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D-storyⅡ 39 : 인촌과 고루(5)-조선어학회사건

Posted by 신이 On 11월 - 7 - 2012

 

조선어학회사건의 주역 고루 이극로가 1929년 귀국하자마자 어문운동에 뛰어든 것은 “당시 일본 통치하의 조선민족에게 이 언어가 곧 소멸되리라 보았기 때문” 1이었다. 그는 해방직후 자신의 일제시기 활동을 회상하면서 “이 어문운동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혁명의 기초를 삼고자했다”고 썼다.

 

  인촌 김성수는 세계일주여행을 마치고 1931년 귀국하면서 “그중에 가장 깨달은 것 하나는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융화하고저하는 정책과 노력은 하나도 성공치 못하더라는 것” 2이라고 말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실패하리라는 예견처럼 들린다.

 

  일제는 1940년 창씨개명 강행에 이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했다. 어문운동 억압이 극에 달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날조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민족운동단체로 규정 3하고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해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까지 모두 33명을 검거해 29명을 구속했다.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는 1년여에 걸쳐 갖은 고문과 악형을 가했다.

 

  이극로는 감옥에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4 그러나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초대관장을 지낸 김성수도 조사를 받았다.

 

  이와 관련한 유일한 증언자인 김선기는 자신이 1943년 9월 19일 기소유예로 출감한 뒤 김성수를 찾아갔다가 보안과장 야기(八木)에게 조사받았다는 얘길 들었다는 것이다. 5 김성수는 야기에게 “독립운동과 사전편찬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극로도 사전편찬으로 독립이 된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선기는 “김성수가 이 사실을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면서 “범인으로서는 못할 일”이라고 회고했다. 6

 

  김선기는 또한 김성수와 송진우가 조선어학회사건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애썼다고 증언했다. 7 일제경찰은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108명까지 전부 검거하려했으나 학무국의 지시로 축소했다고 한다. 8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우승규는 김성수가 ‘일제의 독편에 그 잔명을 보전하고 해방을 보게 된 것이 신명의 보우를 받은 하나의 기적이 아니었던가한다’ 9고 썼다. 10

 

  이극로를 비롯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고초를 치른 최현배 이희승 김윤경 김양수 김도연 김법린 이인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이은상 권덕규 안호상 곽상훈이 해방 후 김성수 측이 주도한 한국민주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1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어문운동을 펼친 조선어학회와 동아일보세력의 유대가 엿보인다.

 

한국민주당 발기인 중 조선어학회사건 관련자(밑줄 표시)

