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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겠소.”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 몽양 여운형이 낭산 김준연에게 했다는 말이다. 김준연은 여운형의 이 한마디를 ‘해방 직후 우리 정국을 재는데 극히 중요한 척도(尺度)’로 평가했다. 민족주의자들과 협력할 수 없는 여운형의 정치적 신념이었다는 것이다.

 

 여운형의 이 말은 일왕 항복방송 직전 김준연과의 대화에서 나왔다. 김준연은 이후에도 이 대화를 계속 인용하는데, 이 기록은 해방 4개월도 지나지 않아 동아일보 복간 다음날 기고문 1에 처음 나타난다. 동아일보 복간을 축하하는 여운형의 글 2은 며칠 뒤 게재됐다. 당사자들의 기억이 생생할 때였다.

  

 김준연의 기록 3과 증언 4을 종합하면 8월 15일 오전 10시경 창덕궁경찰서 앞에서 여운형이 고하 송진우와 인촌 김성수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의사를 묻는다. 그렇지 않아도 김준연은 전날 건준에 관여하고 있는 정백의 부탁을 받고 이들의 의중을 떠본 뒤 거절 의사를 전하러 가는 중이었다. 이에 여운형은 김준연이라도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김준연 역시 거절하자 ‘공산혁명으로의 일로매진’을 공언했다는 것이다.

 

 해방정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송진우와 여운형이 협력하기를 바랐다. 송진우가 동아일보 사장(1921년 9월~1924년 4월)으로 있을 때 여운형은 상해통신원(1922년 10월~1923년 5월)으로 있었다. 5 여운형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된다. 이 신문이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자진 휴간 중이던 1937년, “씨(氏)는 신문사장이라는 적은 국한적(局限的) 그릇으로 대(對)하기에는 너무 크다”(동아일보 창간기자 유광열)는 인상을 주었다. 6

 

동아일보 상해통신원 여운형의 호상잡신(扈上雜信)

 동아일보 1922년 11월 21일자 2면

 

 같은 해 7월 중일(中日)전쟁이 터지자 송진우는 세계대전을 예언했다.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국학자 정인보는 송진우의 비문에 “신문에 중국의 현상과 세계의 전도를 논한 것이 20년을 지나서도 맞지 않는 것이 없은즉, 그 식견의 탁월함이 이와 같았다” 7고 새겼고, 동아일보 폐간당시 편집국장 고재욱은 “세계대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역사의 진운에 대한 예리한 선견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8고 평했다. 평생의 친구 인촌 김성수는 송진우의 선견지명을 ‘육미탕(六味湯)’이라고 부르면서 송진우와 의논하고 다른 사람들도 경청하도록 했다.

 

 여운형도 해방을 예견하고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조직결성 준비작업을 주로 담당했다는 이임수는 춘천의 의사였다. 이임수의 아들 이란은 여운형을 춘천중학 친구들에게 소개한 죄로 3년형을 치르고 여운형 주변에 머물렀다. 그러나 해방당시 만 20세 청년이었던 이란은 건국동맹이 과장된 것이 많다고 말한다. 9

 

 “제가 볼 때에 건국동맹이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분들이 몽양(‘건준’의 오기인듯함-인용자 주)을 점령하고 들어갈 능력이, 힘이, 없었던 것 같아요. 건맹은 내가 볼 때는 과장된 것이 많아요.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것이 1944년이거든요. 건맹에 몽양을 아는 사람이 모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또 핵심이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1989년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의 이란 선생 면담)

 

 여운형의 협력노력에 대해서도 이란은 “여운형은 혁명가라기보다 스포츠맨에다 연극배우의 소질을 가진 사람”이라며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10

 

 “몽양이 고하를 찾아갔다는 것도 모두 제스처입니다. 안 될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왜 그를 찾아갔느냐 하면은 ‘아니야, 고하는 훌륭한 사람이야’하고 대꾸를 합니다. ‘나는 너를 찾아갔지, 일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남기겠다하는 것입니다.”

 

 당시 송진우와 여운형의 합작을 추진했던 우익계 변호사 이인도 여운형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글을 남겼다. 여운형은 이인에게 “송진우를 만나 이야기하고 합작하자고 애원(哀願)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았소.”라고 전했고, 옆에 있던 민세 안재홍은 “애원이란 말이 과하구만.”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인도 결국 “고하의 민족주의와 몽양의 사이비공산주의가 서로 타협이 되기 어려울 것” 11이라며 포기했다.

