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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준비위원회의 독주를 막아내고자 민족적 민주세력의 총집결체란 기치를 내건 보수정당들의 합동발기회에서 고하 송진우는 빠져있었다. 백남훈 김도연 허정 장덕수가 중심이 된 한국국민당과 김병로 백관수 조병옥 이인 원세훈의 대한민주당(회고록과 전기에 따라 ‘조선민족당’과 ‘고려민주당’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인은 창당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은 1945년 9월 4일 ‘한국민주당’이란 이름으로 합동발기회를 가졌다. 몽양 여운형은 이틀후인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한민당 발기인들이 인공을 타도하자는 요지의 격렬한 성명서를 발표한 9월 8일, 하지 장군 휘하의 미 제24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해 들어왔다. 한민족이 민족진영과 사회진영으로 확연히 갈라진 때였다.

 실은 한민족이 두 진영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었다. 여운형의 인공도 건국동맹계와 공산당계로 갈라져 있었다. 공산당계는 재건파와 장안파로 나뉘었다. 인공의 인민위원으로 ‘선출’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출신 김철수는 “공산당 자신도 이렇게 내부분열이 심했던 것이 바로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에 실패한 원인이었다”고 회고했다. 1

 

 중경(重慶)임시정부의 귀국 전에는 정당을 만들지 말자며 방관하던 송진우는 9월 16일 한민당 창당대회에서 수석총무로 선출된다. 한민당 사무국장 나용균의 회고. 2

 

 “김병로 백관수 씨도 권유했지만 주로 조병옥 씨와 내가 설득도 하고 권하기도 해서 한민당 당수로 취임할 것을 내락받고 9월 16일 오후 시내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1천6백여 명의 당원들이 모인 가운데 결당식을 거행하고 고하를 수석총무에 취임토록 결의했어요。회의도중 조병옥 씨와 내가 고하를 찾아가 이를 통고했더니 수락하기는 하지만 대회장에 나가 인사는 않겠다고 말했습니다。”(동아일보 1971년 11월 30일 4면)

 

 여운형은 인공 출범 후에도 건국동맹을 해체하지 않았다. 3 한민당은 계속 인공을 공격했다. 중경 임시정부만이 ‘정통한 조선정부’라는 논리였다. 급기야 여운형은 10월 1일 기자회견에서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 환영하는 것은 여운형이가 가장 강하다. 사람은 감정이 있는 것이니 10여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굶고 애쓰고 일하던 사람들의 정부임으로 동지애로 가장 사랑하게 된다”면서도 “현재 중경임시정부 외에 미국에도 두 파가 있다. 연안에도 시베리아에도 정당이 있어서 5개의 정부가 있다. 따라서 한 정부만 지지한다고 하면 해외동지를 그만큼 분규시킬 뿐”이라고 폄하했다. 4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하나의 정당으로 보았으나 한민당은 ‘인공을 상대할 수 없는 정당’으로 치부했다. 독립운동가 양근환 5의 주선으로 여운형 송진우 안재홍 백관수 허헌 조동우 김병로 장덕수 최용달 이현상 최근우 김형선의 간담회 6가 열린 뒤 한민당의 백관수는 담화를 발표해 “양근환이 와서 여운형 허헌도 인민공화국을 조직 발표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만났더니 “인민공화국 인정문제에 대해서도 호상격론이 있어 결렬되었다”고 밝혔다. 7

 

 이즈음 여운형 측의 화가 김진우가 중간에 서서 여운형과 송진우의 악수를 청했으나 송진우는 듣지 않았다고 한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모든 것을 원점에 돌려놓을 때 악수가 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 과정에서 김진우가 “후일 민족간의 호상(互相) 출혈이 있게 되면 그것은 고하(송진우)의 책임”이라고까지 대들었지만 송진우는 끝내 듣지 않았다. 8

 

 여운형은 건맹을 해체해 정당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9 인민당 당수가 된 여운형은 동아일보가 복간하자 축사를 보냈다.

