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D-storyⅡ 25 : 고하와 몽양(2)-임정과 인공

Posted by 신이 On 9월 - 5 - 2012

 

 고하 송진우는 중경(重慶) 임시정부를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몽양 여운형은 국내세력으로 정권을 창출하자고 했다. 여운형이 먼저 움직여 해방 다음날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송진우는 여운형이 안재홍과 함께 추진하고 있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여운형은 건준을 모태로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송진우는 하루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했다.

 

 국민대회준비회 김준연 부위원장은 동아일보 복간 다음날 ‘국민대회의 발단’ 1이란 기고문에서 송진우가 건준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제1은 왜(倭)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받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오, 제2는 중경(重慶)에 있는 우리 정부를 부인하고 여기서 바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준의 출범 이후에도 송진우 여운형의 합작움직임은 계속됐다. 1945년 8월 17, 18일경   김병로 백관수 2와 함께 여운형을 찾았던 이인의 회고 3.

 

 “여(呂) 안(安) 씨를 만나 그 문제를 재론하면서『말만 가지고서는 안되니 우선 건준을 해체하고 각계 각전을 망라한 기구를 다시 만들자』면서 건준 해체 각서를 써주도록 요구했습니다。이같이 강경한 요청에『황망 중에 건준으로 가칭해가지고 건국준비에 나섰으나 다시 각계각층을 총망라해서 결정하겠다』는 넉줄 반 정도의 각서를 민세(안재홍)가 쓰고 몽양(여운형) 보는 앞에서 도장까지 찍어 우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동아일보 1971년 11월 30일 4면)

 

  일단 반대편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송진우와 여운형의 합작움직임은 쉽지 않았다. 이인의 회고는 계속된다.

 

“이틀 후 구체적으로 화신백화점 영화관을 빌어 전국적으로 성망이 높은 사람 70여명을 초청해서 이 문제를 논의키로 건준 쪽에서 보낸 유억겸 씨와 합의를 보았읍니다。유 씨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지 두 시간도 못돼 우리 집에 묵고 있던 청년이 뛰어 들어오며 건준 쪽에서 자기파 80명을 더 추가해서『150여명에게 초청장을 보냈다는 기사가 매일신보에 났다』는 거예요。…나로 봐서는 두 번째 배신을 당한 기분이어서 청년들에게『자네들 가서 신문사 엎어 버리고 신문을 압수해서 가져오라』고 호령해서 보냈었지요。”(동아일보 1971년 11월 30일 4면)

 
 반대편의 얘기는 여운형의 측근 이만규가 서술하고 있다. 4 이만규는 여운형과는 사돈벌로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웠다.

 

 외부의 명사 측들이 안(安)을 끼고서 건국준비위원회의 대개혁을 하고 새 사람들이 들어올 계획으로 확대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기를 강요하였다.…안(安)은 안으로는 부하의 뒷공론에 내부가 버성겨 가고 밖으로는 명사 측의 요구에 외압이 강하여 확대위원회를 허락하고 135명의 위원을 뽑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오 반드시 건준에 큰 파란을 일으키고 사업의 지장이 생길 염려가 있었다. 여운형은 이것을 반대하였고 부득이 하거든 의견 제출권만 주고 결의권을 주지 말라하여 회를 소집하지 못하였다. 안재홍이 여기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투쟁사, 1946년, 216~217쪽)  

 

 당사자 중의 한 명인 안재홍은 9월 4일 건준을 떠난다. 5 건준의 주도권이 좌익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안재홍은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반동이자 친일파라는 공격을 받았다. 6 안재홍의 권유로 초기 건준에 참여했던 의혈단원 출신 유석현은 “인공이 선포되고는 공산주의가 싫어 사실상 손을 뗐다”고 회고했다. 7

   

 “내가 치안부에서 일한지 얼마 안돼 좌익계통인 최용달 정의식이 들어왔습니다。이들은 노골적으로 자파로 치안대를 개편하려 하는가하면 8월 24일경부터는 이강국이가 건준지방지부를 인민위원회로 고쳐 조직하고 있다는 말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귀띔해주면서 인민위원회가 무어냐고 묻기도 했습니다。나는 인공이 선포되고는 공산주의가 싫어 사실상 손을 뗐으니까 건준에는 약 2주일 관계한 셈입니다。” (동아일보 1971년 11월 25일자 4면)

