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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9 : 송진우 사장 피살 (2)

Posted by 신이 On 5월 - 24 - 2012



 피살 당시 고하 송진우는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이자 동아일보 사장이었다. 동아일보가 중간(重刊)된 이후 한민당과 마찰이 생기자 설의식 주간이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정당은 때가 오면 흩어지기도 하고 다시 모이기도 하지만 신문은 사업체이기 때문에 고유의 사명에 충실해야한다”고 정리했다.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고하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사출판국, 1965년)




 동아일보 중간 이후 피살 때까지 한 달 간 동아일보에 실린 고하 송진우 관련 기사는 모두 신문사 사장이 아닌 정치인의 그것이었다. 


고하 송진우는 한민당 수석총무로서 ‘선량한 충고자 되라’며 동아일보의 중간을 축하했다.


“이 땅에 서기가 가득하고 생맥이 뛰는지라. 이제나 이제나하고 갈망하든 동아일보는 드디어 소생하였다. 삼천만은 뉘라서 감격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리오마는 지난 이십년동안 동아일보와 희비를 같이해오든 나로서는 그 도가 한층 더 심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는 우리의 이목(耳目)으로서 탄생하였고 우리의 이기(利器)로서 싸워왔다. 그 걸어온 고비고비의 길은 모두가 열혈로 물들어 있고 고심의 흐름이었다.…내외정세가 복잡혼란한 현하시국에 있어서 언론기관의 책무는 실로 중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보도에 충실할 것은 물론이어니와 다만 이에만 그칠 것이 아니다. 민중의 선량한 충고자 되고 현명한 지도자가 되어서 사설(邪說)을 척결하고 정론(正論)을 부액(扶掖,부축)하여 민심의 귀추를 명일정확히 시사(示唆)함으로써 국가건설에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할 것이다. 이제 동아일보가 재출발함에 있서서 열과 성을 가지고 사명을 완수하도록 간곡히 부탁하며 그 전도를 축하는바이다.” (1945년 12월 2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일자 중간호에서 송진우 한민당 수석총무의 생각을 들었다.


“우리 삼천만 민족은 다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일한 정부로 신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정부 이외에는 아무런 정부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엄숙히 생각해야할 것이다.” 1




 고하 송진우는 임시정부에 무척 공을 들였다. 중경(重慶)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함께 입국한 광복군 장교 장준하가 회고하는 1945년 11월 27일 김구 주석과 송진우 한민당 수석총무의 회담. 2




“11시 40분이나 되었을까, 송진우 씨가 당도하였다.…들은 얘기대로 박력 있는 인상이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듯한 표정이 일변하고 열변조의 말문이 열리자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대조적으로 담담한 표정의 백범 선생에게, 준비한 듯한 다섯 가지 건의를 연속으로 제안하는 것이었다.…벌겋게 화기가 도는 안면에, 열이 오르는 듯이 자기주장에 힘을 주어 말할 때마다 박력이 일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그의 구국 일념의 정열은 부러울 정도였다. 듣고 있는 나의 심중까지 그것은 전도되는 듯했다. ‘인민공화국 타도’를 외쳤던 기개가 살아 있음을 목격했다. 저으기 맘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백범 선생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역시 시종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침묵으로 이 제언을 전부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침묵만으로 대하는 심회를 내 어찌 짐작하리오.”




 송진우의 측근인 김준연 전 동아일보 주필은 동아일보 복간 이틀째인 12월 2일자 기고에서 송진우가 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 국민대회준비회를 추진하는 목적을 설명했다.



1945년 12월 국민대회준비회 사무실(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내)을 나서는 고하 송진우. 고하는 12월 30일 집에서 암살당했다.


