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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36 : 인촌과 고루(2)-안창호와의 관계

Posted by 신이 On 11월 - 7 - 2012

  고루 이극로가 1929년 귀국 후 추진한 조선어사전편찬회 설립 1에 인촌 김성수는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한 달 만에 출국한다. 선진문물을 직접 살펴보기 위한 세계일주여행이었다.

 

  세계일주여행은 김성수에 앞서 변호사 허헌이 딸 허영숙과 함께 다녀왔다. 이극로도 독일에서 귀국하기 전 프랑스와 영국, 아일랜드와 미국을 둘러보았다. 김성수가 일본을 들러 첫 기착지로 삼은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로 보인다.

 

  김성수는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임시정부와 인성학교에 자금을 내놓는다. 이때 인성학교 교장은 김성수가 1915년 조선물산장려회에서 함께 활동한 김두봉이었다. 2. 김두봉은 또한 이극로에게 상해시절 한글연구의 스승이기도 했다.

 

  김성수와 이극로는 치밀했다. 그러나 김성수가 기록을 남기지 않은데 비해 이극로는 기록했다. 3 유진오가 일기 때문에 곤혹을 치른 것 4이나 후에 이극로가 수첩 때문에 고초를 당하는 것 5과 같은 일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나 김성수는 편지 외에는 글을 쓰지 않았고 6 글을 쓸 줄 몰랐다. 7 정확하게는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8

 

  따라서 김성수의 상해 임시정부 방문 기록은 찾기 어렵고 증언에 따를 수밖에 없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안창호 내무총장의 비서를 지낸 구익균은 자신의 회고록 9에서 “유럽을 순방한 뒤 귀국길에 상해에 들른 인촌 김성수도 도산을 찾아서 인성학교에 기부금을 전했는데,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기금도 내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밝혔다. 10

 
  “모든 천도교 등 여러 사람들이 세계일주를 했지만 김성수 씨만이 상해를 방문했다. 상해만 가면 임시정부와 관계있다고 괴로우니까 안가는데, 김성수 씨만이 상해를 방문해서 일금, 인성학교에 일금, 도산 선생에 일금, 돈을 주고 가셨다고, 그렇게 뜻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도산 선생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11

 

 

안창호의 비서 구익균. 올해 나이 105세다.

 

  김성수는 측근들에게 임시정부 방문 사실을 얘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를 만난 사실을 농담 속에서 밝히고 있다. 김성수는 농담을 좋아했다. 그는 윤택중 12에게 임시정부 방문 때 안창호와의 금주 약속을 털어놓으며 “영국에 갔을 때 그걸 깜박 잊고서는 정말 기가 막힌 위스키가 있길래 한 병을 사서 소포로 도산 선생한테 부쳐 드렸어. 아껴가며 잡수라고…그러니 그걸 받는 선생의 얼굴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게. 실수한 거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세계일주를 마친 귀국길이 아니라 일주를 위한 출국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극로는 자신에 대한 일들을 빠짐없이 수첩에 적어두고 자주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도 했다. 그는 가출옥해 있던 안창호와 점심을 먹은 사실도 적었다. 13 안창호와는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극로는 1936년 10월 28일 한글반포 제490회 기념식에서 안창호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안창호는 “조선민족은 조선(祖先)으로부터 계승해온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결국은 국가까지 잊어버렸다. 다만 조선어만을 보유하는 상태이므로 이것의 보급 발달에 힘쓰지 아니하면 아니된다”고 말했다. 14 이 때문에 이극로는 종로경찰서에 불려가고 15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때도 고초를 치른다.

 

  김성수와 안창호의 일화는 계속된다. 안창호가 가출옥해 있을 때 김성수가 여관으로 찾아가 방석 밑에 돈을 넣어줬다든가 16, 별세 직전 병원비를 몰래 전했다는 일 17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없다. 김성수는 해학을 즐기면서도 치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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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익균 선생 증언
Title : 구익균 선생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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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사회 각계유지 망라, 조선어사전편찬회’, 동아일보 1929년 11월 2일자 2면.

