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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둘러싼 동아일보 기사를 왜곡보도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보도했고, 민족적 감정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신탁통치안’을 반대했다. 동아일보가 극우정치세력의 편에 서서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안 1 2으로 둔갑시켰다거나 반탁감정을 불 질러 사태를 악화 3시켰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모스크바 삼상협정의 내용은 분명 ‘신탁통치안’이었으며, 한국인들은 자주독립의 정신에서 ‘신탁통치안’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동아일보가 반탁운동을 반공반소운동으로 이용했고 이 과정에서 찬탁세력을 반민족자 혹은 매국노로 매도했다고 주장 4하고 있다. 이 같은 의심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측이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는데, 동아일보가 정반대의 추측보도(‘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를 가장 먼저 게재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자주독립의 정신에서 일관되게 반탁입장을 분명히 했다.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서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애썼다. 5 소련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전 중소(中蘇)조약을 통해 여순과 대련항의 사용권을 가진 상태였다. 한반도에서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여유가 있었다. 6 그러나 부동항 문제 7건 이란 문제 8건 동아일보는 소련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1920년 창간된 동아일보는 일제시기 내내 국내외 정세에 민감했다.

 

 사실 동아일보는 소련의 의도를 경계했지만 처음부터 반소(反蘇)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도 처음에 소련의 영토적 야심을 의심했지만 막상 신탁통치안이 발표된 뒤에는 이를 선창했다는 소련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려는 국내 찬탁세력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9

 

 군사적 필요가 이미 상실된 분담 점령의 불합리를 구태여 부동의 전제를 삼고, 그로써 신탁관리란 결론을 추출하려는 소련의 의욕은 과연 무엇인가? 진실로 이해키 어려울 말만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서 우리는 소련의 음험한 침략주의의 변형의 일편이 아닌가하고 의심치 않을 수 없다。

(1945년 12월 28일자 1면 사설, 민족적 모독-신탁 운운에 대하야 소련에 경고)

 

 탁치의 논제를 미소(美蘇)중의 그 누가 선창하였고 또 찬성하였든가 하는 것은 원래부터 문제가 안된다. 우리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노예로의 국제적 철쇄가 우리를 다시금 결박하려는 이 탁치의 모욕에 그래도 이것을 인종해야 옳은 것인가?

(1946년 1월 5일자 1면 사설, 자아모독을 격(擊)함, 신탁 수락은 노예근성)

 

 특히 조선공산당이 1946년 1월 2일 ‘모스크바 결정은 카이로 결정을 더 구체화시킨 것’이라며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서자 김창숙(金昌淑)선생의 경고문을 게재했다. 10 동아일보 창간기자 유광열은 20여년 후 “다른 신문은 좌익의 보복이 두려워 싣지를 못하는데 동아일보가 용감하게 경고문으로 찬탁의 부당성을 지적했다”고 회상했다. 11

  

 

“그 글이 명문이었어요。 이때 두 진영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동아」는 꿋꿋이 민족진영 편으로 필봉을 날카롭게 했습니다。” (유광열 한국일보 논설위원·본사 창간당시기자, 천관우 본사주필과의 대담, ‘민족과 민주의 궤적(軌跡) 반세기-동아지령(東亞紙齡) 13986호에 비친 격동의 현대사’, 동아일보 1967년 4월 1일자 9면)

 

 당시에도 찬탁세력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결정한 ‘신탁통치’가 그때까지 국내에 전해진 신탁통치와는 다르다며 ‘후견’이란 용어를 들고 나왔다. 12 그러나 동아일보는 후견이란 용어가 그 의미에서 신탁통치와 다름이 없다면 자주독립의 열망과 배치된다고 반박했다. 13

 

 계속해서 동아일보는 소련을 신탁통치의 제안자로 지목했으나 소련을 직접 비난하지는 않았다. 14 이승만이 반탁입장이면서 미군정 대신 미 국무성내 유화주의자를 공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구가 국내 인식에만 몰두한 나머지 민족자결의 입장에서 미군정에 대해 일종의 쿠데타를 감행한 것과 대조된다. 15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미소(美蘇)회담을 앞두고 신탁통치가 아닌 자주독립의 승인을 촉구했다. 16 미국과 소련 중에서 조선 민족에게 즉시 독립을 주자고 하는 측은 민족의 ‘은인(恩人)’이고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측은 ‘원수(怨讐)’라고 못 박았다.

 

 소련의 타스통신이 1946년 1월 19일 평양발로 반탁운동을 공격하자 동아일보는 1면 사설 17을 통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소련에 대해 “우방국으로서의 조선이 필요하다면 무단적 탄압이나 신탁통치나 원산, 청진 등을 요구치 말고 오랫동안 노예적 착취와 탄압에 신음한 조선민족에게 우의와 애정을 표시하여 주기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타스통신이 며칠 후 모스크바 현지시간으로 24일 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의 제안자가 미국이었다는 사실 18을 보도하자 동아일보는 한민당 원세훈의 기고로 이 보도를 반박했다. 19 사실 원세훈의 지적대로 신탁통치안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보도를 접했을 때 반대하다가 소련이라는 보도를 보고 찬성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공산당이었다. 20

 

 미국이 제안하였으니 묵인하고 소련이 제안하였으니 반대한다는 우리 민중지도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오직 그런 분자가 있었다면 소위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이 탁치의 제안이 미국 측의 것이라는 보도를 들었을 때에는 절대 반대의 태도로 민중을 동원하다가 막부(莫府,모스크바)회의에서 소련이 제안하였다는 보도를 보고는 태도를 표변하야 무조건 지지하야 탁치를 반대하는 민중 심리를 악용하야 반탁으로 민중을 동원하고 탁치 지지로『데모』행진을 감행한 결과로 민중을 우롱、기만한 마각이 노출되고 대중의 염노(念怒)와 악감만 초치(招致)하야 대중과 상이하게 되었다. (원세훈 기고, ‘탁치 제안은 누가 먼저 했든지, 자주 독립과는 배치, 타스통신을 읽고’, 동아일보 1946년 1월 29일자 1면)

 

 동아일보는 그 후에도 반탁운동 반공운동을 벌여 나갔다. 반 소련, 반 스탈린, 반 타스통신 기사도 계속 보도했다. 21  

 

  민주주의에 있어서 신문보도라는 것은 순정한 동기에서 생긴다. 신문은 선전의 무기가 아니다. 타스통신은 미군정이 반동적 운동을 선동하고 교사한 것처럼 보도하였다. 조선에 있는 미군은 결코 반동적이 아니다. 그들은 순연한 민주주의자들이다. 미군은 조선 사람에게 자유를 줄 수는 없으나 다만 민주주의의 섬광을 주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산주의의 암흑이 있을 것이다. (재미 한인위원회장 임병직의 성명서, 동아일보 1946년 2월 11일자 1면)

  

 

 

Notes:

  1. 박태균, 해방후 친일파의 단정·반공운동의 전개,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25, 1993.11, 182-193

    민족지를 주창하고 나섰다가 1930년대 이후 친일지로 바뀌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역시 일제시대의 친일사주, 편집자 등이 해방 이후 그대로 이어졌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협정’의 내용을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하고, 반탁운동에 앞장서서 ‘찬탁=매국=친소’ ‘반탁=애국=반공’이라는, 사실과는 정반대 내용을 내보냈던 것이 동아일보였다는 사실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2. 박태균 서울대 교수, 역사비평 2005년 겨울호(통권 73호), 2005. 11, 66쪽

    1945년 12월 27일에 결정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동아일보에 의해서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지면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정치적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것을 통칭 ‘찬반탁운동’이라고 부른다.

