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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석간은 26일 오후 제작 배포하는 신문을 ‘27일자’라고 했다. 일제시기에 시작된 관행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 1도 1945년 12월 26일 오후 제작 배포됐다.

 

1945년 12월 27일자 1면. 스탈린의 사진이 아래에 있다.

 

 

 국제통신에서 25일자부터 이름이 바뀐 합동통신의 외신제휴사는 AP였고, 좌익성향인 조선통신의 제휴사는 UP였다. 따라서 합동통신은 워싱턴 25일 발(發) UP기사 2의 크레디트 3를 ‘화성돈 25일발 합동지급보’라고만 해서 26일 각 신문에 서비스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는 다음날 조선일보, 서울신문, 중앙신문, 신조선보 등 27일자 조간에도 글자한자 틀리지 않고 똑같이 실렸다. 중국에서는 UP기사가 좀더 자세히 번역 소개됐다. 4

 

 이 기사는 모스크바에서 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 전, 25일 워싱턴에서 나온 추측기사였다. 따라서 27일 오후 제작 배포된 ‘28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는 소련을 신탁통치 주장의 주범으로 상정해 ‘소련의 조선신탁 주장과 각 방면의 반대 봉화’가 제목이 됐다. 횡설수설 칼럼 5이나 사설 6도 추측기사를 인용해 소련에 화살을 돌렸다.

 

    ▼소련이 원산、청진 등 부동항을 요구한다는 외전으로 인하야 바든 충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꼬리를 물고 이제는 소련이 조선신탁통치를 삼상회의에서 주장한다는 외보 (횡설수설)

 

   미국의 주장과 논거는 명명백백한지라 그 우호적 태도를 신뢰하는 바이나 소련의 일기(日氣)는 이 하등의 궤변이며 이 하등의 폭언인가?(사설)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라는 삼상회의 결정이 모스크바에서 발표된 시점은 28일 새벽 6시, 서울은 낮 12시(워싱턴 27일 밤 10시)였다. 이날 오후 제작 배포된 ‘29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의 제목은 ‘신탁통치제 과연 실시’ 7였다. 추측기사대로 되어간다는 의미에서 ‘과연’이란 부사가 붙은 것이다.

 

 삼상회의 결정 8이 신탁통치가 아니라 임시 민주정부 설립에 방점 9이 있었더라도 한국민의 즉시 독립에 대한 열망은 너무도 컸다. 1일 복간호에서 ‘각 길로 한 신지(信地), 완전한 자주독립(自主獨立)’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은 동아일보는 이 열망을 보도했다.  

 

 “지금 모스크바에서 방송이 나왔는데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겠다는 결정이 났대. 나라가 망해가는데 음악회는 무슨 얼어죽을 음악회 10야.” (이규갑)  11 

“이 ‘신탁통치 반대’라고 하는 슬로건은 한국 민중의 민족적 감정에 강한 반향 12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영민)  13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을 ‘탁치반대!! 독립전취!!’라고 한 ‘30일자’ 동아일보는 무려 4개면으로 29일 제작 배포됐다. 다음날 30일 오후 제작 배포한 ‘31일자’ 동아일보에는 그날 새벽 암살된 송진우 사장의 사건이 ‘독립전선에 귀중한 생혈(生血)’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그의 암살사건은 고하(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소문을 임정(임시정부)쪽에서 퍼뜨리던 차에 일어난 것으로….” (강원룡)  14 

 

 

 

 

Notes:

  1. 동아일보 12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화성돈(워싱턴)25일발 합동지급보】막사과(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 가고 있다. 즉 반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지역을 일괄한 1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2. 미국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 1945년 12월 26일자 7면

    May Grant Korea Fredom
    By United Press

    A program for the independence of Korea may emerge from the conference of Big Three foreign ministers at Moscow, Some circles here believed last night. Secretary of State Byrnes went to Russia reportedly with instructions to urge immediate independence as opposed to the Russian Thesis of trusteeship. Korea at present is divided into two zones-Russian and American-with the boundary extending along the thirty eighth parallel. There are no indications thus far that the Big Three have reached and conclusions. The American position is that…

  3. 한국언론진흥재단, 크레디트

     신문기사에서 첫행의 괄호 안에 밝혀 놓은 그 뉴스의 제공 통신사의 이름 또는 그 기사원고의 송고 특파원의 이름.

  4. 석원화, 심민화, 패민강 편, 중국언론 신보(申報)에 그려진 한국근현대사(김승일 번역), 역사공간, 2011년

    신보(1872년 상해에서 창간된 근대 중국 신문) 1945년 12월 28일자, 미국과 소련 한국문제 상의

    합중사 워싱턴 25일 발 통신 정보가 빠른 사람이 전해 온 오늘의 소식: 한국의 독립계획에 관하여 모스크바 외교부장관회의에서 협의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소식통은 또 미국 국무경 베르나스가 모스크바로 갈 때 정부의견서를 가지고 갈 것인데, 소련이 제출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즉시 한국의 독립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까지는 세 강국이 다른 결론을 내렸다는 그런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입장은 카이로선언에 근거하여 한국에서 민중투표를 실행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으로, 민중투표를 통해 자율적으로 정부를 선택하는 형식을 취하자는 것이다. 관찰가들은 소련은 이미 미소 점령구를 합병하고 한 부서에서 신탁을 책임지고 민중투표를 진행하기 전에 일정한 기간동안 남방의 비옥한 토지에서의 생산물과 북방의 공업물자와 상호간 무역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북위 38도 선이 한국을 두 부분으로 갈라놓고 있고, 또 소련은 이것을 경계선으로 하여 계속 분단 상태로 둘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전민투표는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5. 1945년 12월 28일자 1면, 횡설수설

