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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이인은 1927년 2월 피압박민족대회에 프랑스 파리 유학생 김법린을 조선대표로 파견할 때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인이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사건에 이 사실이 포함돼 고초를 겪었다고 회고 1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어학회사건의 주역인 고루 이극로를 피압박민족대회에 파견한 것은 동아일보였다.

 

  이극로는 1927년 2월 베를린대학 재학 중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열린 제1회 피압박민족대회에 황우일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다. 2 동아일보 기자 김준연은 베를린대학 동기였는데 이극로에게 여비를 보냈다. 3조선대표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환기시키고 취재도 하라고 부탁했다. 김성수가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을 때였다. 4

 
  조선대표로 황우일과 이극로 외에 프랑스 유학생 대표 김법린, 독일 유학생 대표 이의경(필명 이미륵), 여행중이었던 허헌이 참석했다. 허헌은 동아일보사장 직무대행을 지낸 항일변호사였다. 당시 허헌은 동아일보 취체역이었는데 이 대회에는 신문기자로 참석했다.

 

동아일보 1927년 5월 14일자 2면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한 조선대표와 일본공산당 대표.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편산잠 이의경 이극로.

 

동아일보 1927년 3월 21일자 2면

 

  이극로는 백림(伯林·베를린)통신원으로서 기사를 썼다. 5 기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정확했다. 한마디로 치밀했다.

 

  김법린이 대회에서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압제에 대해 탄핵하는 기사 6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김모(金某)’라 표기돼 있다. 총독부를 의식한 것이다.

  
  이극로의 치밀함은 귀국 후 1930년 가을 재만(在滿)동포 위문사 겸 만주당국 교섭사로 만주에 갈 때도 드러났다. 당시 중국 영토인 만주의 길림과 돈화 사이 철도연변에 사는 조선동포를 만주당국이 가혹하게 탄압하자 조선의 신문사를 중심으로 각 사회단체가 이극로를 재만동포 위문사 겸 만주당국 교섭사로 파견한 것이다.

 

  이극로는 서울을 떠나기 전날 각 신문에 일부러 자신의 사진을 크게 내고 기사를 잘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7신문에 난 사진과 기사로 여권 대신 신분을 증명해 영문도 모르게 죽게 될 것을 방비한 것이다. 만주동포에 대한 추방 살해가 빈번한 만주는 외부인에게는 더 위험했다.

 

동아일보 1930년 9월 30일자 2면

 

  사실상 이극로는 신문사, 특히 동아일보의 특파원이었다. 이극로는 만주 안동현에 도착하자 동아일보 신의주지국에 근무하는 서범석 기자를 찾아 참고할 얘기를 들었다. 8 이극로는 누구보다도 만주사정에 정통했다. 이극로는 1912~1915년 주로 만주에 있었고, 1915년 겨울 만주 무송현을 떠나 1000리를 걸어서 안동현까지 왔었다.

 

 

 

Notes:

  1. 이인, ‘항일투쟁회고’, 경향신문 1962년 8월 2일자 2면. 필자가 1942년 11월 조선민족을 붙들기 위한 조선어와 한글보존을 위한 조선어대사전간행과 백이의(白耳義)「브라셀」에서 개최되는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비밀히 김법린 씨를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에 참가케 했던 것과 그 외 필자 개인관계로 일인(日人)이 지적했던 혁명투사양성기관인 조선양사관과 조선의 문화증진을 위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초대관장 인촌 김성수 2대가 필자) 과학을 보급 여행(勵行)하는 조선과학보급회, 발명학회, 조선물산장려회의 각 대표 책임을 필자가 당하고 있던 것 전부는 그 궁극의 목적이 조선독립의 준비공작이었다.

  2. 조선어학회사건 일제 최종판결문 전문, 동아일보1982년 9월 8일자 10면. 백림 대학재학중 1927년 백이의(白耳義) 수도「브뤼셀」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여 총독 정치의 즉시 중지를 절규하여 조선독립을 위하여 분투한 바 있고

  3. 이극로, 고투 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36쪽. 백림대학에서 동창으로 있던 김준연씨는 일찌기 귀국하여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있던 때이다. 세계 약소민족대회가 백이의 수도 부라슬에서 열린단 말을 듣고 국내의 대표로 나와 황우일을 파견하게 되어서 만주에 나가서 여비를 나에게 부치게 되었다. )

  4. 유진오, 1962년 2월 18일자 2면. 고하(송진우)는 호방하고 인촌(김성수)은 해학을 좋아해서 주석같은 데서 두 분이 맞붙으면 상대를 사뭇 헐뜯는 것 같은 농담이 벌어지는 때도 흔히 있었다。이를테면『인촌은 돈으로 사장(동아일보사장)을 했지。나는 내 몸뚱이로 사장을 했단 말이야』(고하가 필화사건으로 일정의 형무소 살이를 한 일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고하가 내던지면 『여북 미련해야 몸뚱이로 사장을 한담』하는 격이다。

  5. 백림(伯林·베를린)통신원 특신, ‘백국(白國·벨기에) 수도에 개최된 반제국주의대회기(記)’, 동아일보 1927년 3월 21일자 2면. 1927년2월5일부터 동(同) 14일 백경(白京·벨기에)에서
    루보=전세게에서 압박밧는 게급(階級)과 민족(民族)들이 공수동맹(攻守同盟)으로 생존권을 보전하기위하야 1925년 겨을에 독일 백림(伯林)을 비롯하야 파리(巴里) 론돈(倫敦)등 기타 세게 각처의 주요도시에서 반뎨국침략주의대련맹(反帝國侵略主義大聯盟)의 긔관을 설치하고뎨국주의대항책을 강구하기 위하야 금번 백이의(白耳義) 서울『부랏셀』에서 대회를 열게 되얏는데 이 대회는 예비회의와 정식회의의 두차례로 난우어 예비회의는 2월 5일부터 동 9일까지 5일간 정식회의는 2월 10일부터 동 14일까지 5일간으로 전후 열흘동안 열리엇섯는데 대회의 전후 경과에 대하야 백림통신원(伯林通信員)의 특신을 오늘부터 계속하야 소개함니다.

  6. ‘대회벽두에 조선대표가 일본압박을 탄핵’, 동아일보 1927년 2월 11일자 2면. 긔보=백이의(白耳義) 서울『부랏셀』에서 열닐 피압박민족대회(被壓迫民族大會)는 작 십일부터 개회되엿다는데 조선인 대표 김모(金某)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압박에 대하야 탄핵하는 긔세를 내엿다하며

  7. 이극로, 고투 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55쪽. 서울을 떠나는 전일의 각 신문에는 (동아, 조선, 중앙) 일부러 시키어서 나의 사진을 크게 내고 기사를 잘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 신문을 각각 한장식 얻어오라고 하여 그것으로써 여행권 대신에 나의 신분을 증명하게 하였다.)

  8. 이극로, 고투 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56쪽. 서울을 떠날 때에 서정희씨로부터 자기의 아들인 서범석씨를 찾아 만나서 길돈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동아일보사의 특파원으로 갔던 관계를 말하고 그에게 예비지식을 얻어 가지고 가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서범석씨의 집을 찾아서 그를 만나 좋은 참고담을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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