  3.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년, 306쪽

    이처럼 반탁투쟁은 중경임정 추대운동이었고, 신탁반대운동이었고, 반소반공투쟁으로서, 이 세 가지는 상호 유기적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일반 민중의 반탁투쟁을 민족자주정신의 발로가 아니라고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경임시정부는 1942, 43년경부터 한국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국제관리안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고, 1945년 10월 미국정부의 신탁통치안이 국내에 보도되었을 때에도 정당 사회단체 모두가 그것에 반대하였다. 신탁통치란 한국인에게 민족적 감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 말의 경우 남북분단 좌우분열의 위기의식이 커질 때였으므로 연합국 결정에 어느 때보다도 신중히 대처했어야 할 터였는데, 잇단 왜곡보도가 반탁감정을 불 지르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의 신탁통치는 그때까지 한국에 전해진 신탁통치와는 다르다는 점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으며, 극우정치세력이 신탁통치에 대한 민족 감정을 이용하였다는 점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4. 김민환, 미군정기 신문의 사회사상, 나남출판, 2001년, 71~72쪽

    자유주의 신문들은 공산주의나 진보주의 신문들이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나서자 이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최상룡이 지적하였듯이, 우파 신문들은 점차 반탁의 민족주의적 측면보다는 그 반공이데올로기로서의 유효성의 측면을 의식적으로 이용해 나갔다. ‘동아일보’는 찬탁파를 지목하여 “정계에서는 이 기회를 또다시 파세(派勢) 확대의 기회로 생각하여 격월(激越)한 논의를 제시하고 민의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전제하고, “탁치를 가로놓고 또다시 한말의 당화(黨禍)를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자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동아일보 1946년 1월3일자 사설 ‘통일저해의 원인’-저자 각주) 이 신문은 “탁치 내용을 진보적 민주국가 육성을 목표로 한 것이라 주장하며 스스로 자주성을 부인한다면 이는 민족 생존의 목적성을 무시한 망동”(동아일보 1946년 1월6일자 사설 ‘자아모독을 격(擊)함-저자 각주)이라고 단정하였다.…(중략)…해방 이후 좌파들이 줄기차게 한민당을 주축으로 한 일부 우파를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아세웠는데, 이제 ‘동아일보’가 좌파를 반족적 분자로 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설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자력자존, 자주자율을 근본으로 한 자아광복의 이념과 배치되는 일체의 사태와 함께 이 날을 말살하자. 일정(日政)과 부동(附同)하여 동족을 욕되게 하고 괴롭게 하던 악질의 친일 반역자 무리, 타력에 의거하여 잔재를 묻은 채 현상에 구안(苟安)하려는 배와 사대자 계층, 일시의 혼란을 악용하여 야욕을 꿈꾸는 독립방해자 도당 등 이 모든 반족적 분자들과 함께 이 날을 우리의 기억과 환경에서 완전히 청소하자.(동아일보 1946년 8월29일자 사설 ‘국치일에 제함’-저자 각주)

    우파가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투쟁 과정에서 좌파를 오히려 반족적 분자로 몰아세운 이런 이념적 전치는 이후 집요하게 지속되었다.

  5. 이재훈, 해방전후 소련 극동정책을 통해 본 소련의 한국인식과 대한정책, 사림(史林) 제20호, 2003년, 70~71쪽

    앞서 본 바와 같이 소련은 한국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여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의 행사를 원했다. 즉 한반도에 대한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고 유지하면서 타국의 한반도지배를 봉쇄한다는, 강대국의 전형적인 속성을 심중(心中)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의 의도에 따라 한반도문제는 ‘국제협력의 틀’속에서 강대국간 협의의 대상이 되었고, 소련은 그와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국제회담에서 한국문제가 제기되는 것에 소극적, 회피적으로 대응하면서 국제신탁통치라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국에 가장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소련은 북한 점령정책을 통해 북한에 자국의 이익이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고자했다.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지령’을 바탕으로 북한에 친소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이식하기 시작했다. 지령에 따르면, 북한에는 소비에트 혹은 소비에트권력의 여타 기관이 수립되거나 소비에트질서가 도입되지 않으며, 모든 반일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참여하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이 수립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6. 남광규(매봉통일연구소), 신탁합의를 전후한 미 소 중의 입장과 임정의 반탁 민족자주노선의 한계: 1945.12~1946.1 기간의 국제협의와 임정의 대응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제44집 1호, 2004년,151쪽

    소련의 대(對) 조선정책은 소련 자체만의 확고한 목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조선을 대상으로 경쟁하는 세력들간 이익균형을 모색하면서 소련이 확실한 정책을 제시하기 전에 미국의 조치를 주시하며 기다리는 것이었다. 특히 소련은 중소조약으로 여순과 대련항의 사용권을 확보하여 상대적으로 한반도에 부동항을 확보해야한다는 점에서 여유가 있었다.

  7. 동아일보 1945년 12월 25일자 1면,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 ①, 부동항 이권에 대한 풍설을 듣고-본보 주간 설의식

    중대한 불행을 초래하기 쉬운 이『풍설』이『정설』로 발전되기 전에 행(幸)여나 미연방지의 효를 얻어볼까 함이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6일자 1면,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2), 이권운운은 독립부인 부동항요구의 풍설 듣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 업시는 중국의 완전한 독립이 보장 못된다』고 한 장 주석의 선언은 세계대세를, 극동정세를 달관한 지언이엿스니 미국도 또한 동일한 대세관이엿고 영국도 그러하엿다。 이리하야 맞춤내『조선의 자주독립』을 약속한『카이로 선언』이 생기게 된 것이니 이것이 모다 역행을 불허하는 대세의 소사다。(중략)
    세계적으로 거보를 움즉이고 잇는 소련이 이 세계대세에 대한 명찰이 없을 리 없다。 더구나 이미 극동의 화약고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조선의 지위, 조선을 중심으로 한 극동정세에 몰이해할 이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그 자체의 혁명이론으로 보아서、그 이상으로보아서、또는 그 세계정책의 통념으로 보아서 어느 나라보다도 솔선하야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협력자임을 자기(自期)한 나라이며、약소민족의 자립을 위한 노력의 격려자임을 자부해온 우방이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 (3) 제정시(帝政時)와 방불한 정세, 부동항요구의 풍설 듣고

    소위 소련의 부동항문제란 그 유래가 원래 깊다。 이는 제정시대부터의 숙제이니 태평양방면에 원도를 가젓든 제정 로서아의 동점주의는 동기 결빙으로 반신불수나 다름없는 해삼위 일항만으로도는 심히 무력하엿다。그리하야 제로(帝露)는 당시의 늙은 청국을 주물러서 만주로 진출하엿던 것이다。 여순、대련의 획득을 비롯하야 남만철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경영은 그야말로 순풍 괘범식으로 진보되매 이에 기세를 얻은 제로는 일보를 경진하야 태평양진로의 요충인 조선반도에 착안하고 동점정책의 결실을 이 땅에서 지으려 하였다。이리하야 이조 말기의 조선국정에 가지가지의 화제를 남기엇든 것은 거세、숙지하는 바어니와 조선반도로 조수같이 밀리는 이 제로의 세력은 일본의 대륙정책과 조화될 이치가 만무하야 필경은 일로(日露)가 상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 결과 전쟁은 일본의 승리에 돌아가서 제로의 만주경영은 그대로 일본에 상속하고 말았다。(중략) 이 동점주의의 최대 요건인 부동항 문제란 원래『로서아』국토 자체가 가진 최대의 결함인 만큼 그 정체와 정권이 제로거나 소련이거나를 부문하고『로서아』자체로서는 해결하지 아니치 못할 거의 숙명적인 과제였는 것이다.(중략)
    그러나 이번 만주 진공을 기회로 체결된 중소조약을 일별하건대 여순의 군사기지、대련시의집권、만철(滿鐵)의 공동경영 등등 그 어느 것이나 제로시대(帝露時代)의 형태에 근사치 않음이 없다。(중략)
    더구나 이번 대전을 계기로 소련의 대외정책을 음미해보건대、침략까지는 아니라하더라도『방식이 다른 자가세력(自家勢力)의 확충』을 강행하려는 의도가 보임을 숨길 수 없다. 구주방면은 잠간 논외로 하더라도 근동방면의『이란』토이기 문제 등은 일전(一戰)이 생길지도 모를만한 정세에 이른 것으로 보더라도 소련의 방식을 짐작하기에 어느 정도 가능타 할 것이다。 극동방면은 외몽고가 완전히 소련의 의욕대로 되었고、만주가 구태(舊態)로 근접된 위에 삼팔선이란 괴상한 장벽이 그대로 존속되어 잇는 이때에、원(元)、청(淸) 양항에 대한 이권요구 운운의 풍설은 단순한 풍설이라고 들어버리기에는 제로(帝露)의 과거 실적과 소련의 현하 실정이 너무도 심각한 바 있음을 느낀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자 1면, 소련의 극동책과 조선 진설이면 피로써 항쟁, 부동항요구의 풍설 듣고

