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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4 : 복간 후 임시정부 보도(2)

Posted by 신이 On 6월 - 1 - 2012



 해방 후 중경(重慶) 임시정부가 1945년 11월 23일 환국했을 때 동아일보는 복간 전이었다. 김구 주석은 1945년 11월 27일 국내 주요 정당 대표와 회담했다.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1진 귀국. 김구 김규식 등 임정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김구 주석과 함께 입국한 광복군 장교 장준하는 이날 회담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발간한 사상계 1966년 10월호에 실린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고 6개월-4당수와의 회담과 임정요인 제2진의 환국’. 1




  장준하는 송진우에 대해 “ 인간과 성품에 대한 것은 우선 거구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굽히지 않는 고집이 강한 의지와 함께 안면에 담겨서, 거장의 모습이 풍긴다고 한다. 그는 강인한 민족주의자로서 명분과 전통을 존중하는 인물이며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절대적인 배척을 신조로 하고 있고,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하여 집결되는 인물 가운데 중심인물이라고 하였다. (123쪽)


여운형에 대해서는 “나의 학생시절이나 입국 이후에나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며 “풍채가 좋고 활발한 성격이며 잘 생긴 용모로서 정치인다운 활동성을 보여 온 사람”으로 소개했다.


이러나저러나 국내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는 활동적인 인물이다. 특히 체육인들과 젊은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분을 너무 현실에 치우치는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싶다. 그의 정치노선은 사회주의 좌파 경향일 뿐이지, 결코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극렬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완전 포위가 되어 있다. 해방 전에 그는 일본에게 정권을 이양하라고 합법투쟁을 벌리기도 한 일이 있으며, 그 후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였다. 8월 15일 원등(遠藤)이 여 씨에게 송진우 씨에게 한 것과 같은 청을 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이를 수락한 인물이다. (126쪽)


 

안재홍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우파적인 경향의 분으로 일반 지식층과 언론계에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


언젠가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에게 인사차 오신 것을 직접 만나본 일이 있다. 선비적인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시던 키가 크고 몸은 가늘던 인상이었다. 그는 8.15해방을 맞아 여운형 씨의 권고로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하였다. 건준의 부위원장으로 있었으나 인적 관계나 정책면에서 여 씨와는 이견을 가졌었고, 특히 건준의 모든 실권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악되고 있음을 불만으로 여겨와, 수차에 걸쳐 이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거듭 실패, 때마침 9월 1일에 결성된 조선국민당 당수로 추대되자, 건준과의 거리가 명확히 들어났다. 9월 24일에 사회민주당, 민주공화당 등 6개의 정당단체가 국민당이란 이름으로 통합되자 다시 당수로서 임정 지지를 결의시켰다.(127쪽)


 

허헌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좌파 경향의 사상을 가진 변호사 출신이고, 날카로워 보이도록 강한 성격과 의지의 소유자라고 중평(衆評)한다”고 전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확대위원회가 9월 4일 열리고 이 자리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사람이다. 부위원장으로 증선(增選)되자 안재홍 씨는 사면하고 결국 여운형 씨와 좋은 콤비가 되어서 잘 어울리는 처지라 한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이 감싸고 있고 그 역시 그 속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다. 9월 6일, 저녁 6시에 서울 경기여고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렸고 여기엔 약 6○○명 대표가 참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민대표회의는 ‘임시 정부조직법’안을 통과시켰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 후 건준은 모든 사업을 이 ‘인민공화국’에 인계하였다. 이들이 일방적으로 조각하여 발표한 부서를 보면 주석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허헌, 내무부장에 김구, 외무부장에 김규식 등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1월 7일에 이 박사는 정식으로 주석 수락의 거부를 성명 발표하였고, 미군정 당국도 정당이나 사회단체로서는 인정할 수 있으나 정부를 표방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해체를 시사했다. (129쪽)


 다음날 회담과 관련한 자유신문의 보도. 


인민위원회 허헌씨 담

당초 임시정부 요인의 입국을 기대했으나 당시의 국내외 정세로 부득이 인민공화국을 성립시킨 유래를 설명하고 현재 하부조직이 잘된 상황을 이야기하였더니 김구 선생도 혁명정부의 ○○성이로 노력한 경과를 말씀하고 차후로서도 협의협력하자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국내의 현정세가 무엇보다도 전 국민이 생활의 안정을 갈망하고 있으니까 정국을 안정시켜야 된 것이 선결과제로 나는 백지로 임하겠으니 잘 지도하여 주십사고 하였습니다. (1945년 11월 28일자 1면)


 장준하는 이와관련해 “11월 28일자 일부 신문에 김구, 허헌 회담의 결과로 임정이 앞으로 ‘인민공화국’과 잘 협의해서 해나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합의사실이 발표”됐다고 적고 있다.


