이나 한독당 계통에서도 일부가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6. 서용규 전 노동당 고위관리(가명·현재는 망명해 유럽 거주),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하권-김일성과 북조선 건국의 숨겨진 이야기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1994, 116쪽.

    “북에서 친일파 문제는 여운형-김일성 토론 이전에도 큰 논란거리였습니다.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수를 하다 이북에 올라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 사법국장을 한 최용달이 곤욕을 치른 거예요. 당시 북에서는 친일파를 얘기할 때면 김성수와 그의 동생 김연수 백관수 장덕수의 이름이 자주 거론됐어요. 그런 가운데 최용달이 월북하면서 데리고 간 조교 한 사람이 북조선 조직위원회 선전부에서 일하다 46년초 김성수 등이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아니라는 글을 쓴 겁니다. 김성수가 세운 보성전문학교에서 최용달 교수의 조교로 일하던 경력 때문에 자연히 김성수를 옹호했던 것이죠.”

  7. 김상훈, 김성수여 복죄(伏罪)하라!, 문화일보 1947년 7월 5~6일자 2면.;=김성수를 학병을 권유한 친일 민족반역자라고 주장했다.

  8. 박달환, 인물월단(人物月旦), 1946. 1. 20, 『인민』 1946. 3(『한국현대사자료총서』 8);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8권, 역사비평사, 2004.

    만약에 그렇게 약체(弱體)일 것 같으면 애당초 친일파니 민족반역자니 사이비 애국자니 망명 정객이니 하는 슬로건은 박헌영씨가 지어낸 것이다. 박씨는 대담하게 이런 조어를 지어내 투쟁 대상을 여지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조어가 그들에게 거의 낙인과 같이 되어 다시는 박헌영씨와 싸울 기력을 잃게 되는 것을 왕왕 보게 된다. (출처 : www.krpia.co.kr )

  9. 김상훈, 위대한 민족의 수령, 문화일보 1947년 6월 14일자 2면.;=박헌영을 찬양하고 있다.

  10. 김상훈,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드리는 노래, 시집 흙, 평양:문예출판사, 1991, 9~11쪽.;=월북한 뒤 발표한 시로 김일성을 찬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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