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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27 : 고하와 인촌(1)-반공주의자들

Posted by 신이 On 9월 - 27 - 2012

 

 타고난 정치인이었던 고하 송진우와 달리 정치에 뜻이 없었던 인촌 김성수가 교육사업에 정진하겠다는 생각을 밝힌 것은 해방 무렵으로 보인다. 복간된 동아일보에서 주간을 맡게 되는 설의식은 전 동아일보 주필이자 송진우의 측근인 낭산 김준연과 해방 다음날 밤을 지새우면서 이 같은 대화를 나눴다. 설의식은 일년여가 지난 1946년 9월 17일자 동아일보 1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76년에 출간된 전기 2의 내용과 비슷하다.

 

필자=이제는 대도(大道)가 트였으니 역량 것 일들을 해야겠는데 대관절 조선 현 단계의 정책에 대한 고하(송진우) 선생의 심경은 여하(如何)?

낭산=토지국유, 대산업 국영 등 대체로 대세에 순응하려는 결심이다.

필자=인촌(김성수) 선생은 여하?

낭산=보전(보성전문)을 키워서 인재를 기를 자기(自己)는 박물관장이나 하여서 조선의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겠다고. 사리사욕은 완전히 떠난다는 생각이오.

 

 해방일 김성수는 서울 종로구 계동 집에 없었다. 3 일제의 최후 발악을 염려한 송진우의 권고로 서울을 피해 경기도 연천의 해동농장에서 해방을 맞았다. 4 밖에서 장병을 지휘하는 사령관역인 송진우와 안에서 계획을 세우는 참모역인 김성수의 역할분담 5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해방 훨씬 전부터 송진우와 김성수는 반공주의자였다. 김성수의 측근 유진오는 ‘그래도 좌익에 대한 이해가 송진우 보다는 김성수가 깊었다’고 회상했다. 6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좌익세력을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독주하고 있었다. 중경의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 세력에게는 이들의 행태가 위험해보였다. 이때 송진우 뿐 아니라 김성수 앞에서 좌익의 논리를 조금이라도 편다는 것은 ‘좌익의 물이 드는 것’으로 비쳤다. 7 15년 전 해외선진 문물을 살펴보러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의 소련이 아니었다. 8 어쨌든 해방직후엔 38도선 이남에 소련군이 진주할지 미국군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아직 건설 중에 있으나 모든 장애를 제치고 전 연방 총동원으로 가장 왕성한 원기로 진행 중에 있으니 큰 성공이 반듯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더이다.” (김성수 씨  귀경담, 동아일보 1931년 8월 14일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5년 9월 20일에 일찌감치 이들이 가입한 한국민주당을 ‘반동적 정당’으로 규정했다. 이날 당의 노선으로 최종 확정된 8월 테제에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 송진우와 김성수를 중심한 한국민주당은 지주와 자본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반동적 정당”이라고 나와 있다.

 

“1946년 댁에 찾아가 인촌 선생(김성수)을 뵈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아주 싫어하시더군요. 우리 조국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소련이 왜 조국이냐고 하시더군요. 당시 공산주의자 입장에서 소련이 조국이라니 하신 말씀이었어요.” (권이혁 씨 인터뷰, 2011년 5월 6일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실)

 

 김성수는 백범일지에 나온 김구의 말처럼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이라는 의미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했다. 9

 

 

     해외문물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김성수와 환영인파.     동아일보 1931년 8월 14일자

 

 

   <인 물 정 보>

   송진우 (宋鎭禹): 1890~1945, (전)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 (金性洙): 1891~1955, 동아일보·고려대·경성방직 설립자
   김준연 (金俊淵): 1895~1971, 동아일보 주필, 제1·3·4·5·6대 국회의원
   설의식  (薛義植): 1900~1954, (전) 동아일보 주간 겸 부사장
   유진오(兪鎭午): 1906~1987, 제7대 국회의원, (전) 고려대 총장·초대 법제처장
   권이혁(權彛赫):1923~,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 (전) 문교부 장관

 

 
 

Notes:

  1. 설의식, 해방삽화-팔일오 전후, 동아일보 1946년 9월 17일자 3면

    16일 밤 내방(來訪)한 낭산(김준연)과 저녁도 같이하고 단파도 같이 들으면서 밤을 새웠다. 혜화정 꼭대기에서 바라보이는 서북각, 동남각에는 화광(火光)이 충천하였다. 총독부를 비롯하여 군영(軍營) 등에서 기밀문서, 기타를 소각하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새로 2시경, 야릇한 일군(日軍)의 행동을 발견하고 지하실에서 날을 밝혔다. 그때에 낭산과 주고받은 화제 중의 한마디를 쓰기로 한다.

