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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양 여운형이 해방직후 송진우와 힘을 합치려한 것은 그의 뒤에 있던 인촌 김성수 세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은 일제시기 조선중앙일보 사장시절 “동아일보 보성전문 중앙학교 방직회사 직뉴회사가 모두 김(金)의 계통”이라며 “그 사업이 모두 민족적으로 훌륭하다. 이 다음 무슨 일이 있은 때에도 그 그룹이 상당한 세력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1 2해방당시 여운형은 55세의 김성수보다 다섯 살 많은 60세였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위원장으로서 처음 송진우와의 협상이 실패한 뒤에도 김성수와 그 세력을 배제하지 않았다. 미군이 1945년 9월 8일 남한에 진주하기 직전 여운형이 측근 백상규 조한용 여운홍 3명을 통해 건네준 메시지에는 분명 장차 조선의 정부수립에 참여할 인사로 자신과 측근인 메신저 3명, 안재홍 건준 부위원장에 이어 김성수 보성전문 교장을 추천하고 있다. 3당시 백상규 4는 건준에 참여하고 있었고 조한용 5은 여운형의 비서, 여운홍 6은 여운형의 동생이었다. 이들이 미군함 카톡틴 호에서 건넨 ‘지도자(loyal)’의 명단 17명중 김성수를 자신들 다음인 6순위로 매긴 것이다. 7

 

  나머지는 조만식(평양) 최동(세브란스 의사) 이만규(배화여학교 교사) 김창숙 구자옥(YMCA총무) 이임수(의사) 황진남(함흥) 홍순엽(변호사) 장덕수(보성전문 교수) 박용희(목사) 이원철(전 교수)이었다. 이중 조만식 건준 평남위원회 위원장은 여운형 뿐 아니라 송진우와 가까운 사이였고 이만규 이임수 황진남만이 여운형 측 사람들이었다. 일부러 송진우를 배제했지만 김성수 김창숙 장덕수는 송진우가 조직한 국민대회준비회(국준)에, 구자옥 홍순엽 장덕수 박용희 이원철은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참여하고 있었다. 최동은 미군정이 들어선 뒤 세브란스의전 교장으로서 조선의학교육평의회에 참여했다.

 

  2일부터 인천 앞바다에서 미군을 기다렸던 메신저들은 6일 건준이 인민공화국(인공)으로 바뀐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백상규는 7일 송진우 측의 국준 결성식에서 자신이 실행책임자로 선출된 것을 알지도 못했다. 8

 

  여운형이 생각한 ‘지도자’들은 인민공화국에서도 대표로 뽑힌다. 6일 여운형의 사회로 열린 건준의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인공 중앙인민위원(55명)으로 여운형 김성수 조만식과 여운형의 측근 이만규가 선출됐다. 건준이 좌익일색이라며 우려했던 여운형의 측근 이임수는 후보위원, 국준에서 고문을 맡게 될 김창숙이 역시 고문으로 뽑혔다. 여운형이 불참한 가운데 8일 중앙인민위원회의가 열린데 이어 14일 공산주의자들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조각명단에서 여운형은 부주석, 조만식은 재무부장, 이만규는 보건부장, 김성수는 문교부장이었다. 우익에서는 벽보에 적은 조각이라며 ‘벽상정부(壁上政府)’ ‘벽보내각’이라고 놀렸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32년 장덕수 모친 회갑연 때 명월관에 모인 인물들.
앞줄 가장 왼쪽에 앉은 이가 김성수, 오른쪽 끝이 여운형이다.
 

 

 

Notes:

  1. 이만규(李萬珪),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단기4279[1946], 206쪽.