 

 “8·15가 되자 지하운동을 해왔던 건국동맹이 해방과 함께 지상에 나타나 종로YMCA회관 2층에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건맹 간부로 있었던 나는 건준 1차 개편 때 건준 서기국 소속 위원을 맡아 회의에도 참가하고 의사일정이랄까 이런 일도 기획했습니다. 그러다가 기왕에 있던 건국동맹을 정당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물러나 인공에는 직접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이동화 건준 서기국 위원 회고, 74, 전 동국대 교수, 동아일보 1971년 11월 25일자 4면)

 

 8월 15일 이후 금일까지 동맹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음으로 11월 11일을 기하여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 재출발 7만 여의 당원을 합하여 당명을 조선인민당으로 가칭하게 되었다. (건국동맹 발전적 해소, 정당(가칭 조선인민당)으로 재출발, 자유신문 1945년 10월 26일자 1면)

 

여운형의 동아일보 중간(重刊) 축사 (동아일보 1945년 12월 6일자 1면)

 

<인 물 정 보>

송진우 (宋鎭禹): 1890~1945, (전) 동아일보 사장
여운형 (呂運亨): 1886~1947, 독립운동가, (전) 근로인민당 총재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나용균(羅容均): 1896~1984, (전) 보건사회부 장관, (전) 국회 부의장
양근환(梁槿煥): 1894~1950, 독립운동가, 친일단체 국민협회 민원식 회장 살해
백관수(白寬洙): 1889~6.25 때 납북, 폐간 당시 동아일보 사장
허헌(許憲): 1885~1951, (전) 동아일보 사장 직무대행,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진우(金振宇): 1883~1950, 사군자 화가
이동화  (李東華): 1907~1995, (전) 통일사회당 대표

 

 

 

Notes:

  1. 김철수(金綴洙, 79·현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 거주·일본「와세다」대졸· 공산주의 운동하다 일경(日警)에 피체 13년간 복역 해방 후 2년간 활동하다 귀향), 남북의 대화-공산당의 내분, 동아일보 1971년 11월 27일자 4면

    “내가 해방으로 공주감옥을 나올 때 함께 복역했던 20여명의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당장 서울로 가서 공산당을 조직하자고 했지만 박헌영과의 대립이 싫어 향리로 돌아갔던 것입니다。그러나 그 후 고향으로 간도사건 주범 김근(金槿)과 김현수 등이 자꾸 내려와 가자고 졸라요。그래서 올라갔더니 명륜동에 사는 친동생 광수(光洙, 그 후 월북 북괴상공부상 역임·현재 행방불명)와 박낙종(朴洛鍾, 조선정판사 사장으로 그 후 위폐사건으로 검거됨) 하필원(河弼源) 송언필(宋彦弼, 정판사부사장·피체)등이 나를 중심으로 해서 공산당을 재건하자고해요。
    그들은 그때 이미 20만원인가를 주고 귀국하는 일본놈으로부터 인쇄소를 사들여 조선정판사 간판을 붙인다고 서두른 때였읍니다。나는 해방 전 국제공산당 활동에서『자리 욕심에 앞서 일을 죽도록 해야지 민중이 따라 오는 법』이라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에 당수 같은 건 별로 생각이 없었고 좌익 내의 분열도 염려가 돼서 그랬읍니다。그래서 얼마 후 나보다는 이영(李英, 장안파 공산당· 48년 월북 최고인민회의 의장·59년 조국통일민전 의장단에서 해임제거됨)을 중심해서 하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읍니다。내가 9월 15일경 재건파로 공산당에 정식 입당해 버리니까 나를 추종했던 사람들이 모두 재건파로 입당했읍니다。