 

 여운형은 미군의 남한 상륙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열어 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이때에도 여운형과 공산당의 세력이 비슷했다. 8 그러나 이 대회 9는 선거를 거치지 않은 임의적인 모임이었다(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의 증언). 이어 발표된 인공의 각료명단도 당사자들과 상의 없이 멋대로 작성돼 벽보에 나붙었다. ‘벽보내각’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송진우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오다가 8월 30일에 와서야 미군이 9월 7일에 경성에 들어온단 말을 듣고 급속히” 국민대회준비회를 설립했다. “그리하야 9월 7일에 지방유지의 다수 참석 하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결의”했다.

 

 당시 송진우 주변 인물이었던 유홍은 4반세기가 지난 1972년 동아일보에 보낸 글 10에서 송진우가 임시정부를 지지한 것은 “3·1 운동의 주동세력으로 3·1 독립운동의 소산인 임정의 법통을 신생한국에 계승시켜야한다고 생각한 것이지 임정의 국제적 위치와 실력을 과대평가하여 임정을 영접하려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11

 

 

 

 일제시기 상해에서 체포돼 귀국한 여운형 사진과 서명.  관련 기사에 ‘상해○○정부의 중요인물로 ○○운동에 진력’했다고 나와 있다. 앞의 ○○는 ‘임시’정부, 뒤의 ○○는 ‘독립’운동을 가리킨다.   동아일보 1929년 7월 19일자 2면.

 

일제시기 3년만에 출옥한 여운형(×표 된 사람) 사진.  동아일보 1932년 7월 28일자 2면

 

 

<인 물 정 보>

송진우 (宋鎭禹): 1890~1945, (전) 동아일보 사장
여운형 (呂運亨): 1886~1947, 독립운동가, (전) 근로인민당 총재
안재홍 (安在鴻): 1891~1965, (전) 한성일보 사장, 제2대 국회의원
김준연 (金俊淵): 1895~1971, 동아일보 주필, 제1·3·4·5·6대 국회의원
이인 (李仁): 1890~1979, (전) 초대 법무부 장관, 제1·3대 국회의원
이만규 (李萬珪): 1882~1978, 북한의 교육자, (전) 배화여중 교장
유석현(劉錫鉉): 1900년∼1987년, 독립운동가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유홍 (柳鴻): 1898~1988, 제2·4·6대 국회의원

 

 

 

Notes:

  1. 김준연 국민대회준비회부위원장, 국민대회의 발단, 동아일보 1945년 12월 2일자 4면

    (전략)…그리고 일방에는 송씨를 중심으로 하야 국민대회를 준비하게 되엇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오다가 8월 30일에 와서야 미군이 9월 7일에 경성에 들어온단 말을 듯고 급속히 이 계획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국민대회의 주지는 중경(重慶)에 잇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명백히 표시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야 9월 7일에 지방유지의 다수 참석하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결의하고 전국적 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기 위하야 준비회를 설립하고 그를 준비하며 집행위원을 선거하야 당면의 제 문제를 처리케 한 것이엇다.

    그러면 어째서 여씨와 합작하야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하지 아니하고 따로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엿는가, 제1은 왜(倭)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밧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오, 제2 중경에 잇는 우리 정부를 부인하고 여기서 바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다、이리하야 여씨를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 운동은 결국 인민공화국의 성립 급(及 )기(其)정부의 수립까지 진전하게 되엿고、송씨를 발기자로 한 국민대회준비회운동은 재중경 우리 임시정부 절대지지운동을 전개케하야 금일의 형세를 순치케 한 것이다.

  2. 고하 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 출판국, 1964년, 310~314쪽

     

    5. 국민대회 준비회와 한국민주당의 결성

     

    고하는 총독부의 정권수수(政權授受) 교섭을 받았을 때와, 평양 조만식이 행정권 인수에 관하여 문의해 왔을 때, 그리고 여러 지방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 답변은 한결같았다.

    『개인이 받을 수 없소. 연합군과 민중만이 정권을 줄 수 있지, 일본 정부나 한 개인이 정권을 주고 받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오.』

    이와 같은 고하의 주장에 반하여, 몽양은 총독부와의 협상이 이루어지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시위와 방송으로 민중을 선동하기에 이르렀다.