    ▼소련이 원산、청진 등 부동항을 요구한다는 외전으로 인하야 바든 충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꼬리를 물고 이제는 소련이 조선신탁통치를 삼상회의에서 주장한다는 외보의 우일탄(又一彈) ▼공보가 아니매 경솔한 비판은 짐짓 피하려니와 ▼1939년 이래 소련의 약소민족에 대한 태도로 보아서 묵과해 버릴 수도 없는 점이 불무(不無) ▼연이 사실에 근접한 바 약간이라도 잇다면은 세계의 조류를 이탈하고 우리의 정신에 배치하는 소련의 태도는 불가해(不可解)중에도 불가해지사 ▼제정을 복멸하고 제국주의의 구역에서 탈퇴하야 세계약소민족의 해방을 지도하든 선진자의 □지도 석일(昔日)의 몽이던가?▼삼팔장벽은 우리의 의사도아니오、누구와의 약속도 아니라니 ▼이것을 기성사실로 구실을 삼□은 삼팔장벽을 이러케 이용하는 소련의 모략으로 생각할박에 별무도리 ▼아직 의도만 보엿지 최후의 결절에는 상미(尙未)도달、허매 우리는 최대의 결의와 용기로 인내함이 당연타 하겟스되 ▼최후의 결절에 도달한 날에는 삼천만은 최대의 결의와 용기로 배격할 뿐。

  6. 1945년 12월 28일자 1면 사설, 민족적 모독-신탁 운운에 대하야 소련에 경고


    방금『모스크바』에서 개최중인 미、소、영 3국 외상회의의 의제와 결론에 대하야 아직 그 전부를 알 수 없거니와 극동문제가 중요한 의제의 하나일 것이며 따라서 조선문제도 당연히 토의될 것을 예상하였든 터이매 우리는 회의의 진행과 성과에 대하야 다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작보와 같이 외전은 조선에 대한 미、소 양국의 견해가 다름을 지적하야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은 신탁관리를 주장한다고 전한다。회의로부터 발표된 정식 공보가아니매 그 진부는 속단키 어려우며 따라서 비판의 정도도 기하기 어려운 터이나 이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전문이 간단하야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한 설명도 모호한 감이 없지 않으나 대체로 미국은 카이로선언을 준수하여 국민투표에 의한 즉시 독립을 승인하자는 것이며 소련은 삼팔선의 존속으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니 일국의 신탁관리로 하자는 것이라 한다. 미국의 주장과 논거는 명명백백한지라 그 우호적 태도를 신뢰하는 바이나 소련의 일기(日氣)는 이 하등의 궤변이며 이 하등의 폭언인가?


    삼팔선이란 원래 괴이한 현상이다。 이 불합리 지극한 장벽이 생기게 된 이유의 여하를 불구하고 이에 대한 우리의 총의는 다방면으로 이미 누누이 표명된 바이매 번진(繁陳)할 필요가 없거니와 만일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미소의 태도가 참으로 우우적(友友的)이라 할 진대、자주 독립에 절대적으로 방해되는 이 장벽의 존속을 고집할 이유가 어느 편에나 만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이 장벽의 존속을 전제로 하는 궤변으로 투표불능을 운운하여 오만불손한 폭언을 남발하니 이 하등의 모략인가? 설혹 조선의 현하 실정이 양국 군대의 주재를 필요로 하며、따라서 조선의 정상적인 독자적 정부가 수립되기 까지 잠정적으로 군정의 실시가 필요함으로、명실상부한 연합군의 이름과 조직하에서 일원적으로 운영하자는 주지라 할진대 이는 어느 정도로 수긍할 점도 있을 법하거니와 군사적 필요가 이미 상실된 분담 점령의 불합리를 구태여 부동의 전제를 삼고、그로써 신탁관리란 결론을 추출하려는 소력의 의욕은 과연 무엇인가? 진실로 이해키 어려울 말만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서 우리는 소련의 음험한 침략주의의 변형의 일편이 아닌가하고 의심치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일국관리 운운의 문귀에 이르러 일국은 결코 미나、영이나、중국을 의미함이 아니고 소련 자신을 암시하는듯한 어조임을 간취할 때 우리의 의심은 더한층 심하며、우리의 분격은 더한 층 심각한바 있음을 솔직히 표명치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신탁관리란 비상한 모욕이다。 카이로선언 등 국제조약의 배신일 뿐 만 아니라、조선독립의 후원자요、추진자로 자기(自期)한 자신의 자기 부인만이 아니라、조선민족의 자립을 무시하고 존엄을 모독하는 무모한 광언이다。 아직 진상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음으로 우리는 이후의 진전을 주시하는 동시에 이 이상의 비판을 보류하거니와 불의와 부정에 대하여는 “피로써 항쟁”한다는 단연한 결의를 일언하야 우선 소련의 맹성을 경고하여 두려는 것이다.