 

 결과론이지만 송진우가 여운형의 합작제의를 거절한 것에 대한 비난과 책임론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12 그러나 송진우가 합작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여운형이 ‘공산혁명으로의 일로매진’을 공언한 때문이라기보다는 원칙과 명분 없는 정치노선을 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3

 

 

<인 물 정 보>

여운형 (呂運亨): 1886~1947, 독립운동가, (전) 근로인민당 총재
김준연 (金俊淵): 1895~1971, 동아일보 주필, 제1·3·4·5·6대 국회의원 
송진우 (宋鎭禹):1890~1945, (전) 동아일보 사장
정인보 (鄭寅普):1893~1950, (전) 국학대학장,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이란 (李란): 1925~2011, 독립운동가
이인 (李仁): 1890~1979, (전) 초대 법무부 장관, 제1·3대 국회의원
안재홍 (安在鴻):1891~1965, (전) 한성일보 사장, 제2대 국회의원
유홍 (柳鴻):1898~1988, 제2·4·6대 국회의원

 

 

 

Notes:

  1. 김준연 국민대회준비회부위원장, 국민대회의 발단, 동아일보 1945년 12월 2일자 4면

     8월 15일 오전 10시경이엇다、나는 창덕궁 경찰서압헤서 여운형 씨를 만낫다、송진우 씨가 나오느냐고 물엇다. 송진우 씨는 나오지 안케되고 김성수 씨에게는 문의할 기회가 업섯다고 대답하엿다、그러면 그대는 어떠냐고 하기에 나도 참가할 의사가 업다는 것을 말하엿다、여운형 씨는 그러면 나혼자 나가겠다고 말하엿다、그래서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다고 말하엿다.

     8월 9일에 소련이 일본에 대하야 전쟁을 선언하고 활동을 개시하야 만주로 조선으로 진군하게 되니 일본 정부는 최후의 기(欺)○원까지 상실하고 말엇던 것이다. 원자폭탄에 의하야 창황실조(蒼惶失措)한 일본 정부는 또다시 소련의 진출을 보게됨에 천만장(千萬丈)의 구렁으로 굴러 떠러저 버렷다. 벌서 국민을 속여서 끌고 나갈 수는 도저히 업게 되엇던 것이다. 이와가치 되여 적군의 침입을 보면서도 대항적 선전포고를 행하지 못하고 항복을 결정하고 다못 그 절차에 관하야 논의하고 잇을 뿐이엇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중앙정부의 이 태도를 살피고 대책을 강구하게 되어 10일에는 경무국 보안과장이 주동이 되어 진고게 모처에서 조선군 두 참모와 원전(原田) 경무국 사무관 등 입회하에 송진우 씨를 만나서 행정위원회의 조직을 의탁하엿스나 송 씨는 거절하고 11일 12일 양일(兩日)에도 동양(同樣)의 교섭이 잇고 13일에는 생전(生田) 경기도지사와 동(同) 경찰부장이 만나서 교섭하엿으나 역시 거절하고 14일에는 나도 생전(生田)지사와 강(岡) 경찰부장을 만낫스나 동일한 결과가 되고 말엇다.

     그러는 동안에 여운형 씨의게도 교섭이 잇엇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우(某友)가 중간에 서서 나에게 송(宋) 김(金) 양씨(兩氏)에게 여 씨와 합작하도록 권유하여 달라고 의뢰하엿던 것이다. 나는 15일 오전 7시 반에 여 씨가 정무총감을 만나러 갓단 말을 들엇다. 나는 모우에게 송 김 양씨와의 교섭 전말을 보고하러 가는 길이엇고 여 씨는 정무총감을 만나고 오는 길이엇던 모양이다.

     15일 정오에 왜황(倭皇)의 무조건 항복선언이 라되오를 통하야 발표되자 여운형 씨는 안재홍 씨와 제휴하야 건국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대대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엿다. 그리하야 경성은 물론이고 지방까지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세력이 파급하게 되엿다.…(후략)

  2. 인민당 여운형 씨, ‘인민 위해 분투’, 본보 중간(重刊)과 각 방면 축사, 동아일보 1945년 12월 6일자 1면

    동아일보가 속간된다하니 경하합니다. 이제 새삼스러이 신문의 사명이라든가 책무를 운운할필요도 없을 줄 안다. 다만 인민을 위하야 신문인으로서 분투해 주기 바랄 뿐이다.