    『소련군이 서울역에 입성하니 환영하러 가자······.』

    「건준」은 8월 17일 삐라를 뿌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민중을 선동하여, 군중을 이끌고 서울역으로 환영을 나갔다. 몽양은 백상규, 최근우 등을 시켜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니, 고하도 같이 나가자고 권고해 오기도 했다.

    『몽양은 영어도 잘하고 하니, 혼자 가는 게 좋지 않은가.』

    하고, 고하는 몽양의 권고를 뿌리치기도 했다. 물론 미군도 소련군도 오지 않았다.

    미군 환영을 함께 나가자는 권고는 여러 가지 음모가 내포된 것이기도 했다. 그 음모는 고하의 형안(炯眼)에 가볍게 일축되었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선동과 모략이 해방이란 기껍기만 한 흥분에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이에 근촌(近村)과 가인(街人)은「건준」의 선동과 모략 등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몽양과 민세를 찾았다.

    『지금「건준」식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건준」을 해체하고 민중 대회를 열어서 위원 33명을 뽑아 이를 운영케 함이 어떻소.』

    하고 근촌과 가인은 몽양에게 타협안을 제출했다. 전 민중에게 끼치는 영향이 너무도 걱정이 되어서 한 행동이었다.

    이 타협안에 몽양과 민세는 즉석에서 찬성을 했다. 그들이 찬성한 이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고하를 포섭해 보자는 욕심에서였다.

    이 안(案)에는 고하도 찬의를 표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었다. 그 33인의 인선(人選)을 이쪽에 맡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몽양은 이미 공산당에 둘러싸여 본의 아닌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여서, 고하의 요망을 박차고「건준」중심의 33인 위원 명단을 제시했다. 그것을 고하가 들을 리 또한 만무했다.

    근촌과 가인 등은 다시 타협안을 제출해서 위원을 70여명으로 확대 구성하자고 했다. 몽양은 또 승낙했다. 몽양은 돌아가서 이번에도 그 70명의 대다수를 전과 같이 자기 사람으로 구성해 버렸다. 또 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가인은 단념하지 않고 고하에게 몽양과의 타협을 종용했으나, 끝내는 듣지 않았다. 고하는 보수와 진보 두 세력을 그 합작으로써 건국대업에 이바지하게 하려는 가인 근촌의 운동에 대하여서는 일단 종지부를 찍게 하고, 여하한 조건이라도 건준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과는 타협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고하는 몽양의 두번 배신에 지친 것이다.

  3. 이인(76·변호사·한민당 당무부장·군정검찰총장·전 법무장관)의 회고, 남북의 대화-임정을 받드는 사람들, 동아일보 1971년 11월 30일자 4면

    “8월15일 무조건 항복방송을 듣고 즉시 자전거를 타고 고하 등 민족주의자들을 만나러 가는데 한 청년이 여운형씨가 정권을 잡을 기구 같은 걸 만들었다고 말해줘요。원서동 고하 댁을 갔더니 30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씨가 와서 합작하자는 것을 송진우 씨가 거절했다는 말들을 해요。그 말을 듣고 나는『고하 선생은 혼자 몸이 아닙니다。그 큰 문제를 혼자서 결정한 것은 너무하지 않았읍니까。 몽양이 조선독립을 혼자서 시키고 있다고 민중들에게 그릇 선전하면 야단입니다』고 말했더니 옆에 있던 분들이『애산이 이쪽저쪽 잘 알지 않느냐』면서 중간에 들 것을 중용해요。
    나는 일제때 몽양의 사건을 변호도 해주고 한 일이 있어 그와는 잘 아는 처지였읍니다。사상적으로 그는 어딘가 민족주의에서는 약간 어긋난 불투명한 데가 있다고도 느끼고 있었지요。

    어떻든 나는 민족이 분열돼서 독립을 맞이해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16일 아침 계동 임용상씨 집에서 여(呂)씨와 민세 안재홍 씨를 만나『독립운동하면서 고생은 같이 했는데 왜 민족진영을 제외시켰느냐』는 얘기와 함께『조선이 두 분 물건이요。 』하고 힐난조로 얘기했더니 여씨는『그 사람들 만나서 얘기해봤는데 일 못하겠던데』라고 중얼거려요。그래서 계속 내가 얘기를 해서 그날 오후 2시에 고하 집에서 함께 만나기로 했지요。그런데 약속된 시간에 앞서 몽양은 한 청년을 나에게 보내 고하를 찾아갔으나 다시 의견일치를 못 보았다고 알려주었읍니다。