  7. 1945년 12월 29일자 1면, 신탁통치제 과연 실시=외전이 전하는 막사과 회담내용=

    4국 통치위원회, 금후 5개년 계속

    (막사과 27일 AP 합동) 27일로써 종결을 본 3국 외상회의에서 다음의 결정을 보았다고 관측되고 있다.
    일、소련、미국、영국 급 중국에 의한 일본관리제의 실시 4개국 이사회는 전회 일치제를 채용하는 최종결정권을 이사회가 잡든지 맥아더 대장에게 그 이상의 권한이 부여되는지는 불명이다.
    일、원자력관리문제에 관해서는 일월 개최의 국제연합 총회에서 토의될 제안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일、조선에 미、소、영、중의 4개국의 신탁통치위원회가 설치된다. 동(同)위원회에는 5년 후에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관측 하에 5년이라는 연한을 부한다. 미、소 양국은 남북조선행정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야 양 지구 군정 당국의 회의를 개최한다.

     

    미소(美蘇) 2주간 이내에 회담
    (화성돈 28일 UP발 조선통신) 4개국에 의한 최고 5개년 조선신탁통치협정에 관한 삼국외상의 제의에 대하야 작일 외교계에서는 이는 결과에 있어서 통일된 경제적 안정을 기초로 하는 피국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앞으로 2주간 이내에 소미회담에서 조선의 긴급한 문제를 토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막사과 콤뮤니케에 대하여 이로써 38도 경계선으로 인하여 양성된 경제적 기타 제 장해를 제거하게 될 것을 동(同)방면에서는 기대하고 있다.

     

    미 국무장관 담
    (막사과 27일 발 AP 합동) 삼국 외상회의는 27일 상오 3시 종료『반즈』미 국무장관은 백림、파리 경유 공로(空路)로 귀국함에 당하야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회의는 비상히 건설적이었다. 단지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3국 대표간에 우의적관계가 성립하야 금후에 발생할 제 문제를 동일한 정신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한점이 특히 건설적이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5년 12월 29일자 2면, 외상회의 협정전문

     

    (화성돈 28일 발 AP 합동) 막사과 삼국외상 회의 협정문이 28일 삼국 수도에서 동시에 발표되였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갓다.

    일、극동자문위원회를 폐지하고 11개국의 극동위원회를 설치하야 4개국일본관이 이사회를설치한다

    이、미、영、소 삼국은 미、영 양국 군대가 그 임무와 책임이 완료하는대로 가급적 속히 중국으로부터 철퇴할 것이다.

    삼、삼국외상은 중국이 통일된 민주주의적 국가로 되여 국내항쟁을 정지한다는 필요성에 관하야 동의되었다.

    사、원자『에넬기』는 평화산업 이외에 이용되지 안흘 것을 보장하는 목적으로 원자력 관리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미영 양국의 나마니아(羅馬尼亞)『불가리아』양국을 승인하는 평화조약체결조건이 발표되였고 원자관리위원회의 설립에 관해서는 1월의 국제연합총회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각 성원국가와 이 이사회를 가(加)한 관리위원회를 창설할 결의가 제□되였다

    오、극동위원회는 소、영、미、화、불、화란、가내타、호주、『뉴지랜드』인도、비률빈의 11개국으로 구성된다. 동(同)위원회 성원국가의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맥아더』대장이 발한 지령을 검토한다. 또 위원회의 결정사항을『맥아더』대장에게 전달하는 것은 미국정부의 책임으로 되였다. 또 긴급을 요하는 경우는 미국은 잠정적 지령을 발할 수 있다.

    륙、조선에 주재한 미소양국군사령관은 2주간이내에 회담을 개최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설립을 원조한다. 또 미영소화(美英蘇華)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설립케하야 조선의 장래 독립에 비할 터인바 신탁통치기간은 최고 5개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야 동국(同國)의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통치제에 관한 외상이사회의 제안은 검토키 위하야 미소영화 각국 정부에 회부된다

    칠、미소영 삼국은 이태리 라마니아 발아이(勃牙利) 홍아리(洪牙利) □란으로 더부터 1946년 5월 1일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를 준비한다

     

    1945년 12월 29일자 1면 사설, 순혈을 축적하라, 형제의 심장에 격한다

     


    우리의 국토를 양단하고、국민을 양단하야 분열을 조장하고 대립을 심각케 하는 38장벽이 그대로 존속되어 있는 현재에、또 한편으로 원산 청진의 부동항에 대한 이권을 요구한다는 풍설이 들리며、뒤를 이어서 신탁관리라는 언어도단의 폭언이 방출되는 이 냉엄한 현실을 삼천만 동포는 어떠케 보는가?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망국의 통한이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못한 채、민족의 자주를 무시하고 민족의 존엄을 모독하는 이 국제적 모욕을 당하는 이 급박한 현실에 대하야 삼천만 형제는 어찌할 각오이며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타력(他力)이란 원래 이러한지라、외모(外侮)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내(內)로는 여전히 골육이 상쟁해야 할 것인가?영도의 야욕을 위하야 동족이 상극해야 할 것인가?『욕투서이기기(欲投鼠而忌器, 쥐를 때리려 해도 접시를 깰까 아까워서 못 함)』라는 원려(遠慮)까지는 못 가진다하더라도『순망치한(唇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의 근례는 알음 즉 하거늘 구태의연하게 내분을 계속하야 만족할 것인가?