  3. 김준연,  ‘나만이 아는 비밀 –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과 해방 정계’, 독립노선, 시사시보사 출판국, 1959, 257~272쪽 

    조선총독부의 정권이양 교섭

     그래서 안재홍 씨와의 사이에 논쟁이 있은 후에는 더욱 몸을 조심하는 의미로 이불을 펴고 1년 동안이나 칭병을 하고 들어 누워 있었다. 그랬었는데 13일 밤 그는 나를 만나서 총독부와의 4차에 걸친 교섭에 있어서 그전에 나에게 말한 대로 일본과의 타협을 일체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송진우 씨는 나에게 말하기를 “경기도 생전(生田)지사와 오까 경찰부장을 만나서 강경히 거절하였더니 오까 경찰부장은 그러면 김준연 군을 만나게 해줄 수 없겠소? 김 군이 청년 간에 신망이 있다니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여보게 하겠소!”라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송진우 씨는 “낭산(朗山)이 여기 와있는 것을 경찰이 정보망을 통하여 다 알고 있으니 안 만나면 도리어 좋지 않을 것이니 한번 가보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그러면 만나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송진우 씨는 전화로 바로 연락하기를 “김 군이 여기와 있는데 내일 오전 중에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하자 저편에서도 내일 오전 9시경에 경기도청으로 와달라는 대답을 하여왔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 경기도청으로 찾아가서 지사를 만나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오까 경찰부장은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나와 생전(生田)지사의 이야기는 5,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서울 상공에 미국 B29폭격기가 날아왔었다. 한번 오고 또 오고 두 번이나 왔었다. 그래서 나는 생전(生田)지사와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 두 번이나 경기도청 길 건너편에 있던 체신부 방공호에 지사와 함께 피난하였었다. 나와 생전(生田)지사는 점심도 같이 하였다. 점심은 빵 두개와 물 뿐이었다. 이래서 5, 6?시간 이야기하는 도중 그의 근심하는 바는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일인의 생명을 위협하지나 아니할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우리 학생들은 결코 그와 같은 일은 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장담하였다. 그리고 흔연스럽게 대하였었다. 물론 생전(生田)지사도 일본이 항복 한다는 말은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의사는 표시할 수 없었고 전쟁이 계속된다는 전제하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으로 5, 6시간이나 이야기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점심을 같이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지사와 작별을 고하였다.

     작별시 지사는 내게 묻기를 ‘당신이 송진우 씨를 만났습니까?’ 라고 하기에 나는 ‘만났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러면 당신도 송진우 씨와 같은 의견이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때 정백(鄭栢)이라고 하는 나의 ML당 옛 동지가 나를 찾아와서 “일본이 곧 손을 드니 우리가 뒷일을 담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국내서는 여운형 씨와 송진우 씨가 악수를 하면 그에 대항할 세력이 없을 것이니 그대가 송진우 씨와 김성수 씨에게 말해서 연락을 취해 달라.”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송진우 씨는 “총독 측에서 네 번이나 교섭하여 왔는데도 거절하였는데 지금 여운형 씨가 말한다고 해서 되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 길로 나는 김성수 씨를 만났는데 그이는 막 연천(漣川)으로 떠나려고 옷을 갖추어 입고 마당에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갖지 못하고 경기도지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만 하였다. 그리고 밤에 돌아가 송진우 씨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자니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내일 정오에 일본천황의 중대방송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공산혁명을 말하던 여운형 

    우리는 그것이 일본의 항복 선언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와 송진우 씨는 일본 세력이 물러가고 조선이 독립되는 것을 생각할 때 기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하였다. 그랬더니 이튿날 아침 어떤 친구가 ‘오늘 아침 7시 반에 여운형 씨가 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이 앞서 총독부에서 송진우 씨와 나에게 하였던 교섭을 여운형 씨와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침을 먹고 10시쯤 돼서 전일 정 군이 나에게 송진우 씨와 김성수 씨에게 교섭해달라고 하던 사건에 대해서 회담하기 위하여 창덕궁 경찰서 쪽으로 내려왔다. 그때 계동 초입 우측에 장일환 군이 살고 있었는데 정군 이 거기 머무르고 있는 고로 거기에 가서 소식을 전하려 하였던 것이다. 원동 송진우 씨 댁을 출발해서 창덕궁 담을 지나 창덕궁경찰서 앞에 다달았다. 그때 저 남쪽으로부터 활발히 걸어오는 여운형 씨를 발견했다. 서로 만나니 여운형 씨는 평소의 그 활발한 태도로 악수를 청한 후 나에게 “고하는 어떻게 하오?” 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하여

