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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객(政客) 고하 송진우는 해방직후 국민대회준비회를 통해 민족의 뜻과 힘을 한곳에 모아 정부도 세우고 정당도 만든다는 구상을 했다. 당장 정권을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세우기 위한 민주적 절차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좌익 연립정부 조직인 건국준비위원회(건준)나 조선인민공화국(인공)과는 차원이 달랐다.

 

 국민대회준비회는 결성강령으로 첫째 연합국에 대한 감사, 둘째 민족 총역량 집결, 셋째 중경 임시정부(임정) 법통 지지, 넷째 민주주의 방식에 의한 정당정치 실현을 내세웠다. 1 송진우의 구상은 국민대회를 열어 장차 수립될 국가의 의회조직의 모태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건준(인공)이나 임정은 행정을 담당하는 권력조직이지 권력의 기반이 되는 의회조직은 아니었다. 2      

 

 송진우는 1945년 8월 하순 서울 원서동 집에서 국민대회준비회 조직을 도와달라고 이인에게 부탁했다. 3 당시 이인은 민족주의세력을 합쳐 정당을 결성하려 하고 있었다.

 

 “국가가 건립되자면 국회가 있어야하지 않겠소? 나는 국회개설준비로 각계각층을 망라한 국민대회준비회를 발기할까 하오. 이것은 결코 애산(이인)을 위시한 동지들이 만드는 정당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또 별도로 깃발을 들고 나오자는 것이 아니니 양해하고 협력해주기 바라오.”

 

 정당은 각기 이념과 노선에 따라 달리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연합시킬 수 있는 조직적 그릇이 필요했다. 4 좌익진영의 모체역할을 하는 건준(인공)에 대한 우익진영의 모체역할이 국민대회준비회의 첫 사업으로 제시된 이유였다.

 

 9월 7일 결성된 국민대회준비회 위원장은 송진우, 부위원장은 서상일, 고문은 권동진 오세창 김창숙, 각 부서 책임자는 김준연 장택상 김동원 윤치영 안동원 송필만 최윤동 이정래 이순탁 고재욱 설의식 강병순이었다. 5 김성수는 국민대회준비회의 상임위원이었다.

 

 이인과 별도로 창당을 추진하고 있던 허정과 장덕수는 송진우 김성수와 접촉했으나 이 둘의 의견은 서로 달랐다. 34년 뒤 허정은 회고록. 6에서 김성수는 정당조직에 찬성했으나 송진우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인촌(김성수)은 설산(장덕수)의 설명을 신중한 태도로 듣고는 곧 찬성했다. 그러나 그는 교육사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정당조직의 일선에 나서거나 정당의 중요한 자리를 맡지는 않겠으며 뒤에서 힘껏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고하(송진우)는 임시정부의 환국을 서둘러 그분들을 모시면 되고 새로운 정당을 조직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허정, 1979년, 98쪽)

 

 
1932년 장덕수 모친 회갑연때 명월관에 모인 손님들. 앞줄좌로부터 김성수 장덕수(당시 도미중)의 장형 장덕주, 그 뒤 오른쪽이 여동생 장덕희, 한사람건너 모친 김현묘 오른쪽 끝이 여운형. 가운데줄 좌로부터 김도연(반쯤앉은사람) 다음 허정 한사람 건너 윤보선. 뒷줄좌로부터 최두선, 9번째부터 백관수 허헌 송진우.

 

 

  
<인 물 정 보>

송진우 (宋鎭禹): 1890~1945, 국민대회준비회 위원장, 한민당 수석총무, (전)동아일보 사장
김성수 (金性洙): 1891~1955, 동아일보·고려대·경성방직 설립자
이인 (李仁): 1890~1979, 초대 법무부 장관, 제1·3대 국회의원
허정 (許政): 1896~1988, 한민당 총무, 제헌의원, (전) 국무총리
장덕수 (張德秀): 1894~1947, 한민당 외교 및 정치부장, 동아일보 창간 당시 주간

 

 

 

Notes:

  1. 고하 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 출판국, 1964년, 312~314쪽

    몽양이 공산당과 합작을 해서 이른 바 인민공화국 정부를 조직하는 동안, 고하는 국민대회를 열 준비를 갖췄다. 그가 이 국민대회를 계획한 것도, 민중의 의사를 준중하여 민중의 총의로써 국민의 신임과 정권 인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몽양의「건준」의 선동 정치로 인해서 민심이 흉흉할 때, 민족주의자와 일부 보수세력, 그리고 갈팡질팡하는 수많은 민중에게 행방의 지침을 주기 위한 실천이었다.
    우선 고하는 국민대회 결성강령을 내세웠다.

    (1) 연합국에 감사를 드린다.
    (2) 국민대회를 열어서 해내·해외의 민족 총역량을 집결한다.
    (3)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의 법통(3·1운동의 법통)을 지지한다.
    (4) 보수·진보 두 갈래의 정당을 만들어 민주주의 방식에 의한 정당정치를 실현한다.