    재건파로 입당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읍니다。그 재건파는 공산주의자로 보아서는 투쟁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읍니다。그들은 줄기차게 독립운동이자 공산주의운동을 벌여왔지요。그래 재건파 공산당으로 입당했더니 박헌영 직계인 이주하(李舟河) 김삼용(金三龍)이는 당권을 빼앗으려 들어온 줄 알고 몹시 싫어하는 눈치가 역연했읍니다。그 오해 때문에 그 다음 민족진영과 합작운동 할 때 크게 장애가 됐읍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마는 일제중엽 공산당활동은 그 계보가 꽤 복잡합니다。1920년 조선 내에서 장덕수(張德秀) 최팔용(崔八鏞) 주종건(朱鍾健) 이봉수(李鳳洙) 씨와 내가 주동이 돼 사회혁명당을 만들었고 그 무렵 상해에서는 이동휘 씨가 중심이 돼 김립 씨등과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는데 이 두 단체는 그 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으로 합류됩니다。이걸 소위 상해파 공산당이라고 하는데 1924년인가 김사국(金思國) 이영(李英)이 중심이 돼 공산당서클로 서울청년회를 조직해서 상해파와 대립합니다。
    그때 서울청년회 소속 허일(許一)이라는 사람이 장덕수에게「레닌」으로부터 받은 40만원을 어떻게 했느냐고 다른 사람들 보는데서 시비를 걸어 이에 대꾸하자니 우리들 조직이 탄로가 날까봐 그대로 수모를 당하기도 했읍니다。 그 후 화요파가 성하니까 한때 대립했던 서울청년회와 상해파가 서로 합해「서상합작파」라는 이름으로 공동으로 화요파에 대립하기도 했읍니다。해방 후 이영을 만나서 들으니 화요파에 대립하기 위해서 ML당 조직에 관계했다고  합디다。나도 ML당 조직은 전혀 몰랐읍니다。
    결국 공산계열내의 분쟁은 일제에 유리했기 때문에 그 후 대립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나 화요파가 계속적인 투쟁을 했다고 볼 수 있읍니다。
    해방직후 장안빌딩에서 이영 중심으로 소위 장안파공산당이 결성돼서 재건파와 알력이 있게 됩니다。
    공산당 자신도 이렇게 내부분열이 심했던 것이 바로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에 실패한 원인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2. 나용균(羅容均, 75·한민당 사무국장·전 국회부의장·보사장관)의 회고, 남북의 대화-임정을 받드는 사람들, 동아일보 1971년 11월 30일 4면

    8월 17일 상경해보니 건준과의 합작에 대해 갑론을박 야단들이었어요。그런데 고하는『임정이 들어올 때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말고「백지」로 나가야된다』고 초연한 태도였읍니다。 한데 건준이 자꾸 세력이 커지는가하면 20일경에는 바로 명륜동 우리 집과 담하나 사이를 둔 김해균 씨(그 후 월북·전 보성전문 영어강사)집에서는 소위 재건파 공산당이 결성돼서 지방에서 속속 올라온 사람들이 타고 온 트럭이 골목길을 메울 정도였으며 매일같이 법석대고 있었읍니다。
    김씨는 좌익 최용달(崔容達)과 선이 닿아서 박헌영을 끌어다 자기 집에서 공산당을 결성한 것이지요。형세가 이렇게 되자 고하와 친동서간이 돼서 인척간인 나는 고하에게 날마다 쫓아가다시피 해서『저들은 적지(赤紙)로 계속 나가는데 우리만이 손을 놓고 백지(白紙)로 나가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정당결성으로 저들과 대립하자고 권했읍니다。날이 갈수록 건준은 조직을 확대해서 건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들어갔던 사람들이 그 정체를 알고도 공산당들의 협박에 쉽사리 발을 빼지 못하기도 했읍니다。그래 하루속히 보수정당을 만들어야 되겠는데 9월 7일 인공이 발표되니까 고하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김병로 백관수 씨도 권유했지만 주로 조병옥 씨와 내가 설득도 하고 권하기도 해서 한민당 당수로 취임할 것을 내락받고 9월 16일 오후 시내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1천6백여 명의 당원들이 모인 가운데 결당식을 거행하고 고하를 수석총무에 취임토록 결의했어요。회의도중 조병옥 씨와 내가 고하를 찾아가 이를 통고했더니 수락하기는 하지만 대회장에 나가 인사는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3. 윤덕영, 일제하 해방직후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과 국가건설노선, 연세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년, 284쪽