     “고하는 나오지 않고 김성수 씨는 어제 오후 연천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야기할 틈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여운형 씨는
     “동무는 어떻게 하겠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여운형 씨는 나를 만나면 동무라 불렀다. 그것은 내가 ML당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그이도 또한 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나도 나서지 않겠소.” 라고 분명히 대답했다.
    그랬더니 여운형 씨는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좋소. 나 혼자 나서겠소.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소.” 라고 결연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여운형 씨의 이 한마디 – ‘공산혁명으로 일로 매진하겠소’-는 해방 직후 우리 정국을 재는데 극히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중략)

     

    여운형과 결별

    그러므로 나는 한때 조선 공산당 책임자였지만 송진우 씨와 의견을 같이하였고 그래서 여운형 씨를 만나 이런 말을 듣고도 나는 그길로 張씨 집에 가서 정백(鄭栢) 군을 만나 ‘송진우 씨는 거절했고 김성수 씨는 총총히 연천으로 떠나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다’ 고 말했고 ‘나도 그러지 못 하겠다’ 는 것을 여운형 씨에게 말 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나는 송진우 씨 댁으로 돌아가 정오에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방송을 듣게 되었다.

    <자 일은 이제부터로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오후 2시경 정백 군은 다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말하기를
     “여운형 씨를 만났더니 송진우 씨가 확실히 거절하였다니 송진우 씨의 의견은 다시 물을 것 없고 동무만은 꼭 같이 일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하겠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못 하겠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다시 다져서 말하기를 ‘그러면 동무가 후회하지 않겠소’ 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이 때 분연히 ‘후회하지 않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었다.

     그 후 여운형 씨는 안재홍씨와 연락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6일에는 박헌영과 함께 경기여고 강당에서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다 송진우 씨는 이를 일소에 부치고 9월 7일 동아일보 강당에서 국민대회준비회의 결성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결당 준비 중에 있던 한민당에서는 9월 8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소위 조선인민공화국을 통격하였었다. 9월 16일 드디어 한민당이 결성되고 국민대회 위원장인 송진우 씨는 한민당 수석총무 자리도 겸하게 되었었다. 나는 국민대회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어 송진우 씨를 도왔었다. 10월 16일에는 이승만 박사가 미국 군용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생각하면 안재홍씨는 1년 전 송진우 씨를 조소해서 “고하는 로맨틱하오. 이승만 박사가 미국 군함을 타고 인천항에나 들어올 줄로 아오?” 라고 말하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그 후 1년이 지나지 못해서 이승만 박사는 미국 군함 아닌 미국 군용비행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으니 그들 두 사람의 식견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292년 7월호, ‘眞相’)

  4. 김준연, ‘8.15전후 한국사정’, 정계야화-김준연(金俊淵)편(11), 동아방송 1965년 8월 16일 방송

  5. 여운형  동아일보 상해통신원,  ‘호상잡신(扈上雜信)-휴전기념일 소감’, 동아일보 1922년 11월 21일자 2면

    설산(장덕수) 형, 오늘은 11월 11일이올시다. 4년 전 오늘 새벽에 시산혈해(尸山血海)를 이루던 세계대전쟁이 종국됨을 보(報)하던 각 예배당 종소리에 깨여 일어나 우리도 무엇을 해보자고 의논하던 일이 어제같이 기억이 됩니다. 과거 4년 동안에 세계 형세도 다소 변경됨이 없지 아니하고 우리 사업도 기록할만한 것이 적지 아니하나 평화의 소식은 아직 막연합니다. 오히려 전쟁만이 더욱 격렬하여집니다. 종전으로 하여오던 수적(獸的) 전쟁이 끝나지 못하여 새로 일어나는 인적 전쟁은 전세계에 불을 놓습니다. 항상 속아 사는 인생들은 이날에 평화를 기념하며 또 그것을 몽상합니다. 상해는 각 종족이 다 모여 사는 한 세계의 축도올시다. 승자와 패자 그들이 이날을 어떻게 지내는 꼴을 구경하려고 나는 아침부터 나섰습니다. 먼저 10시 30분에 강서로 중앙예배당에서 거행하는 평화기념 예배회에 참석하였나이다. 회중은 모두 전쟁에 종사하였던 군인들과 또 그들의 가족들뿐이올시다. 아들 둘을 전쟁에 내보낸 노인의 흐르는 눈물 만면하여 명인한 목소리로 성경을 낭독함과 11점을 종치자 회중이 기립하여 2분간 묵념하는 것과 그 외 모든 절차가 전승축하나 평화기념 보다는 전망(戰亡)군인의 추도회라는 것이 합당하겠더이다. 동시에 예배당 문밖을 내다본즉 거리에 군차와 행인까지 행주(行走)를 정지하고 정립(靜立) 묵념하는 것은 나의 무한한 감상을 일으키더이다. 어떠한 종군하였던 친구의 청요로 ‘푸렌치 클럽’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나이다. 6시 반부터 모여든 각국 군복을 입고 사람 많이 죽였다는 표증(表證)이 번쩍번쩍하는 훈장을 한 군인들이 거의 6백 명가량이나 모여드는데 절룩바리 곰배팔이 등 부상한 군인들이 반수 이상이나 되옵데다. 8시가 되더니 오케스트라가 각국 각 노래를 연주하고 간단한 식사(式辭)가 있은 후에는 한쪽에서는 먹고 마시며 한쪽에서는 춤추고 뛰기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9시 반쯤 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한즉 회당에서 어떠한 수사의 연설하던 말이 다시 기억됩니다. “연년(年年)이 광음은 의연히 지나가나 평화기념일은 평화의 세계보담도 전쟁의 세계, 생명의 세계보담도 퇴폐한 세계를 연상케할 뿐이다.” 잠은 아니오고 그리운 형의 생각은 금할 수 없어 다시 뛰어 일어나 정원에 나가 달을 우러러보니 심중소회를 말할 곳도 없어 종일토록 본 바와 느낀 것을 기록하여 형에게 보냅니다. 붓대를 더지는 이 순간에 나의 가슴에 맺히는 무한한 회상을 형은 알리라 합니다. (11월 11일 오후 11시)