나는 전연 기억할 수 없는 합의사항이었다. 누구보다 엄 부장이 초조한 빛이었다. 나의 회담 기록에도 전연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는 내용이었다. 허헌의 ‘인민공화국’ 조직 설명 끝에,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제거한 정부라야 되겠다는 말에 백범 선생이 수긍을 표시한 것뿐이다. 신문기사를 엄 부장과 함께 재삼 읽어가며 검토했다. 물론 허헌 자신이 일방적으로 공개한 내용이며, 제 1, 2, 3항까지는 용납할 수 있다 해도 4항에 가서 ‘인민공화국’과 협의해서 앞으로의 일을 처리한다는 결론 구절은 완전한 허위 조작이었다. (사상계 1966년 10월호)


 장준하는 허헌이 임시정부 측의  오보 항의에 그 책임을 기자들에게 돌렸다고 적었다.


창가에 묵묵히 석양을 지고 앉아서, 우리의 정정 요구를 수락했으나 신문이 자기의 정정 내용을 그대로 실어 줄지는 의문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덧 붙였다. 이 말은 곧 그 당시의 모든 신문이 좌익 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한 마디였다. 그날 저녁 나는 허헌 씨의 그 상기된 얼굴에 고였던 노여움의 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상계 1966년 10월호)


 앞서 복간한 조선일보도 기사 2를 실었으나 동아일보는 복간 후 송진우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를 인터뷰했다. 송진우는 이 인터뷰에서 “우리 삼천만 민족은 다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일한 정부로 신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대하던 우리 임시정부 김구 주석 이하 각 요인의 속속 환국으로 말미아마 국내정계는 아연 긴장하야 삼천만 민중의 주목의 초점이 되고 잇다. 주석이하 각 요인은 환국한 후에 국내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저 아무런 정견도 발표치 안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먼저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 씨를 비롯하야 국민당 안재홍씨 등 국내 중요 정당 수뇌자 제씨와 회견하고 간담하엿는데 그 회담내용은 알 수 업스나 임시정부 요인 환국 후 최초의 요담이니만치 그 동향은 극히 주목을 끌고 잇다. 이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 씨를 왕방하고 금후 정계의 귀추를 뭇기로 하엿다.

 

 문: 임시정부 요인이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얏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야 선생은 어떠케 생각하는가.

 답: 공식、비공식을 초월하야 우리 삼천만 민족은 다갓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일 진정한 정부로 신봉하지 안으면 아니된다. 개인자격이니 비공식이니 하는 것은 대외적인 법적관계를 고려하는 것일 것으로 대내적으론 문제가 되지 안는다. 이 정부이외에는 아모런 정부도 우리가 가질 수 업다는 것을 엄숙히 생각하여야할 것이다

 

 문: 임시정부는 국내 각 정치세력과 여하한 보조를 취할 것인가.

 답: 자주독립 국가체제를 급속히 수립하기 위하야는 무엇보다도 임시정부의 핵심인 정치세력을 토대로 하야 각파와 합류하여야한다는 것은 이미 14조 강령에 발표된 것이다.

 

 문: 임시정부를 개조한다는 말이 잇는데 개조의 시기와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답: 개조와 시기와 방법은 알 수 업으나 당면한 현 계단에 잇어서는 개조할 필요가 업다고생각한다. 도로여 혼란만 일으킬 우려가 업지 안키 때문이다. 이와가치 생각하는 것은 나뿐 만아니라 삼천만 민중의 총의일 것이다.

 

문: 임시정부의 시정방향은 어떠한가

답: 잘 알 수 업으나 시정의 전제 조건으로서 급무는 국방군의 확립이다. 이것이 수립되지 안코는 지방의 치안도 유지할 수 업고 생산증진도 기대할 수 업다.”

(절대 신봉하자, 개인자격은 대외관계 뿐-김 주석 회견 후 송진우 씨 담, 1945년 12월 1일자)











Notes:

  1.  장준하,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고 6개월(3)-4당수와의 회담과 임정요인 제2진의 환국’, 사상계 1966년 10월호.

