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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37 : 인촌과 고루(3)-김두봉과의 인연

Posted by 신이 On 11월 - 7 - 2012

  고루 이극로는 귀국 전 아일랜드에서 모국어교육 상황을 조사하면서 한글운동을 결심했다. 이극로는 1928년 6월 6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시가를 둘러보고 문부성도 방문했다. 1  이극로는 “그 나라 사람들이 모국어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 간판과 도로표식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조선말과 글도 저런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조국에 돌아가면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에 한 생을 바치자고 결심했다” 2고 한다.

 

  귀국 후 이극로는 조선어사전편찬회 설립에 앞서 1929년 7월 상해에 있는 김두봉에게 이윤재를 보내 그를 초빙하려했으나 거절당한다. 3 김두봉은 한글운동에서 이극로의 스승이었다. 김두봉은 조선어사전편찬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4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설립된 뒤에도 이극로는 1930년 1월 상해를 거쳐 귀국한 김양수를 통해 김두봉의 얘기를 듣는다. 5 김두봉은 “한갓 조선 어문의 연구 또는 사전 편찬은 민족운동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연구의 결과, 정리 통일된 조선 어문을 널리 조선 민중에게 선전 보급함으로써 처음으로 조선고유 문화의 유지 발전, 민족의식의 배양도 기할 수 있으며 조선 독립의 실력 양성도 가능한 것이니 다음부터는 이와 같은 방침으로 진행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해 김두봉은 동아일보가 창간 10주년 기념으로 한글연구부문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인사에게 주는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동아일보 1930년 9월 3일자 4면.
김두봉이 최현배와 함께 조선어문 공로자로 소개됐다.

 

  인촌 김성수는 1930~1931년 영국 런던에 체류할 때 말과 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6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우리나라 문자이고 고유한 말이다”고 했다고 한다. 7 

 

  이 같은 김성수의 경험은 동아일보가 앞장서 조선어학회에서 마련한 새 철자법을 채택하고 이에 맞춰 7만원을 들여 새 활자를 만드는 데 하나의 동기가 됐다. 8 동아일보는 신철자법통일안이 정식으로 발표되기 전인 1933년 4월 1일부터 통일안 원안에 따라 지면을 새롭게 꾸몄다. 9

 

동아일보 1933년 3월 30일자 석간 2면 지면(왼쪽)과 4월 1일자 석간 2면 지면.
4월 1일자 신문부터 새 철자법에 따라 새 활자를 만들어 지면이 깨끗하고 산뜻하다.

 

  김성수도 김두봉과 계속 직간접으로 연락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 간사 현동완이 1934년 11월경 남경에서 김두봉을 만났을 때 “김성수의 도움으로 영국으로부터 어학책을 송부하여 왔으므로 김성수와 만나면 잘 전언하여 주기 바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어 김두봉은 현동완에게 “원세훈, 김성수, 권동진, 안재홍과 만나면 잘 전하여 주기 바란다”며 안부를 전했다. 10

 

  1934년 11월 이전이라면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이 영국 런던대에서 유학할 때였다. 김상만은 방학 때 귀국해서는 이극로를 조선어학회 사무실로 찾아왔고 출국할 때도 인사하고 떠났다. 11 동아일보 서무부장 김철중의 차남 김선기는 1934년 6월 조선어학회 대표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가 1937년에야 런던대에서 음성학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김성수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김선기는 1935년 7월 런던에서 열린 제2회 국제음성학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 이극로는 이희승 정인섭과 함께 한글 음성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12

 

동아일보 1935년 11월 14일자 3면.
이해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2회 국제음성학대회.

 

  김성수와 김두봉이 단지 1915년부터 조선물산장려계에서 함께 활동한 것만으로 김성수가  김두봉의 활동을 지원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 상해에서 김두봉이 교장으로 있는 인성학교 앞으로 자금을 내놓은 것이라든지, 김두봉에게 어학책을 보내도록 한 것이 김두봉의 활동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었는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김성수가 글을 쓰거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성학교 자금은 차치하고라도 어학책을 송부한 것은 김두봉의 한글연구나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극로도 그렇지만 김두봉도 해방 후 북한으로 가 그에 대해 설명할 기회는 없었다.

 

 

 

Notes:

  1. 이극로,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영국 런던에서 유학하던 때와 그 뒤’, 조광 1936년 7월호, 97쪽.

  2.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8, 1998, 402쪽.

    그랬더니 이극로는 아일랜드에 갔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모국어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 간판과 도로표식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조선말과 글도 저런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조국에 돌아가면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에 한 생을 바치자고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3. 조선어학회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종결서 일부, 이극로의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71쪽.