    진실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하야 정책으로써 상지한다면 백번도 가하다。그러나 소위 좌우라 하는 양진(兩陣)의 정책을 대비하건대 그 거리란 척촌에 불과하니 정책때문에 근접불능이란 수긍할 수가 없는 말이다。더구나 조선의 실정은 다행하게도 뚜렷한 좌우병립의 필요성이 박약하게 되어있다。 진부한 보수나 기발한 급진이 용인될 정세가 아니다。 이른바 보수나 급진이 다같이 확보 추진할 근거와 대의를 잃었으니、이는 실상 일본의 패망이 결정적으로 해결의 토대를 지어준 까닭이다。토지문제가 그러하고 금융문제가 그러하다。산업、교육 등 모든 문제의 이념과 중심은 이미 좌우의 현수(懸殊)한 차이가 생겨질 여지가 없을 정세에 있으니 이는 각당 각파의 정책을 통관하여도 증명되는 바이다。 차이가 있다고 하면 그는 지엽말절에 속하는 일종 기술적 문제일 것이다。

     


    이러케 따저보면 결국 문제는 영도권이다. 내가 집권하겠다는 사욕의 공식 표현이다. 안락의자의 선점을 서기하려는 사투에 불과하다고 보리니、돌! 이 무슨 추태인고? 이 단문을 초(草)하야 듯이 여기에 이르매 박안삼탄(拍案三嘆,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탄식함)의 격정을 제억키 어렵다。 조선은 이제 조선의 조선이 아니라、동양의 조선이 아니라、세계적 조선이다。국제무대의 전면에 들어난 조선이다。
    그리하야 세계의 이목과 관심은 저절로 우리에게 쏠리어 그 동태와 귀결을 기다리고 잇는 차제라、이 아슬아슬한 무대 우에서 배역의 막후다툼을 연출하여야 올흘 것인가? 당면한 조선의 지상명제는『자주독립의 급속완성』이란 일점뿐이다。상하나 좌우의 문패별을 운운할 것 업시 이 단일한 목표를 향하야 사력을 다해야할 시기요 처지다。
    우주생성의 원리가 본대부터 상대적이매 좌우의 병립이란 일종의 자연현상이다。 변증법적철리의 근원이다。부인은 고사하고 원래 그리하어야 발전이 잇고 향상이 잇는 것이다。그러나 병립이라고 반듯이 대치가 아니며、상충이 아니며、상?이 아니다。 또 아니어야 할 것이다。「병립□패」의 이론、『음□화』의 경지를 못가□가? 이를 이해치 못하겟고、이를신봉치 못하겟고、이를 실천치 못하겟다는 지도자와 도당들은 조선의 역외로 물너서라!민족의 통일을 운운하면서도 음으로 진세의 분열을 조장시키는 자、계급의 해소를 운운하면서도 내로는 역량의 분산을 의도하는 자는 선득 조선의 강토 밖으로 물러서라! 피로써 단결하고、피로써 진군할 우리의 목전사태는 이가튼 잡종의 탁혈이 필요치 않을 뿐 아니라 도리혀 천추에 누를 끼칠 우려가 불소한 까닭이다。써、순혈의 축적을 촉하야 형제의 심장에 격(檄) 한다。

  8. 1945년 12월 30일자 3면, 군정청 입보의 조선탁치내용, 3국 정부의 발표

    28일 미군영부에서 군정청에 드러온 군사 전보에 의한 삼국외상회의의 성명전문은 다음과 갓다

    (화성돈 12월 28일발) 12월 27일에 종료한 막사과 삼국외상회의에서 결정한 조건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27일 오전(오후의 착오-인용자 주) 10시(경성 28일 정오)에 삼국수도에서 동시에 발표하였다. 조선문제에 관하야 삼국외상은 조선에 4국(미、소、영、중) 공동위원회를 설치키로 결정하였으며 이 공동위원회는 조선을 독립국으로 5개년간 신탁관리 하에 두기를 결정하였다 이 발표에 의하면 금후 2주일 이내로 북선 소군사령부에 양국대표가 회합하야 공동위원회를 성립하야 조선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되였다.

  9. 1945년 12월 30일자 3면, 독립을 위한 신탁, 냉정하게 직무에 충실하라, 아놀드 장관 변명

    민족의 치욕 신탁통치 문성(問聲)이 고조되는 이때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고문 원한경 씨를 대동하고 29일 오전 10시반 군정청 제일회의실에 나타나 신문기자단과 회견하고 신탁통치에 관한 긴장된 질문에 대략 다음과 갓흔 견해를 표명하고 일문일답을 하였다.