    어찌하든지 속히 완전한 조선어사뎐(朝鮮語辭典)을 제뎡할 필요가 잇다고 얼마 전 사회 각 방면의 인사를 망라한 유진태(俞鎭泰)씨 등 108명의 발긔로 조선어사뎐편찬회발긔회(朝鮮語辭典編纂會發起會)를 조직하야 한글긔념일인 지난 31일 오후 7시 시내 조선교육협회 안에서 한글긔념식을 마친 뒤에 즉시 발긔회 총회를 열고 여러 가지로 토의한 결과 결국 조선어사뎐편찬회를 창립하얏는데 발긔인은 알에와 갓다더라.

  2. (국가보훈처)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8권:문화투쟁사, 독립유공자 사업기금 운용위원회, 1976,346쪽. 조선물산장려계(각주:경북경무부의 ≪고등경찰요사≫pp.260∼264.)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고보 출신으로 1년제) 학생들이 조선물산장려계를 조직하고 경제적 자립 사상을 비롯한 민족혼 고취를 목표로 그들은 전해 일본에 갔던 수학여행기를 가장한 동유기(東遊記) 90부를 발행하여 보급하는 외, 회원간의 토론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발각되어 피검되었다. 그들은 휘문의숙의 남형유·최남선 등의 찬동을 얻어 지도받기도 했는데 관련자 130여 명 중에는 김성수·박중화·유근·김두봉·안재홍 등이 포함되어 있다.

  3. 이극로, 고투 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4. 유진오, ‘각계원로들의 체험을 엮는 장기시리즈-편편야화 53, 동아일보 1974년 5월 2일자 5면.

    우선 그날의 내 일기를 그대로 인용해 보기로 하자。(괄호안은 이번에 넣은 설명)『1945년 8월 15일, 수, 청(晴)。일기쓰기를 그만둔 지 만 열다섯 해다。 사회사정연구소 사건으로 서대문서에 검거되어 일기 때문에 갖은 욕을 다 당한 이후로 일기쓰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이었다。그러나 오늘부터는 일기를 도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날을 기다림이 대범(大凡) 얼마나 되었던고!

  5. 최영희 김호일 공편, (애산) 이인, 과학사(애산학회 편찬),1989,167쪽.

    이극로는 무엇이든 수첩에 적어두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것으로 해서 여러 사람이 겪은 고초가 막심했다. 그는 안창호와 점심을 같이 먹은 사실도 적어놓았다. 심지어는 김양수의 자제가 휘문학교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일과 식이 끝난 뒤 참석자 몇 사람이 함께 점심 먹은 일도 수첩에 기록을 했다. 일경은 이 수첩을 근거로 꼬치꼬치 캐묻는데 “점심을 먹으며 무슨 말을 하였느냐. 식당에서 나와서 어디로 갔느냐”고 했다. 애산은 사실대로 “말한 것이 없다”고 대답하자 굵직한 고무호스로 난장질을 하고 몸을 비틀어대는 등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애산은 그 일로 열흘이상을 닦달을 당하여 이후로 수첩이란 것은 도대체 지니지 않게 되었다.

  6. 인촌기념회 편, 인촌 김성수 전, 인촌기념회, 1976, 432쪽.

    이러한 매일신보의 기자가 계동으로 찾아와서 ‘다음은 선생님의 차례’라면서 제자들을 학병으로 보낸 학교장으로서의 감격을 써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아시다시피 나는 글을 쓸 줄 모르오.’

  7. 유진오, ‘인과 지의 지도자’, 동아일보 1962년 2월 18일자 석간 2면.

    보성교장으로 재임하시는 동안, 나는 7,8년간 졸업식전, 기타의 경우에 선생이 낭독하신 식사 기념사 훈사(訓辭) 같은 것을 대필(代筆)하였는데,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큰 고역이었다.;유진오, ‘인간 인촌 김성수’, 신동아 1976년 4월호, 496쪽. 인촌 선생을 모시고 보성전문학교에 있는 동안에 강연 원고나 훈시 등을 써 드리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당신이 글은 안 쓰시지만 내가 글을 쓰다보면 정신이 집중되지 않고 귀찮을 때 슬쩍 넘기고는 나중에 마음에 걸렸는데 이것을 읽으신 인촌 선생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8. 신도성, 정가의 낙수, 관동출판사, 1977.49~51쪽.

