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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8 : 송진우 사장 피살 (1)

Posted by 신이 On 5월 - 18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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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워싱턴 27일 밤 10시, 영국 런던 28일 오전 3시, 소련 모스크바 28일 새벽 6시. 1945년 12월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라는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 결과가 발표된 시점이다. 그때 서울은 28일 낮 12시였다. 그 후 고하 송진우는 42시간, 만 이틀도 되지 않아 원서동 자택에서 흉탄을 맞고 비명에 숨졌다. 1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피는 뿌려지다!

독립전선에 귀중한 생혈

30일 조조、자택에서 흉탄을 밧고

고하 송진우 선생 순국

필생을 조국의 해방 자주독립을 위하야 혈투(血鬪)하여온 민족지도자 고하 송진우 선생은 30일 조조 6시 10분경 시내 원동 74번지 자택에서 폭한(暴漢)의 흉탄을 받고 장서하였는데 향년 57세다. (사진은 고 송진우 선생)




 암살범은 고하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찬성해 저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8일 오후 방송으로, 또 신문 호외로 신탁통치 2 3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하 송진우의 첫 반응은 독립을 위해 “최후까지 투쟁하자” 4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머물고 있는 경교장이었다.  


“오후 2시경 한국민주당 송진우 씨, 곧 이어서 국민당 안재홍 씨, 신한민족당의 김려식 씨 등 긴장한 중에도 분주히 달려왔다. 이상 여러분의 말을 들으면 김구 주석은 오직 침울에 잠겨 있을 뿐이라고 한다.” (1945년 12월 29일자 조선일보)


“임정에서는 각 정당에 대표 2인씩과 6대 종교단체의 대표와 각 신문사 기자의 참집을 요청하야 지난 28일 오후 8시에 약 70명의 애국 동지의 모임을 열게 되었다.” (1945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




 고하 송진우는 낭산 김준연과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전원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었으나 그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 5 임정계는 즉시 미군정을 부인하고 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정권을 인수하자고 한 반면, 송진우는 반탁은 국민운동을 통해 국제여론에 호소해 달성하고 미군정과는 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


 이 자리에 참석했던 고 강원룡 목사의 회고. 7  강 목사는 이날이 29일 밤이라고 기억했지만 전날인 28일 밤의 착각이었다. 8 9 10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토론이 시작된 것은 1945년 12월 29일 밤 김구 선생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큰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어요.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으니까. 남로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어요. 다들 아주 격해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우리가 왜 서양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어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어요. 송진우 선생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지만.”


“그날 밤 그는 ‘3상회의 결의문도 읽지 않고 방송만 듣고 떠들어선 안 된다’며 ‘길어야 5년 이내에 끝나는 신탁통치를 하고 결국엔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의논해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운다고 하는데, 이대로라면 우리가 5년을 왜 못 견딘다는 말이냐’고 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 끼어들지 않고 우리끼리 정부를 세우라고 하면 과연 우리가 5년 안에 통일정부를 세울 자신이 있느냐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저는 ‘저 사람이 무슨 저 따위 소리를 하고 있냐’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역시 송진우 선생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하 송진우와 임정계 사이에는 격론이 벌어졌고 이날 회의는 밤을 넘겨 29일 새벽, 낮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산회했다.




 29일 오전 한민당 간부회의에서 고하 송진우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할 것과 민족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임정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의는 동아일보 사장실에서 열렸는데 이곳이 한민당 수석총무의 집무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송진우 수석총무는 매우 격양된 어조로 탁치반대와 임정 중심의 단결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어디서 난 소문인지 모르나 고하는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는 풍설이 나돌았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었을 때 나의 눈앞에는 그처럼 열렬히 탁치반대의 임정지지를 부르짖던 고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도성 씨 회고) 11


29일 오후 임정회의 12에 참석 13했던 고하 송진우가 이튿날 새벽 암살되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원세훈이었다. 14


“고하와 임정 간에 의견이 달라졌다는데 사실이오.”


“글쎄 임정에서는 모두 짚신감발을 하고 걸어 다니면서라도 반탁을 한다 합디다. 반탁이 문제가 아니라 군정과 충돌을 일으켜놓고 임정이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나도 알 수가 없소.”




 동아일보는 31일자 신문에 ‘일주(一柱)를 잃다’ 15라는 제목의 사설로 고하 송진우를 추모했다. 사설은 “우리 민족이 완전한 자주독립이란 건설사업에서 한 개의 기둥을 잃었으나 이를 기회와 인연으로 삼고 바른 기운을 가다듬어 대역사를 완성하자”고 역설했다.