     

    ▶ 123쪽 송진우 씨. 그의 인간과 성품에 대한 것은 우선 거구의 인물이라고 했다. 굽히지 않는 고집이 강한 의지와 함께 안면에 담겨서, 거장의 모습이 풍긴다고 한다. 그는 강인한 민족주의자로서 명분과 전통을 존중하는 인물이며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절대적인 배척을 신조로 하고 있고,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하여 집결되는 인물 가운데 중심인물이라고 하였다.

     

    ▶ 126쪽 여운형 씨. 나의 학생시절이나 입국 이후에나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다. 이러나저러나 국내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는 활동적인 인물이다. 특히 체육인들과 젊은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가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풍채가 좋고 활발한 성격이며 잘 생긴 용모로서 정치인다운 활동성을 보여 온 사람. 그러나 나는 이분을 너무 현실에 치우치는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싶다. 그의 정치노선은 사회주의 좌파 경향일 뿐이지, 결코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극렬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완전 포위가 되어 있다. 해방 전에 그는 일본에게 정권을 이양하라고 합법투쟁을 벌리기도 한 일이 있으며, 그 후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였다. 8월 15일 원등(遠藤)이 여 씨에게 송진우 씨에게 한 것과 같은 청을 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이를 수락한 인물이다.

     

    ▶ 127쪽 안재홍 씨. 이 분은 사회주의 우파적인 경향의 분으로 일반 지식층과 언론계에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다. 언젠가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에게 인사차 오신 것을 직접 만나본 일이 있다. 선비적인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시던 키가 크고 몸은 가늘던 인상이었다. 그는 8.15해방을 맞아 여운형 씨의 권고로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하였다. 건준의 부위원장으로 있었으나 인적 관계나 정책면에서 여 씨와는 이견을 가졌었고, 특히 건준의 모든 실권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장악되고 있음을 불만으로 여겨와, 수차에 걸쳐 이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거듭 실패, 때마침 9월 1일에 결성된 조선국민당 당수로 추대되자, 건준과의 거리가 명확히 들어났다. 9월 24일에 사회민주당, 민주공화당 등 6개의 정당단체가 국민당이란 이름으로 통합되자 다시 당수로서 임정 지지를 결의시켰다.

     

    ▶ 129쪽 허헌 씨. 건국준비위원회의 확대위원회가 9월 4일 열리고 이 자리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사람이다. 사회주의 좌파 경향의 사상을 가진 변호사 출신이고, 날카로워 보이도록 강한 성격과 의지의 소유자라고 중평(衆評)한다. 부위원장으로 증선(增選)되자 안재홍 씨는 사면하고 결국 여운형 씨와 좋은 콤비가 되어서 잘 어울리는 처지라 한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이 감싸고 있고 그 역시 그 속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다. 9월 6일, 저녁 6시에 서울 경기여고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렸고 여기엔 약 六○○명 대표가 참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민대표회의는 ‘임시 정부조직법’안을 통과시켰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 후 건준은 모든 사업을 이 ‘인민공화국’에 인계하였다. 이들이 일방적으로 조각하여 발표한 부서를 보면 주석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허헌, 내무부장에 김구, 외무부장에 김규식 등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1월 7일에 이 박사는 정식으로 주석 수락의 거부를 성명 발표하였고, 미군정 당국도 정당이나 사회단체로서는 인정할 수 있으나 정부를 표방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해체를 시사했다.

     

    ▶ 132~133쪽 11시 40분이나 되었을까, 송진우 씨가 당도하였다. 같이 온 분 중 한 분이 송진우 씨의 가방과 외투를 받아들고 아래층에 머물고, 송진우 씨는 비대한 체구로 층계를 성큼성큼 올랐다. 같이 온 분 중에는 김준연 씨도 끼어 있었다. 회색양복에 무게를 느끼는 걸음걸이로 복도를 지나 응접실에 들어섰다. 역시 같은 자리에 안내하고 나서 백범 선생을 모시고 나오자, 송진우 씨는 약간 흥분을 띠운 홍조의 기색으로 백범 선생을 맞았다. 들은 얘기대로 박력 있는 인상이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듯한 표정이 일변하고 열변조의 말문이 열리자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대조적으로 담담한 표정의 백범 선생에게, 준비한 듯한 다섯 가지 건의를 연속으로 제안하는 것이었다.

     

    ① 이번 2차 대전은 민주주의 대 파쇼의 대결이었으니 만치, 승리를 이끈 연합국가의 기치 아래로 우리도 나아가야 할 것이므로, 국가가 통일되어 민주국가를 완성하는 데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② 가급적 속히 최선을 다하여 몇 개조의 친선사절단을 조직하여 선생님의 친서를 가지고 각 연합국을 방문토록 하여, 우리 국내외에 사상적 통일이 되어 자주독립을 할 만큼 실력이 양성되었음을 선전하여, 연합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독립촉성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③ 재정문제에 있어서는, 국내외의 유지들의 희사를 받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④ 집무계통의 사무조직을 하루 속히 완비시키는 것을 최선책으로 판단합니다.