  6. 유광열(柳光烈) 동아일보 창간기자, 여운형론(呂運亨論), 백광 1937년 1월호, 23쪽

    氏와 筆者가 만나기는 筆者가 某報記者로 있을 때에 上海佛祖界에서 한번 만난 일이 있었고 그 後氏가 朝鮮에 와서 囹圄의 身이 되었다가 出獄한 後 暫時路上에서 만났고 氏가 中央日報社長이 된 後에 몇 번 만났다. 氏에 對하야 世에서는 毁譽가 不一하다.
    氏를 或者는 雄辯이라한다. 그러나 氏의 말을 들어보면 그 聲量이나 風采는 그럴듯하나 그 立論의 根據를 들어가보면 많은 疏放이 있다. 그의 말 中에서 사람을 “앳트랙트”하는 點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情熱的인 點일 것이다.

    筆者는 어느 會席上에서 某氏와 氏의 式辭를 아울러 들은일이 있는데 某氏는 冷靜히 말을 하나 그말은 極히 緻密하며 建築에 비하면 小規模이나마 탄탄한집이요 氏는 熱情的으로 쏟아저서 듣기에는 多少의 快感이 있으나 理智의 저울로 달아보면 空疎한 部分이 많은 것이다.
    氏가 어떤 靑年의 葬式의 式辭를 할때에 氏는 고만 聲淚가 俱下하고 말었다. 勿論 葬式에 聲淚가 俱下할곳도 있겠지 그러나 이 式에 參與하였든 사람이 大部分이 그 靑年과는 氏만못지않게 親하되 우는 사람은 一人도 없었다.

    그리고 式後에 헤여질 때에 氏의 聲淚俱下를 評하야 曰
    “氏의 울음은 참 雄辯式이야 雄辯은 그래야 되는 것이야”
    “그래 英雄은 善立이라더니 참, 그것은 英雄式이야”
    “글세, 우리도 말을 잘하려면 우는 法을 배워야겠서”

    이 말들中에는 氏에게 感歎하였다느니보다 多分의 揶揄가 包含되지 않었을가 한다. 現在 朝鮮靑年의 文化水準은 놀라운 程度로 昇進한다. 모든 것을 批判할만한 理智의 慧命이 날로 增長된다. 氏는 多方面으로 交際가 넓다. 耶蘇敎人들은 氏를 耶蘇敎人이라한다. 그럴것이 氏는 耶蘇敎會에 가서 禮拜도 보고 敬虔祈禱도 드리니까····
    新進主義者들은 氏를 主義者이라한다. 그들은 만나면 그런 學說을 말하니까···
    일즉이 朝鮮의 어떤 詩人이 많은 詩를 지어가지고 中國에 갔었다. 中國의 어떤 詩人에게 得意然하게 이야기하니 中國詩人이 어떤 詩句에는
    “子詩가 近於杜詩일세”
    하니 朝鮮詩人은 滿悅하였다. 또다른 詩句에 對하여는
    “子詩가 近於李太白詩일세”
    하니 朝鮮詩人은 또 滿悅하였다. 그리다가 中國詩人은 다시
    “然이나 子詩는 何在오?”
    하니 朝鮮詩人이 默然하였다는 말이었다.