    삼팔선의 일시적 분단도 오히려 자주 독립을 전제로 하는 모든 노력과 공작에 치명적 타격이며 은인의 한도에 막다른 모욕이어늘 영토와 주권을 직접으로 침해하는 그같은 거조(擧措)를 어떠케 용납할 것인가? (중략)
    소련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얼간 망족(亡族)』이 잇다하면 그들은 작약(雀躍)하리라. 조국까지는 아니라하더라도 그와 방사(倣似)한 생각을 가짐으로서 자가(自家)의 존재를 보지(保持)하리라하는 도배가 잇다하면 그들은 묵인도 하리라。(중략)
    그러나 정설(正說)인 경우에는 단연코 항쟁을 불사(不辭)할 뿐이다。

  8. 동아일보 1945년 12월 25일자 1면, 테헤란 동남방에, 소군대(蘇軍隊)집결?

    【테헤란 22일 발 AP합동】『이란』참모본부장교 담(談)에 의하면『테헤란』남방 75리『같므사에』도 별안간 소군(蘇軍)부대 급 전차대의 집결을 보앗는데 동시에 동(同)지방 주민 중에도 무장한 자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데헤란 23일 발AP 합동】『데헤란』『마잔데랑』간의 철도 요충점『갈무살』에 군부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보도가 전하야『이란』의 소요는 점차 동방에 확대하는 형세라 한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2일자 1면, 조선과 동(同)한 파사국(波斯國)의 운명

    【상항(桑港)1일 발 공립】반즈 미 국무장관은 막부(모스크바) 회담경과의 발표에 잇어서 파사(波斯, 이란)국 문제에 언급하야
    『파사(波斯, 이란)이 요구하는 미소주둔군 즉시철퇴문제에 대하야서도 여러 가지 논의하얏스나 하등의 결론에 도달치 못하고 파사에 있어서의 미국군과 소련군의 철퇴는 미결채로 있다』고 말했다.

  9. 동아일보 1946년 1월 5일자 1면 사설, 자아모독을 격(擊)함, 신탁 수락은 노예근성

    조선문제에 대한 막부(莫府,모스크바)의 삼외상회의가 탁치라는 결론이엿다는 것은 기(其)내용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로서는 의외의 모욕이 아닐 수 없다. 탁치의 논제를 미소중의 그 누가 선창하엿고 또 찬성하엿든가 하는 것은 원래부터 문제가 안된다. 우리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노예로의 국제적 철쇄가 우리를 다시금 결박하려는 이 탁치의 모욕에 그래도 이것을 인종해야 올흔 것인가? 만일 이에 대한 시인이 잇다면 이는 실로 노예근성의 비굴인 것으로 자아모독도 한계가 잇을 일이니 삼외상회의를 절대로 지지한다는 표명은 이 하등의 망언이며 삼외상회의의 탁치내용을 진보적 민주국가육성을 목표로 한 것이라하야 자아의 자주성을 부인함으로 자민족의 노예화를 긍정한다고 하면 이는 정권쟁탈에 근안이 되여  민족생존의 목적성을 무시한 망동이 아니고 무엇이랴.

  10. 동아일보 1946년 1월 7일자 1면,  민중 기만의 대악감범(大惡敢犯) 매국간책(賣國奸策)을 자행

    맹성하라 민족분렬의 책임을
    유림대가(儒林大家) 김창숙(金昌淑)옹은 6일 본사를 통하여 조선공산당의 신탁통치 지지의 오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발하였다.

    조선공산당에 보내는 경고문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군, 금번 신탁통치문제에 관하여 군(君) 등이 지난 3일에 발표한 성명서를 읽고 나는 방성통곡하였다. 군 등이 모스크바 삼상회담으로써 세계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한 걸음 진보라 하며 또 안정한 통치는 금일 조선을 위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구가하였으니 군 등이 이족(異族)의 통치를 즐겨받겠다는 그 의도가 나변(那邊)에 있는가를 엄숙히 묻고자 하노라. 우리 3천만 민중이 탁치 반대를 동성절규(同聲絶叫)하는 금일에 있어 오직 공산당에 속한 군 등 일부만이 이러한 매국적 행동을 감위(敢爲)함은 이야말로 참된 민족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다. 군 등이 처음 인민공화국이란 것을 창조할 때에 그 정권 절취의 야심 발로를 알았으나 그러나 어찌 금일의 이족(異族)통치를 구가하는 반역자가 될 것까지를 뜻하였으랴. 군 등이 민족통일전선을 운운할 때에 민족반역자를 제외하라 절규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런데 군 등이 도리어 민족반역자의 전모(前茅, 척후)가 됨은 그 무슨 장두(마음 속)냐. 군 등이 매양 민족분열의 책임을 타인에 전가하려 하였지만은 금일 이러한 매국의 대악을 감범(敢犯)하고도 오히려 전국 민중을 기만하여 군 등의 산하로 몰아넣으려 하느냐. 현명한 민중은 절대로 군 등의 매국적 간책에 맹종하지는 아니하리라. 나는 동포를 사랑하는 진의로써 다시 군 등에게 묻노라. 그 소위 발명서가 공산당 전체의 의사에서 출(出)함인지 혹은 일부 불순분자 소위인지 그 책임 소재를 명백히 3천만 민중 앞에 공포하라. 그 매국적 행위에 참가치 아니한 공산당원은 일시라도 빨리 탈당을 성명하고 참다운 애국자인 공산주의자가 되라. 만일 그것을 애매(曖昧)에 돌린다면 우리 민중은 절대로 그 반역 죄악을 용서치 아니하리라.