“일제로부터 정권을 받는 것은 괴뢰정권이 되기 때문에, 8.15 직후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不可)하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민대회를 열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야한다.”  3




 상해(上海)에 잔류해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12월 2일 귀국하자 이틀 후 송진우는 인촌 김성수, 낭산 김준연, 창랑 장택상과 함께 이들을 찾는다. 4 임정 중심으로 각 정치세력을 통합해 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5




 송진우 한민당 수석총무가 12월 22일 라디오를 통해 발표한 정견은 그대로 동아일보 6 에 실렸다. 송진우 수석총무는 “한민당은 우방 연합군의 진주를 따라서 환국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한다는 기치 하에서 결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정강정책으로 첫째 민족의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수립, 둘째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정체(政體) 수립, 셋째 경제적으로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 넷째 민족문화 앙양, 다섯째 국제헌장 준수와 세계평화 기여를 내세웠다. 7




 이와 별도로 국민대회준비회도 속속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국민대회준비회는 12월 16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다음달인 1월 10일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8 이에 앞서 12월 10일에는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를 조직해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9


“우리나라를 세우는 데에는 가장 중요한 건설자금 문제를 우리 삼천만 동포의 손으로 해결하여 광복대업(光復大業)을 이루자는 취지에서 오세창 송진우 백관수 방응모 이갑성 소완규 제씨의 백여명이 발기인이 되어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를 조직하였는데 방송국 각 신문사 각 은행의 후원으로 우리의 불타오르는 애국정열에 의한 현금으로 각 애국반 단위로 하고 정회를 대표입금단으로 하여 12월 10일부터 12월 말일까지 수금하기로 하였으며 애국금처리는일체를 임시정부에게 일임하기로 하였다.”




 더 나아가 12월 23일에는 임정 재정부장 조완구의 요청으로 김성수, 장택상, 김동원과 함께 ‘애국금헌성회’로 발전시켜 그 중앙본부를 광화문 동아일보사옥 내 국민대회준비회에 두었다. 10




 임정 절대 지지를 외치던 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구 주석은 ‘민족적 대손실’이라며 애도했다.


“우리의 운동을 위하여 다대한 공적을 쌓았고 분투하여온 고하 동지를 잃게 됨은 우리의 큰손실이다. 애도의 말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탁치반대운동을 전개하는 차제(此際) 여사(如斯)한 불상사는 우리 민족의 대외관계에 불소(不少)한 악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 사랑하는 동포는 특히 이 점을 주의치 않으면 안된다.”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Notes:


  1. 절대 신봉하자, 개인자격은 대외관계 뿐-김 주석 회견 후 송진우 씨 담, 1945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중간호.


     고대하던 우리 임시정부 김구 주석 이하 각 요인의 속속 환국으로 말미아마 국내정계는 아연 긴장하야 삼천만 민중의 주목의 초점이 되고 잇다. 주석이하 각 요인은 환국한 후에 국내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저 아무런 정견도 발표치 안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먼저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 씨를 비롯하야 국민당 안재홍씨 등 국내 중요 정당 수뇌자 제씨와 회견하고 간담하엿는데 그 회담내용은 알 수 업스나 임시정부 요인 환국 후 최초의 요담이니만치 그 동향은 극히 주목을 끌고 잇다. 이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 씨를 왕방하고 금후 정계의 귀추를 뭇기로 하엿다.


     문: 임시정부 요인이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얏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야 선생은 어떠케 생각하는가.

     답: 공식、비공식을 초월하야 우리 삼천만 민족은 다갓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유일 진정한 정부로 신봉하지 안으면 아니된다. 개인자격이니 비공식이니 하는 것은 대외적인 법적관계를 고려하는 것일 것으로 대내적으론 문제가 되지 안는다. 이 정부이외에는 아모런 정부도 우리가 가질 수 업다는 것을 엄숙히 생각하여야할 것이다

     

     문: 임시정부는 국내 각 정치세력과 여하한 보조를 취할 것인가.

     답: 자주독립 국가체제를 급속히 수립하기 위하야는 무엇보다도 임시정부의 핵심인 정치세력을 토대로 하야 각파와 합류하여야한다는 것은 이미 14조 강령에 발표된 것이다.


     문: 임시정부를 개조한다는 말이 잇는데 개조의 시기와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답: 개조와 시기와 방법은 알 수 업으나 당면한 현 계단에 잇어서는 개조할 필요가 업다고생각한다. 도로여 혼란만 일으킬 우려가 업지 안키 때문이다. 이와가치 생각하는 것은 나뿐 만아니라 삼천만 민중의 총의일 것이다.