    언제인가 중앙일보 사장시대에 몽양이 나에게 한 말이 새삼스럽게 기억된다. “현금(現今) 조선 안에 표면에 드러난 세력으로는 야소교 천도교등 종교단(宗敎團)을 들 수 있고, 그 외에는 김성수의 그룹이다. 동아일보 보성전문 중앙학교 방직회사 직뉴회사가 모두 김(金)의 계통이다.  그 사업이 모두 민족적으로 훌륭하다. 이다음 무슨 일이 있은 때에도 그 그룹이 상당한 세력을 갖일 것으로 모시(侮視,멸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일을 하려면 상당한 능률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염려는 자본주의에 편경(偏傾)하기 쉽다.”  이 말을 회상하고 보면 몽양이 송을 성심으로 합작하려 한 것은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송과 합작은 송 개인이 유능한 지도력이 있다고 본 것이 아니요 그 배후에 있는 그룹 전체를 상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좌익 중 크다고 볼만한 그 그룹의 편경을 방지하여 편경주의를 버린 우익과 합작시켜 대동일치를 시키려 한 것이니 혁명적 투쟁을 계속하여온 몽양은 다시 정치적 요리로도 현실의 수확을 걷자는 것이었다.

  2.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1993, 294쪽.

    몽양은 고하와 같은 계일인 김준연과 장덕수에게도 건국사업에 협동하기를 권하였으나, 두 사람 모두 고하와 분리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몽양이 이들과 합작을 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해방 전 몽양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조선 안에서 표면에 드러난 세력으로는 기독교 ·  천도교 등 종교단을 들 수 있고, 그 외에는 김성수의 그룹이다. 동아일보 · 보성신문 · 중앙고보 ·  방직회사 · 직뉴회사가 모두 김의 계통이다. 그 사업은 모두 민족적으로 훌륭하다. 이 다음 무슨 일이 있을 때에도 그 그룹이 상당한 세력을 가질 것임으로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일을 하려면 상당한 능률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염려는 자본주의에 편향하기 쉽다.’ (몽양 구술과 <여운형 투쟁사>에서)

  3. 9 Sept 45,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 (1945.9.9-1945.2.12) (‘주한미군일일정보요약’ 영인간행, 한림대학아시아문화연구소,1988)

  4. 유진오, 편편야화(片片野話)-일제말기의 보전(普專), 동아일보 1974년 4월 20일자 5면.

    일본말을 상용하라는 억지의 정책은 보전에서는 또 한 가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국어상용’이 강조되기 전에도 강의를 일본말로 하는 것은 보전에서도 원칙이 되어 있었지만 일본말을 잘 모르는 백상규(영어) 안호상(철학) 같은 분들은 별수 없이 우리말로 강의를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꿈도 일본말로 꾸라’는 세상이 되고 보니 그들의 처지도 딱해졌다.…당시 우리나라에서 영어회화를 제일 잘한다는 정평이 있던 백상규씨가 시학관을 퇴치하는 방법은 한층 걸작이었다. 시학관이 들어온다고 하는 시간에는 그는 그 시간이 독본시간이든 작문시간이든 불계(不計)하고 영어회화시간이라 해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만 떠들어 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학생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 물론이지만 영어회화시간이라서 영어를 한다는 데는 시학관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국어상용’은 강요하면서도 일인들도 영어라면 쳐다보고 있던 때라 보전학생들은 영어를 잘한다고 탄복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5. 조한용 씨(70·현 서울거주)의 말, 동아일보 1971년 12월 4일자 4면.

    까빈은 우리에게 소련군의 동태와 공산세력의 활동에 관한 것, 발전소의 분포 및 현황, 건준의 성격 권한 조직형태 구성인물 성분 등을 자세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되도록 상세히 설명했으나 까빈은 무엇인가 납득 못하는 듯한 태도와 표정을 보였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떠난 후 ‘인공’이 수립된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고 ‘까빈’ 일행은 전해 받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42척의 군함에 분승한 ‘하지’ 및 그 장병들과 함께 8일 오후 1시경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6. 여운홍 , (몽양) 여운형,  청하각,1967, 163~164쪽.