  11. 유광열 한국일보 논설위원·본사 창간당시기자, “민족”과 “민주”의 궤적(軌跡) 반세기-동아지령(東亞紙齡) 13986호에 비친 격동의 현대사, 천관우 본사주필과의 대담, 동아일보 1967년 4월 1일자 9면

    필봉으로 맞선 신탁통치

    ▲천관우=해방 전에는 우리가 나라 빼앗긴 설움으로 자연히 민족주의 내지 민족단일전선 같은 것으로 통일될 소지가 많았다 하겠읍니다마는、해방이 되고는 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읍니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국교재개문제 등 대개는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말씀해주시지요。

    ▲류광열=일본서 제국주의 내지 파시즘이 왕성했을 때는 마치 중국에서 국공합작하듯 좌우익이 서로 손을 잡고 당면의 적을 타도한다는 생각이 우리 국민간에도 많았읍니다。그러나 공동목표였던 일제군국주의가 무너지고 나니 이에 대한 증오감은 일반 뒤로 물러나고 38선을 둘러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격렬해졌습니다。 옛날에도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자를 소시민들이라고 욕을 하고 심지어 물산장려운동조차 혁명을 방해한다고 반대했어요。그것이 해방 후에는 더 심해졌지요。한 가지 이 무렵의「동아」에 대해서 기억에 남는 건、신탁통치문제 때였어요。 공산당이 처음에는 신탁통치를 같이 반대하는 척하다가 46년1월3일 서울운동장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토대회에서 깃발을 딴것으로 달고「모스크바」삼상회의 절대 지지로 나왔어요。그즈음인데、박헌영(朴憲永)이가「뉴욕타임즈」기자「존 스톤」에게『조선이 소련의 한 주(州)가 되려는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거던요。 이때 김창숙(金昌淑)선생이『박헌영 등 공산도배에게 묻노라』라는 성토문을 썼어요。다른 신문은 그 보복이 두려워 싣지를 못하는데「동아」가 이것을 전문게재했읍니다。그 글이 명문이었어요。 이때 두 진영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동아」는 꿋꿋이 민족진영편으로 필봉을 날카롭게 했습니다。

  12.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년, 321쪽

    공산당에서는 1월 중하순부터는 3상회의 결의에는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은 없고, 후견이라는 말만 있다고 선전하였다. 공산당이 각급 당부에 지시한 3상회의 결의에 대한 ‘해설’에는, 소련정부가 참가하였기 때문에 한국을 급속히 독립국가로 되도록 보장하였다고 설명하고, 신탁통치라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 3상회의 결의에는 ‘후견제’만 있지 결코 신탁통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신탁통치’가 아니라 ‘후견제’라는 공산당의 주장은 미군정측과 반탁세력을 당황하게 하였다. 미군정 정치고문 베닝호프는 1946년 1월 13일 소련측이 발표한 3상회의 결의 사본에 후견(guardianship)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모스크바결정서 조항의 소련측 원문에 대한 공인된 사본을 가능하다면 무전으로 보내달라”라고 국무장관에게 긴급히 요청하였다.

  13. 동아일보 1946년 1월 11일자 1면 사설, 『탁치』와『후견(後見)』

    일(一)
    자주독립은 우리의 숙원이엿든 것으로 자주독립과 배치되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삼천만의 의사표시는 당연한 이로(理路)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대한 신탁통치설에 관해서는 미국의 통신망을 통한『신탁통치』란 표현에 대하야 소련   보도는 신탁통치란 용어 대신에『후견』이라는 어구로 표현되여 잇서 이에 대한 견해와 태도가 구구한 바 잇거니와 탁치라해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엿든 것이나 이제 후견이라고 해서 다시 이를 지지하여야하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인가함에 대하야 우리는 또한 의염(疑念)이 없을 수 없다.

    이(二)
    후견이라는 용어는 제1차 세계대전을 수국(收局)하기 위하야 체결된 국제연맹규약 제22조제2항에서 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국제연맹 제22조는 위임통치제도에 관한 규정인 것이니 위임통치제도에 있어서 수임국이 연맹에 대신하야 후견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엿기 까닭에 수임국이 연맹의 법률적 위임을 밧고서 통치를 하게 되는 것으로 연맹은 위임통치지역에 잇어서 주권자가 된다는 설이 국제법상 견해(見解)인 것이다. 그런데 신탁통치제도의적용은 금차 대전의 수국을 위하야 체결된 연합국 헌장에 의거한 것으로 이 연합국 헌장의 각 규정 가운데서는 후견의 용어를 발견할 수 없으며、그러모로 그 개념의 특수성도 인지할 수는 없다.
    따라서 후견이라는 용어만으로서는 주권이 우리에게 존재하게 된다고 보는 것은 속단일 것이며 국제법상 용어라 해서 그 ?념으로서 유추한다면 후견 운위하는 이면에는 오히려 우리의 주권이 연합국에 보류된다고 결론하게 되는 것이 올흘 것이다. 그러모로 문제는 단순히용어의 관념적 해석만으로 추단할 것이 아니라 막부회의의 결정 내용으로 그 구체적 해석에 의거하지 안흐면 안될 것이다.

    삼(三)
    그런데 후견의 용어로서 표현된 소련 측의 통신인 삼외상회의가 결정한 4개조(個條) 전문이라는 것을 보아도 우리에게 즉시 독립을 승인치 안는 것으로 해석하게 됨이니 우리의 주권은 결국 5개년의 기한부로 보류되는 것이 사실이다. 연합국이 우리에게 민주주의적 원칙 우에서 자주 독립의 확립을 원조협력한다는 점에 잇서서 감사할 바라는 것은 췌언(贅言,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불요하는 것이나 결국에 잇서서 후견이란 용어가 신탁통치라는 것과 기(其) 취의(趣意)、다름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자주독립의 요망과 단연 배치되는 것이니 우리의 반대의사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후견이란 용어에 매료될 하등의 근거가 없을진대 더욱더 여기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4. 동아일보 1946년 1월 13일자 1면 사설, 정치와 지조

    일(一)
    1914년과 1935년에 체결된 불로동맹(佛露同盟)과 불소(佛蘇)상호원조조약은 그 시기 시기에 양국의 경제관념이나 정치이념에 있어서 공통된 점에 빙거(憑據)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차이가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오즉 공통된 위구에 대한 인식에 의하야 성립된 것이다。
    금반 소련이 토이기에 대하야 흑해의 요항(要港)『트랍존』을 포함한 7500평방 리의 영토를 요구하는 것은『따다넬스해협』에 대한 발언권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요『이란』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이란 인민의 요구에 의한다는 것보다는 일방으로 영국의 세력을 누르고、그리함으로 타방으로는 파사만(波斯灣)에 출구를 획득하려는 수단이다。
    연안정부(延安政府)에 대한 원조중지를 구실로 만주 철도 공관권과 여순항의 사용권의 획득에 성공한 것은 우리가 주지한 사실이거니와 원산 청진항의 사용권 획득을 위하야 자국에 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을 또한 망각할 수 업다。

    이(二)
    소련이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인 줄은 아나 그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주의보다는 이해관계로、즉 자국의 안전과 번영과 통일를 위하야 노력하고 잇는 것을 잘안다。자국의 위구를 면(免)하기 위하야서는 숙적 나치 독일과도 악수하고 미영(美英)의 의아심을 풀기 위하야서는 국제공산당까지도 해산해 버린다。그러나 그들은 언제든지 자국의 이익을 주장하고 시플 때에는『혁명은 수출하지 안는다』는 덜미테서 물자와 자금을 뒤로 돌리니『조국』을 위하야 조국을 파는 혁명가는 비단『이란』혁명가뿐만이 아날 것이다。
    그것은 소련뿐만 아니리라고 항의할 것을 안다。진실로 그러하다。제1차 세계대전은 허다한 민족국가의 주권만은 용인하엿스나 경제국가에 상응한 안전과 번영을 허용할만한 아량을 열강이 가지지 못한대서 제2차 대전의 비극은 초래되엿스니、이 점을 여하히 정정하야 국제평화를 영속케할가하는 것이 국제연합기구의 중심문제가 되는 소이(所以)다。