    과거 40년간을 두고 독립을 위해 싸와온 경로로 볼 때 금일 신탁관리설에 대해 기대와 착오됨을 통분하는 것은 지당하다고 보나 신탁통치는 독립조선에 대한 신탁이라 햇습으로 해석여하에 따라 소망이 만흔 자구라고도 볼 수 잇다. 오해로 인한 요란은 조선의 장래를 위해 방해가 될른지도 모를 일이며 글자한자 해석을 그릇한다면 큰 사태를 초래할 것이다. 신탁통치는 조선임시민주정부를 수립코저 함이 목적일 것이다. 위선 조선인이 당면한 경제산업에 잇써 유의하야 신탁관리문제로 모든 기관이 중지 상태로 드러가지 안키를 요망한 제(題)를 싸고 단연 배격의 함(喊)다 현 단계에 이르러 진실한 냉정이 필요할 것이다. 4개국을 밋고 밋는 중에 직무에 충실하여야한다

    문 하지 장군은 조선을 독립식히지 안흐면 민심을 수습할 수 없다고 미(美)본국에 통전한 일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답 내가 하지 않은 말하기는 어려우나 우리는 언제나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조하기에 노력하고 잇다

    문 군정장관은 신탁통치를 조선에 필요하다고 보는가

    답 조선의 현상으론 독립과정에 있어 외국의 원조를 바다야 할 것이다. 다만 일국의 원조이건 4개국의 원조이건 원조에는 다름이 업슬 것이고 신탁통치도 원조를 위한 것이라고 본다.

    문 그러타면 하필 왈 5개년인가

    답 시일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업다 시일의 장단문제는 기술자 일개인을 양성함에도 4개년을 요한다. 일국의 완전한 정치적 기초를 만들자면 5개년을 필요치 안을까한다

    문 삼십팔도선은 철폐되는가

    답 철폐하지 안코는 이 문제의 해결을 할 수 업슬 것이다. 어쨋든 일주일 이내에 평양에서 미소군정당국의 위원회가 열릴 것이니 일반은 흥분하지 말기를 바란다.

  10. 1945년 12월 25일자 2면, 음악가를 총망라, 세말 구제(救濟) 대음악회구제사업의 적극성을 띠우기 위하여 기청(基靑)전국연합회에서는 28일 29일 양일 오후 2시와 6시 반 4회에 걸쳐 대음악회를 배재대강당에서 개최하게 된다. 음악계에서는 해방 후의 구제사업을 위하여 또한 적극 협력하기로 되여 계정식 박사를 비롯하여 김생려 이강렬 김원복 이영옥 김자□ 김천애 서수준 김학상 한규동 김□로 제씨가 출연하리라 한다.

  11.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체험(1), 한길사, 2003년. 229~237쪽

     반탁의 열기 속에서

     내가 청년 웅변가로 이름이 나고 정치인들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1945년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서울시민 궐기대회에 청년 대표로 나가 연설하면서부터였다.

     내가 신탁통치 소식을 처음 듣게 된 것은 12월 28일 오후 배재중학교 강당에서 월남 동포를 위한 연말 자선음악회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우리 기독청년연합회는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명 음악인들이 출연하는 음악회를 기획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미군에게까지 표를 팔았는데, 바로 그날 저녁 음악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 세 시쯤 되었을까, 이규갑(李奎甲)이라는 사람이 음악회 준비로 한창 바쁜 우리들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이가 예순쯤 되었던 그는 감리교 소속 목사로 건국준비위원회의 재정부장을 맡았다가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을 따라 국민당 조직에 참여하기도 했고 기독교 남부대회의 사회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아, 지금 정신이 있나 없나?”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우리들에게 그는 더욱 언성을 높여 말했다.

    “지금 모스크바에서 방송이 나왔는데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겠다는 결정이 났대. 나라가 망해가는데 음악회는 무슨 얼어죽을 음악회야.”

     그날이 바로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상이 모여 한반도를 5년 이내에 신탁통치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코리아에 관한 모스크바 의정서’를 공동 발표한 날이었다.

     한반도를 신탁통치하겠다는 방침은 이미 2차 대전 중에 미국에 의해 구상되었고 의정서가 발표되기 두 달 전인 10월 20일에 미국 국무부 극동국장인 빈센트가 ‘한반도 신탁통치 예정’ 운운하여 신탁통치라는 말이 아주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흥분한 이규갑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들은 크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즉시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나를 비롯한 간부들은 모두 감정적으로 격분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이런 판국에 우리가 음악회나 할 수 있느냐는 데 목소리를 함께 하고는 “어차피 음악회에 사람들이 많이 올 테니 음악회 대신 신탁을 반대하는 강연을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음악회를 취소하기로 하고 출연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그때 출연자 중에 김천애(金天愛)라고, 일제 말기에「봉선화」라는 노래로 이름을 날리던 소프라노 가수가 있었는데, 그녀가 우리 결정에 반발하고 나왔다.

    “당신들은 강연하는 사람만 애국자고 음악하는 사람은 애국심도 없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노래하러 왔으니 노래를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정대로 노래를 부르기로 하고 임정 요인인 엄항섭과 나는 강연을 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꽉 찬 강당에 김천애가 먼저 나와서 노래를 했는데, 어느 틈에 소복을 차려입고 무대에 나와 참 구성지게 노래를 잘 불렀다.

     나는 감정이 채 진정되지 않은 채로 강당에 나가 마구 열변을 토했는데, 그때의 뜨거운 내 감정이 전달되었는지 앉아 있던 서양 사람들도 내 강연에 박수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강연회를 마친 우리는 강연만 하고 끝낼 수는 없고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몇 명이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을 찾아갔다. 경교장은 벌써 신탁통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각 정당과 사회단체 인사들로 초만원이었다.