    한편 3일밤부터 시작한 폭풍우는 5일 아침에야 겨우 멎었다. 그때 우리가 타고갔던 선박은 겨우 70여톤 정도의 작은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어느정도 위험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5일 오후부터는 풍정낭식(風靜浪息)하여 해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한편 때로는 백사장에서 해수욕을 하는 낭만도 가질수 있었다. 그러나 날씨는 다시 흐려져 7일밤부터는 비가 또 내리기 시작하였다. 8일 새벽 3시경이었다. 그때 해상은 잔잔하고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재곤이『멀리서 불빛이 보인다고하면서 저것이 미군 함대인 것 같다』고 말하였다. 이에 우리는 벌떡 일어나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수많은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미군 함대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곧 선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할 차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한가지 곤난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천을 떠날 때 준비하였던 태극기를 놓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서 걱정을 하고 있노라니까 이것을 안 김재곤이 자기에게 일장기(日章旗)가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이리해서 훌륭한 태극기가 만들어졌으며 우리는 그것을 배 끝에 달아매었다. 한편 시간이 지남에 따라 멀리 보이던 불빛은 차차 커지더니 4시간반 쯤 해서는 선체가 완연히 보였는데 군함의 척수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우리는 맨앞에선 배로 가서 사령관이 탄 배가 어떤 것이냐고 물은 즉 뒤에 오니 물으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뒤에 오는 배들에게 묻기를 5, 6차나 되풀이한 끝에 우리는 마침내 사령관「하지」중장이 탄 배를 만났다. 그러나 그냥은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배를 향하여 악을 썼다. 그러자 그 배는 잠시 머물러서 긴 쇠사다리를 내려 주었다. 백상규가 먼저 오르고 다음에 내가 그리고 마지막에 조한용이 올랐다. 쇠사다리가 좀 미끄럽기는 했지마는 우리도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그때까지 해는 뜨지 않았다. 응접실로 안내된 우리는 건준위원장의 환영 메시지를 전달하려 왔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랬더니「하지」중장의 참모총장인「까빈」준장이 막료인 대령 2, 3인을 데리고 와서 그들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呂運亨)의 명의로 된 환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하지」중장과의 면회를 요청하였다.

  7. 남광규,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친일파와 토지문제에 대한 입장과 정치적 성격,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2집2호, 2011, 40쪽.

    이들이 미군에 건네준 친일 협력자들의 명단에는 윤치호, 한상룡, 박홍식, 김연수 등이 적혀 있었는데(조용중 1990, 43~47). 이들의 명단과 직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윤치호, 한상룡, 박충양, 이진호, 김명춘, 이기영 등 일제 작위수여자 6명과 진휴, 양.J.S.의 기독교 인사 2명, 화신 백화점 사장인 박흥식과 항공사 대표인 신영인과 같은 실업가 2명, 실업가지만 만주총영사였던 김연수, 경상북도 도지사 김대우, 총독부 교육국장을 했던 엄창섭 등 관료가 3명, 건준 참여 인사인 조병상 등 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해방 정국에서 공적인 활동이 중지된 자들로 후에 반민특위에서 친일파로 처벌당한 범주에 속한 인사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여운형이 미군에 건네주려 한 메시지 내용에 나타난 친일파 인물의 기준은 건준과 인공에 참여한 공산당 재건파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이 미군에게 장차 조선의 정부수립에 참여할 인사로 소개한 내용에는 김성수, 장덕수와 같이 이후 한민당 창립 멤버가 되는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이강국, 허헌 등 일부 재건파 공산당의 주요 인사들은 배제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건국 이후 반민특위에서 규정한 친일 인사의 범위는 여운형계가 지목한 친일파 인사들과 유사한 범위를 보여 주고 있다.

  8. 고하 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 출판국, 1964, 314쪽.

    이에 대하여 고하는 점차적인 포섭 방침을 세우고 연합군이 서울에 진주한 다음날인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심했다. 국민대회준비회는 임원 선출 결과, 위원장에 고하, 부위원장에 서상일(발기인총회때의 의장), 고문에 권동진 · 오세창 · 김창숙, 각부서 책임자에 김준연 · 장택상 · 김동원 · 윤치영 · 안동원 · 송필만 · 최윤동 · 이정래 · 이순탁 · 고재욱 · 설의식 · 강병순 등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고하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가 망라되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국민대회가 소집될 때까지의 실행 책임자로는 고하를 비롯하여 서상일 · 김준연 · 장택상 · 윤치영 · 김창숙 · 최윤동 · 백상규(이때 몽양의「건준」에서 전향하여「국민대회」에 참가) 등을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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