    이것으로써 氏의 캐릭터를 論議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善意로 解釋하면 耶蘇敎人이나 主義者이나 다 잘 親하야 일을 좀하여 보겠다는 熱意에서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何如間 이것이 一部의 非難을 받으면서도 氏의 人格의 圓滿을 讚하는 이가 많음도 事實이다.(중략)

    지금의 朝鮮人識者間에는 快活한 사람보다 沈鬱한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氏는 언제만나도 快活明朗하다.
    사람에 따라 말은 다르겠지만 찡그린얼굴보다 웃는 얼굴보기가 나은 것은 事實이다.
    氏가 現在 新聞社長으로 있다하야 그것으로만 論할 수는 없다. 氏는 新聞社長이라는 적은 局限的 그릇으로 對하기에는 너무 크다.
    新聞社長 呂運亨이가 아니라 呂運亨이가 臨時로 新聞社長이 된 것이다. 말은 같은 말 같으나 前者와 後者는 懸殊한 差異가 있다. 新聞社長某라 하면 그가 新聞社長을 고만들 때에는 적어도 新聞社長일 때보다 그 價値가 減少되겠지만 某가 新聞社長을 하였다하면 그가 社長을 고만두어도 그 價値에는 何等增減이 없다는 말이다.
    氏가 아직 五十이다.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싶어하고 周圍도 그에게 일할 機會를 많이주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7. 정인보, ‘고하 선생 송군(宋君)의 비’, 독립을 향한 집념-고하 송진우 전기, 동아일보사, 1990년, 24쪽

    어려서부터 난리를 겪고 중간에는 세상일이 비뚤어지고 잘못 되었으나 항상 낙관을 갖고, “적의 망하는 것은 서서도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언젠가 김성수 군이 나에게, “고하의 말을 믿지 마시오. 서서 기다릴 수 있다 하더니 지금 이꼴이 무엇이오”하고, 농담을 한 일도 있었지만, 군이 신문에 중국의 현상과 세계의 전도를 논한 것이 20년을 지나서도 맞지 않는 것이 없은즉, 그 식견의 탁월함이 이와 같았다.

    단군기원 4279년(1946년) 10월 세움

  8. 고재욱의 서문, 고하 송진우 선생 전,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편, 동아일보사, 1965년

    선생의 덕망이나 금도에 대해서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거니와 세계대세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역사의 진운에 대한 예리한 선견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9.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정치학),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여운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년, 739쪽

    여운형과 오래전부터 극친하게 지내던 춘천의 의사 이임수(李林洙)의 아들 이란(李欄, 1925~2011)씨의 회고, 이정식 교수가 1989년 8월~12월 3차례 면담

    책들을 보면은-특히 이만규의 여운형투쟁사-5월달에 조동호씨 등 몇 사람이 잡혀가서 건맹(건국동맹)이 와해 단계에 있었는데 이여성 최근우 이런 사람들을 다시 기용해서 제2차 건국동맹을 만들었는데 해방이 되고 나니까 제1차 지하조직하고, 제2차 지하조직하고의 인적 교류가 잘 안되었다고 나와 있는데, 제 색각에는 건국동맹이 뚜렷하게 부서라든가하는 것이 되어 있었으면 계동에서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을 조직할 때에 건맹이 점령하고 들어가야 했어요. 제가 볼 때에 건국동맹이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분들이 몽양(‘건준’의 오기인듯함-인용자 주)을 점령하고 들어갈 능력이, 힘이, 없었던 것 같아요.
    건맹은 내가 볼 때는 과장된 것이 많아요.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것이 1944년이거든요. 건맹에 몽양을 아는 사람이 모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또 핵심이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몽양은 일본이 패전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10.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명예교수(정치학),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여운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년, 742~743쪽

    여운형과 오래전부터 극친하게 지내던 춘천의 의사 이임수(李林洙)의 아들 이란(李欄, 1925~2011)씨의 회고, 이정식 교수가 1989년 8월~12월 3차례 면담

    8·15날 그 집에 가보니까 몽양이 정신이 없어요. 그래 우리 아버지가 몽양에게 충고를 한 것이 왜 그러느냐. 지금 왜놈들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총자루를 쥐고 있는데 왜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안 만나느냐. 몽양 선생은 윤치영 같은 놈 당신 돈을 모두 떼어 먹고 그랬는데 그런 놈을 왜 만나겠느냐. “아 돈이야, 내 돈이지 당신 돈이었소? 왜 안 만나느냐.” 당신이 씨앗을 뿌린 거야요.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한 후에 숙청을 해도 늦지 않은데 왜 지금 거절하느냐. 지금 참을 때가 아니냐. 왜 지금 감정을 노출해서 그러느냐. 그 때 종로에서도 일본 놈들 두들겨 주어 가지고 사건이 났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거 반대야. 치안을 어떻게 할라고 하느냐. 그래 변소간에서 싸운 것이 그거야요.