     경교장에 모인 인사들은 소속 당이나 단체를 불문하고 모두 신탁통치 절대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모스크바 결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비상대책회의는 29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나는 29일의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는 한민당, 국민당, 공산당 등 좌우를 망라한 정당과 사회단체, 종교계와 언론기관 등의 대표 약 200명이 참석해 열기를 뿜었다. 그러나 그 회의에 이승만 박사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 무렵 이박사는 신탁통치 반대 성명에도 매우 소극적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나중에 반탁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것을 반공과 연계시켜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한 이박사가 과연 처음부터 반탁의 입장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여하간에 당시 경교장 회의의 열기는 대단했다. 참석자들은 좌익이고 우익이고 가릴 것 없이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고함을 지르고 일어나서 주먹질을 하는 등 모두 울분으로 감정이 북받쳐 있었다. 김구 선생도 “오늘부터는 양복도 구두고 다 벗어버리고 전부 짚신을 신고 다니자” 소리를 높이는 판이었다.

     모두들 신탁통치 반대에 한 목소리를 냈지만 반대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임정과 한민당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즉 임정에서는 미국을 믿을 수 없으니 미군정을 임정에서 접수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힘으로 신탁통치 반대를 관철시키자는 것이었고, 한민당에서는 미군정을 그렇게 정면으로 부인하지 말고 신탁통치반대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열어서 그 여론을 미국에 알려 목적하는 바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그런 한민당의 입장 때문이었는지 공산당에서 온 사람은 한민당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한민당이 미국에 신탁통치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서 미국이 탁치안을 내놓아 소련이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신탁통치 결정은 결국 이승만 박사와 한민당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박사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이미 신탁통치 관계 발언을 해 굉장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을 들은 한민당 진영에서 모략하지 말라는 반박의 소리가 쏟아져나왔는데, 특히 임영신(任永信)은 “한민당이 없었던들 이박사는 물론 김구 선생을 비롯한 사람들이 고국에 와서 제대로 발붙일 수 있었겠느냐”며 한민당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참 동안 했다. 그녀는 얘기 끝에 불쑥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여기 와서 차 타고 가다가 남자들이 길가에서 함부로 오줌 누는 것을 보곤 하는데, 그런 야만적인 광경을 보고 우리가 독립할 능력이 있다고 보겠습니까? 이런 상황이니 신탁통치하겠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참석자들 대부분이 냉철하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한 채 신탁통치 반대가 곧 독립 쟁취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지사적인 의분을 터뜨리는 데 그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의를 지배한 것은 감정적인 말의 난무였다.

     

    고하 송진우의 독특한 시각

     그런데 그런 분위기와 달리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여준 사람이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였다. 한민당 수석총무로 당을 이끌고 있던 송진우를 그때 처음 봤는데, 그는 3·1운동의 주역으로 48인 사건에 연루돼 일경에 체포됐던 민족지도자였고, 3·1운동의 소산인 임정의 법통을 독립된 새 나라에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송진우는 큼지막한 몸집에 맞게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도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송진우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이런저런 말의 난무 끝에 신탁통치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하기 위해 임정이 주권을 행사,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이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고 상인들도 모두 철시해 반탁운동을 벌이자는 의견이 대세로 자리잡아갈 무렵이었다. 그는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그런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우리가 경박해서는 안되겠지요.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내용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 · 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 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간에 전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의 합의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 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송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세찬 반발이 일었다. 좌익계 사람들은 물론 임시정부 사람들도 “봐라, 역시 한민당이 신탁통치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것 아닌가” 하며 그를 비난했고 “매국노” “망할 놈의 영감” 하는 공격과 야유가 빗발쳤다.

     나도 고하의 발언을 듣고 “뭐 저런 사람이 있는가?” 하고 흥분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역시 반탁의 입장이었으나 다만 그 방법에서 견해 차이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그는 임정이 미군정을 배격하고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것에 대해서 현실 정세를 고려해 우려를 표시했던 것이다. 어쨌든 고하의 발언으로 그날 임정과 고하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그런데 고하는 경교장 회의에 참석한 직후인 31일(30일의 착각. 고하는 28일 밤 경교장 회의에서 공격을 받은데 이어 29일 오후 경교장 회의에 참석했다가 30일 새벽 암살됐다.-인용자 주) 새벽 한현우라는 사람에 의해 자택에서 총탄에 맞아 암살되고 말았다. 해방정국에 충격을 준 그의 암살 사건은 고하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소문을 임정 쪽에서 퍼뜨리던 차에 일어난 것으로, 분명히 경교장 회의에서 그가 한 발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직업 테러리스트인 암살범 한현우는 재판 과정에서 고하뿐 아니라 몽양도 암살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몽양을 죽이려고 미행을 하다 파고다 공원 앞길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차마 죽일 생각이 들지 않아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지금 깨닫는 것은 애국심이라는 감정과 현실적으로 국가를 위해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지혜롭게 판단하는 것은 때로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 나라를 운영하려면 감정보다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합리적인 계산이 앞서야 하는데, 당시 지도자들은 대부분 그런 점에서 능력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지금 보면 비난을 받던 송진우 같은 사람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역사에서 ‘만약’ 이라는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만약 그때 우리가 잠깐의 굴욕을 참고 인내심을 가지고 신탁통치에 대해 달리 대응했더라면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웠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신탁통치를 반대해야만 했었느냐 하는 데 대해서 회의를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갓 벗어난 당시 우리 민족의 감정으로는 신탁이 곧 식민통치와 같은 굴욕적인 상태로 퇴행하는 듯이 느껴졌고 그 단순한 감정에 휘둘려 이남의 전지역은 반탁의 열기로 들끓었다. 온 나라 온 국민이 거대한 감정의 파도에 파묻혀 실제적으로 신탁안을 챙겨보거나 실무적으로 대처할 방안을 궁리해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감정의 분출만 이어졌다. 28일 밤부터 서울 거리는 신탁반대 삐라와 포스터가 범람하기 시작했으며 서울의 대부분의 상점이 29일부터 철시에 들어갔고 거리에는 ‘신탁통치 결사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의 행렬이 이어졌다.