    필자=이제는 대도(大道)가 트였으니 역량 것 일들을 해야겠는데 대관절 조선 현 단계의 정책에 대한 고하(송진우) 선생의 심경은 여하(如何)?
    낭산=토지국유, 대산업 국영 등 대체로 대세에 순응하려는 결심이다.
    필자=인촌(김성수) 선생은 여하?
    낭산=보전(보성전문)을 키워서 인재를 기를 자기(自己)는 박물관장이나 하여서 조선의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겠다고. 사리사욕은 완전히 떠난다는 생각이오.
    필자=그럼 됐소하고 나는 크게 즐거웠다. 그리고 낭산과 악수하면서『낭산이 나보다 연장이니 내가 형님으로 대하리다』하였다.

    이리하야 우리는 고하 선생을 중심으로 새 조선재건의 일단을 맡으려고 나섰다. 그리하여 미군의 상륙을 기다려(즉 일군의 항복을 기다려서) 발족한 것이『국민대회준비회』였다. 정당의 요청도, 다른 염념(染念)도 끊고 오직 이 국준(國準)의 노선을 지켰던 것이다. 국준의 자취는 이미 낭산이 발표하였고 또 그 후의 사정은 만목소시(萬目所視, 많은 사람이 다같이 지켜보는 바)니 쓸 필요가 없다. 낭산은 지금도 정당에는 관계없이 민주의원에 간여하고 나는 나대로 이 동아일보를 지킬 뿐이다.

  2. 인촌 김성수 전, 인촌기념회,1976년, 464~465쪽

    참으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때로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아 절망을 가누지 못했고 온다해도 생전에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탄식하던 조국해방의 날이 현실로 온 것이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22세에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25세에 중앙학교를 인수한 이래 반생을 구국사업으로 일관한 인촌이었다. 누구보다도 감개가 깊었으나 이런 때에도 그는 서두르는 일이 없었다. 부인이 빨리 서울에 올라가야하지 않겠느냐고 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울에는 고하와 여러 동지들이 있으니 모든 일은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요. 서두를 것은 없소.”
    그리고 앞으로의 처신을 이렇게 말하였다.
    “정치는 고하와 동지들에게 맡기고 나는 학교를 하겠으니 당신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가하면 이렇게도 말했다.
    “학교도 이제는 학자에게 맡기고 나는 박물관장이나 돼서 나라의 보물을 지키는 일을 하면 꼭 좋겠소.”
    그가 연천을 떠나 서울에 올라온 것은 17일 밤이었다.

  3. 유진오, 편편야화-해방과 나, 동아일보 1974년 5월 2일자 5면

    매일신보 편집국을 들어서니 장철수 기타의 사람들이 달려들어「오메데도로」(경사스럽습니다)를 연발한다。 정인익 편집국장을 만나 수상의 유고「게라」를 보았다。 그리고 홍종인 군을 따라 조사실로 가서「포츠담」공동선언이 실린 만주신문을 보았다。
    비로소 모든 것이 환해졌다。어찌할 것인가。 잠깐 생각하다가 좌우간 김성수 씨를 만나 좀더 이야기도 듣고 하려고 계동으로 갔더니 작일 연천으로 가셨다한다。 허탕치고 돌아서는데 경계경보 발령。전동으로 내려오다가 경계가 너무 삼엄해서 남계양행 골목으로 빠져 탑동공원 앞에서 전차를 탔다。

  4. 동아일보 1974년 5월 2일자  5면

     8월 14일「이쿠타」(生田) 경기도지사와의 회담을 마치고 송진우는 김성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일이 고비가 될 것 같으니 자네는 연천에 내려가 있는 것이 좋겠어』일제의 단말마적인 발악을 걱정해서였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김성수가 물었다。
    『나야 세상이 뒤바뀌는 것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
    연천역 앞에 있는 최남(崔楠)의 농장에서 해방을 맞은 김성수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고하와 동지들에게 맡기고 나는 학교를 하겠으니 당신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5. 유진오, 인(仁)과 지(知)의 지도자, 1962년 2월 18일자 2면