    문: 임시정부의 시정방향은 어떠한가

    답: 잘 알 수 업으나 시정의 전제 조건으로서 급무는 국방군의 확립이다. 이것이 수립되지 안코는 지방의 치안도 유지할 수 업고 생산증진도 기대할 수 업다.


  2. 장준하,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고 6개월(3)-4당수와의 회담과 임정요인 제2진의 환국’, 사상계 1966년 10월호.


    ▶ 123쪽 송진우 씨. 그의 인간과 성품에 대한 것은 우선 거구의 인물이라고 했다. 굽히지 않는 고집이 강한 의지와 함께 안면에 담겨서, 거장의 모습이 풍긴다고 한다. 그는 강인한 민족주의자로서 명분과 전통을 존중하는 인물이며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절대적인 배척을 신조로 하고 있고,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하여 집결되는 인물 가운데 중심인물이라고 하였다.


    ▶ 132~133쪽 11시 40분이나 되었을까, 송진우 씨가 당도하였다. 같이 온 분 중 한 분이 송진우 씨의 가방과 외투를 받아들고 아래층에 머물고, 송진우 씨는 비대한 체구로 층계를 성큼성큼 올랐다. 같이 온 분 중에는 김준연 씨도 끼어 있었다. 회색양복에 무게를 느끼는 걸음걸이로 복도를 지나 응접실에 들어섰다. 역시 같은 자리에 안내하고 나서 백범 선생을 모시고 나오자, 송진우 씨는 약간 흥분을 띠운 홍조의 기색으로 백범 선생을 맞았다. 들은 얘기대로 박력 있는 인상이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듯한 표정이 일변하고 열변조의 말문이 열리자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리면서, 대조적으로 담담한 표정의 백범 선생에게, 준비한 듯한 다섯 가지 건의를 연속으로 제안하는 것이었다.


    ① 이번 2차 대전은 민주주의 대 파쇼의 대결이었으니 만치, 승리를 이끈 연합국가의 기치 아래로 우리도 나아가야 할 것이므로, 국가가 통일되어 민주국가를 완성하는 데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② 가급적 속히 최선을 다하여 몇 개조의 친선사절단을 조직하여 선생님의 친서를 가지고 각 연합국을 방문토록 하여, 우리 국내외에 사상적 통일이 되어 자주독립을 할 만큼 실력이 양성되었음을 선전하여, 연합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독립촉성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③ 재정문제에 있어서는, 국내외의 유지들의 희사를 받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④ 집무계통의 사무조직을 하루 속히 완비시키는 것을 최선책으로 판단합니다.

    ⑤ 하루 바삐 국군을 편성시키는 것이 필요할 줄로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건의를 채택하신다면 어느 정도 치안도 유지되고 생산 활동도 상당히 활발해 지리라고 전망합니다.


     이것이 김·송 회담에서 내가 기록하였던 골자이다. 벌겋게 화기가 도는 안면에, 열이 오르는 듯이 자기주장에 힘을 주어 말할 때마다 박력이 일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그의 구국 일념의 정열은 부러울 정도였다. 듣고 있는 나의 심중까지 그것은 전도되는 듯했다. ‘인민공화국 타도’를 외쳤던 기개가 살아 있음을 목격했다. 저으기 맘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백범 선생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역시 시종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침묵으로 이 제언을 전부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침묵만으로 대하는 심회를 내 어찌 짐작하리오. 송진우 씨가 일어날 때 나는 무엇인가 무척 허전 못함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3. 김준연 국민대회준비회부위원장, 일체의 국정(國政)은 국민의 총의로-국민대회의 발단, 1945년 12월 2일자 동아일보


     8월 15일 오전 10시경이엇다、나는 창덕궁 경찰서압헤서 여운형 씨를 만낫다、송진우 씨가 나오느냐고 물엇다. 송진우 씨는 나오지 안케되고 김성수 씨에게는 문의할 기회가 업섯다고 대답하엿다、그러면 그대는 어떠냐고 하기에 나도 참가할 의사가 업다는 것을 말하엿다、여운형 씨는 그러면 나혼자 나가겠다고 말하엿다、그래서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다고 말하엿다.