1945年 9月 8日 韓國民主黨發起人

姜仁澤 姜章洙 姜樂遠 康弼祥 康萬裕 高秉哲 高天仇 高柄南 高光表 高永完 高準澤 高羲東 高永完 高水煥 高光文 高在旭 高相俊 高志暎 具滋觀 具鳳書 具永根 具鳳祖 具滋玉 具滋赫 具本俊 具聖書 桂炳鎬 鞠泰一 奇世勳 奇雄 奇斗錫 南宮璞 南公春 任鳳淳 曺星煥 曺亨珍 曺圭百 曺燕煥 金東煥 金科白 金憲植 金觀濟 金夏弼 金相勳 金昌洙 金時學 金晟鎭 金鳳翼 金信均 金鴻爵 金容國 金哲鎬 金明東 金炳根 金應洛 金萬基 金熙成 金正璿 金洛泳 金鴻濟 金濟榮 金漢圭 金敏圭 金若水 金炳魯 金用茂 金時中 金武壽 金洙喆 金法麟 金道泰 金正奎 金浪洙 金載學 金麟鎬 金山 金鳴善 金哲洙 金恒圭 金東元 金炳淵 金觀鎬 金日光 金泰榮 金允榮 金永燮 金晩洙 金文圭 金重根 金德鉉 金在哲 金容殷 金哲奎 金甲植 金敎英 金鐘範 金相億 金碩龍 金興玉 金淳興 金性仁 金重鉉 金麗植 金鍾悳 金庸性 金善亮 金用鉞 金然城 金禹善 金光衝 金鍊 金東植 金碩鎭 金根培 金明德 金文鉉 金燮 金翊中 金炳洙 金泰烈 金相萬 金成浩 金元圭 金武永 金永喆 金永煥 金度演 金孝錫 金承植 金熙俊 金贊淳 金鳴亮 金鍾弼 金洪植 金基坤 金鳴善 金俊玉 金允經 金洛泳 金寬植 金寂音 金日永 金相敦 金相治 金策一 金奉武 金光春 金鳳翼 金光烈 金德銀 金箕鉉 金宗贊 金大奉 金相雨 金學善 金彼得 金鍾喆 金鍾珏 金春基 金榮勳 羅容均 羅明均 羅承奎 羅景鎬 羅有春 盧百容 盧壽鉉 盧天錫 盧承佑 盧世愚 盧就湜 이름梁源模 梁槿煥 梁濟博 梁源容 梁東萬 梁濟善 柳貞根 柳志水 柳子厚 柳基元 柳葉 柳容鐸 柳榮國 柳貞烈 李仁 李炳憲 李圭鳳 李源赫 李克魯 李庚洙 李鳳九 李寬永 李熙昇 李鏞 李敏弘 李昌煥 李英學 李相學 李時玩 李相殷 李浩呈 李鎬柱 李軒九 李世禎 李敏膺 李勳求 李休烈 李春昊 李正得 李相敦 李甲成 李晶來 李龍範 李鎭壹 李熙宰 李壽福 李英輝 李炳主 李漢容 李萬鍾 李基明 李鍾奭 李吉用 李殷相 李致寧 李聖鳳 李先根 李象範 李象武 李丙燾 李德松 李鍾洙 李庸憲 李道衡 李庸洙 李鴻稙 李斌承 李希寧 李光雨 李雲 李泰完 李起鵬 李重熙 李賢在 李東濟 李鍾駿 李容植 李源喆 李能雨 李丁奎 李容稷 李秉鎭 李量華 李淨 李榮俊 李炳洪 李正立 李曾林 李憲 李得年 李恒植 李康元 李昌秀 李元寧 李會極 李萬竹 李起世 李鍾奎 李鉉佑 李相規 李碩奎 李道濟 李度照 李潤洛 李源弘 李甲洙 李奎甲 李範英 李寅永 李乙漢 李聖熙 李豊求 李英 李順鐸 李泰榮 李承年 林鳳珍 林誠鎬 林圭 林宗恒 林海植 林鍾燮 林炳現 林聖福 明東 明濟世 明道奭 牟德錫 閔昌植 閔丙世 閔丙德 閔泳吉 閔庚輝 閔圭植 閔丙燾 閔癸植 朴商來 朴彰緖 朴元奎 朴容羲 朴容海 朴用淳 朴瓚熙 朴明煥 朴儀陽 朴鍾萬 朴準圭 朴文禧 朴淳道 朴錫圭 朴昌邱 朴古峰 朴仲漢 朴秉來 朴斗寅 朴明雋 朴容義 朴柱益 朴駿秉 朴源植 朴平山 朴相國 朴勝喆 朴宗赫 朴鍾華 朴瓚鉉 朴容喜 朴鶴田 朴寬燮 朴泰遠 朴凉實 方洙누이름 卞熙瑢 卞鴻奎 卞壽天 白寬洙 白涇水 白泓均 白小峯 白南國 白南雲 白麟濟 白南煥 白南奎 白南鴻 白仁受 白永基 白南祺 白南薰 白樂濬 白萬吉 裵熙晟 裵一權 裵仁植 裵廷鉉 裵榮春 徐元出 徐相國 徐容先 徐丙仁 徐珉鎬 徐相天 徐基俊 徐鳳勳 徐恒錫 徐基燮 徐東日 徐相巨 徐成達 徐廷基 成樂薰 薛義植 薛麟 宋鍾根 宋雲 宋必滿 宋南憲 孫永植 孫俊模 孫晋泰 孫在基 孫角 孫基勳 孫錫台 孫奉祚 孫外達 孫哲洙 愼鏞植 申元局 申宰休 申公淑 申德永 申泰翊 申洪均 申東旭 申鉉彰 申玩 申鳳休 辛兌鉉 沈鳳求 沈在德 安俊植 安奉鎬 安浩相 安亨俊 安孝相 安鳳鎬 安昌南 安栽瑢 嚴柱天 嚴明燮 吳鳳彬 吳錫均 吳永基 吳景淑 吳翊殷 吳弼泳 吳世昌 吳相鉉 吳胤善 吳貞洙 吳建泳 吳宗植 吳世豊 玉璿珍 禹興泰 元世勳 元翊燮 元一 兪乙濬 兪鎭午 兪致敦 兪億兼 兪鎭熙 劉興三 劉興山 劉寅壽 劉錫昶 劉載五 尹明龍 尹洪烈 尹昌錫 尹在殷 尹學起 尹宅榮 尹治衡 尹弘奎 尹元上 尹聲烈 尹潭 尹致暎 尹弘燮 尹潽善 尹相殷 尹昌錫 尹顯杓 尹鉉吉 尹聖容 殷周杓 張子一 張志暎 張龍河 張鉉重 張鉉植 張勃 張載性 張起沃 張鉉七 張德秀 鄭震燮 張錫英 張澤相 張連松 張世煥 張時華 張光好 鄭鍾植 鄭學龍 鄭世權 鄭基鋒 鄭晩溶 鄭吉龍 鄭學溶 鄭鐵 鄭武容 鄭昶溶 鄭求暎 鄭顯模 鄭琦瑢 鄭東於 鄭世鎬 鄭寅會 鄭均植 鄭永善 鄭煜 鄭保羅 鄭載源 鄭龍鎭 鄭元溶 鄭仁朝 鄭魯湜 鄭順錫 鄭烈模 리이鄭宇瀅 鄭振玹 鄭載擧 鄭用柱 鄭機謨 鄭珍容 鄭一亨 鄭漢吉 丁炳律 丁奎七 全甲淳 錢鎭漢 田學培 趙在新 趙圭煥 趙讓鎬 趙鍾培 趙憲泳 趙永元 趙孝源 趙暖夏 趙鼎奎 趙鍾國 趙鍾九 趙潤植 趙東泌 朱鍾勳 池龍洙 池載雄 陳洪基 車相達 千大根 崔召昌 崔養玉 崔秉濟 崔泰吉 崔箕寧 崔承金 崔養俊 崔鉉培 崔天 崔容均 崔昌文 崔熙松 崔文烈 崔元寬 崔承萬 崔泰泳 崔淳周 崔元東 崔萬熙 崔秉錫 崔泰旭 崔萬南 崔翰敎 崔慶煥 崔基涉 崔圭成 韓普容 韓東洙 韓聖斌 韓昇瑀 韓學洙 韓澤洙 韓弼洙 韓順魯 韓國鍾 韓南洙 韓秉鎬 韓昇寅 韓仁鳳 韓奎柏 韓泰五 韓軫熙 韓錫完 韓忠植 韓德權 韓泰洙 河錫辰 河祥鏞 河龍鐵 咸尙勳 咸台永 咸大勳 咸錫泰 咸錫勳 許然 許政 玄東完 玄濟明 玄相允 郭福山 郭鋒 郭尙勳 郭鍾于 郭柄夏 洪性夏 洪燦 洪順燁 洪元吉 洪義善 洪鍾珏 洪承恒 洪淳甲 洪鍾肅 洪鍾漢 洪淳昌 黃道哲 黃泳洙 黃文哲 權東鎭 權悳奎 權承烈 權潭 權義善 權泰陽 權五璇 權命柏 權錤洙 權泰憲 權瑩奎 權泰淑 文箕玉 文奉錄 文成洙 孟基永(傳單)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Notes:

  1. 이극로, ‘조선어학회와 나의 반생’,고투 사십년,1947, 을유문화사, 63쪽.

  2. 동아일보 1931년 8월 14일자 2면

  3. 조선어학회사건 최종판결문, 동아일보 1982년 9월 6~8일자 6 혹은 10면

  4.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8, 1998,402쪽.

    이극로도 감옥에서 고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고문을 많이 받은 것은 동지들이 한 일까지 자기가 다했다고 스스로 ‘죄’를 걸머지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5. 김선기 명지대 명예교수, ‘인촌 김성수’,  신문평론, 한국신문연구소, 1976년 4월호, 81~86쪽.

  6. 김선기, ‘한글맞춤법과 인촌’,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214쪽

  7. 김선기 명지대 명예교수, ‘국어운동, 한글학회의 발자취’, 나라사랑 제26호, 1977년 3월, 38~42쪽; ‘무돌 김선기 선생 글모이Ⅴ무돌 김선기 선생논문.산문집’, 도서출판 한울, 2007, 84~88쪽

  8.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도서출판 차송,2005,162쪽.

    원래는 사전편찬회 발기인 108명과 금전 기부자 전원, 또한 이를 후원한 신문사 책임자들과 심지어 진단학회 회원까지도 전부 검거하고자 했으나, 학무국의 지시로 검거인원을 축소했다고 한다.

  9. 우승규, 동아일보 1955년 2월 20일자 1면. 인촌 선생이 그렇듯、안으로는 민족 명일의 번영을 위하여 성열을 쏟는 한편、밖으로는 암암리에 해외에 있는 망명 지사들과 기맥을 통하여、광복운동에 또한 단충(丹忠)을 기울였었다。그리하여 선생은 8·15 그날까지、일제총독부가 이 나라에서 가장 미워하면서도、매우 꺼리고 두려워하는 대상자의 한사람으로、커다란 살촉을 받는 가운데서 살아온 것이다。이런 점으로 볼 때에、지금 생각하면、선생이 일제의 독편에 그 잔명을 보전하고 해방을 보게 된 것이、신명의 보우를 받은 하나의 기적이 아니었던가한다。

  10. 우승규, 나절로만필,  탐구당, 1978, 439~440쪽.

    인촌 선생이 기세(棄世)했다는 비보를 듣자 당시의 주필이었던 고재욱 전사장은 나더러 추도하는 사설을 쓰라고 지시했다. 처음엔 사양했으나 붓을 들었다.…나는 인촌 선생의 상중에 두 편의 사설을 썼다. 먼저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서’였고, 다음엔 ‘애도, 인촌 선생의 영결’이란 제목으로였다. 나는 전후 편에서 선생의 생전 인품과 업적 등을 들은대로 본대로 아는 데까지 썼다…한마디로 거족적 존경을 받는 참된 애국지사를 잃었다고 애닯은 뜻을 표했다. 이러한 찬사가 과했었는진 모르나 설사 내가 다른 신문사에 있었더라도 논조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으리라.

  11. 자료대한민국사 1, 1945년 09월 08일,한민당, 임정외에 정권 참칭하는 단체 및 행동 배격 결의 성명서[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