    여운형과 그 주변 세력들은 건준에서 인공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실상 들러리였다. 여운형의 지도력은 그 주변의 사람들에 국한되었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공산주의 세력은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돌진하고 있었고, 그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테러가 게재되었을 개연성도 높다. 이런 점에서 건준 내에서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과의 협력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건준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곧 공산당의 영도권을 장악하려는 공산주의세력의 방침이 이미 확고히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목 여운형 회견, 인민공화국탄생 경위 등 소감을 개인자격으로 언명
    게재지명 매일신보
    게재일자 1945년 10월 02일
    날짜 1945년 10월 01일

    呂運亨은 10月 1日 오후 7시 시내 玉仁町 47번지에서 시내 각 신문사 기자단과 회견하고 개인의 자격으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하였다.

    (問) 朝鮮人民共和國이 탄생한 경위는 무엇이며 그 후 어떻게 되었으며 장차 어떤 방책으로 나아갈 터인가
    (答) 建國準備委員會가 새 조선의 건설을 위하여 8月 15日 이후의 치안유지를 위주로 노력하고 있다.(略)

    (問) 어째서 人民共和國이라고 했는가
    (答) 먼저 人民共和國을 조직하고 인민위원을 선정하였는데 국호에 各說이 있었다. 卽 朝鮮, 大韓, 高麗, 大震 等이었으나 결국 단군 이래의 고유명사인 朝鮮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인민이란 문자에 대하여도 여러 가지 議論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주권은 인민에게 있는 것이다. 벌써 100년전에 미국에서는 인민을 주권의 주체로 보지 아니했는가. 대체 조선의 독립은 연합군이 우리 조선사람에게 주는 단순한 선물은 아니다. 3천만 조선동포는 과거 36년간 유혈의 투쟁을 계속해 왔으므로 혁명에 의하여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에는 기탄이 필요치 않다. 혁명가가 먼저 정부를 조직하여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에 비상조치로 생겨난 것이 즉 人民共和國이다.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朝鮮人民共和國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초에 연합군이 진주만 하면 즉각에서 국권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 즉 朝鮮人民共和國의 내각이었다. 약체이면 보강하여 난국에 처할 수 있게 하겠다. 혁명초에는 혁명단체가 조각하는 것이오 인민이 조각하는 것이 아님은 孫文을 보아도 알 것이다.

    (問) 현재 韓國民主黨을 주로 해서 人民共和國과 建準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答) 대단히 좋다. 민주주의니까 정견과 이론이 같은 사람끼리 政黨을 조직함은 당연하다. 지난 8月 15日 이후로 각정당이 족출했으나 그것은 결코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압박에서 해방되어 정치적 호흡을 하게 되니까 자연발생적 필연적 현상이 아닌가. 앞으로 시일이 지나면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합의될 것은 기정된 운명이다. 결국은 2·3의 정당만이 남게 될 줄 안다.

    (問) 重慶臨時政府를 유일무이한 정통한 조선정부로 보기 때문에 人民共和國을 반대하는 최대의 이유로 보는데
    (答) 重慶臨時政府를 지지환영하는 것은 呂運亨이가 가장 강하다. 사람은 감정이 있는 것이니 10여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굶고 애쓰고 일하던 사람들의 정부임으로 동지애로 가장 사랑하게 된다. 제1차대전이 끝난 후 기미년에 상해에서 파리에 대표를 보내고 조선민족지도기관을 설치 3月 1日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호응하여 상해에서도 3月 1日 임시정부를 수립, 대일 반항이 목적이었다. 10년 5개월동안 합력하다가 조선에 잡혀왔다. 그러므로 임시정부에 경의를 표한다.
    臨時政府(重慶)만을 지지한다는 법은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重慶臨時政府도 절대 지지는 중요치 아니한다. 국내에 있는 모든 정치운동을 무시할 그네들은 아니다. 나는 해외정권을 환영한다. 현재 重慶臨時政府 외에 미국에도 두 파가 있다. 연안에도 시베리아에도 정당이 있어서 5개의 정부가 있다. 따라서 한 정부만 지지한다고 하면 해외동지를 그만큼 분규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해외동지를 환영해 들여서 국내에 정부를 조직하여야 한다.

