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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이 김성수를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선전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10월 20일 영문팸플릿 ‘The Traitors, And The Patriots(반역자와 애국자)’ 배포 이후다. 그 이전에는 지주 자본가라는 의미에서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일뿐이었다. 1 그러나 인민공화국이 미군정에 의해 부인되자 같은 달 12일 ‘민족반역자의 죄악 폭로’를 결정하고 20일에 친일의 증거라는 연설문을 담은 영문팸플릿을 배포했다. 한국민주당에 대해서도 박헌영은 30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명의로 “민족부루죠아지 중에서도 가장 반동적 부분을 대표하는 친일파 수령들”이라고 낙인찍었다. 2 이 같은 박헌영의 한민당에 대한 낙인찍기는 조선공산당 내 일부에서 “도리어 많은 적을 사게 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3

 

  12월 11일 아놀드 군정장관과 박헌영이 만난 자리에서도 아놀드가 “교육부의 중책은 김성수가 맡고 있다”고 설명하자 박헌영은 “김성수는 대지주로서 현재 극우민족주의자로 처신하고 있다. 그는 이전에 친일파였는데 지금은 친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4

 

  그러나 박헌영은 1946년 4월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을 맞아 조선공산당 투쟁사를 정리하면서 “이승만ㆍ김구ㆍ원세훈ㆍ장덕수ㆍ김성수ㆍ안재홍 류의 친일파 친팟쇼파 반연합국적 반동파가 주권을 쥐는 독립은 조선인민은 절대 반대한다”며 김성수를 포함해 우익 핵심인물들을 ‘친일파 반동파’로 몰았다. 5 민선 입법의원 선거가 치러지자 박헌영은 1946년 11월 김성수와 장덕수를 지목해 “조선청년에게 향하야 일본황국을 위하야 전사의 각오로써 출전하라는 격려연설은 우리 인민들은 영원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대구지국장 출신의 한민당 간부 서상일도 ‘친일파’로 낙인찍었다. 6 월북 후에 발표된 글이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의 결의이후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가 현실로 굳어져가자 박헌영은 3월 “이러한 선거는 인민의 적인 한줌도 못되는 친일파민족반역자 이승만 김성수 등 한민당 일파에서만 지지하는 것”이라며 총선거를 보이콧할 것을 호소했다. 7 같은 해 4월에는 “조선에 관한 막부(모스크바)삼상결정을 인민의 원수요 민주주의의 적인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파 반동 분자들이 반대했다”고 비난하면서 남북연석회의를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8 이 글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전조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제안한데 대한 답신이었다. 결국 남북연석회의는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까지도 김성수에 대한 낙인찍기는 계속된 셈이다.

 

 

 

Notes:

  1.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1945.9.20.;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5권, 역사비평사, 2004, 55쪽.

  2.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박헌영, 조선공산당의 주장-조선민족통일전선결성에 대해,1945.10.30.;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2권, 역사비평사, 2004,72쪽.

  3. 정희영(鄭禧泳), 박헌영 동지에게 서한, 1946.1.25 ;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6권, 역사비평사, 2004, 61쪽.

    그러나 동무의 원칙론의 부절(不絶)한 되푸리는 도로혀 많은 적을 사게 했다. 동무는 한민당 지도자 송진우, 김성수 일파를 반민, 친일파로서 그들을 규정하고, 소위 “임정”파가 아즉 귀국도 하기 전에 반소 반공적인 나슈날파-스트로 규정하여, 그와의 제휴를 거부는 결의를 갖었는가 하면, 실제에 있어서 송진우 일파와 다같은 이승만이 중심인 소위, 「독립촉성 중앙협의회」에 휘둘이여, 우리 당대표로서의 모욕까지 당한 겄은, 어떠케 생각하는가?(출처 : www.krpia.co.kr )

  4. 박헌영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박헌영 동지와 아놀드의 회담,1945.12.12 ; 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2권, 역사비평사, 2004,110~111쪽.

    아놀드:(미군정청 구조를 나타내는 도표를 박헌영에게 보여주면서) 이 도표에는 군정청의 여러 기관들에서 근무하는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의 비율이 표시되어 있다. 처음에는 약 1,000명의 일본인들이 업무에 종사했지만 일본인들을 한국인들로 교체하여 현재는 일본인들의 수가 89명으로 축소되었다. 군정청 기관들에서 근무하는 일본인들 외에도 일본인 전문가들-기사, 기능공 약 700여명을 현재까지 활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인 전문가들을 활용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군정청의 여러 부서들 가운데 한국인들로만 구성된 법무부가 가장 잘 조직된 부서이다. 이들 중에는 변호사들이 특히 많다. 교육부의 중책은 김성수가 맡고 있다.(박헌영의 보충-김성수는 대지주로서 현재 극우민족주의자로 처신하고 있다. 그는 이전에 친일파였는데 지금은 친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출처 : www.krpia.co.kr )

  5. 박헌영, 1946. 4. 15, 조선과 조선공산당, 이십일주년 기념일에 제하야,『해방일보』 1946. 4. 17∼20.;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2권, 역사비평사, 2004, 260쪽, 261쪽.