    ⑤ 하루 바삐 국군을 편성시키는 것이 필요할 줄로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건의를 채택하신다면 어느 정도 치안도 유지되고 생산 활동도 상당히 활발해 지리라고 전망합니다.

     

    이것이 김·송 회담에서 내가 기록하였던 골자이다. 벌겋게 화기가 도는 안면에, 열이 오르는 듯이 자기주장에 힘을 주어 말할 때마다 박력이 일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그의 구국 일념의 정열은 부러울 정도였다. 듣고 있는 나의 심중까지 그것은 전도되는 듯했다. ‘인민공화국 타도’를 외쳤던 기개가 살아 있음을 목격했다. 저으기 맘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백범 선생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역시 시종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침묵으로 이 제언을 전부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침묵만으로 대하는 심회를 내 어찌 짐작하리오. 송진우 씨가 일어날 때 나는 무엇인가 무척 허전 못함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 134~135쪽 오후 3시. 여운형 씨가 도착하였다. 과연 풍채가 좋고 내가 가장 많이 이야길 듣던 그대로 활달한 성격의 분이었다. 내가 솔직히 말하여 한번 꼭 만나보고 싶었던, 속으로 그리워하던 여운형 씨가 활발한 걸음으로 덥석덥석 올라오셨다.  백범 선생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도 위축되거나, 위압당하는 기색이 없었다. 퍽 친숙한 표정으로 어렵지 않게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나는 그 잘생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니 전연 무의식 속에 이상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저분의 코가 조금만 더 컸다면···’  그러나 여운형 씨의 이야기는 별로 기록할 요점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내용이 아니고 사담 비슷한 얘기로 얼버무렸다. 그 대신 퍽 정답에 술술 대화를 이어나갔다. 전연 어떤 깊이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오전 중의 두 분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백범 선생에게 하는 일종의 변명임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하는 인사 정도로, 태양의 위치가 바뀌어 그의 얼굴에 명암을 받으면서 어렵지 않게 백범선생을 대하였다. 깊숙이 가죽소파에 몸을 묻고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선생님이 들어오신 후 일하실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드린다고 애써 보았습니다.”하는 말을 썩어 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아니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들어오셨으니, 제가 할 일은 없어진 줄로 압니다.”  백범 선생은 처음, 이날 처음으로 웃음을 가볍게 풍기면서 눈을 한번 지긋이 떴다 감으셨다. 그리고는 일체 정치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셨다. 여운형 씨는 계속 여러 사람의 안부를 물었고, 또 자기가 상해를 떠나던 시절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렇게 한 사십 여 분만에 그는 일어섰고 응접실 문밖까지 따라 나와 그를 배웅했다.

    “…저, 선생님, 참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전 장준하입니다. 학병으로 나갔다가 중경으로 가서….”

    “오오! 알아요. 신문에서도 보았고 또 얘기도 듣고…참 수고합니다. 우리 집이 계동인데, 그 계동 골목에서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으니, 한번 놀러 오구료.”

    백범 선생은 이미 자기의 거실로 들어가셨고 응접실엔 공허만이 고여 있었다.

     

    ▶ 135쪽 4시에 마침내 허헌 인민공화국 국무총리가 나타났다. 짙은 회색 양복에 중간키를 가진 이 신사는 단정한 몸차림의 인상으로 빈틈없는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가 데리고 온 수행원이 바로 유명한 이강국(李康國)이었다. 물론 뒤에 안 일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았다. 극히 사무적인 언행으로 그는 조리 있게 ‘인민공화국’의 조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전국적인 조직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의 내용이었다.