    (問) 미군정당국에서는 현재 조선인민공화국정부를 정당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데 如何
    (答) 인민공화국정부뿐 아니다. 重慶臨時政府를 비롯한 모든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군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페어 플레이를 해야 한다. 미군정당국에서는 조선사람들의 정당이 싸움을 하는 경우에는 간섭할지라도 그밖에 모든 것을 일일이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고 싶다. 더티 플레이를 하지 말라. 정치게임에서도 남의 대가리를 까는 짓은 하지 말라. 나는 절대로 외국의존에는 반대이다.

    (問) 인민공화국정부는 붉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如何
    (答) 포복절도할 일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의 조선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조선에 적색이 어데 있느냐. 대체 공산주의자를 배격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다 같이 되어 가지고 민주주의 □□□□ (略) 많고 적은 것은 결국 인민투표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영국을 보라. 6·7년간 전쟁에 승리의 공로자 처칠이 물러나고 영국의 노동당이 승리했다. 그러나 적색은 아니다. 영국내각에는 공산당이 3人밖에 없다. 노동자 농민 及 일반노동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이냐. 만일 그러면 나는 공산주의자도 되겠다. 노동대중을 위하여 여생을 바치겠다. 우익이 만약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 이론에는 나는 정당하다고 안본다. 인민이라면 적색이라고 함은 소학교 1년생과 같은 사람이라 하겠다.
    韓國民主黨, 國民黨 建進黨이 민족적 총력을 총 단결하여야 할 터인데 그 결정은 인민이 할 것이다. 사대주의 배외사상은 절대 배제하여야 하겠다.

    (問) 모정당에서는 중경임시정부는 연락이 있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呂運亨氏는 연락이 있는가
    (答) 나도 3년간이나 연안독립동맹과 연락하고 지하운동을 해왔다. 독립동맹은 40分盟이 있고 5·6만명의 맹원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군대도 있다. 중경임시정부와는 직접 연락은 없으나 소식은 그치지 않고 있다.

  5. ‘독립전선의 통일염원, 당파를 초월한 감격의 열론(熱論) 전개, 획기적 각 정당 수뇌회동’, 자유신문 1945년 10월 6일자 2면

    10월 5일 오전 10시경 동대문의 모처에서 민족통일과 신정권 수립을 위하야 정계 거두 10여명이 개인의 자격으로 한자리에 모이어 약 6시간에 걸친 역사적 대회합이 전개되었다. 이 모임은 일즉 민원식을 암살한 사건의 주인공인 양근환 씨의 사회로 열리었는데 여기에 회동한 사람은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 조동우 허헌 김병로 장덕수 백관수 최근우 최용달 씨 등 정계의 거두들이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하여 민족통일전선결성의 제1차 회합이 정열과 감격 속에서 토의된 것이다.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목 각 정당지도자들, 각 정당단체 단결과 신정권수립에 관해 간담
    게재지명 매일신보
    게재일자 1945년 10월 06일
    날짜 1945년 10월 05일

    5日 오전부터 시내의 모처에서 각당수령들이 모여 무릎을 같이하고 간담을 하였다는 보도가 한 번 전하여지자 3천만 민중의 이에 기대하는 소리는 아연 높아 그 성과의 크기를 진심으로 염원하여 마지않은 터이다. 즉 이날 오전 10시부터 呂運亨 宋鎭禹 安在鴻 白寬洙 許憲 趙東祐 金炳魯 張德秀 崔容達 李鉉相 崔謹愚 金炯善 梁槿煥 제씨가 시내 昌信洞 某의 집에 모여