    그 후 가인(김병로) 근촌(백관수)등과 다시 한번 말해보자고 얘기가 돼서 아마 18일경인가 다시 임씨 집으로 셋이서 갔읍니다。 여 안 씨를 만나 그 문제를 재론하면서『말만 가지고서는 안되니 우선 건준을 해체하고 각계 각전을 망라한 기구를 다시 만들자』면서 건준해체각서를 써주도록 요구했읍니다。이같이 강경한 요청에『황망 중에 건준으로 가칭해가지고 건국준비에 나섰으나 다시 각계각층을 총망라해서 결정하겠다』는 넉줄반정도의 각서를 민세가 쓰고 몽양 보는 앞에서 도장까지 찍어 우리에게 건네주었읍니다。그리고 이틀 후 구체적으로 화신백화점 영화관을 빌어 전국적으로 성망이 높은 사람 70여명을 초청해서 이 문제를 논의키로 건준 쪽에서 보낸 유억겸 씨(미군정때 문교부장)와 합의를 보았읍니다。유씨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지 두시간도 못돼 우리집에 묵고 있던 청년이 뛰어 들어오며 건준쪽에서 자기파 80명을 더 추가해서『일백오십여명에게 초청장을 보냈다는 기사가 매일신보에 났다』는 거예요。매일신보는 그때 건준 영향 하에 있었지요。 나로 봐서는 두번째 배신을 당한 기분이어서 청년들에게『자네들 가서 신문사 엎어 버리고 신문을 압수해서 가져오라』고 호령해서 보냈었지요。 조금 있다 가인 근촌이 와서 내가 이 말을 했더니『잘했어、그 사람들 그럴 거야』합디다。
    가인과는 곧 우선 급한대로 권동진 오세창 김성수 백관수 등 15명 이름으로『우리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며 무관하다』는 내용의 벽보 1백여장을 만들어 시내 요소요소에 붙였읍니다。”

  4. 이만규(李萬珪),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1946년, 205쪽, 216~217쪽

    지도력의 중심

    몽양은 처음부터 좌우익의 분열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국내에 있는 우리 민족의 좌익세력과 국제적으로 밀려오는 좌익발전에 눈이 어둔 우익지사들과 좌익혁명가 중 소아병적 과격분자와는 사상의 거리가 너며 멀고 개인으로도 서로 접촉이 없고 서로 이해도 없고 만나기 전에 불신과 의심만을 가졌기 때문에 합작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중간사역이 몽양 자신의 사명이라고 자각하였다. 공산당원 중에는 몽양의 가는 노선을 잘 아고 개인으로 협력하려고 하는데 송은 절대로 임정 맹종주의로 응하지 아니하니 송이 우익전체의 대표가 아닌 이상 송 1인의 불응으로 대사이오 꼭 하여야할 일을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거부한 송은 혁명의 준비가 없었지마는 몽양은 깊고 큰 준비가 있으니 그 잠력(潛力)하였던 힘이 제절로 폭발되지 않을 리 없다.

    몽양은 송의 일미(一味)인 김준연과 장덕수에게도 건국사업에 협동하기를 권하였었다. 그들은 다 송과 분리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여기서 몽양은 송의 일파라고 볼만한 사람들의 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간파하고 그들이 어떤 그룹적 약속이 있지나 아니한가 추측하고 그 그룹과의 합작을 중지하고 이 다음 기회로 밀었다. 이때에 청년층에서는 몽양이 굴슬적(屈膝的) 타협을 송에게 하려는데 반대가 있었지마는 몽양이 그같이 성의를 다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중략)