    몽양은 “36년간 눌려 살다가 해방이 되었는데 때리는 놈도 몇 놈 있겠지요. 그것을 무슨 말을 하느냐.” 우리 아버지는 그게 아니요. 큰일 난다. 일본 놈 헌병이 지금 칼을 차고 다니는데…여보 지금 밥은 다 된 밥인데 왜 지금 한 사람이라도 희생을 시키느냐, 우리가 일본사람들을 잘 감시를 해 가지고 희생 없이 보내서 우리가 완전히 정권을 잡거든 그 때 가서 재판을 해도 늦지 않은데 지금 왜 그러느냐.
    몽양은 우리 아버지더러 저이는 한문만 많이 해가지고 무엇이든지 타협만 할라고 하는 비폭력파라고 생각을 했고, 우리 아버지는 선생은 언젠가 실정(失政)을 한다. 그는 정력파고 성격이 과격한 사람이거든, 선생은 위대하고 나 같은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지만 선생은 반드시 실정합니다.

    해방 전에 몽양과 장덕수는 거래가 없었어요. 8·15날 그 날 그 방에 정백(鄭佰)이고 최용달(崔容達)이고 꽉 차있는데 장덕수는 들어오라고 할 처지도 못되지, 계동 집에서. 장덕수가 왜 인사를 하러 갔느냐 생각을 하는데 그때 정보도 없고 여운영이 무엇이 된다고 하니까 그래서 이종형(李鍾滎), 윤치영도 왔는데 며칠 있으니까 미국이 오고 이렇게 되니까 몽양은 엿이나 먹어라 하는 태도였지요. 그러니까 몽양이 속을 드러내 놓은 결과밖에 없었다 이거지요.
    그래 다음날 11시 40분쯤에 계동에 갔는데 방안에 들어설 틈이 없어요. 선생님이 소집을 했는지 모두 모였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여운홍(呂運弘) 씨, 정백(鄭佰) 씨인데 정백은 어찌 떠들고 다니는지 거품을 물고 반 미쳤어요. 최용달, 박문규(朴文圭) 씨 등도 있었는데 이강국(李康國) 씨는 안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날은 못 보았어요. 이정구(李貞求)도 있었죠.

    여자로는 김명시(金命時)라던가 고명자(高明子) 등이 있는데 그날 김명시는 못 봤지만 고명자는 와 있었어요. 고명자는 원래가 김단야(金丹冶) 부인이지요.
    그날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간에는 대부분 좌경된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어요. 그 때 소문에는 소련 군대가 서울에 들어오느니 어쩌니 했지요. 일본 사람이 망한다는 것. 일본 천황이 항복한다는 것만 알지 전연 정보가 없었죠. 카이로회담 얘기도 듣기는 했지만 원문을 읽어 본 것도 아니고. 그래서 소련군이 들어온다고 하기 때문에 몽양이 좌익 세력을 포섭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건맹이라는 조직도 있지만 몽양 언저리에서 좌익을 빼 놓고 이론적으로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없어요.
    인민당(人民黨)도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주장했는데 당내에서 논란이 많았어요. 그런데 몽양이 별 큰 관심이 없으니까 정구가 동대(東京大學)를 나오고 그랬으니까 “야,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무상 몰수, 무상 분배가 좋겠습니다.” “아, 좋겠지” 하는 식이예요.

  11. 이인,  ‘해방전후 편편록(片片錄)’, 신동아 1967년 8월호, 354~356쪽

     “정치는 현실인데 몽양과 민세가 비록 불순하기는 하나 불과 반일 간에 몽양의 천하가 된 것처럼 그 기세가 沖天하는 듯하니 만일 이대로 간다면 전도가 암담하지 않겠소!”
     나의 이 말에 옆에 있던 김준연이 제안했다.
     “愛山은 몽양, 민세와 친한 처지이니 한번 절충해 보시면 어떻소?”