     나 역시 젊은 혈기로 그런 ‘행동’에 참가하였고, 그렇게 행동으로 사는 순간에는 가슴에 격정만이 들끓을 뿐, 냉정한 머리의 로고스는 부재했다. 그때 뜨거운 가슴과 함께 서늘한 머리를 가지고 인내심과 여유로 사태를 파악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쉬운 역사의 한 장은 그렇게 우리를 시험 속으로 내몬 채 우리 눈앞에서 거침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12. 1945년 12월 30일자 3면, 반대연설대회 31일 오후 명치좌서

    3.1운동 이후 최초의 국민적 총의에서 울어나오는 탁치반대의 봉화는 드높고 또 넓게 퍼져서 학술원 문학동맹 등 10여 단체 공동주최의 탁치반대 강연회는 31일 오후 2시부터 명치좌에서 개최케 되었는데 연사는 여좌하다.
    백남운 신남철 박극채 최성세 송석하 김택원 도상록 김양숙 박치우 이태준 이미조

  13. 고영민, 해방정국의 증언-어느 혁명가(革命家)의 수기, 사계절, 1987년, 89~94쪽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나는 조선공산당원으로서 조선산업노동조사소의 서기장 겸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고, 거주지역에서도 세포 책임자로서 혁명활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나는 혁명활동에 대한 의욕이 불타올라 뛰어난 ‘직업혁명가’를 자부하면서 의기양양해 하였다. 그러나 전혀 수입이 없는 ‘직업혁명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1945년 12월, 그 해도 다 저물어가는 겨울의 추위는 정말 혹독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집에는 온돌방을 따뜻하게 할 땔나무도 없었고, 김장김치나 깎두기 또한 담그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소식이 전파를 타고 서울에 흘러들어왔다.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12월 29일이었다.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 한국사회는 새로운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해방 후 한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에 의해 점령 · 지배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 환희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던 한국민중은 그것이 비록 일시적 · 과도기적 조치라 할지라도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민중은 즉각적인 독립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민중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자신들의 국토가,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이건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이건 간에 외국군대에 의해 분할지배된다고 하는 사실에 참기 어려운 굴욕을 느꼈다. 더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미소 양점령군의 기행(奇行) · 만행이 알려지게 되면서 점령군에 대한 한국민중의 반발은 더욱 거세어졌다.

    미군 점령지배하의 남한은 해방이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시기와 비슷한 ‘폐쇄된 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1945년 12월 23일부터 27일 사이에 모스크바에서 한국문제에 대하여 미·영·소 3국의 외상회의가 열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중에게는 그 사실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돌연 28일에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내용이 발표되고, 다음날 외국통신사의 보도에 의해 그 소식이 서울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외신에 의해 전해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내용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5년 이내 기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 5년간의 신탁통치라는 보도에 한국민중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한국민중의 민족적 감정을 폭발시켰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서울거리에는 ‘신탁통치 반대’ ‘탁치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건 군중시위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고, 그 참가인원 또한 점점 늘어만 갔다. 군중들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후에 들은 바로는 미군정 및 이승만 세력의 경우 민주적 임시정부 수립의 ‘준비’를 목적으로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파괴하여 고등판무관에 의한 미국의 직접통치방식을 실현시키려는 속셈에서 군중들을 선동하였고, ‘상해임시정부계’의 김구 · 김규식 세력은 자신의 정치세력 확장에 절호의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하여 ‘탁치반대’를 강력히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신탁통치 반대’라고 하는 슬로건은 한국민중의 민족적 감정에 강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남운의 감동적 연설

    조선공산당은 보수세력들이 함부로 날뛰는 것에 의심을 가지면서도 ‘버스에 늦게 타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생각하여 활동을 서둘렀다. 그러나 당으로서는 중요한 최종결정권을 가진 박헌영이 북한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명백한 당의 입장을 결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당원들 사이에는

    “태도결정을 지연시키는 것은 당을 민중으로부터 고립시킨다.”

    “아니다. 대중에 추수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대중추종주의에 불과하다.”

    “소련의 스탈린 동지가 주도한 삼상회의 결정이 한국민중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삼상결정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등의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좌익진영은 서울거리에서 분기하고 있던 군중들에게 일정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30일 오후 2시, 명동 공회당에서 강연을 개최하였다. 연사는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백남운과, 유명한 시인 임화(林和), 그리고 나 3인이었다. 내가 강연회장에 들어갔을 때 공회당은 이미 초만원이었고 시위중이던 데모대도 발길을 멈추고 공회당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그 날 오전 11시경 당중앙으로부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해 연설할 것을 지시받았지만, 그것에 찬성하라는 것인지 반대하라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당중앙에서는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추진되어 오지 않았소. 조선공산당이 과거에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해 왔고, 현재도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오. 그 밖의 것은 고동지에게 일임하겠소.”