    일반이 건준에 대한 비평이 늘어갈 때에 내부에는 불통일이 생겼다. 외부의 명사 측들이 안(安)을 끼고서 건국준비위원회의 대개혁을 하고 새 사람들이 들어올 계획으로 확대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기를 강요하였다. 여기에는 내부 몇 사람의 연락도 있었다. 안(安)은 안으로는 부하의 뒷공론에 내부가 버성겨 가고 밖으로는 명사 측의 요구에 외압이 강하여 확대위원회를 허락하고 135명의 위원을 뽑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오 반드시 건준에 큰 파란을 일으키고 사업의 지장이 생길 염려가 있었다. 여운형은 이것을 반대하였고 부득이 하거든 의견 제출권만 주고 결의권을 주지 말라하여 회를 소집하지 못하였다. 안재홍이 여기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5. ‘몽양 여운형 씨의 추억’, 민세 안재홍 선집 2,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편, 지식산업사, 1983년, 204~205쪽

    건준이 성립된 후, 몽양은 좌방적인 공작 또는 건국동맹을 주력으로 자기의 정치공작에 여념이 없는 편이었다. 1945년 8월 18일, 자정이 지나는 때, 나는 몽양과 계동의 모 장소에서 장시간을 단독회담하였으나, 몽양의 의도하는 바가 나의 포부인 민족주의진영 주도세력하의 건국방침과는 상당 거리 있는 편이어서, 사실의 내면에서는 이날로써 거의 결렬하였고, 추후 내가 8월말경 양주군 팔당에 가서 누워 있는 몽양을 찾았을 적에도, 몽양 행여나 나의 주장에 기울어질까 보아, 최용달 정백 양씨 동반하여 쫓아왔으므로 아무 성과 없었고, 9월 4일에 건준 퇴각과 함께 몽양과는 다시 사이가 벌어졌다. (1947.9, 게재지 미확인)

  6.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정치학),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년, 513~514쪽

    공산당의 안재홍 협박

    이 글에는 발행자의 이름이 적혀져 있지 아니하나 박헌영 계열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당시 조선공산당 내부에서의 지도권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해방된 날 여운형이 선택했던 정백이 서울파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므로, 그리고 기타의 서울파 인물들이 135명 중에 끼어있었으므로 공격의 화살이 그들에게 집중되는 동시에 이들을 선택 또는 전형한 안재홍도 공격의 대상이 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전단은 “안재홍의 정체를 공개함” 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서 9월 3, 4일에 작성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정백, 권태석(權泰錫), 윤형식(尹亨植) 등은 서울파 또는 장안파 인물들이다.

    배신과 음모와 배역, 반동의 총지휘자 안재홍의 용서할 수 없는 죄상(罪狀)을 통쾌히도 백일하(白日下)에 폭로되었다. (중략) 呂씨가 건강부조(不調)로 팔당(八塘)에 휴양한 것을 기회삼어, 건준위원을 독자적으로 지명결정(指名決定)하였으니 음모와 죄상이 명백하다. 연중(然中) 그 위원 중에는 공산주의자로 가장한 정치부로커 정백과 일본제국주의의 주구 권태석(權泰錫)이란 간악배(奸惡輩)들이 중요한 의자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양자는 安의 견마지충(犬馬之忠)을 다하는 충복인 동시에 가장 신망이 두터운 모사였으니 반역의 죄상이 분명하고, 이들의 과거는 대중이 잘 아는 바이다. 특히 정백과 권태석은 사변전에 윤형식(尹兄植), 이승복(李昇馥) 輩의 손을 잡고 일본제국주의와 의식적으로 야합하여 만일의 요행을 기대하고 내선협회(內鮮協會)를 조성하였으니 현명한 대중은 安 일당의 반동적 죄상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배신, 음모, 반역, 반동의 총아(寵兒) 안재홍이여!
    그대는 굳지 고집하여 죽음을 감수하려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운동에서 발을 빼여 생명을 보전(保全)하려는가? (중략)
    民世여! 그대는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일절를 그대 자의(自意)에 마끼노니 현명한 그대는 충분히 각오하리라 믿는다.