    삼(三)
    국가의 정치적 방향을 결정함이 오로지 지리적 경제적、인구적、전략적 제 요인에 의한다는 것 등 췌언을 요치 안커니와 이 제 요인을 구사하야 국가의 안전과 번영과 통일을 구현시켜야하는 것은 민족국가의 지상 명령인 동시에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할 것이다.
    우리가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야 민족국가건설 전야에 있어서 민족통일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이때 정치가로서의 긍지와 위신과 임무를 망각하고 감히 타국을『조국』이라고 호칭하는 사대주의에 의한 정권쟁탈과 정권참여의 사혹(思惑)에서 모략선전과 소아병적 초□와 조변석개의 무원칙으로 민중을 현혹케 하니 삼천만 겨레는 마땅히 민족국가의 지상명령을 고수하야 사이비적 정치가에 의하야 민족의 통일이 분열되고 번영과 안전이 몰락과 위험의 함정에 함입(陷入)케 되는 것을 방지하여야할 것이다。

  15. 남광규(매봉통일연구소), 신탁합의를 전후한 미 소 중의 입장과 임정의 반탁 민족자주노선의 한계: 1945.12~1946.1 기간의 국제협의와 임정의 대응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제44집 1호, 2004년,156쪽

    실제 김구는 반탁운동과정 중 반소반미의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단지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적 대의에 충실하려는 일념에서 반탁운동을 한 것이지 미국과 소련을 반대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만큼 김구는 너무나 국내적 인식에만 몰두한 민족자결의 입장에서 국제적 인식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김구의 현실판단은 이승만이 반탁입장이면서 국제적 인식을 고려해 군정에 대한 공격 대신 미본토의 국무성 내 유화주의자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린 정치 전략과 사뭇 비교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스크바회의를 앞두고 사실 미국은 국내 정국의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임정을 고려해왔다. 임정세력과 미국과의 현실적 제휴가 점차 가시화되려는 과정에서 터진 반탁운동과 미군정에 대한 일종의 쿠데타는 미국으로는 의외의 사태였던 것이다.

  16. 동아일보 1946년 1월 19일자 1면, 은수(은혜와 원수) 만대의 기점, 미소회담에 일언을 근정(謹呈)

    미소회담은 열리엇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에 의한 미、소、중、영 4개국 공동위원회의 서막인 미소회담은『해방조선』을『도마』우에 올려노흔 회담을 개시하엿다。이 회담의 주제가 무엇인가?는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왈(曰) 38장벽문제、왈(曰) 임정조성문제、왈(曰) 신탁관리문제 등등 부분적으로 따지면 여려가지가 잇스나 일언(一言)으로 요약하면『조선을 요리』하는 방법론이다. 주방의 지휘권을 이미 미소당국이 가젓는지라、미소 양국의 구미와 식성에 적합하는 방법으로 요리될 것은 세고당연(勢固當然)이다。
    그리하야 이 양국의 방침과 의도가『조선자신』의 구미와 식성에 일치한다고 하면 문제는 간단하다。?단하다고 하기보다도 조선의 행복을 위하야、동양의 안정을 위하야 내지 세계의 평화를 위하야 실로 미소 양국의 공덕은 기리 만대에 빗날 것이다。그러나 만일 불행하게도 만일 조선의 기대와 요구에 일치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어찌 될 것인가?

    이(二)
    38이거니、임정이거니、신탁이거니、원래 이것은 개별적으로 부분적으로 취급될 성질이 아니오『조선』이라는 통일체를『조선』이라는 포괄적 견지에서 음미해야 할 것이오 요리해야할 것이다。문제의『조선』은 결코 미국의 조선도 아니며 소련의 조선도 아니오 철두철미 조선의 조선이다。 명실이 상부한 조선의 조선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문제의 여하를 불구하고『조선의 요리』란 하등의 의미가 없다。따라서 조선의 구미와 식성을 무시하는 조선의 원조란 용어부터 성립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혀 조선의 성장발전에 지대한 방해를 끼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반(今般) 미소회담에 잇서서 미소 양국대표가 어느 정도로 우리 조선의 구미와 식성을 인식하엿스며 따라서 어느 정도로 우리의 희구를 용인하며 우리의 기대를 존중하는가?가 우리의 최대관심이다。

    삼(三)
    강도、일본의 세력을 구축하여준 미소 양국의 은공에 대하야는 상하좌우、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삼천만 혈족이 일치하야 일관하야、일심으로 감사해하는 바이니 이 점은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야 우리는 미소양국의 원조와 지도와 고문 하에서 하루바삐 자주독립의 명과 실을 어드려하는 것이다。 국제공적을 밋고、국제정의를 밋고 미소양국의 위신과 미소 양국민의 우의를 밋고、우리는 우리 조선의 완전독립의 일로를 직진하려고 하는 것이다。
    원래 우리의 주장과 요구와 희망은 누누이 선시(宣示)된 바와 갓치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하다。
    『시급히 자주 정권을 수립하야 완전독립의 승인을 엇자』。
    이 ?단한 일행(一行)이다。조선을 양단하야 치명적 상처를 내이고 잇는 38장벽의 철폐를 주장함도 이것이며、신축성의 여하를 불구하고 신탁관리를 반대함도 이것이다。잠정적으로 군정이 필요타 할진대 차라리 명실이 상부하게 연합군의 이름과 조직 하에 일원적으로 실시한다면 또한 모르려니와 국토와 국민을 양단한 의미없는 38선을 어떠케 우리가 용인할 것인가? 강도의 약탈에 의하야 굼주리고 헐벗은 실정에 처하여 잇다한들 자별한 역사와 문화를 가젓고 스스로 밋는 역량과 의욕을 가진 민족으로서 어찌 신탁제의 감리를 바들 수 잇을 것인가? 신탁통치의 관리 하에서 개왓잘(瓦)으로 꾸물거리기보다는 차라리 자주독립 기치하에서 옥(玉)으로 부서지자!함이 조선 삼천만의 총의이니 40년간 망국의 통한이 골수에 사못친 우리의 당면한 관심은『완전한 자주독립』이란 일점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이 일점을 인식하고 원조하고 추진하여 주는 나라는 우리의 우방이오 그러치 않는 나라는 우리의적국이다。 은수의 기로가 여기에 잇다。은수만대를 결과할 기점은 바루 여기에 잇다。써 미소양국 대표단의 숙고와 명단을 기대하야 일언을 근정한다。

  17. 동아일보 1946년 1월 26일자 1면, 근거 없는 타스 보도

    일(一)
    막부(莫府,모스크바) 22일발 에이·피 통신은 평양발「타스」통신을 전하고 있는 바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일(一) 38도 이남에서는 미、소 영이 결정한 5개년 신탁통치안을 대대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것, 이(二) 위정부(僞政府) 김구 이승만 양씨는 조선 내란을 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소련에 대하야 열렬한 적개심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 삼(三) 1월 12일 각 단체가 반탁시위행렬을 거행하야 조공 당수 장송곡과 소련을 중상하였다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서는 미군정당국이 너무도 관대하였다고 공격한 것이다。

    이(二)
    구랍(舊臘) 29일 하지 중장은 각 당 당수와 신문기자를 초청하야 미국무성에서 온 공문을 발표하야 삼상회의의 결정이 결고 조선을 속□함이 아니라 자주독립을 원조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누누이 설명하야 극력 양해를 구한 것이엿다. 그러나 민족적 자존심의 충동으로서 요화(燎火)처럼 이러나는 전민족적 반탁열에는 하지 장군도 엇지할 수 없엇든 것이며 둘재로민족의 혁명적 집결과 전통을 무시하는『위정부(僞政府)』라는 용어에 우리는 분개를 금치 못하거니와 김구 주석과 이 박사에 대한 언급에는 사실의 왜곡도 너무나 심하다. 국내 통일에 분망한 김구 주석은 일즉이 반소(反蘇)를 표명한 일이 없다. 이 박사가 통일을 교란하는 소아병자를 배격한 것도 우국의 지성을 표명함이요 반소(反蘇)를 고취한 것은 아니였다. 셋재의 이유에 이르러서는 1월 3일 좌익측의 기만적 시위행열을 몰은 체하는 일방적 공격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유린하야 무단적 탄압을 종용하는 것이니 민주주의자 하지 장군의 양심이 허락할 리 만무하다。