     8월 9일에 소련이 일본에 대하야 전쟁을 선언하고 활동을 개시하야 만주로 조선으로 진군하게 되니 일본 정부는 최후의 기(欺)○원까지 상실하고 말엇던 것이다. 원자폭탄에 의하야  창황실조(蒼惶失措)한 일본 정부는 또다시 소련의 진출을 보게됨에 천만장(千萬丈)의 구렁으로 굴러 떠러저 버렷다. 벌서 국민을 속여서 끌고 나갈 수는 도저히 업게 되엇던 것이다. 이와가치 되여 적군의 침입을 보면서도 대항적 선전포고를 행하지 못하고 항복을 결정하고 다못 그 절차에 관하야 논의하고 잇을 뿐이엇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중앙정부의 이 태도를 살피고 대책을 강구하게 되어 10일에는 경무국 보안과장이 주동이 되어 진고게 모처에서 조선군 두 참모와 원전(原田) 경무국 사무관 등 입회하에 송진우 씨를 만나서 행정위원회의 조직을 의탁하엿스나 송 씨는 거절하고 11일 12일 양일(兩日)에도 동양(同樣)의 교섭이 잇고 13일에는 생전(生田) 경기도지사와 동(同) 경찰부장이 만나서 교섭하엿으나 역시 거절하고 14일에는 나도 생전(生田)지사와 강(岡) 경찰부장을 만낫스나 동일한 결과가 되고 말엇다.

     그러는 동안에 여운형 씨의게도 교섭이 잇엇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우(某友)가 중간에 서서 나에게 송(宋) 김(金) 양씨(兩氏)에게 여 씨와 합작하도록 권유하여 달라고 의뢰하엿던 것이다. 나는 15일 오전 7시 반에 여 씨가 정무총감을 만나러 갓단 말을 들엇다. 나는 모우에게 송 김 양씨와의 교섭 전말을 보고하러 가는 길이엇고 여 씨는 정무총감을 만나고 오는 길이엇던 모양이다.

     15일 정오에 왜황(倭皇)의 무조건 항복선언이 라되오를 통하야 발표되자 여운형 씨는 안재홍 씨와 제휴하야 건국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대대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엿다. 그리하야 경성은 물론이고 지방까지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세력이 파급하게 되엿다.

     그리고 일방에는 송씨를 중심으로 하야 국민대회를 준비하게 되엇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오다가 8월 30일에 와서야 미군이 9월 7일에 경성에 들어온단 말을 듯고 급속히 이 계획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국민대회의 주지는 중경(重慶)에 잇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명백히 표시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야 9월 7일에 지방유지의 다수 참석하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결의하고 전국적 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기 위하야 준비회를 설립하고 그를 준비하며 집행위원을 선거하야 당면의 제 문제를 처리케 한 것이엇다.

     그러면 어째서 여씨와 합작하야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하지 아니하고 따로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엿는가, 제1은 왜(倭)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밧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오, 제2 중경에 잇는 우리 정부를 부인하고 여기서 바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다、이리하야 여씨를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 운동은 결국 인민공화국의 성립 급 기정부의 수립까지 진전하게 되엿고、송씨를 발기자로 한 국민대회준비회운동은 재중경 우리 임시정부 절대지지운동을 전개케하야 금일의 형세를 순치케 한 것이다.

  4. 정부의 구성 그대로 추진, 신(申) 내무부장과 간담한 한국민주당 송진우 씨 담(談), 1945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


     한국민주당 송진우 인촌 김성수 씨 국민대회준비원부위원장 김준연 씨 동(同) 외교부장 장택상 씨는 4일 오후 한미호텔에 체재중인 정부요인 제씨를 왕방하고 일로(一路) 무사히 환국한데 대한 인사를 하엿는데 그 석상(席上) 특히 신익희 내무부장과의 요담을 마친 한민당  송진우 씨는 다음 갓치 말하엿다.