    세상이 다 아듯이 인촌(仁村)과 고하(古下)의 두 분은 친한 친구의 사이였을 뿐 아니라 둘도 없는 동지로서 일신동체(一身同體)가 되다시피 하여 일생을 보낸 분들인데 매사에 있어서 인촌은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대고하는 참모의 일을 맡아보셨다하면 고하는 밖에서 장병을 지휘하여 전투에 종사하는 사령관의 일을 맡아 보신 셈이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풍모나 뱃심이나 활동에 있어서나 고하가 형격 같았지마는 내용으로는 인촌이 형격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고하는 호방하고 인촌은 해학을 좋아해서 주석같은 데서 두 분이 맞붙으면 상대를 사뭇 헐뜯는 것 같은 농담이 벌어지는 때도 흔히 있었다。이를테면『인촌은 돈으로 사장(동아일보사장)을 했지。 나는 내 몸뚱이로 사장을 했단 말이야』(고하가 필화사건으로 일정의 형무소 살이를 한 일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고하가 내던지면 『여북 미련해야 몸뚱이로 사장을 한담』하는 격이다。그러나 한번 인촌이 날카로움을 품은 음성으로 한마디 말을 던지면 고하는 입을 꾹 담을고 마는 것이었다。

    일정(日政)도 말기에 가까웠을 때의 일이다。어찌된 연유이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없으나 어느날 인촌을 뫼시고 길을 가다가 위당 정인보 선생을 만났다。 마침 점심 때인데다가 그때는 술도 밥도 육류도 모두 주리고 있던 때라 인촌이「김천대회관」에 가서 점심을 사시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고하도 불러내지』하셨다。 동아일보가 폐간을 당하고 있을 때라 고하도 무척 울적하게 지내실 것을 생각하신 것일 것이다。

    그리고 김천대회관의 일실(一室)에서 인촌、고하、위당 세 분과 나와의 뜻하지 아니한 주연이 시작되었다。
    전쟁 말기의 분위기아래 일인(日人)경영 음식점에서 대낮에 벌어진 주연이라 이야기도 조용조용 진행되었다。 그러나 잔을 거듭함을 따라 고하의 음성은 높아갔다。 물론 시국담이었다。일경이 옆에 있으면 잡아가기라도 할 판이다。차차 걱정스러울 정도가 되었을 때 『인제 그만해!』 날카로운 인촌의 말소리가 떨어졌다。 고하는 말을 뚝 끊지고、약간 원망스런 눈으로 인촌을 바라보고、그리고는 씩 웃고 또 술잔을 들었다。

  6. 유진오, 편편야화, 1974년 4월 15일자 5면

    인촌이 보전을 인수한 후 1、2년 동안 인촌주변의 보전 관계자들 사이에는 주연이 잦았는데 그 주연의 분위기가 또한 활기에 찬 것이었다。 특히 인촌 고하 김병로 김용무 등 몇 분이 모이면 학교관계자들의 모임이라느니 보다도 우국지사들의 비분강개하는 좌석같이 흥분된 대화가 밤늦도록 계속되곤 하였다。
    어찌된 까닭이었던지 그런 좌석에는 젊은 사람 중에서 나와 김광진이 가끔 배석하였는데 이분들은 우리가 무슨 좌익의 대표나 되는양 논전을 펴기를 즐겼다。좌익에 대한 이해성(理解性)은 인촌이 좀 앞서는 듯 하였으나 고하 인촌의 두 분은 그때부터 뚜렷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라나 선후배가 한데 엉킨 술자리는 밤이 늦어지면 으례 선배들의 독천장(獨壇場)이 되기 일쑤였다。 젊은 패들은 한참 마시다가 지쳐버리는데 인촌 고하 김병로 김용무 등 노장들은(그때 아직 50세 미만이었지만) 술자리가 길어지면 도리어 기세가 더 올라갔다。그리하여 우리들 젊은 패는『고하는 각론인데 가인(김병로)은 아직 총론이야』하는 은어를 썼다。고하는 이미 취했는데 가인은 아직도 멀었다는 뜻이었다。

  7. 유진오, 편편야화-“각파(各派)와 상의(相議) 정부수립” 주장하자 좌익으로 몰려, 동아일보 1974년 5월 8일자 5면

    이튿날(20일) 나는 계동 댁으로 인촌을 찾아갔다。2,3일 전에 인촌이 연천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보니 인촌댁은 이미 예전의 인촌댁이 아니었다。사랑방에 손님이 가득히 모여 앉아 나라걱정들을 하고 있는데 이야기는 결국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비난과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 지지로 집약되는 것이었다。
    토론도 아니요 의견교환도 아니요 각자가 생각나는 대로를 그대로 뿔뿔이 떠들 뿐이었으나 공기는 몹시 격앙된 것이었다。그런 중에도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서는 특히 격한 비난들을 퍼붓고 있었다。