    삼(三)
    사회주의가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이라고 해서 그 행동까치를 진보적이요 민주주의적이라고는 생각지 안는다. 언행의 일치 이론과 실천의 상부는 고금 동서를 막론하고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반면 현실적 인간은 주의나 사상을 고수하기보다는 이해관계에 음즉어져는 실예가 만타. 우리는 소련이『이란』에서 무엇을 의도하고 잇다는 것 이상으로 조선에서 무었을 의도하고 잇는가를 잘 알고잇다. 우방국으로서의 조선이 필요하다면 무단적 탄압이나 신탁통치나 원산、청진 등을 요구치 말고 오래동안 노예적 착취와 탄압에 신음한 조선민족에게 우의와 애정을 표시하여 주기 바란다. 사랑은 이해의 어머니요 결합은 그 결실이기 까닭이다. 우리는 결코 친미(親美) 반소나 반미 친소(親蘇)를 원함이 아니며 친미친소친중(親美親蘇親中)의 국제적 협조를 염원하는 까닭에 우리의 자주적 입장을 요망하고 잇다는 것을 이해하지 안흐면 안될 것이다.

  18. 동아일보 1946년 1월 28일자 1면

    스티코프 장군의 발표한 삼상회의 결정내용, 입경(入京)후 최초의 기자단 회견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 스틱곱 대장(大將)은 지난 26일 오전 11시 그 숙사(宿舍) 조(朝)호델에서 내경(來京) 후 처음으로 신문 급 통신기자단을 회견하고 그 석상 소련통신 타스의 전문은 다음과 가치 발표하엿다.…(후략)

    동아일보 1946년 1월 29일자 1면

    소련대표 스장군(將軍) 발표한 타스통신 보도내용(2), 입경(入京)후 최초의 기자단 회견에서
    지난 16일부터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 소련수석대표 스틱코프 대장은 지난 26일오전 11시 그 숙사 조선호텔에서 입경 후 처음으로 신문 급 통신 기자단과 회견하고 그 석상에서 소련통신 타스전문(電文)을 다음과 가치 발표하엿다.…(후략)

  19. 동아일보 1946년 1월 29일자 1면, 탁치 제안은 누가 먼저 햇든지, 자주 독립과는 배치, 타스통신을 읽고-원세훈

    스티코프 대장의 신문기자 회담에서 우리는 막부(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에 신탁제를규정한 유래를 알게 되엿다. 탁치를 미국 측이 제안하엿고 제1차 5개년으로 불충분한 때는 제2차 5개년까지 하자는데 대하야 소련은 최고 5개년으로 하자는 대안으로써 결정하엿다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소련안이 미국안과 오십보、백보란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차라리 최고 5개년이라는 기한부도 하지 말고 탁치를 거치지 아니하는 독립승인안을 제출 결정하엿드면 우리 삼천만 조선민족은 소련에 대하야 감사를 두렷슬 것이다.

    그런데 막부 삼상회의 결정서가 우리 서울에 발포되자 해(該)안중(案中)에 규정된 탁치제에대하야 조선민족은 이것을 죽엄으로써 반대하게 되었다. 그 반대의 이유는 이족(異族)의 압박에서 40년동안이나 신음하던 조선 민족으로서는『카이로』『포쓰담』의 선언 공약에 의하야 자주독립이 실현되기를  학수고대하던 남어지에 절대 반대함은 민족적 이념과 감정에서의 당연한 발로이고 추호라도 다른 것이 개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탁치안을 그누가 제안 결정하였는지 물어볼 여가도 없이 절대 반대할 뿐이다. 소련에서 제안하였는지 미국에서 제안하였는지 그 진상의 규명은 타일로 미루고 우선 탁치만을 먼저 반대하는 것이 곳 우리 삼천만의 민족적 결심이다. 미국이 제안하였으니 묵인하고 소련이 제안하였으니 반대한다는 우리 민중지도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오직 그런 분자가 있었다면 소위(所謂)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이 탁치의 제안이 미국 측의 것이라는 보도를 드럿슬 때에는 절대 반대의 태도로 민중을 동원하다가 막부(莫府)회의에서 소련이 제안하였다는 보도를 보고는 태도를 표변하야 무조건 지지하야 탁치를 반대하는 민중 심리를 악용하야 반탁으로 민중을 동원하고 탁치 지지로『데모』행진을 감행한 결과로 민중을 우롱、기만한 마각이 노출되고 대중의 염노(念怒)와 악감만 초치(招致)하야 대중과 상이하게 되엿다.(계속)

     

    동아일보 1946년 1월 31일자 1면, 타스통신을 읽고②, 조공(朝共)지도자를 배격함이 반소반공(反蘇反共)은 아니다-원세훈

    그리나 저러나 최근 보도를 종합하면 미국 측에서는 조선에 탁치를 피일(避逸)할 수 잇다는 듯이 전한즉 소련측이 솔선하야 조선에 탁치불요라고 즉시 독립을 허여하기를 주장하기로 하엿다. 이제 탁치반대운동의 본질과 민족적 심리를 함부로 모라처서 타스통신은 왈(曰)반동이니 왈(曰)반소(反蘇)니 하는 것은 우리 민족과 민족심리를 모욕하고 무소(誣訴)함도 막심하기 짝이 없다. 4당 큼무니케로 논하야도 막부 삼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야 조선의 자주독립을 실현케 하겟다는 이념을 지지하는 동시에 신탁국 국제헌장 중에 의구(疑懼)되는 신탁제(信託制)제에 대하야는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基)하야 반대한다는 제2항을 조공(朝共)측은 역시 말?하여 버리고 벽(壁)신문 혹은 삐라로 마치 삼상회의 결정을 4당이 무조건 지지한 것처럼 대중에게 우롱적(愚弄的) 상투수단을 쓴 데서 한민당 급 국민당은 조공(朝共)의 배신을 책하고 4당 공동 콤미우니케를 파기하게 된 것이다。이러한 진상을『타쓰』통신이 또한무소(誣訴)하야 한민당의 지도자들을 반동이라 한 것은 조공일파(朝共一派)의 구습을 그대로놀려서 조선민중지도자의 소련에 대한 의구심만 조장하는데 불과한다.

    그러고 해(該)통신은 공산당 비서 박헌영 만을 양심적인 애국주의자라고 칭하며 박 씨를 비난하는 민족운동자들을 반동분자라고 칭하며 박헌영이 소련 일국의 신탁이라면 찬성하고 조선을 소련의 일 연방으로 장래 편입함도 이념으로 한다는『유피』통신기자에게 말한 것이 전파되자 박을 매국노라고 대중이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도배를 반대하는 것을 반동이라고、이들을 도리어 양심적 애국자라고『타쓰』통신이 규정하는데서 조선의 민중은『타쓰』통신이 혁명 우방의 유력한 통신인 것을 대조하고 한심 통탄하기를 말지 아니한다. 더욱히 박을 배격하는 것이 곳 소련을 배격하는 것처럼 입론(立論)함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하다 다시 말하면『천자(天子)가 곳 짐(朕)이요 짐(朕)이 곳 천자(天子)라』는 격으로『박(朴)이 곳 소련이오 소련이 곳 박(朴)이라』는 논(論)인가?그 논거가 어데 있는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더퍼노코 남조선의 민중이 반소(反蘇)라는 증거가 어데 있는가? 오늘까지의 모든『데모』에 조공(朝共)측 지도자들의 잘못을 배격한 적은 있었지마는 우방 소련에 대하야 반격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러함에 불구하고『타스』통신이 조선민중지도자가 반소일로(反蘇一路)로 매진하는 것처럼 우방 소련대중에게 그릇된 보도를 선전하는 것은 조선 민족의 친소(親蘇)를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것으로박게 해석되지 안는다 4대 연합 맹방에 절대 친선을 맹서하는 조선 민족을 소련과 격리코저 이간(離間) 중상하는 한『타쓰』통신에 대하야 호의적 경고를 발할 뿐이다.