    라고 할 뿐이었다.

    최초로 연단에 오른 나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하에서 가장 용감히 투쟁하였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만이 진실로 민족해방을 이룩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설명하여 갔다. 그러나 청중들로부터는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다!”

    라는 야유가 빗발치듯 쏟아졌다.

    나는 가까스로 한 시간 동안의 연설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왔는데, 나 자신조차 내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의 내용을 사실상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찬성해야 할지 반대해야 할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 자신도 ‘신탁통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였기 때문에 입장이 잘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연설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임화가 연단에 올랐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청중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독립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라!”는 등의 야유와 함께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백남운이 등단하였다. 그는 곰보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조용하게 이야기 서두를 꺼내었다.

    “동포 여러분! 저는 지금부터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 산야를 자유로이 뛰어다니면서 토끼라든지 그밖의 다른 먹이를 찾으며 살아가던 한 마리의 이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겨울, 눈이 많이 내려 온산야가 눈으로 덮히고 말았기 때문에 먹이를 구할 수 없었던 이리는 배가 너무나 고파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어느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리는 어느 커다란 대문이 있는 집 앞에서 큰 개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리는 몸집이 야위었지만 개는 살이 토실토실 쪘고 추위를 이길 수 있는 훌륭한 자기 집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리는 그 개에게 ‘너는 무얼 먹고 살이 그렇게 쪘느냐? 또 그 집은 어떻게 갖게 되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개는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주인은 이 마을에서 제일 가는 지주이고 또 많은 돈을 갖고 있거든. 그래서 주인집 가족들이 먹다 남은 음식도 언제나 풍성하지. 난 그 덕분에 먹을 것이 끊일 사이가 없지. 그런데 넌 어떤 주인 밑에 살기에 그렇게 야위었니?’ 하고 말했답니다. 이리는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개에게 의지해서 먹을 것을 좀 얻어 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리가 개의 목을 보니 튼튼한 자물쇠 같은 것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리는 개에게 ‘네 목에 있는 것은 무엇이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개는 매우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너는 너를 붙들어매는 것이 없구나. 이건 개목걸이라는 거야.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려고 목에 자물쇠를 채우는 것이지’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의 대답에 놀란 이리는 ‘그러면 우리가 좋아하는 산야를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도 없다는 말이니? 나는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자유를 속박당하는 것은 원치 않아. 정말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야’ 하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5천 년이라는 유구한 역사적 전통과 뛰어난 민족문화를 가진 백의민족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리가 갖고 있었던 산야, 즉 조국의 산과 강, 그리고 논과 밭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조국의 산하를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과거 반세기 동안에 걸친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아래서 우리 민족은 철제 자물쇠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인 식민자들은 모두가 살이 졌지만, 우리 민족은 손과 발에 쇠고랑이 채워진 채 굶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애국자들이 살해되었고 토지와 쌀을 빼앗겼습니다. 더구나 우리 민족에게는 자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미국사람이 먹다 남은 비프스테이크가 아무리 영양 많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걸 먹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소련사람이 먹다 남은 보드카가 아무리 맛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김치 · 깎두기가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는 우리 조상이 있음으로써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우리후손들 또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에게는 신탁통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힘이 있는 민족입니다. 또한 그러한 우리 민족의 우수함과 위대함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미국이나 소련의 감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힘으로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외국인의 노예가 되는 것에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의 굴욕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모두 함께 얼어섭시다.“

    백남운의 연설이 진행되고 있을 때, 대회장 여기저기에서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연설이 끝난 후에도 강연장에 있던 많은 군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조선독립만세’, ‘신탁통치 반대’ 등의 슬로건을 외쳤다.

    나도 백남운의 연설을 들으면서 내 자신의 유치한 연설을 부끄러워하였다. “산야를 뛰어다니는 자유를 원한다”, “우리는 미국의 감독이나 소련의 감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에 감동한 나 또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4. 조병옥, 나의 회고록, 민교사, 1959년, 190쪽

    이렇게 죄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군정을 전복하려고 하였고 반면 우익은 우익대로 반탁운동을 계기로 폭력화하였던 것이다.

    그 첫 희생자가 한민당 당수 송진우 선생이었던 것이다. 즉 고하 송진우 선생은 임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렬 반탁운동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군정을 접수하는 반탁운동이란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반대하고 제한된 반탁운동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송진우 씨는 암살당하였던 것이다.

    즉 단기 4278년 12월 18일 송진우 씨는 서울시 원서동에 있는 자택에서 암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 송진우 씨가 암살당한 것은 비단 한국민주당의 일대손실일 뿐만 아니라 민족진영의 큰 손실이었던 것이다.

    고하 송진우 씨는 서기 1890년에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고  재조가 남보다 뛰어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즉 고하 선생은 원래 성품이 고매 활달하고 정치적 역량이 풍부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일제통치하에 있어서도 고하 선생은 끝끝내 고절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대일본교제와 교섭에 있어서도 자기의 독특한 수단과 자신을 가지고 처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아일보사장은 오랫동안 한만큼 동아일보지국망의 독자층을 통하여 해방 전이라 할지라도 민족진영의 지도자로써 엄연한 존재와 권위를 가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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