    『여운형이가 정부를 조직해? 누구의 수권(授權)을 받고 정부를 조직해?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세계 수십 개국의 승인까지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멀쩡하게 있은데 왜놈한테 수권을 받아가지고 정부를 조직해?』
    큰소리로 비분강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촌은 그날 직접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으나 며칠 전 연천서 돌아오다가 계동어귀에서 수모를 당한 이야기를 하였다。일단(一團)의 청년들이(그들은 보전학생이었다는 설도 있다。-김준연 저「독립노선)」)길을 막으면서 못간다 하기에 왜 못가느냐 했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임모(林某)의 저택(그때 건준 사무소로 쓰던 집)을 가리키면서『저기가 바로「조각본부(組閣本部)」이기 때문입니다』하더라는 것이다。

    인촌과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서 그대로 앉아서 듣고 있노라니 화제가 임시정부 지지로 나가는 것은 좋으나 일정하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무슨 반역자인양 아무런 발언권도 없다하는 듯하여서 나는 잠깐 말참례를 하였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좋습니다。누구나 다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국내에 있던 사람들이라 해서 왜 발언권이 없읍니까。국내에 있던 사람들도、미국서 돌아오는 사람들도、소련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다같이 발언권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인촌은『허 저것 봐。유 선생도 벌써 물 먹었구먼。』농조였지만 내 말을 못마땅해 하였다。

    「물 먹는다」는 관용어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그러나 나는 그때 인촌께 그 말을 들은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좌익 물이 들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해방된 조국강토위에 질서있게 정부(통일정부)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하던 나의 의견은 최용달 군에 의해 이미 배척당했거니와 이렇게 해서 이번에는 인촌에게 좌익적인 생각이라 받아들여졌다。

  8. ‘신음중의 구미열강, 해외동포의 활동, 딴 민족 융화 통일은 실패’, 동아일보 1931년 8월 14일자 2면

    ◇김성수씨 귀경담

    재작년 12월 경성을떠나 구라파각국과 쏘베트 로서아와 아메리카를 력방하야 문물제도를 시찰한 본사 취체역 김성수(金性洙씨는 12일 오후 7시 경성역 열차로 2□월 만에 귀경하얏다 역두에는 긔다수의 출영이 잇섯다

    씨는 려행중 감상을 다음과 가티 말하얏다

    구라파의 소위 강대국은 물론 신흥제국까지 대개 보앗스며 로농로서아도 잠간 들럿섯고 도라오는 길에 아메리카를 일별하얏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도처에 우리 조선사람이 산재하얏스며 그중에는 특출한 수재도 만허 외국인의 찬탄을 밧는이도 적지안습니다 비롬 외국에 류랑은 할 망정 확호한 의식미테 생활하야 나가는 것이 매우 깃벗습니다
    열강의 상태는 극도의 자본주의 발달 때문에 수습치 못할 혼돈 중에 빠지어 왼 나라가 신음 중에 잇스니 그 귀추(歸趨)가 어떨는지는 측단할 수 업더이다
    구라파중에서도 가상 평화하게 잘 지나는 나라는 소위 약소국이라고 하는『스캔디나비아』제국이엇스며 쏘베트 로서아는 아직 건설중에 잇스나 모든 장애를 제치고 전 연방 총동원으로 가장 왕성한 원긔로 진행중에 잇스니 큰 성공이 반듯이 잇스리라고 생각되더이다.
    이번 여행에 어든 소감은 만치만 그 중에 가장 깨다른 것은 하나는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융화하고저하는 정책과 노력은 하나도 성공치 못하더라는 것이오 또 하나는 우리 민족의 노력이 다른 민족에 비하야 손색이 잇지 안흔가 하는 것이며 또하나는 자본주의 발달은 세게적으로 팽창하야 가는 중이니 조선도 결국은 자본주의화하고야 말 운명에 잇는 이상 우리의 힘 미치는 대로 우리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것이외다.

  9. 한진수 동아일보 2020위원회위원장, 인촌 김성수-자립자강하여야 한다, 동아일보사, 2011년,108쪽

    인촌은 김구 선생과 이동휘 선생의 대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이유로 공산주의를 반대했습니다.

    “(이동휘) 대저 혁명이란 유혈사업으로 어느 민족에게나 대사인데, 현재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오. 따라서 이대로 독립을 한 후 또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되니, 두 번 유혈은 우리 민족에게도 큰 불행이오. 그러니 적은이(아우)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나(김구 선생)는 반문하였다.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씨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불가능하오.’ 나는 강경한 어조로 다시 말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弟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그러자, 이 씨는 불만스러운 낯빛으로 나와 헤어졌다.”(<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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