  2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미국무부 극동과장,미외교정책협의회에서 조선에 신탁실시 제창
    게재지명 매일신보
    게재일자 1945년 10월 23일
    날짜 1945년 10월 20일

    [뉴육(紐育)20일발SF 동맹(同盟)]미국무성극동국장 빈센트는 20日 미국외교정책협의회 회합에서 미국의 극동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一. 중국 급(及) 소련과의 협력정책은 극동안정을 위해 불가결한 요건임. 소중(蘇·中) 양국과의 협력관련를 강화하여 극동에 있어서 미국정책의 목적은 달성될 것이다.
    一. 베트남 정세에 관해서는 미국정부는 당지에 있는 프랑스 주권을 문제로 삼지 않을 의향이다. 난인(蘭印) 정세에 대한 미국 입장에 대하여는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주권국이 관리하기 위하여 강제조치를 취하는데 대해서는 미국은 원조도 하지 않을 터이며 참가도 하지 않을 작정인데 베트남 급(及) 난인(蘭印)에 있어서 평화적인 협정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필요가 있다면 원조할 작정이다.
    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이미 9月 22日 화이트하우스성명에서 개요가 명백히 되었다. 즉 일본을 완전히 무장해제하면 군사력을 박탈하고 개인의 자유 근본적 인권존중에 대한 일본군민의 희망을 조장 촉진시키는데 있다.
    一. 조선에 대하여서는 동 국의 신탁관리제를 수립함에 앞서서 우선 소련과의 사이에 의사를 소통시킨 후 허다한 정치문제를 해결시키고 싶다. 조선은 다년간 일본에 예속되었던 관계로 지금 당장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않다. 따라서 미국은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하여 그 간 조선민중의 독립한 통치를 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할 것을 제창한다. 미국은 조선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독립한 민주주의적인 국가로 만들 작정이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민주주의적 정부를 가진 강대 且 협조적인 통일국가가 실현하도록 조장하는데 있다. 미국은 미중(美·中) 양국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과의 협력을 계속할 생각이다. 중국은 극동에 있어서 소련과 미국 사이에 간섭지대 내지 교량적 역할을 하여 왔다. 금후도 미국은 중국이 교량적 역할에 노력하여 주기를 환영한다.
    一. 소련과의 협력관계는 우호적인 미·소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할 것을 기초로 한다. 소련도 미국이 극동에 대하여 중대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을 인식하기를 희망한다.

    각 정당행동통일위원회, 신탁실시반대 결의하고 성명서발표
    게재지명 매일신보
    게재일자 1945년 10월 29일
    날짜 1945년 10월 26일

    각 정당행동통일위원회에서는 26日 오후 2시 반 황금정(黃金町) 일본생명빌딩1층에서 국민당 명제세(明濟世), 건국동맹 이여성(李如星) 한봉석(韓鳳石) 최근우(崔謹愚), 조선공산당 김형선(金炯善) 정태식(鄭泰植), 고려국민동맹 염정권(廉廷權), 임시정부환영준비회 이풍구(李豊求), 정당통일기성회 박문희(朴文熹) 김성기(金成琦) 등 각 정당대표자 약 백여명(한국민주당에서는 불참)과 이 날 새로이 통일위원회에 참가를 희망한 문화·학술·산업단체대표 약 5백여명을 심사한 결과 정식으로 참석시키고서 의장 박문희의 사회로 전체위원회를 개최하였었는데 신탁통치문제를 비롯하여 좌기(左記)와 같은 4개 사항을 가결하였다.

    1) 신탁관리에 관한 건
    조선공산당 정태식으로부터 신탁관리문제의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선민족으로서는 절대로 찬성치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 정당이 통일된 보조로서 이 문제에 대한 조선민족의 총의를 대표하여 반대성명을 하는 동시 미대통령 트루만과 하지중장에게도 조선의 실정을 충분히 인식시키는 동시에 조선민족은 절대로 반대한다는 것을 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동시에 민족반역자에 의한 조선통일의 본열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는 한계가 되는 것이니 여기에 대하여 민족반역자를 철저히 규탄하는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을 제안한 결과 만장일치로 반대성명을 발표하며 이를 실천화시키고자 국내여론을 환기시키자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그 실행위원으로서 국민당 안재홍(安在鴻), 조선공산당 김형선, 통일기성회 이갑성(李甲成)의 세분이 지명되어 별항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시 신탁통치반대 민족반역자 처단운동을 전 민족적으로 실천화시키기로 되었다.

    2)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관한 건
    이 문제에 관하여서는 동 협의회를 어디까지라도 강화시키자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었으나 결국 김성기, 한봉석의 제의가 채택되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국내 통일문제를 적당히 해결하기 위하여 국내실정을 가장 정확히 인식할 것이며 따라서 민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인민공화국정부와 해외임시정부의 양 진영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조직체가 되도록 이승만에게 진언키로
    만장일치로 가결을 보게 되었다.

    3) 행정통일위원회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발전과정을 보아서 적당한 시기에 발전적 해산을 할 것을 결의 하였다.

    4) 해외요인 환영에 관한 건
    이승만을 비롯하여 해외요인이 귀국할 때에는 각 적당이 공동주최로 환영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 하였다.

    그리고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 전체위원회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 성명서
    일본이 패배하자 조선은 카이로회담에 의하여 당연히 완전한 자주독립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연합국에 만강의 사의를 표하면서 그 실현이 급속하기를 고대하였다. 우리가 목하 제종의 불편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정에 최대의 협력을 아끼지 않는 것도 자주독립의 과도적 단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전(外電)은 조선통치설을 전하고 있으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기대에 배치됨이 너무나 크며 유멸(幼滅)이 이에 더 할 데 없다.
    조선민족은 4천년의 장구한 역사와 혁혁한 문화를 가졌고 완전한 독립국가를 유지하며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실력과 열의를 가진 것은 각국이 충분히 인식할 줄 믿는다. 일본의 통치하에서도 우리는 해내외에서 수많은 동지가 혈전고투하여 해방에 노력해온 것을 그들이 시인하고 원조까지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운운함은 조선민족을 모욕하고 기만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3천만 민족의 총의를 대변하여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한다.
    1945年 10月 26日
    각 당 행동통일위원회

  21. 동아일보 1946년 2월 11일자 1면,「맥아더」장군을 비방, 대통령처사(處事)에 곤란(困難)을 모함(謀陷), 「타스」을 반박(反駁)함, 「워싱톤 타임스 헤라르드」지(紙) 사설