     

    ▶ 141~143쪽 어제의 4당수회담에 관한 신문기사였다. 다른 것보다도 허헌의 신문 담화 내용이 전연 뜻밖의 기사로 실려 있었다.  내용은 11월 28일자 일부 신문에 김구, 허헌 회담의 결과로 임정이 앞으로 ‘인민공화국’과 잘 협의해서 해나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합의사실이 발표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전연 기억할 수 없는 합의사항이었다. 누구보다 엄 부장이 초조한 빛이었다. 나의 회담 기록에도 전연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는 내용이었다. 허헌의 ‘인민공화국’ 조직 설명 끝에,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제거한 정부라야 되겠다는 말에 백범 선생이 수긍을 표시한 것뿐이다. 신문기사를 엄 부장과 함께 재삼 읽어가며 검토했다. 물론 허헌 자신이 일방적으로 공개한 내용이며, 제 1, 2, 3항까지는 용납할 수 있다 해도 4항에 가서 ‘인민공화국’과 협의해서 앞으로의 일을 처리한다는 결론 구절은 완전한 허위 조작이었다. 엄 부장은 즉시 허헌 씨를 조치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통보가 갔는데도 허헌은 나타나지 아니했다. 나는 나대로의 사태 분석을 이렇게 엄 부장에게 피력했다. 이 박사가 좌익세력 제거를 선언하고 ‘인민공화국’ 주석의 취임을 거부 성명했으며, 공산주의 공격 담화를 발표하면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외치자 입장이 난처해진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  내의 좌익 세력과 제휴하여 그들을 ‘인민공화국’의 각료로 이용하면서 세力을 만회하는 한편 김구 선생을 자기들 세력권 내에 잡아두려는 획책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마치 임정계열이 ‘인민공화국’을 지지 합작하는 것처럼 회담내용을 왜곡 발표하고 임정의 법통을 ‘인민공화국’에 넘기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려는 의도가 분명하지 아니한가. 그 이유는 국민적 감정이 지금 임정에 집착되어 있고 모든 관심이 이 임정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김구 선생의 역할을 이용하기 위해 임정을 물로 늘어지는 방도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인민공화국’의 각료에다 해외인사들을 나열식으로 앉히고 실질적인 권력구조에는 자기네 세력을 침투시켜놓고 있다. 문제는 임정 안의 좌익 세력과의 합세를 막는 길만이 그들의 대세만회의 술책을 분쇄하는데 있다. 그들이 암중모색하는 길은 이 박사가 조직하는 ‘독립촉성국민회’와 군정이 시사한 ‘정권을 표방하는 기관’의 해산에 대항하는 길일 것이다. 엄 부장은 나의 이 열띤 정국관을 듣고 있다가,

    “맞는 말이오, 그러나 모르는 것은 아니지…”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죠, 결론은.”

    그리하여 엄 부장은 두 번째로 허헌에게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 이번에는 자동차를 내어 그 차로 조치하도록 했다. 마침내 허헌 씨가 나타났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떤 기대감을 표시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아래층 응접실에서 나는 엄 부장과 허헌 씨 앞에 어제의 회담 기록과 신문 몇 장을 펼쳐 놓았다. 엄 부장이 따지고 들었다.

    “허 선생 이것은 어찌된 일이요?” 그러나 그의 대답도 용의주도한 것이었다.

    “그야 기자들의 소행이 아니요! 어떻게 쫓아다니며 일일이 기사 내용을 감시 조사할 수 있겠소?” 약간 불쾌한듯한 어조로 우리를 번갈아 응시하면서 두 번째 말문을 열었다.

    “인민의 여론이 아마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모양이요, 그렇길래 기자들이 그렇게 쓴 것이겠지요…자, 날 오라고 한 것은 그것 때문이요?”

    “·········”

    오히려 우리가 입이 막혔다. 그도 합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만은 전제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책임은 기자에게 돌렸다. 사실 그 당시 신문기자들 가운데는 공산주의자들이 들끓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엄 부장은 만만치 않게 언쟁을 벌렸다. 정치인 답지 않다는 요지였다. 국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치고는 할 수 없는 담화 내용의 발표가 아니냐는 심문식 질문에 그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창가에 묵묵히 석양을 지고 앉아서, 우리의 정정 요구를 수락했으나 신문이 자기의 정정 내용을 그대로 실어 줄지는 의문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덧 붙였다. 이 말은 곧 그 당시의 모든 신문이 좌익 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한 마디였다. 그날 저녁 나는 허헌 씨의 그 상기된 얼굴에 고였던 노여움의 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연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모순된 일이 사태를 끌고 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 급속독립촉성, 1945년 11월 28일자 조선일보

     

    환국 제3일부터 홀홀히 자주독립완성의 본격적 공작에 착수한 김구 주석은 27일에는 오전 중에 한국민주당 송진우 씨 국민당수 안재홍 양씨를 공동 접견하고 오후에는 다시 인민당수 여운형 씨, 인민공화국 국무총리 허헌 씨를 역시 동시 접견하여 주요정당 중 공산당을 남기고는 정치요인들을 전부 접견하고 그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금후의 정치공작을 급속히 진행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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