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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6 : 소련과 김일성 보도

Posted by 신이 On 6월 - 19 - 2012

 

 동아일보는 미국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일 복간직후 소련을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진주한 동맹이자 정의를 구현하는 국가로 표현했다.

 

   이미 전쟁이、다 끝난 오늘、일본군을 모조리 보내어 주기위하여 진주하여온 우리 동맹군 미군과 소련군 장병들에게 이 이상 더 괴로움과 수고를 끼쳐서는 너무 미안한 일이다.

 (임시정부 참모총장 유동열 씨 담, 신 국가건설의 새로운 구상-군사(1), 1945년 12월 1일자 3면)   1

 

   8월 9일 소군(蘇軍)이 정의의 총뿌리를 일본군에 돌리자 정예를 풍치든 일본군은 소군의 진격을 막아내기보다 국내 중요시설을 파괴하기에 바빴다.

(단말마 행상기(行狀記), 1945년 12월 3일자 2면)  2

 

 

 동아일보는 조선공산당이 정견을 발표하자 이를 게재했다.  이승만 박사의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3도 소개했다. 소련군이 주둔한 북조선에서 공산당이 비행을 저지르자 민심이반(民心離反)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방송에 의한 주요정당의 정견발표는 군정청에서 추첨을 하여 순차가 결정되어 제1회를 조선공산당 대표가 30일 야(夜) 오후 7시 20분부터 서울 중앙방송국의『마이크』을 통하여 방송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4정당 정견발표 방송, 1945년 12월 2일자 2면) 4

 

   소군(蘇軍) 진주 당시에는 공산당 절대지지로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소위 공산당원들의 비행이 축일(逐日) 증가함을 따라 인민의 기대와 동정(同情)을 잃게 되었습니다. 물론 진실한 공산주의자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거리의 쌈패나 또는 식당뽀이 등 기타 무뢰한이올시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위대을 조직하여 치안에 협력하게까지 하였다가 폭행 약탈이 일익우심(日益尤甚)하게 되니 소군사령부에서 적위군 무장해제를 시켰습니다.

(38 이북소식, 1945년 12월 15일자 1면)  5 

 

 특히 김일성에 대해서는 소련의 지지 아래 공산당의 비행을 바로 잡을 독립투사로 전했다. ‘김일성’이란 이름은 동아일보에 12월 6일자에 처음 등장했다. 6

 김일성 씨는 만주서 활동하엿슴으로 임시정부와는 아무 연락도 업섯다. 그리고 김일성 씨는 지금 상당한 고령인데 평양에 와 잇는 김일성 씨는 엇던 분인지 모른다. (안우생 임시정부 비서)

 박헌영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 7 하지 않았지만 김일성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 박헌영 8 을 경계했으나 김일성은 너무 모르고 있었다.  9 당시 남조선에서 김일성 환영준비위원회 10 가 결성되었는데 그 위원장은 홍명희였다. 홍명희가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1924년 5월~1925년 4월)으로 있을 때 박헌영도 동아일보에 판매부 서기와 지방부 기자(1924년 4월~1925년 5월)로 있었다.    

 

   소군(蘇軍)에서는 조선민주당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 정치를 절대 지지한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 장군도、공산당의 비행에 대해서는 분개하며、민주주의 정체 수립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소군 측에서는 김일성 장군도 공산당원의 비행은 엄중 취체(통제)하도록 역설하고 있습니다. (38 이북소식, 1945년 12월 15일자 1면)

 

 

   우리의 투사 김일성 장군 무정 장군 등을 환영하고자 준비위원회에서는 20여 단체가 참가하여 준비 중인데 확정된 부서는 다음과 같다.