    지난 1월 22일 워싱톤타임스 헤라르드 지(紙)의 사설로『타스통신을 반박』하엿는데 그 요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갓다.
    이 경우에 이르러서는『트루망』씨(氏)도 공산주의자가 전 세계를 선동하야 미(美) 육해군을 비밀리에 해(害)하고 잇는 결과에 직면하였다. 어떠케 공산주의가 미(美)육해군을 해하고 잇는가는 다음 글을 일거 보면 알 수 잇다.
    맥어드사령부는 작일(昨日) 맥어드 장군을 불신임(不信任)하고 현재 일본에 주재하고 잇는 미군의 군정책과 군령을 광범위에 긍하야 변경을 요구한다는 쏘련의 기정정책(旣定政策)을 공격하였다.
    한동안 공산주의자와 쏘련의 주구들은『맥어드 장군』에 대하야 조치 못한 풍설을 라디오 신문 혹은 속삭거리는 구전으로 악선전하고 잇다. 그네들이 항상 말하는 욕설、예를 들면『맥어드』는 고장난 경보기라고하며 혹은 일본에서 선전하고 잇는 것과 가치『맥어드』는 자기직책을 다하고 잇지 못한다하며『맥어드』는 미국의 충신이 아니다라고 등으로 비방하고 잇다.
    그러나『막어드』장군는 미국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신임을 밧고 있고 위연만한 공산주의자로서는 건드릴 수 업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쏘련은 이에 대하야 공공연히 표면에 나세게 되였다.
    일본의 것과 독일의 것을 비교하면 분명하다、이런 증거로 더욱 미국국민은『맥어드』장군을 절대 지지하게 되고『뻔즈』가『맥어드』장군을 막사과에서 팔엇다고 미국국민은『뻔즈』를 비난 공격하고 있다.
    쏘련은 슬근슬근 악풍설(惡風說)을 선전하는 직접 허위선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즉 쏘련정부기관지『타스』통신은『스타린』을 위하야 그 명령에 의하야 남북조선에 잇는 미군은 삼상회의결정을 배격하는 반동분자를 충똥시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맥어드』장군과 국무성과 이간시켜『맥어드』장군의 권한을 깜고『맥어드』장군의신망을 몰락식키기 위한 것이다.
    이 막사과의 명령은 전세계 공산당에게 이을 행하도록 지령하엿다
    지금 드디어 트루만 대통령은 명백히 공공연히 미국의 육해군 장병을 세계에 모욕하랴고 모든 책동을 하고 잇는 것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였다.
    공산주의자는 쏘련 정부를 제외한 전 세계의 모든 국가와 정부를 파괴할냐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네들의 야망을 감출 줄을 몰으고 그네들은 그것을 위하야 우리를 파괴하고 우리를분리시키고 잇다. 그리고 우리 육군과 해군을 부패시키고 잇다.『트루만』씨는 미국대통령이므로『맥어드』장군을 □□하느니 그러치 안으며는『맥어드』장군을 몰락케하느냐 하는 입장에 다다럿다.

     

    동아일보 1946년 2월 11일자 1면, 조선인은 생명을 걸고, 민주주의를 전취, 불연(不然)이면 공산주의 암흑이 잇다, 재미(在美)한인위원회의 직접 경고

    재미 한인위원회장 임병직(林炳稷) 씨는 지난 1월 23일 다음의 성명서를 발표하엿다.
    이금(爾今) 주로 미국으로 인하야 획득한 세계대전의 완전한 승리가 민주주의에 있는 것인가 공산주의에 있는 것인가를 시문(試問)한다면 조선사람들은 합중국민에게 대한 호의가 더만흘 것으로 안다.
    언제나 소련의 공보대리(公報代理)처럼 취급되고 있는『타스』가 조선에 잇는 미군수뇌부를 공격 비난하엿다
    연합통신이 적군(赤軍)을 비난하엿다고 하엿고 혹은 연합통신이 노서아(露西亞)를 공격하엿다는 등 또는 국제통신사가 블웨비키를 비난하고 잇다는 등의 급보를 여러분은 읽지 못하엿을 것으로 안다. 물론 그런 일은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에어서 신문보도라는 것은 순정한 동기로부터 기생(起生)되는 것이다. 신문은 선전의 무기가 아닌 것이다.『타스』는 조선에 잇는 미군수뇌가 반동적 운동을 선동하고 교사한 것처럼 보도하엿다.
    하와이로부터 소로몬 뉴기니야로부터 비율빈(比律賓,필리핀) 마리아나 오끼나와 그리고 아세아(亞細亞)와 구주(歐洲)의 다른 곳에서 인류의 자유를 위하야 피를 흘린 이들에게 대하야 이 하등의 언어도단의 폭언이라할 것인가.
    조선에 잇는 미국 군대는 결코 반동적이 아니다. 그들은 순연한 민주주의자들이다. 이 오보가 미군병사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소련은 그들이 도처에서 사용하고 잇는 동일한 활동과 전술을 사용할 것이다. 미국은 이것을 충분히 감시하지 안흐면 안될 것이다.
    미국 군인들은 조선사람에게 자유를 줄 수는 없으나 다만 민주주의의 섬광을 주려고 함이다. 그러치 안흐면 공산주의의 암흑이 잇을 것이다.
    이 운명적인 순간에 잇어서의 조선의 화제는 아세아 대륙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의 장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사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잇으며 그리고 그들은 생명을 도(賭)하야 민주주의를 전취(戰取)할 것이다.

답글 4개 »

  1. 동아일보는 “군사적 필요가 이미 상실된 분담 점령의 불합리를 구태여 부동의 전제를 삼고, 그로써 신탁관리란 결론을 추출하려는 소련의 의욕은 과연 무엇인가?” 라며 맨처음 소련이 신탁을 주장했다고 오보한다. 그후에 소련이 아닌 미국이 신탁을 주장한 것임이 드러나자 “탁치의 논제를 미소(美蘇)중의 그 누가 선창하였고 또 찬성하였든가 하는 것은 원래부터 문제가 안된다.” 라고 한다. 물론 신탁은 무조건 안되는 것이지만 오보로 인해 피해본 사람들에게는 한마디 사과없이 문제가 안된다고 하며 얼버무리는 자세로 나오는 건 분명한 잘못이다.

    Comment by 송현우 — 2015/01/19 @ 1:41 오후

  2. 답글이 늦었습니다.
    오보로 인한 피해에 대해 알아보다가 늦게 답글을 올립니다.
    오보는 잘못입니다. 그러나 오보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아시는 것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그렇다고 오보가 문제가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보는 잘못입니다.
    다만 오보로 인한 피해를 찾던 중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했습니다.
    ‘한국보수세력연구’와 ‘한국진보세력연구’를 쓰신 남시욱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글입니다.

    남시욱, 한국보수세력 연구, 나남출판, 2005, 222~223쪽

    만약 모스크바 3상회의 내용이 처음부터 보다 정확히, 그리고 보다 충분히 전해졌더라면 당시의 정치정세는 달라졌을 것인가. 장기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단기적으로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국내의 좌우익 대립과 미소 양국의 이해대립을 감안할 때 미소공위가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들과 협의해서 임시정부를 수렵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미소공위와 임시정부가 협의해서 결정토록 된 신탁통치문제도 합의를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워싱턴의 미국 행정부, 특히 국무성과는 달리 서울의 미군정 수뇌들은 하지 중장 이하 거의 대부분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있었다. 다만 단기적으로 보면, 최소한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기사가 난무하던 그 무렵 모스크바회의에 관해 사태를 좀더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미국정과의 정면대립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송진우가 암살당하는 사태만은 안 일어났을지 모른다. 송진우는 김구의 임정과 반탁운동을 협의하다가 극우세력에 의해 ‘찬탁’으로 인식되어 반탁열기가 한창 고조되던 12월 30일 새벽 자택에서 암살되었다. 송진우의 희생은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던 한민당으로서 큰 손실이었을 뿐 아니라 장덕수, 여운형, 김구 암살로 이어진 정치테러의 서막이었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동네의 동네역사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by 신이 — 2015/02/14 @ 5: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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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toryⅡ 23 :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5) |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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