     나는 이날 밤 서용길을 데리고 거리에 날뛰는 竹槍(건국준비위원회청년들)과 혼잡한 인파를 헤치고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 자리 잡고 있다는 몽양과 민세를 찾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만규 만 있고 몽양과 민세의 행방은 일반에게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 우선 이만규를 잡고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젊은 사람들에게 죽창을 들려 행인을 위협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그런 것이 아니라 우선 치안이 물란하기에 그랬을 뿐이오. 애산 댁에 전화로 연락해보았으나 계신 곳을 알 수 없어 걱정하던 터이니 곧 몽양을 만나 보시오.”
     李는 이렇게 말하면서, 몽양과 민세가 齋洞에 있는 林龍相家에 있다고 일러주었다.

     이튿날 아침 8시경 나는 齋洞을 찾아 몽양과 민세를 만나고, 건준의 불순성과 최근우 권태석 이규갑 등 몇 사람이 방문을 밀폐하고 국가 初建 운운하는 부당성을 논박했다. 그러자 몽양은 이렇게 말했다.
     “애산조차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도리가 없고, 고하를 만나 이야기하고 합작하자고 哀願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았소.”
     “哀願이란 말이 과하구만.”
     옆에 있던 민세가 苦笑하면서 말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 각층 각계를 총망라한 인사로써 一席 논의하자는데 합의한 뒤 내가 제의했다.
     “우선 고하와 다시 한번 만나시지요.”
     “좋소. 오늘 오후 2시 내가 다시 고하를 탐방할 터이니 애산도 동석하시오.”

     몽양의 이러한 대답을 듣고 나와서 나는 곧 고하에게 연락했다. 그날 마침 용산의 일본주둔군이 입성한다는 미군과 시가전을 한다고 全市가 철시했고 시민대표 다수가 나를 찾아와서 軍에 교섭하여 시가전이 중지되도록 요청하고 시민 인심이 흉흉 불안하고 각계 다수 인사의 내방으로 혼잡하던 터에 오후 6시경이나 되어 弟妹 應洪의 말에 조금 전에 몽양을 행길에서 우연히 만났더니, 고하와 면담했으나 그 사람과는 일을 같이 못할 사람이더라고 나에게 전언하라고 했다. 이 사람들이 또 싸웠구나! 딴은 고하의 민족주의와 몽양의 사이비공산주의가 서로 타협이 되기 어려울 것이고 또 은연중 주도권을 서로 장악하려는 배짱으로 맞지 않은 것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상 추진하지는 아니했다.

  12.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년, 114~115쪽

    아무런 해방준비 작업이 없던 이들은 해방정국의 주도권이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세력에게 있음이 명백해지자 합작요구를 거부했고, 결국 건국동맹이 중심이 되어 건국준비작업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직후 찾아온 첫 번째의 민족통일전선 시도가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누구도 사소했던 이 국면이 향후 좌우대립의 시초가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13. 유홍, 남북의 대화 (57)-「반탁」과「찬탁」의 회오리⑥, 동아일보 1972년 2월 19일자 4면

    해방후 고하 송진우의 주변에서 줄곧 고하 몽양 민세 등 여러 정치지도자를 직접 접한 유홍씨(74· 전 국회의원·현재 서울시 노량진동거주)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남북의 대화」시리즈 중 지난 1월 13일자「분산된 민족의 힘」항은 고하의 해방직후 정치노선에 관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의견이 있었읍니다。
    이제 고하도 몽양도 다 세상을 떠난 지금 굳이 몽양을 비판할 뜻은 추호도 없지만 후일의 기록을 위해 사실을 밝히려합니다。(중략)

    또『해방직후 몽양의 협력요청에 고하가 응하였던들 좌우분열은 격심해 지지 않을 수 있었고 우익진영에서 몽양과 협조했던들「건준」이 공산당과 협력하여 좌익 일변도로 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문을 갖게된다』는 의견이 있었읍니다。
    고하가 몽양의 협조에 응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 몽양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인했다는 것 둘째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정권을 민족의 적이었던 총독부로부터 몽양이 받았다는 것 세째 몽양은 공산혁명으로 일로 매진하겠다고 공언한 점등입니다。

    고하는 이처럼 원칙과 명분 없는 정치노선에의 협력은 혼란만 더욱 가중시키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령 일례를 들어 고하가 몽양에게 협력했다면 임정도 소위 몽양의「인공」을 떠받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또한 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 교섭을 받고도 거절한 고하가 총독부로부터 정권을 수여받은 몽양과 합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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