▲위원장 홍명희 ▲부위원장 김기전、김광수 (김 장군 환영준비, 1945년 12월 21일자 2면)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Notes:

  1. 1945년 12월 1일자 3면, 임시정부 참모총장 유동열 씨 담, 신 국가건설의 새로운 구상-군사(1)

  2. 1945년 12월 3일자 2면, 단말마 행상기(行狀記)

     

  3. 1945년 12월 23일자 2면,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1), 조국파괴는 가증타, 진정한 주의는 반대 안한다, 이박사, 공당(共黨)에 대한 방송

    이승만 박사는『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제하에 19일 서울 중앙방송국을 통하야 방송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갓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안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야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再三)말한 바와 가치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요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4천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젓스나  우리가 다아 잘못한 죄로 거이 죽게 되엿다가 지금 간신히 살아나서 다시 발을 땅에 디디고이러날려고 애쓰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밧게서 드러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증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공산당 극열분자들의 행동을 보시요 위선 동서각국에서 수행되는 것만 볼지라도 파란국(波蘭國, 폴란드) 극렬분자는 파란국 독립을 위하야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파란 독립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구라파의 해방된 모든 나라를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 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시키기를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은 그이들의 선동에 끌려서 무엇인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써 항거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이 공산분자들의 파괴운동으로 인하야 분열항쟁이 아니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을 보아도 장개석 총통의 애국심과 용감한 군략(軍略)으로 왜적을 항쟁하야 실낫가티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야 노핫나니 연맹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어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쪼각에 나누어 노코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야 중앙정부와 장총통을 악선전하야 그 세력을 뺏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이르켜 관병(官兵)과 접전하야 동족상쟁으로 피흘리기를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야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안키에 이르럿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의 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야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잇섯스면 어찌 참아 이가튼 파괴적 행동을 취할 것인가.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不過) 몃 명이 못되엇나니 공산문제는 도모지 업는 것입니다. 그 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밧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을 위하야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님니다. 따라서 서백리아에 잇는 우리 동포들도 다대수가 우리와 갓흔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인 것을 우리는 밋는 바임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석겨서 공산 명목을 □□하고 국권을 업시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사리와 영광을 위하야 부언낭설(浮言浪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명사를 주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럿드니 요지음은 민중이 차차 께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업시 해서 남의 노예를 맨돌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잇슬 것임니다. 이 분자들이 노국(露國)을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의 한국에서 떠나서 저기 조국에 드러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시럽게  섬기라고하고 십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차저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맨들어 가지고 잘하나못하나 우리의 원(願)하는대로 만들어 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웨 조선사람의 형용을 쓰고와서 우리 것을 빼아서다가 저의 조국에 붓칠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안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여가 다 목숨을 내노코 싸울 결심입니다. 우리가 우리나라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파라 먹을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이 사람들을 회유(誨喩)해서 사실을 알려주시오 내용 모르고 풍성학려(風聲鶴唳,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에도 놀람을 이르는 말)로 따라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야 도라서게만 되면 우리는 과거를 탕척(蕩滌)하고 함께 나아갈 것이오 종시 곳치지 안코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親父兄)이나 친자질(親子姪)이라도 거절시켜서 즉 원수로 대우해야 할 것입니다.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애증과 친소를 도라볼 수 업는 것입니다. 옛날에 미국인들이 독립을 위하야 싸울 적에 그 부형은 영국에 충성하야 독립을 반대하는 고로 자질들은 독립을 위하야 부자형제간에 싸워가지고 오늘날 누리는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언제든지 어대서든지 건설자나 파궤자와는 합동이 못되는 법입니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궤자가 회개되든지 해서 갓튼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됨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만흔 시일을 허비하고 만흔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앗스나 종시 각성이 못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업시 협동하는 각 단체와 합하야 착착 진행중이니 지금이라도 그 중 극렬분자들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여 거절하지 안흘 것이니 다만 파궤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큰문제를 우리손으로 해결치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과 갓치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우리는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 무궁한 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함니다.

  4. 1945년 12월 2일자 2면, 4정당 정견발표 방송

  5.  1945년 12월 15일자 1면, 38 이북소식

  6. 1945년 12월 6일자 1면, 연안과도 충분연락, 안 비서와 일문일답

    5일 오후 1시반 경교정 숙소에서 임시정부선 전부 비서로 잇는 안우생(安遇生) 씨는 기자단과의 회견 석상에서 다음과 여한 문답을 하야 국내에서 삼천만 동포가 듯고저하는 연안문제를 위시하야 중국내의 사정을 전하엿다.