    1) 각 정치단체의 대동단결에 관한 건
    2) 초정당적 자주독립촉진기관의 설립에 관한 건
    등 두 가지 의안을 중심으로 간담회가 열리었던 것이다. 회담은 梁槿煥의 사회아래 온화한 공기 속에 진행되어 오전 중을 보내고 일동 점심을 같이 한 후 오후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각 수령들의 가슴속에 끓는 조국애의 정열과 현하 우리가 당면한 오늘이란 이 순간을 생각하여 볼 때는 우국지성은 차츰차츰 막히었던 장벽을 무너뜨리고 풀기 어려웠던 매듭을 풀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제1안에 대하여는 의견이 거의 일치를 보아 새 조선건설의 굳센 맹약을 하고 제2안으로 들어가서는 논란이 장시간 계속되었으나 제1안을 근본적으로 승인하는 이상 앞으로 더욱 신중히 구체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오후 4시 반경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 날의 성과는 그 간담내용의 결과여하 그것보다도 이들 수령이 조선이 해방된 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회동하고 장시간에 걸쳐 기탄없는 의견과 포부를 토로하여 교환을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이 날의 전반적 공기로 보아 결국은 각 당의 총역량을 결집한 통일전선이 구성될 가망이 충분히 엿보였다는 것도 큰 수확으로서 인정되는 바이다. 이 날의 간담회에는 각당 수령이 모두 개인의 자격으로써 참석했지만 불원간에 다시금 각 단체대표의 자격으로써 중요한 회합을 재개할 것도 약속되었다. 그런데 이 날 朴憲永과 李英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신병으로 참석치 못하였다.

  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목 각 정당지도자들 간담회에 대한 한민당의 반박
    게재지명 자유신문
    게재일자 1945년 10월 08일
    날짜 1945년 10월 05일

    6日 시내 모처에서 각당 수뇌들이 一堂에 회합하여 당면한 제문제에 대하여 평의한 사실에 대하여 韓國民主黨總務 白寬洙는 다음과 같은 담화로써 각당 대표가 모인 것도 아니고 의견이 접근된 것도 아니란 뜻을 언명하였다.
    “지난 5日 梁槿煥이 와서 呂運亨 許憲도 인민공화국을 조직발표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당면한 시국문제를 평론함이 어떠냐기에 본인들이 그것을 깨닫고 근신하고 있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여 재삼 거절하였으나 단 5분간이라도 만나 말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므로 梁氏와는 舊交가 있고 친하므로 갔더니 의외에 각당대표로 간 일이 없고 또 화제도 인민공화국 인정문제에 대해서도 호상격론이 있어 결렬되었으며 자못 중대한 시국문제에 한해서만 朝鮮共産黨, 國民黨, 韓國民主黨 등 가히 상대할 수 있는 정당끼리 대표를 보내어 상의하기로 되었습니다.
    같이 각당대표가 모여 어떤 의견의 일치를 본 듯이 보도된 것은 불쾌합니다. 제위의 오해 말기를 바랍니다.”

  8.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편, ‘고하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 1965년,310쪽

    그러나 몽양은 그 후에도 고하의  충고를 잊지 못했음인지 여러 사람을 사이에 놓고 악수할 것을 청해왔다. 몽양은 화가 일주(일주 김진우)를 중간에 넣고 고하에게 교섭을 했다. 일주는 이미 몽양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고 있으며   고하와도 가까운 터이었다. 일주는 직접 또는 서면 권로를 하다못해 끝내는 『후일 민족간의 호상출혈(互相出血)이 있게 되면 그것은 고하의 책임』이라고까지 강박했다.

    이에 고하는 인민공화국의 불법성을 지적 공박하고는「인민공화국」을 해소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거기다가 도장을 찍어 보내면 악수할 수 있다고 응수했다。이리하여 고하와 몽양은 물과 불이 되고, 몽양의 노선과 고하의 노선은 좌와 우로, 그리고 끝내는 남과 북으로 갈리고 말게 된 것이다。

  9.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정치학),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년, 562쪽

    건국동맹이라는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조직이 실질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징조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그는 주변에서 그런 일을 맡아줄 유능한 심복들이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가 믿고 의지했던 유능한 청년들은 대부분 공산당에 가입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충성하기보다는 공산당의 지시를 따랐다.…여운형이 1945년 11월 12일에 조선인민당을 조직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기 나름대로의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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