    이 글은 또 안재홍을 친일파였다고 공격했고, 정백, 권태석, 윤형식, 이승복이 내선협회(內鮮協會)를 조직하였다고 하는데, 정백은 일제말기에 광산 브로커를 하고 있었다는 설은 있으나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7. 유석현(劉錫鉉, 72·전 의혈단원·1923년 폭탄투쟁) 회고, 남북의 대화-건준의 독주, 1971년 11월 25일자 4면

    “해방이 되자 안재홍 씨로부터 건준에 와서 일 좀 해달라는 연락이 와서 나갔더니 치안부를 맡겼읍니다。그때 내가 연락을 해서 후생부장에는 정구충(鄭求忠)씨(당시 서울 여의전교장·서울 성북구 성북동)가 맡았읍니다만。그때 나는 직업별 지역별 자위대 비슷한 걸 조직하고 한편은 일본인 가정을 수색해서 권총 일본도 등을 압수하기도 했읍니다。그중 권총 한자루는 내가 지니고 다녔지요。또 하루는 이전 국방부 쪽에 있는 양조장에서 술을 압수해서 일반에 나눠주기도 했습니다。(중략)

    내가 치안부에서 일한지 얼마 안돼 좌익계통인 최용달(崔容達) 정의식이 들어왔읍니다。이들은 노골적으로 자파로 치안대를 개편하려 하는가하면 8월 24일경부터는 이강국(李康國,(경성제대 졸 민전(民戰)사무국장 46년 대구폭동 지령혐의를 받자 월북、북괴 최고인민회의제 1기 대의원 인민군야전병원장 53년 간첩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 받음)이가 건준지방지부를 인민위원회로 고쳐 조직하고 있다는 말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귀띔해주면서 인민위원회가 무어냐고 묻기도 했읍니다。나는 인공이 선포되고는 공산주의가 싫어 사실상 손을 뗐으니까 건준에는 약 2주일 관계한 셈입니다。”

  8. 이동화(李東華, 74·전 동국대 교수·서울 성북구 종암아파트) 회고, 남북의 대화-건준의 독주, 1971년 11월 25일자 4면

    “8·15가 되자 지하운동을 해왔던 건국동맹이 해방과 함께 지상에 나타나 종로YMCA회관 2층에 간판을 내걸었읍니다。건맹 간부로 있었던 나는 건준 1차 개편 때 건준 서기국 소속 위원을 맡아 회의에도 참가하고 의사일정이랄까 이런 일도 기획했읍니다。그러다가 기왕에 있던 건국동맹을 정당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물러나 인공에는 직접 관계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9월 6일 오후 4시경부터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는 우연히 참석하게 됐는데 그때 회의는 경기고녀 강당(현 창덕여고 자리)에서 약 3백명 가량이 모인 가운데 개최됐어요。너무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든지 서울에 와 있는 사람들만 모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그때의 세력분포는 내가 알기로는 공산당과 몽양세력이 비슷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회의도중 몽양 측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란 칭호는 인민이란 게 너무 과격하니 조선민주공화국으로 하자고 제의해요。

    그러니까 좌익계가 들고 일어나 인민공화국이 좋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그대로 통과됐읍니다。이 회의에는 재건파 공산당을 만든 박헌영은 나오지 않았으나 배후에서 조종했던 것이 아닌가봅니다。건준에 참가한 사람의 대부분은 일본사람들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을 경우에 당시 눈에 보이는 세력으로는 건준이 있었기 때문에 건준이 독립한국의 새 정권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건준이 이처럼 서둘러 인공을 선포한 것은 2,3일후 들어올 미 점령군에게「기성사실」로 보게 함으로써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자기를 주장하기 위한 포석이었지、그 자체가 정권수립이라고 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이 인공에서는 좌익계가 주도권을 잡게 됐지요.”

  9. 김철수(金綴洙, 79·현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 거주·일본「와세다」대졸· 공산주의 운동하다 일경(日警)에 피체 13년간 복역 해방 후 2년간 활동하다 귀향), 남북의 대화-공산당의 내분, 동아일보 1971년 11월 27일자 4면