    문: 임시정부와 연안과는 연락이 있었으며 연안서 조선동포가 독소전(獨蘇戰)에 출전하엿단소식이 전문(傳問)되엿섯는데 그는 사실인가.
    답: 연안과 임시정부와는 연락이 잇섯스며 모택동 씨로부터 조소앙 씨, 유림 씨가 초청을 바더서 여러 가지 의견교환과 조선독립에 대하야 만흔 원조도 밧엇다. 그리고 연안서 조선인의 독소전에 출전한 사실은 업고 소련내의 조선동포가 출전한 사실은 잇다. 그리고 연안과 임시정부와의 연락은 주로 장건상 씨가 하야왓다.
    문: 김일성 씨와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어떠하며 최근 평양에 와 잇는 32세의 청년 김일성(金日成) 씨는 어떤 분인지.
    답: 김일성 씨는 만주서 활동하엿슴으로 임시정부와는 아무 연락도 업섯다. 그리고 김일성 씨는 지금 상당한 고령인데 평양에 와 잇는 김일성 씨는 엇던 분인지 모른다.

  7. 1945년 12월 16일자 1면, 정치통일을 방해, 철폐하라 삼팔선장벽, 외인기자가 본 해방조선

  8. 고영민, 해방정국의 증언, 사계절, 1987년, 85~86쪽

     남한에서는 1945년 10월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도단위 당대표자회의가 개최됨으로써 박헌영 일파의 헤게모니가 완전히 확립되었지만, 북한지역에서는 급속하게 박헌영 일파의 헤게모니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되고, 김일성 일파가 점차 그 헤게모니를 장악해 나갔기 때문이었다.…그 다음날인 10월 14일에 김일성 환영 평양시민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그것은 김일성을 확실하게 ‘조선민족의 최고영도자’로 등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9.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2008년 11월 18일 인터뷰

      다 아는 얘기인데요. 김일성이 되기 전에 김성주였다 하는 사람도 있고, 좌파에서는 김일성은 김일성이지 김성주가 뭐냐 하는 사람도 있고, 같은 고향사람인데, 사실은 초등학교의 선후배예요. 내가 갔을 때는 김일성은 졸업하고 떠났기 때문에 같이는 못 다녔고. 같은 고향이고 그랬는데 김일성이 김성주 때 그러니까 해방되고 얼마 안 돼 고향에 왔어요. 동네어른들이 김성주가 왔는데 내일 아침 환영잔치가 있을 테니까 한번 가자”고 했어요. 김일성과 함께 조반을 먹었는데 동네 어른들이“성주야, 해방됐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그래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친일파 숙청, 두 번째는 토지개혁이라고 5가지를 얘기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구나, 공산당 강령이구나, 느낌이 들었어요. 공산당은 조직이 있으니 어떻게 접수한다는 것이 다 있었어요. 한국은 조직이 없어 이승만 박사가 정권잡고 반공하자니까 일제시대 경찰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반공(친일파숙청)이 서서히 될 수밖에 없고. 공산주의자들은 흑백이니까 중간이 없고 미국은 민주주의니까 중간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물우물했거든요. 그때부터 시작해 좌파사람들은 대한민국을 폄하할 때 친일파 숙청을 못해 정통성이 없어졌다하는데요. 과거사 정리한다는 친일파 문제가 지난 정부가 한 것은 그 연장선상에 있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역사의 무대를 차지해야한다, 친일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껴왔지요.

  10. 1945년 12월 18일자 2면, 김일성 김두봉 씨, 환영준비회합

     조국해방을 위하여 만주 광야에서 싸워온 만주유격군 총사령 김일성(金日成) 장군일행과 의용군 김무정(金武正) 장군 일행과 김두봉(金枓奉) 씨 등 혁명투사들의 귀국을 연내에 앞두고 20여 단체가 중심이 되여 15일 정오부터 안국정 인민회관에서 환영준비회를 개최하여 각 단체대표 1명씩을 선정하였다.

댓글 한 개 »

  1. […] 느껴왔지요. 출처: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 자료실 2012 6월 D-storyⅡ 16 : 소련과 김일성 보도: 6월 – 19 – […]

    핑백 by 김일성 관련 증언 : 김학규, 안우생, 김형석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 2014/02/02 @ 11: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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