    李承晩 金九 金性洙 張德秀 安在鴻 元世勳 等을 비롯하야 一流의 反動政客들은 亦是 親日派의 立場에서 三相決定을 反對하고 所謂 反託運動을 이르키고(출처 : www.krpia.co.kr ) 李承晩 金九 元世勳 張德秀 金性洙 安在鴻 類의 親日派 親팟쇼派 反聯合國的 反動派가 主權을 쥐는 獨立은 朝鮮人民은 絶對 反對한다.(출처 : www.krpia.co.kr )

  6. 이정(而丁), 1946. 11. 7, 남조선입법의원, 워싱턴 국가문서센타 Record Group 242(노획문서);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2권, 역사비평사, 2004, 461~462쪽.

    左右合作委員會에서 立法機關 創設의 必要를 決定하고 軍政廳에서는 立法議院法令을 發表하고 이 法令에 依하야 그 代議員이 選定된 結果는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親日派 民族叛逆者 親팟쇼分子들로써 構成된 것이라고 一言으로 評하야 조금도 誇張이 아니다. 例컨데 서울市 三人 代議員이라고 選定된 金性洙 張德秀 金度演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이 日帝時代에 이름난 親日政治家이며 大資本家 或 地主인 것은 누구로도 否認못할 것이다.(출처 : www.krpia.co.kr ) 이와 같이 右翼新聞이 主張하는 立法議院 議員 資格에 依하면 金性洙 張德秀 金度演 等과 같은 親日派 人物이 選出되어서 안되는 것이요 러-취 長官의 下記와 如한 規定에 비추어 보아도 當然排除의 範規에 들어갈 反動分子이다.(출처 : www.krpia.co.kr )金性洙 張德秀 兩人은 다른 것은 고만두고서도 日中 日米戰爭 中에 朝鮮靑年에게 向하야 日本皇國을 爲하야 戰死의 覺梧로써 出戰하라는 激勵演說은 우리 人民들은 永遠히 記憶하고 있는 것이다. 首都 서울의 代議員이 이렇거던 地方에 이르러서 言語道斷의 惡質反動要素가 特選되었을 것은 定해논 理致이다. 各地에서 이름난 親日派로 韓民黨과 獨促 幹部들 四十五名이 被選 登場하였다. 이것은 被選된 것이 아니고 强制投票로서 맨드러진 것이다. (韓民黨 一四 獨促 一七 韓獨 三 人委 二 其他 九) 慶北에서는 徐相日(親日派) 京畿道에서는 李宗根(獨促幹部로 地方人民들의 怨恨의 標的이 되어 이번 蜂起時에 被襲當한 者) 等類가 立法議院 議員으로 나오고 있다.(출처 : www.krpia.co.kr )

  7. 박헌영, 1948. 3. 인민들에게 고함,『노력인민』 1948. 4. 20.;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2권, 역사비평사, 2004, 631쪽,632쪽.

    이러한 選擧는 人民의 적인 한줌도 못되는 親日派民族叛逆者 이승만 김성수 等 한民黨 一派에서만 支持하는 것임니다. 이 反動分子들은 全人民들이 反對하는 單選으로 單政 樹立을 웨 환영하고 실행합니까? (출처 : www.krpia.co.kr ) 이승만 김성수의 反動親日派를 打倒하지 않고는 우리의 승리는 오지 못하며 民主朝鮮의 統一은 아니됨니다. 朝鮮을 美國에 파러먹고 그의 식민지화하려는 매國노 한民黨을 폭로합시다.(출처 : www.krpia.co.kr )

  8. 박헌영, 1948. 4. 12. 외제배제의 중요계기 박헌영선생 회한(回翰), 『노력인민』 1948. 4. 21.;이정박헌영전집편집위원회편, 이정박헌영전집 제2권, 역사비평사, 2004, 637쪽.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에 관한 막부삼상결정은 우리 나라의 통一 민주주의적 완전 자주 독립을 성취시키는 최선의 국제 협정이였음니다. 이 결정은 조선 인민의 이익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임니다. 그렇기 때문에 人民의 원수요 民主主義의 적인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파 반동 분자들은 이 결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섯습니다. 물론 이것은 처음부터 朝鮮을 자기의 식민지로 맨들여는 미국인들의 교활한 사축과 고무하에 진행되였음니다. 반동분자들의 파괴 음모와 미국인들의 고의적 배신은 드디여 쏘미공동위원회를 파탄시켯슴니다.(출처 : www.krpia.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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