     오늘 왕방은 단순한 인사엿다. 그러나 대개 구면 잇는 분들이므로 자연히 흉금을 털어 노흔 시국담이 나오게 되엿다. 일부에서는 혹시 정부개조론이 잇슬지 모르나 이는 정권욕에 급한 사람들의 의견일 것이다. 우선 국가체제를 가추어 열국의 승인을 밧기까지는 그냥 그대로 직진하는 것이 현하의 내외정세로 보아 제일 타당하고 또한 첩경이며 또 우리 국민 거의 전부의 뜻이라고 나는 밋는다. 이런 뜻으로 진언을 햇다. 그리고 시급히 국군을 편성할 필요가 잇는 점、재정문제에 대해서 적당한 편법을 강구할 것 대외사절을 각국에 보내여 우리의 현장을 세계에 알니어 일일이라도 속히 열국의 정식승인을 엇도록 노력할 것 등등、이야기는 다방면에 이르럿다. 하여간 인제 우리 정부의 내부적 체제가 정비되여 가는 중이니 우리 국민은 너무 조급한 생각을 가지지 말고 정부를 신뢰하는 동시에 우리는 다 각각 각자의 직능을 발휘해서 신 국가건설을 협찬해야 할 것이다.


  5.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고하 송진우의 생애와 활동’(1999년),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코리아콘텐츠랩, 2002년.


     임정이 귀국하자 고하는 국민대회준비회의 대표자격으로 임정요인을 방문했다. 1948년 12월 임정 귀국 이후의 고하의 활동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가 이승만 중심의 정계통합보다는 임정 중심으로 각 정치세력의 정계통합을 추진하고 있었고, 임정 절대 지지를 내세우면서 임정 중심의 정부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고하의 전기에 따르면 당시 고하가 임정에게 건네준 정치후원금에 친일파의 돈이 들어 있다는 것으로 수령 여부를 둘러싸고 임정측과 한민당간에 논란이 벌어지고, 한민당 장덕수의 친일 전력문제를 둘러싸고 임정 내 신익희와 장덕수간에 논란이 벌어지면서 고하가 임정에 대해 다른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서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갈등은 부분적인 것이었다. 또한 이들 논란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경우에나 고하가 논란의 종지부를 찍고 임정 측과 한민당 측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목표와 주관이 뚜렷하고 정세판단이 뛰어난 고하가 그러한 정도의 문제로 임정과 갈라서고 활동을 달리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해방 직후 고하의 목표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나타난 좌파의 국가건설과 정국주도권 장악 움직임을 깨뜨리고, 우파의 강력한 지도력과 헤게모니 하에 모든 정치세력을 통합하여 정세변화와 이후 국가건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민당만으로는 우파 헤게모니 하의 정치세력 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정계통합의 상징적 중심이 필요했고 자신과 한민당은 그러한 통합에 실무적인 역할과 실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승만이 귀국하고 미군정의 지지 속에 이승만이 독촉중협을 통해 정계통합을 추진할 때 이에 적극 협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촉중협이 정계통합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특히 임정이 귀국후 독촉중협에 가담하기보다는 임정 중심의 정치통합을 추진하자, 고하의 선택은 보다 분명해져 갔다.

     임정세력 귀국 직후 임정에 대한 일반의 기대는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개인자격의 구국일망정 그것은 미군정과 임정의 관계이지, 일반, 특히 우파적 경향을 갖는 각 정체세력과 각 지역의 유지, 자산가들은 그 동안 정계에 큰 영향을 가졌던 좌파세력을 일거에 압도하고 새로 수립될 정부를 주도할 강력한 정치세력의 출현으로 임정을 받아들였다. 또한 미군정도 개인자격으로 임정을 귀국시켰지만 당시까지는 임정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6. 한민당 정책방송, 1945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


     한국민주당 송진우 씨는 22일 하오 7시 15분부터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민주당의 정견을 방송하기로 되엇다 이는 각 정당 정견방송의 제4차이다.

     4 정당 정견 발표방송

     제4회 한민당(상)(전략) 8월 15일 이래 사태는 낙관을 불허한 바 잇엇스니 연합군의 전면적 진주가 지연되엿고 이 간격은 반드시 우리 전민족의 자유와 질서를 위하야 충실히 이용되엇다고만 볼 수 업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부의 행동은 명랑할 민족적 거취를 혼돈케 하엿고 귀일할 민족적 사상을 방해하엿습니다. 이에 우리는 패잔 일본제국주의의 원호 하에서 발생된 일체 정권을 단호히 부인하고 우방 연합군의 진주를 따라서 환국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한다는 기치 하에서 결당하엿습니다.