    다음날 인촌선생은 나를 병석에 불러서 부통령직을 사임할 뜻을 말씀하고, 그「사임서」의 기초를 명하였던 것이다.…나는 밤을 새워가며 초안을 만들고, 몇 번이나 인촌선생에게 읽어드려서 필요한 수정을 가하곤 하여, 이튿날 아침까지에 겨우 긴 두루마리에 정서(淨書)를 마쳐서 국회로 보냈다.;신도성, 정가의 낙수, 관동출판사, 1977.54~55쪽. 나는 병원선내에 있었으므로 이렇다할 수고를 한 것은 없었으나, 그래도 인촌 선생의 치사를 작성하느라고 며칠을 소비한 끝에 이윽고 기다리던 6월 21일이 되자

  9. 구익균, 새 역사의 여명에 서서, 일월서각, 1994, 127쪽.

    김구 선생의 특무공작도 안창호 선생의 재정지원을 받고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미국 동포들이나 중국을 지나가던 국내 인사들이 안창호 선생을 신뢰해서 그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대주었으므로 도산이야말로 독립운동자금의 주머니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유럽을 순방한 뒤 귀국길에 상해에 들른 인촌 김성수도 도산을 찾아서 인성학교에 기부금을 전했는데,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기금도 내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0. 구익균 회고,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236쪽.

    어느 날 도산 선생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말씀을 하다가 인촌 선생만큼 용기 있고 진실한 애국자가 없다는 말씀을 했다. 인촌 선생은 세계 일주여행 길에 상해에 들러서 일본인과 그 첩자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도산 선생을 찾아 왔었다는 것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도산 선생 사무실로 찾아온 사실에 더 감격한 듯 했다. 당시 국내의 지사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보낼 때는 신변이 위험하여 꼭 인편(人便)을 이용하곤 할 때였는데 국내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던 실력자 인촌 선생이 임시정부에 2천불, 그리고 인성학교에 5백불을 내놓으셨는데 그 자금보다도 그 분이 직접 방문한 것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도산 선생을 직접 뵙고 독립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고 협의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1. 구익균 증언 녹화, 2011년 11월 3일 서울 종로구 익선동 자택.

  12. 윤택중 회고,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368쪽.

  13. 최영희 김호일 공편, (애산) 이인, 과학사(애산학회 편찬),1989,167쪽.

    이극로는 무엇이든 수첩에 적어두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것으로 해서 여러 사람이 겪은 고초가 막심했다. 그는 안창호와 점심을 같이 먹은 사실도 적어놓았다.

  14. 조선어학회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종결서 일부, 이극로의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70쪽

  15. 이석린, ‘화동 시절의 이런 일 저런 일’,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 글모이, 한글학회, 1993, 23~24쪽.

  16. 김재순 증언, 2008년 7월 15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샘터사 사무실.

    “나는 박의규에게 들었다. 동아일보 체육부장을 지낸 참 재미있는 분이다. 박의규와 가깝게 지냈는데 박의규 씨는 도산의 보디가드랄까 수행원이랄까 도산이 시골 같은데 가면 따라다녔다. 1935, 36년경이다. 도산이 서울에 오면 화신 앞에 있는 중앙호텔에 묵으신다. 여러 사람이 찾아오는데 인촌도 와서 절한다. 박의규는 수행원으로 방구석에 있다가 인촌의 손이 방석 밑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본다. 박의규는 참 유머가 많은 사람이다. 인촌이 돌아가고 도산 선생은 방석 같은데 신경 안 쓴다. 박의규가 얼른 방석 밑을 보면 1000원도 있고 그랬다고 한다.”

  17. 이정희 회고,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1985, 237~238쪽.

    마지막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을 도와주신 인촌 선생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찾아다니십니까? 어서 돌아가십시오.”
    눈물이 왈칵 나올 지경이었다. 믿고 갔던 인촌 선생마저 그렇게 냉대를 하는 것이었다.
    도산 선생께 경과를 말해야 하는데 그게 걱정이었으나 나대로 흥분은 가라앉히고 말씀을 드렸다.
     며칠이 지난 후 도산 선생은 날 가깝게 부르시더니 눈물을 흘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인촌이 사람을 보내 많은 협조를 했어. 정말 인촌은 사려 깊은 사람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만약 내가 일본 관헌(官憲)에라도 잡히어 조사를 받는 날이면 여자로서 비밀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임을 인촌 선생께서는 걱정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도산 선생도 인촌 선생도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이고 당시 일군(日軍)에 몸담고 있던 바깥양반(이응준·초대 육군참모총장)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렇게 야단을 치신 후에 나 몰래 도산 선생에게 믿을 만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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