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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38 : 인촌과 고루(4)-조선어학회

Posted by 신이 On 11월 - 7 - 2012

  조선어학회가 벌인 민족운동은 모두 인촌 김성수와 관련이 있다. 김성수는 적극적으로 고루 이극로와 조선어학회를 지원했다. 조선어학회 운영은 이극로가 했고, 이극로가 조선어학회 운영을 하도록 한 주인공은 김성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 

 

  그러나 이희승은 김성수가 조선어학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전했다. 그 관계라는 것이 조선어학회사업에 대한 재정적 뒷받침이었다는 것이다. 2 1933년 한글 반포 제487회 기념일에 나온 ‘한글마춤법 통일안’ 머리말에도 “이 통일안이 완성함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내지 물질적으로 많은 성원과 두터운 양조(襄助)를 주신 경향 유지인사에게 특히 공탁 송진우 김성수 기타 제씨(諸氏)와 각 보도기관 및 한성도서주식회사에 대하여 깊이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돼 있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발간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 머리말.

“끝으로 이 통일안이 완성함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내지 물질적으로 많은 성원과 두터운 양조를 주신 경향 유지인사에게, 특히 공 탁, 송 진우, 김 성수 기타 제씨와 각 보도기관 및 한성도서주식회사에 대하야 깊이 감사의 뜻을 표한다.”고 돼 있다.

    

  김성수는 이극로에게 보성전문 교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으나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사업을 들어 사양했다고 한다. 3 1932년 3월 보성전문을 인수한 김성수가 언제 이극로에게 교장직을 제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해 6월에 교장직에 취임한 김성수는 1934년 9월 안암동에 새로 지은 학교로 이전한 뒤 정원초과 모집문제로 1935년 5월 사임했고, 그 사이 김용무가 교장직에 있다가 그만두고 김성수는 1937년 5월에 재취임했다.

 

  이극로는 1935년 3월 15일 김성수를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초대관장으로 내세웠다. 일본인들이 김성수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는 “일제총독부가 이 나라에서 가장 미워하면서도, 매우 꺼리고 두려워하는 대상자의 한사람”이었다. 4 김성수는 이 관장직도 첫 출간사업인 ‘조선문자 급(及) 어학사’가 나오자마자 변호사 이인에게 넘긴다.

 

  이극로는 치밀했다. 1936년 4월부터 조선어학회에서 ‘한글’을 편집했던 이석린은 이극로가 친일거두에게 학회에서 나오는 책들을 기증하고 선물도 했다고 회고했다. 5 이극로는 1941년 8월 25일 친일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나가 발언하기도 했다. 6 이석린의 말대로 ‘어떡하든지 국어의 사전을 완성해야 했다. 어떡하든지 우리말의 명줄을 이어야 했다. 그것은 조선 민족이 조선어학회에 거는 바람이기도 했다.’ 7

 

 

 

Notes:

  1. 이석린, ‘화동 시절의 이런 일 저런 일’,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 23쪽.

    조선어학회 운영은 이극로 박사에 의한 것이고, 이극로 박사로 하여금 조선어학회를 운영하게 한 장본인이 김성수 선생임을 경찰 당국이 모를 리 없었다.

  2. 인촌기념회 편, 인촌 김성수 전, 인촌기념회, 1976, 377~378쪽.

    맞춤법 작성을 담당한 위원의 한사람이었던 이희승에 의하면, “인촌선생은 조선어학회와 직접적인 관계는 맺고 계시지 않았지만 기회 있는 대로 음으로 양으로 원조를 아끼지 않으셨다. 단번에 많은 금액을 내주신 일은 없으셨으나 일이 있을 때마다 가서 청하면 거절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이극노가 간사장으로 학회 일을 맡았을 때도 그랬고, 내가 간사장이었을 때도 그랬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으로 표준어 사정위원회를 우이동 봉황각에서 열었을 때 인촌 선생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이었던 300원(圓)을 투척(投擲)하셨고 철자법위원회를 제1회를 개성, 제2회를 인천, 제3회를 서울 화계사에서 열었을 때도 그때마다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내주셨던 것으로 안다”고 회상하고 있으며

  3. 이석린, ‘화동 시절의 이런 일 저런 일’,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 25쪽.

  4. 우승규, 동아일보 1955년 2월 20일자 1면.

    인촌 선생이 그렇듯、안으로는 민족 명일의 번영을 위하여 성열을 쏟는 한편、밖으로는 암암리에 해외에 있는 망명 지사들과 기맥을 통하여、광복운동에 또한 단충(丹忠)을 기울였었다。그리하여 선생은 8·15 그날까지、일제총독부가 이 나라에서 가장 미워하면서도、매우 꺼리고 두려워하는 대상자의 한사람으로、커다란 살촉을 받는 가운데서 살아온 것이다。

  5. 이석린, ‘화동 시절의 이런 일 저런 일’,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 20쪽.

    이극로 박사가 조선어학회의 사업을 하는 데에 총독부가 문제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친일거두를 접촉하여야 하였고, 박영효 후작과 중추원 참의들에게 ‘한글’잡지를 매달 기증하고,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조선문자 급(及) 어학사’를 기증하기도 하였고, 특정인에게는 연말에 백화점의 상품권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6. 임전대책협의회 개최에 관한 건, 경고비(京高秘) 제2397호, 1941년 8월 27일.

    이극로는 “정부가 임전대책으로서 어떠한 방침을 정하더라도 당국의 방침에 순응해야 한다. 본 문제를 여기에서 단시간에 이야기한다 해서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말한다면, 선결문제는 유민(遊民), 부유계급, 여자의 박약한 경제적 지식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들의 사회적인 맹성(猛省)을 촉구하고 최저표준에 도달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고 말하였다.

  7. 이석린, ‘화동 시절의 이런 일 저런 일’,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 28쪽.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죽지 못해서 국민총력 연맹에 가입하여 ‘국민총력 조선어 학회 연맹’이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이극로 박사를 위시하여 조선어 학회 사전 편찬원들이 조선 신궁에 참배하기도 했다. 나 이석린도 따라다녔다. 그리고 황국 신민 서사를 외워야 했다. 아니, 외우는 척했다. 어떡하든지 국어의 사전을 완성해야 했다. 어떡하든지 우리말의 명줄을 이어야 했다. 그것은 조선 민족이 조선어학회에 거는 바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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