     본당은 결코 일 계급적인 당이 아닙니다 즉 근로대중이나 소시민의 복리만을 위하는 것도 아니오 그러타고 해서 자본가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요컨대 생사의 운명을 가치한 우리 민족 전체를 포옹 흡수하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 균등한 생장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우리 당의 근본적 이념입니다 . 이 이념 밋테서 정강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매 그것은 당연히 전적이오 포괄적이오 진보적이오 세계성적인 것이 아니면 안니될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것을 성실히 실현하려는 바인데 다음에 그 요령만을 약간 부연하려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수립을 기(期)합니다(생략)

    전 민족이 일치 단결하야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므로서 완전한 독립국가로 승인을 밧지 아흐면 아니되겟습니다. 물론 사상이 다르고 정책이 다른 점도 잇겟지마는 현 단계에 잇어서 삼천만 민중의 신성한 임무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독립을 완수함에 잇다는 것을 자각하야 사상의 정사(正邪)를 운위(云謂)하고 정책의 시비을 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안후면 아니될 것입니다.(생략)

     지엽문제로 민족의 대도를 그릇한다면 그 죄과는 용허할 수 업는 것입니다. 모럼직이 사상을 귀일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고 행동을 통일하야 내정을 종식시키므로써 민족의 정신과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때 그 자치의 능력은 세계에 선시될지니 외해는 자연 삼제(芟除)될지요따라서 자주 독립은 승인될 것입니다. 이에 비로소 우리나라는 세계에 완전히 평등된 인격으로 자주할 수 잇을 것이다(계속).


  7. 민족을 영구유지-한민당 정견 발표방송,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22일 하오 7시 15분 한민당 총무 송진우 씨의 동당(同黨) 정견의 방송이 잇섯다. 그 전반부는 작보와 갓거니와 그 후부의 요지는 다음과 갓다.

    (이) 둘째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정체(政體)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독립한 국가가 되엇드래도 그 권력이 일인의 전○한 바 되고 일계급의 독재한 바가 된다면 무엇으로써 우리의 생명재산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잇겟습니까

     이러한 국가나 사회에는 오직 마찰과 대립이 잇을 뿐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만인이 기구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확립하지 안흐면 아니될지니 민중에 의하야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가 실현됨을 따라서 민중의 자유는 확인되고 민중의 평등은 보장될 것임니다. 이 인권발휘와 행복형수의 기회는 균등화할 것이매 진정한 의미의 공화 원만한 국가가 조성될 것으로 밋는바입니다.

    (삼) 셋째는 경제적으로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입니다(생략) 과거에 잇어서는 자유에만 치중하고 균등에 잇어서는 진실한 고려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가가 이윤추구에 방분한 나머지 경제적 균등의 기회는 파괴되고 따라서 근로대중의 생활은 그 안정을 일햇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독재적 전횡을 타파하는데 잇는 것과 같이 경제적민주주의는 독점의 자본을 제어하는데 잇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의 경제적 민주주의는 그 정책에 잇어서 사회주의의 계획경제와 일치된 점을 발견치 못하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자본을 요하고 독점성을 띠운 중요산업은 국영 혹은 공영으로 해야만 할 것이오 또한 토지정책에 잇어서도 종래의 불합리한 착취방법을 단연 배제하기 위하야 일본인 소유토지의 몰수에 의한 농민에게 경작권 분여는 물론이어니와 조선인 소유 토지도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동시에 매매겸병을 금하야 경작권의 전국적 시설을 촉진하야 민중의 생활을 권보(權保)하지 안흐면 아니될 줄 밋습니다.