 고하 송진우의 암살은 해방정국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발생한 첫 정치테러였다. 16 17




“그러니까 우리나라 해방 후에 말이죠. 정치테러 말하자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정치테러에 제1호는 역시 1945년 12월 30일 날 있었던 그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 선생을 암살한 거, 이것이 아마 제일 처음인 것 같아요.” (박용만 경무대 초대비서관, ‘경무대 비화-제10회 정치 테러’, 동아방송 정계야화, 1965년 1월 26일 방송) 18


 “송진우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문제해결방식은 무모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앞뒤를 가리지 않던 명분론자, 이상주의자들에게는 대세를 따르지 않는 송진우는 어떤 방법으로든 제거해야할 대상이었고, 그것이 곧 애국행위라는 극단적인 흑백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소영웅주의자의 도발적인 테러라기보다는 해방정국의 분열과 대립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타협과 협력은 사라지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해방정국의 분열된 재단 위에 고하는 쓰러졌던 것입니다.” (작가 고원정 해설, KBS 다큐멘터리극장 ‘정치암살의 희생자들-제1부 고하 송진우’, 1994년 2월 6일 방송) 




 그의 영결식은 1946년 1월 5일 그가 평생 가꿔온 동아일보 광화문사옥 앞 광장에서 동아일보사와 한국민주당, 그리고 국민대회준비회의 합동장으로 치러졌다.




고하 선생을 조(弔)함

단기 4279년 1월 5일 동아일보사 주간 설의식은 사원일동을 대표하여 삼가 고하 선생 영전에 고하나이다.…선생이 닦으시고 선생이 기르신 동아일보는 중간벽두에 4개조의 주지를 선명한 바 있었삽거니와 동인일동은 오직 이 주지를 추진하기에 파당을 초월한 공기로서의 자존을 고수하여 필정의 전능을 경주함으로써 언론보국의 직능을 다할까 하오며 아울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민족과 더불어 길이 만대에 선시할까 하오니, 선생 재천의 영령이시여, 미진(迷津)의 뗏목을 찾는 이 겨레의 작금을 부찰(俯察)하시어 피안(彼岸)의 정로(正路)를 지시하소서….(1946년 1월 6일자 동아일보)











Notes:

  1. 희(噫)! 고하 송진우 선생, 수애 어린 자택, 조객의 내방(來訪)잡환(雜還),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우리의 지도자 민족의 거성(巨星)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을 우리는 독립을 채 이루지 못한 채 영구히 일허 버렷다. 단기 4278년 12월 30일 미명 6시 10분 경 선생은 시내 원동(苑洞) 74번지 자택에서 흉한의 저격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완전히 독립이 이루어지는 기쁨의 날을 못보고 원한을 품은 채 서기하였다. 이날 아침에도 선생은 일즉이 잠들어 신탁통치반대라든가 통일완성에 대한 애틋한 구상을 하는 중에 그만 괴한의 조격을 바든 것이다. 뜻 아닌 이 비보에 신탁통치반대의 기ㅅ대를 놉히 내걸고 혈투를 하여 오는 각 정당을 비롯하야  각 단체동지들의 실색과 그 비창한 애도는 송 선생의 뜻을 이루고야 말겟다는 비분으로서 폭발될 것이다.

  2. 신탁통치제 과연 실시=외전(外電)이 전하는 막사과(莫斯科,모스크바) 회담내용,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


    4국 통치위원회, 금후 5개년 계속

    (막사과 27일 AP 합동) 27일로써 종결을 본 3국 외상회의에서 다음의 결정을 보앗다고 관측되고 있다.

    일、소련、미국、영국 급(及) 중국에 의한 일본관리제의 실시 4개국 이사회는 전회 일치제를 채용하는 최종결정권을 이사회가 잡든지 맥아더 대장에게 그 이상의 권한이 부여되는지는 불명(不明)이다.

    일、원자력관리문제에 관해서는 1월 개최의 국제연합 총회에서 토의될 제안이 채택되였다고 한다.

    일、조선에 미、소、영、중의 4개국의 신탁통치위원회가 설치된다. 동(同)위원회에는 5년 후에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잇다는 관측 하에 5년이라는 연한을 부(附)한다. 미、소 양국은 남북 조선행정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야 양(兩)지구 군정당국의 회의를 개최한다.