    또 국민대회 준비회의 첫단계 사업을 제시했다.
    (1)「건준」(인공)이 공산당과 그 동조자들의 모체역할을 하는 데 대하여 국민대회 준비회는 민족진영의 모체 역할을 한다.
    (2) 해외에서 환국하는 지사(志士)와 동포에게 편의를 베푼다.
    (3) 연합군정에 대한 국민의 대변을 한다.
    (4) 민심 안정과 치안 유지에 협력한다.

    등이 그것이었다.
    고하는 곧 국민대회 발기인 선정에 분망했다. 국민대회 준비회 구성은 여기에 모일 수있는 민족진영뿐만 아니라, 진보적 진영의 대표적 인물도 총망라하기로 했다. 우선 3·1운동 이후 꾸준히 고난을 참고 지조를 지켜온 권동진, 오세창, 두 분을 준비회 고문으로 추대하여 승낙을 얻고는 여러 지방에 흩어져 있는 지도층 인사를 서울로 불러 들이기로 했다. 평양의 조만식에게는 안동원을 파견키로 하고, 대구의 서상일에게는 서상국을 파견하고, 충남 논산에 소개하고 있는 정인보에게는 김상만을 보냈다. 이번에는 고하 스스로가 나서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유림의 대표적 지도자 김창숙을 그의 여사로 방문하여 고문으로 추대하고, 병원에 입원 중인 좌파의 홍명희와 공산주의자 김철수 등도 찾아 협력을 요청했다.(이때 홍명희와 김철수는 거절했다)

    국내의 준비위원이 구성된 뒤, 고하는 해외에서 아직 환국하지 못하고 있는 선배나 동지 중 이승만, 김구, 이시영, 김규식 등 대표적 지도자들이 귀국하는대로 교섭하여 찬동을 얻는 방침까지도 세웠다.
    이러한 고하의 구상과 실천방법에 일부 민족주의 진영의 몇몇은 의견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의심을 품는 태도를 취하는 인사도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고하는 점차적인 포섭 방침을 세우고 연합군이 서울에 진주한 다음날인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심했다.
    국민대회준비회는 임원 선출 결과, 위원장에 고하, 부위원장에 서상일(발기인 총회 때의 의장), 고문에 권동진 · 오세창 · 김창숙, 각부서 책임자에 김준연 · 장택상 · 김동원 · 윤치영 · 안동원 · 송필만 · 최윤동 · 이정래 · 이순탁 · 고재욱 · 설의식 · 강병순 등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고하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가 망라되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국민대회가 소집될 때까지의 실행 책임자로는 고하를 비롯하여 서상일 · 김준연 · 장택상 · 윤치영 · 김창숙 · 최윤동 · 백상규(이때 몽양의「건준」에서 전향하여「국민대회」에 참가) 등을 선출했다.

  2. 윤덕영, 일제하 해방직후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과 국가건설노선, 연세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년, 295쪽

  3. 이인, ‘해방전후 편편록’, 신동아 1967년 8월호 363쪽

    8월 하순경인가 고하가 갑자기 만나자기에 원서동댁으로 갔더니 출입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한산했다. 고하가 8.15 이후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아니했으므로 자연 추종자가 멀어졌고 다만 그 측근에는 김준연 강병순이 있을 정도였다. 고하는 “국가가 건립되자면 국회가 있어야하지 않겠소? 나는 국회개설준비로 각계각층을 망라한 국민대회준비회를 발기할까 하오. 이것은 결코 애산(이인)을 위시한 동지들이 만드는 정당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또 별도로 깃발을 들고 나오자는 것이 아니니 양해하고 협력해주기 바라오”하는 것이었다.
    그 위 10여일이 지나서 9월 7일인가 동아일보사옥에서 국민대회준비회 발기회를 한다고 나오라기에 참석했더니 서상일을 위시한 고하의 측근인사와 ‘동아일보’ 관계자 30여명뿐이고 민족진영인사의 저명인사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당시 고하가 너무나 자중해서 급격히 파동하는 시간과 기의(機宜)를 파악치 못한 탓이고 민족진영을 비롯한 각계 인사가 대개 청진동 나의 집으로 모였던 까닭이었다.

  4. 윤덕영, 일제하 해방직후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과 국가건설노선, 연세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년, 294쪽

  5. 고하 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 출판국, 1964년, 314쪽

  6.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허정회고록, 샘터사, 1979년, 98쪽

    인촌(김성수)은 설산(장덕수)의 설명을 신중한 태도로 듣고는 곧 찬성했다. 그러나 그는 교육사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정당조직의 일선에 나서거나 정당의 중요한 자리를 맡지는 않겠으며 뒤에서 힘껏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촌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그가 새로운 정당 조직에 소극적이었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 정당을 조직하는 데에는 인촌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인촌은 일은 자기가 하더라도 자신을 앞세우지는 않으려고 하는 분이었다. 그가 이룩한 수많은 업적을 우리는 알고 있거니와, 어떠한 일에서나 그는 자신의 명성이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가은한 한 뒤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그 공로와 영광은 남에게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분이었다.
    민세도 전적으로 찬성했으나, 고하만은 의견이 달랐다. 고하는 임시정부의 환국을 서둘러 그분들을 모시면 되고 새로운 정당을 조직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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