    “8월 17일 40여명의 정치범 경제범들과 함께 공주형무소에서 석방된 나는 곧장 서울로 올라가 공산당을 조직할까도 생각해봤으나 무엇보다 건강이 아주 악화돼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공산주의자들과의 여러 가지 착잡한 사정이 예상됐기 때문에 부안 향리로 가서 정양을 하고 있었읍니다。빨리 상경하라는 독촉이 심해서 내가 서울에 올라간 것은 9월 4일이었읍니다。명륜동에 있는 동생 집에 머물고 있는데 6일 밤늦게 하필원(河弼源)이가 헐레벌떡 뛰어와 하는 말이 55명의 인민위원과 인공 각료 명단을 내보이며『이렇게 인민공화국을 조직했읍니다』고 말해요。하 씨는 내동생의 친구이며 공산당 이력으로도 나보다 훨씬 후배지요。그래서 나는 대뜸 송진우(宋鎭禹) 안재홍(安在鴻) 백남훈(白南?)씨 등 민족주의자들과 상의해서 한 것이냐고 물었읍니다。그 당시 내 생각으로는 모처럼 남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니 좌우익을 막론하고 합작해서 민족주의자들 영감 밑에서 일해야 진정한 민족통일정부가 서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인데 대답은『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나쁜놈들』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민족운동하는데 분열을 획책하고 있다。6백여명을 모아서 했다고 자랑하지만 내가 대로상에 나가서 연설하면 6천여명도 더 모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공조각에서 경제를 맡은 하 씨에게『자네 경제상 됐다 해서 좋아할 것  없네。자네를 당 기관에서 제외하자는 속셈도 있음을 알아야하네』이렇게 주의를 주었읍니다。그랬더니 하 씨는 그제서야『신문에 나서 큰일입니다。 벌써 조각명단을 신문사에 돌려 이미 식자(植字)가 됐을 텐데요』하기에 나는『신문에 관계 말고 이후엔 그런 짓하지 말라』고 충고해서 돌려 보냈읍니다。”

    “일제 때부터 공산주의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민족의 독립에 대하여 두 파로 의견이 갈려 있었읍니다。하나는 민족의 통일독립에 앞서 공산혁명으로 맞바로 나가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선 일제에서 해방되어 사회가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점차적으로 혁명기반을 조성해서 사회혁명을 이룩하자는 견해였읍니다。나는 후자가 옳다고 보고 있었는데 박헌영 같은 사람은 성급한 전자를 취해서 인공도 그들이 획책한 것입니다。”

    “1920년 상해파 공산당이 창설돼 임정과 대립할 때가 있었읍니다。그때 김구 선생은 말하기를 일본 놈은 우리의 원수이니 설사 우리의 독립을 지원하는 자가 있어도 이를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나、우리 한인 중에 설사 일본에 협조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이는 같은 민족이니 이해로써 포용해야할 것이라고 말했읍니다。이에 대해 공산당에서는 우리 한인 중에 일본놈이 있고 일본사람 중에 한국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친일도배들은 바로 일본놈이니 배격해야 할 것이나 우리 독립을 성원하는 일본 내 공산주의자들은 한인과 다를 바 없다는 논리로 친일하는 놈도 뼈와 피는 동족이라는 임정과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대립했읍니다。또 연안의 독립동맹도 있고 해서 해방이 된 후에도 임정에 대해서는 큰 호의를 갖지 않았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10. 유홍, 남북의 대화-반탁과 찬탁의 회오리, 동아일보 1972년 2월 19일자 4면

    해방 후 고하 송진우의 주변에서 줄곧 고하 몽양 민세 등 여러 정치지도자를 직접 접한 유홍씨(74· 전 국회의원·현재 서울시 노량진동 거주)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남북의 대화」시리즈 중 지난 1월 13일자「분산된 민족의 힘」항은 고하의 해방직후 정치노선에 관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의견이 있었읍니다。이제 고하도 몽양도 다 세상을 떠난 지금 굳이 몽양을 비판할 뜻은 추호도 없지만 후일의 기록을위해 사실을 밝히려합니다。
    먼저『고하 송진우 등이 임정의 국제적 위치와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는 의견이 있었읍니다。
    삼·일 운동의 주동세력으로 48인의 한분인 고하는 삼·일 독립운동의 소산인 임정의 법통을 신생한국에 계승시켜야한다고 생각한것이지 임정의 국제적 위치와 실력을 과대 평가하여 임정을 영접하려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고하가 각계 각층의 인사를 모아 국민대회준비회를 구성한 것은 림정을 위시하여 해외에 망명했던 독립지사들의 환국을 영접하는 준비를 하고 그분들이 환국한 후에 국민대회를 가져 국가민족의 향방을 결정하려는 뜻에서였읍니다。 이것은 임정에 대한 의리에서 뿐만 아니라 고하가 국내 독립지사를 대접한것과 마찬가지로 해외망명중인 선배나 동지를 대접하고자 한 고하의 인품의 일단이 나타난 것이었읍니다。 또한 고하는 이렇게 해야만 국내외 지도자를 총망라한 민족의 총역량을 건국사업에 집결시킬 수 있다고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또『해방직후 몽양의 협력요청에 고하가 응하였던들 좌우분열은 격심해 지지 않을 수 있었고 우익진영에서 몽양과 협조했던들「건준」이 공산당과 협력하여 좌익 일변도로 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문을 갖게된다』는 의견이 있었읍니다。
    고하가 몽양의 협조에 응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 몽양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인했다는 것 둘째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정권을 민족의 적이었던 총독부로부터 몽양이 받았다는 것 세째 몽양은 공산혁명으로 일로 매진하겠다고 공언한 점등입니다。
    고하는 이처럼 원칙과 명분 없는 정치노선에의 협력은 혼란만 더욱 가중시키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령 일례를 들어 고하가 몽양에게 협력했다면 임정도 소위 몽양의「인공」을 떠받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또한 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 교섭을 받고도 거절한 고하가 총독부로부터 정권을 수여받은 몽양과 합작할 수 있을까요。