    (사) 네째는 민족문화를 앙양하야 세계문화에 공헌하는 것임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는 그 특유한 향기를 가지고 우리의 따뜻한 마음으로 배양되어 왓습니다. 그리하야 우리 민족의 생활을 충실히 하고 향상시켜 왓을 뿐만안이라 그것를 더욱 발양시키므로써 우리 민족의 유지와 국가의 지위를 더욱 장구히 하는 것이 되여야할 것입이다. 그런데 과거 36년간 일본통치는 우리의 찬란한 고유문화를 여지없이 유린훼손하여 왓습니다. 우리는 이 유린되고 훼손된우리 민족문화를 본래의 미와 존엄에서 재건하는 동시에 선철(先哲)의 풍부한 창조력은 더욱 계승발양하고 구미의 장소를 흡수하야 더욱 빗나고 더욱 씩씩한 신문화를 건설함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유구한 발전에 공헌할 바가 잇어야할 것이오 한거름 더 나아가서 세계문화에기여하지 안흐면 아니될 것이다.

    (오) 다섯째는 국제헌장을 준수하야 세계평화의 확립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민족적 통일과 주권을 수립하고 타의 제압과 특권을 절대로 부인하야 명실 그대로의 민족자유의권리를 주장할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전세계 제민족과 자유와 평등평화와진보라는 국제적 우애로서 결합하지 안흐면 아니됩니다(생략) 이에 우리는 국제헌장을 준수하고 호혜평등을 기조로 한 외교정책을 수립하므로서 국제평화에 기여하고 따라서 인류의 진보에 공헌할 바 잇서야할 것임이다(생략)

  8.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고하 송진우의 생애와 활동’(1999년)


     이에 따라 고하는 한민당과 국민대회준비회를 두 축으로 임정 중심의 정계통합과 국가건설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한다. 우선 12월 6일 한민당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과 내정에 관한 모든 기관을 임시정부에 이양할 것, 임시정부는 인민공화국에 즉시 해산명령을 내리고 광복군을 급속히 강화시키며, 국제승인을 얻도록 외교사절을 외국에 파견할 것 등을 결의했다.

     한민당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고하는 국민대회준비회를 내세워 임정 중심의 정계통합과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국민대회준비회는 임정 중심의 정계통합과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국민대회준비회는 1945년 12월 16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1946년 1월 10일 국민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국민대회의 안건으로 임시정부 봉대, 자주독립의 즉시승인 요구, 38도선 철폐, 민족적 강기숙청(鋼紀肅淸) 등을 결정했다.

     12월 16일에는 국민대회에서 토의할 대한민국 헌법대강을 준비하기 위해 송진우, 김병로, 이인, 김용무, 정인보 등 11명을 헌법연구위원으로 선정했다.

     고하는 이러한 일련의 한민당과 국민대회준비회의 활동을 주도했다. 물론 그의 이러한 활동이 임정측과의 긴밀한 연대하에서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임정은 정세를 관망하는 입장이었고 고하의 활동은 독자적인 측면이 강했다. 그가 이런 활동을 전개한 것은 임정이라는 절대적 명분(법통)과 일반대중의 광범한 신망을 갖고 있는 강력한 정치세력 통합의 구상을 실현하고 자신이 그러한 통합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영향력과 발언권을 확보하겠다는 목적이 강하게 내재되었을 것이다.

     고하는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시정부개선환영대회’ 환영사에서도 모든 정치문제의 해결방법은 오직 “임시정부가 중핵이 되어서 모든 아류ㆍ지류를 구심력적으로 응집함으로써 국내통일에 절대적 영도를 발휘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능력을 국외에 선시(宣示)하여 급속히 연합국의 승인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중략)

     이렇게 고하ㆍ한민당, 임정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국민당의 안재홍은 독촉중협을 중심으로 한 각 정당의 협동통일이 그 방법의 졸렬함으로 실패했다고 보면서, 독촉중협이 기도했던 민족통일전선 결성은 특별정치위원회로 더욱 발전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가 담화에서 이승만을 열렬한 애국자라고 칭송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담화는 그가 참여했던 독촉중협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임정 특별정치위원회에 대한 사실상의 지지였다.

     이렇게 1945년 12월말에 이르면 중도파와 우파 내 각 정치세력은 임정을 중심으로 점차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1946년 1월 10일로 예정된 국민대회가 성공리에 개최되기만 하면 우파세력 내에서 임정 중심의 민족통일전선 결성, 정치세력의 통합은 보다 확연히 가시화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고하가 있었다.

  9. 독립애국금헌성회, 백여 유지、활동개시, 1945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10.  중앙에 애국금헌성회, 1945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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