  4. ‘사회 각계유지 망라, 조선어사전편찬회’, 동아일보 1929년 11월 2일자 2면.

  5. 조선어학회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종결서 일부, 이극로의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72쪽.

  6. 김성수의 말, 이희승 회고, ‘인촌 김성수-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215~216쪽.

    “내가 영국에 갔을 때지. 내가 신문을 하고 있다니까 한다하는 지식인들이 내게 묻더구먼. 조선은 중국어를 쓰느냐, 아니면 일본어를 쓰느냐. 문자는 어느 나라 걸 쓰느냐? 그렇게 묻더구먼?”

  7. 김성수의 말, 이희승 회고, ‘인촌 김성수-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216쪽.

    “당연허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 가방 속에서 우리 동아일보를 꺼내 보여 주었지. 이것이 우리나라 문자이고 고유한 말이다. 그랬더니 모두 뒤로 자빠지는 거야. 고유한 말과 문자를 가진 나라는 지구상에 몇 안 되는데 그렇게 유구한 문화국인 줄 몰랐다고 말여”

  8. 김성수의 말, 이희승 회고, ‘인촌 김성수-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216쪽. 

    “돈 걱정은 말게. 민족 백년대계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돈 아까와 할 필요 뭐 있는가? 공무국에 알아 봤더니 7만원이면 새 활자로 바꿀 수 있다더구먼? 우리가 솔선수범하는 거여”

  9. ‘한글철자법 십삼 단제’ 사설, 동아일보 1933년 4월 1일자 석간 1면.

    창간 13주년、기념. 우리 사에서는 여섯 해의 세월과 7만의 돈을 들여 포인트식 새 활자를 만드는 동시에 한글식 새 철자법을 채용하기로 하야 오늘부터 시행하게 되엇다。이것은 오직 우리 동아일보의 큰일일뿐더러 진실로 조선말과 글을 위한 큰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우리가 우리 신문 모든 독자에게 새 철자법의 요령을 알리려고「신철자편람(新綴字便覽)」을 오늘 신문의 부록으로 하는 것도 아마 한글운동이 일어남으로부터 처음 잇는 대선전이라고 믿는다。

  10. 증인 현동완 신문조서, 중국 군관학교 입교 주선 사건,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5 중국지역독립운동 재판기록 3. 피의자 안재홍에 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사건에 대하여 소화 11년[1936년] 6월 17일 경성종로경찰서에서 사법경찰리 경기도순사 이익용을 입회시켜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답 김두봉의 이야기는
    1, 경성의 김성수의 도움으로 영국으로부터 어학책을 송부하여 왔으므로 김성수와 만나면 잘 전언하여 주기 바란다는 것.
    2, 경성으로 돌아가면 원세훈, 김성수, 권동진, 안재홍과 만나면 잘 전하여 주기 바란다는 것.
    3, 조선인이 이곳에 오면 독립운동을 시키지만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생활에는 고생시키지 않음. 생활은 내가 보증한다. 또 조선독립운동자의 단결이 강하므로 조선에서 온 청년을 길가에서 헤매게 하는 일은 없다. 희망자가 있으면 청년을 보내 주기 바란다는 것. 군관학교에는 수명을 입학시키고 있는데 돌아가면 안재홍과 원세훈 등에게 그 말을 해 줄 것.
    4, 유도를 하는 청년도 필요하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였고,…

    답 안재홍은 내가 당시 거주하던 서대문정 이정목에 놀러 왔기 때문에 집에서 만나 김두봉 앞으로 청년을 보내면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독립단에 가입시켜서 충분히 생활을 보증할 뿐만 아니라 상해에서는 사람을 많이 보내 줄 것을 희망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였고, 원세훈도 당시 누차 같은 말을 하였으며, 김성수에게는 어학책을 영국에서 김두봉에게 송부한 일에 대하여 답례의 말을 전했을 뿐이다.

  11. 이석린, ‘화동 시절의 이런 일 저런 일’,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 23쪽.

    김성수 선생의 자제가 영국 유학중 방학 때에 귀국하여서는 이극로 박사를 조선어학회 사무실로 찾아와서 뵙고, 방학이 끝나고 영국으로 떠날 때에도 뵙고 떠났다. 이 분은 돗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상으로 김성수 선생과 이극로 박사와의 사이를 알 수가 있다.

  12. ‘조선음성학 세계적 진출’, 동아일보 1935년 9월 24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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