    몽양의 정치 노선으로는 해내외의 민족 민주세력을 총망라 할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며 그러기에 고하는 8월 17일 몽양이 찾아왔을 때 그의 잘못을 누누이 설명하고 임정의 법통을 존중할 것과 건국준비는 독립지사의 환국 후에 국민대회를 열어 결정할 것을 종용한 것입니다。몽양이 고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합세、독주함으로써 혼란을 빚어내자 김병로 백관수 이인 등 제씨가 민족 총집결체로서 명실상부한 체제를 갖추어 해외독립지사들이 환국할 때까지는 치안유지정도로 하고 민족 공산 양 진영의 구성비율을 최소한 좌우동수로 구성할 것을 충고했는데 몽양은 이에 일단 동의하고서도 두번이나 번번이 공산당 일색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민족진영을 배신했읍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하가 몽양의 잘못된 정치노선을 협력으로 중화시키려 노력했지만 몽양이 받아들이지 아니했고 고하가 몽양의 협력을 거부한것이 아니라 몽양에게는 진정한 마음에서 협력을 요청할 의사가 없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 몽양 자신의 뜻이 아니고 몽양을 둘러싼 극좌파들의 압력에 몽양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읍니다만 그렇게되자 처음에 몽양과 협력하던 민세까지도「건준」에서 이탈하였고 몽양도 갈팡질팡하지 않았읍니까。백보를 양보하여 몽양의 배신을 감수하고서도 몽양에 동조 협력하였다면 일시적으로 협화 비슷한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요、임정을 받든다는 원칙 하에「인공」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결국 민족진영의 패배를 자초했을 것임은 명명백백합니다。

    몽양이 민족진영과의 통일은 구하지 아니하고 곧 정권을 잡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소위「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민족진영은 부득이「인공」타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몽양의 정치행각과 정치적 식견을 고하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읍니다。
    또『헤게모니 쟁탈 욕망 때문에 (통일운동이) 실패한 것이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읍니다만 실패의 원인은 앞서 말한 바와같이 좌우동수 비율로 동의해 놓고 몽양의 헤게모니 쟁탈 욕망 때문에 몽양이 번번이 공산당 일색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고하는 해방 전에도 몽양을 아끼고 도왔으며 몽양이 임정의 법통을 존중、자중하면 기회가 왔을 때 지도자로 추대해 주겠다고까지 했읍니다。
    또『조선총독부가 과연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에게 진정으로 정권인수를 요청하였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아직 객관적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하는데 이미「남북의 대화」시리즈 23회에서 밝힌 것처럼 총독부가 고하에게 정권인수를 교섭했지만 끝까지 거부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이에 반해 몽양은 분별없이 덤벼들어 많은 잘못과 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11.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송진우 한국민주당의 과도정부 구상과 대한민국임시정부지지론, 한국사학보 제42호(2011년 2월), 256쪽

    그렇다고 해서 송진우와 동아일보 계열이 임정을 과대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임정세력이 민족운동에 있어 갖는 상징성과 정통성이 있는 반면 국내기반이 전무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아일보를 경영하며 국내외 정세에 국내 어느 세력들보다 밝았던 그들은 적어도 동아일보 폐간 전까지는 임정의 실상에 대해 국내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