  3. 조선에 신탁제 실시, 3국외상회의서 결정, 1945년 12월 29일자 조선일보


    (막사과 27일 AP 합동) 27일로써 종결을 본 3국 외상회의에서 다음의 결정을 보앗다고 관측되고 있다.

    일、소련、미국、영국 급(及) 중국에 의한 일본관리제의 실시 4개국 이사회는 전회 일치제를 채용하는 최종결정권을 이사회가 잡든지 맥아더 대장에게 그 이상의 권한이 부여되는지는 불명(不明)이다.

    일、원자력관리문제에 관해서는 1월 개최의 국제연합 총회에서 토의될 제안이 채택되였다고 한다.

    일、조선에 미、소、영、중의 4개국의 신탁통치위원회가 설치된다. 동(同)위원회에는 5년 후에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잇다는 관측 하에 5년이라는 연한을 부(附)한다. 미、소 양국은 남북 조선행정의 통일을 도모하기 위하야 양(兩)지구 군정당국의 회의를 개최한다.

  4. ‘국준위원장 송진우 씨 담(談)’,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


     우리가 가진 반만년 역사와 지나온 반세기동안 민족해방을 위한 혈투는 세계정국에 대하야 조선민족을 완전해방하야 자주독립시키지 않으면 동양의 진정한 화평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하엿고 따라서 조선민족은 타민족의 지배나 탁치 우(又)는 국제공관을 받을 민족이아니라는 것도 천하가 주지하게 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카이로 뽀쓰담 국제회의에서도 조선독립을 선언케 된 것이다. 여사(如斯)한 국제신의를 무시하고 세계사적 발전을 저해하는 조선의 탁치운운은 단연코 배격치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삼천만이 일인도 빠짐없이 일대국민운동을 전개하야 반대하지 안흐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위하야 이 강토 우에 잇는 동지는 피한방울이 남지 안토록 결사적 용투로서 우리가 당당히 가져야 할 민족주권을 찾아야할 것이다.


  5.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고하 송진우의 생애와 활동’(1999년), 한국현대사통합데이터베이스, 코리아콘텐츠랩, 2002년


     당시 반탁운동을 둘러싸고 김구 측과 고하간에 일정한 마찰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고하가 신탁통치를 찬성했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고하는 12월 30일 새벽 일단의 괴한들에게 총격을 받고 암살당하게 된다. 한현우 등 고하의 암살범들은 1946년 4월 9일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고, 그 배후인물로 지목된 전백도 7월 5일 체포되었다. 주범인 한현우는 국수주의ㆍ파시즘적 성향의 인물로 고하가 민족분열을 초래한 파벌적 인물이며 임정을 무시했고 신탁통치를 지지했기 때문에 암살했으며, 배후는 없다고 주장했다.

     고하의 찬탁주장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면 고하의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자. 그는 이미 3상 결정 훨씬 이전부터 미국 국무부 주도의 한국에 대한 다자간 신탁통치 구상을 알고 있었고 모스크바 3상 결정에서의 신탁통치 주장도 미국무부의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미군정과 맥아더사령부는 이런 미국무부의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미군정이 신탁통치를 한국에 실시하는 것이 조선의 현실과 적합하지 않다면, 이에 대한 대안으로 랭던의 ‘정무위원회’ 구상을 추진할 때 이에 협조했던 것이다.

     고하는 삼상결정이 전해졌을 때 그가 우려하던 신탁통치 실시가 가시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미군정도 3상 결정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군정을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미군정과 연합하여 국제적 여론의 환기를 통해 미국의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또한 3상 결정이 불가피하게 실시될 때를 대비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고하의 3상 결정과 신탁통치에 대한 입장은 1945년 12월말의 시점에서 굳이 나누자면 반탁론에 서 있는 것이었다.


  6. 동아일보사사, 1978년


     그러나 반탁을 주장하는 민족진영 속에도 방법을 놓고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임정계는 즉시 미군정을 부인하고 독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정권을 인수하자는 주장을 편 반면, 송진우는 반탁은 국민운동을 통해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목적을 달성할 일이요 미군정과는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당시의 격앙된 분위기에서 극단론자들은 송진우의 의견을 마치 찬탁이라도 하는 듯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송진우는 냉정한 현실 정치가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미국은 여론의 나라요, 또 우리를 깊이 이해하는 중국도 있는 터라, 실효도 없이 군정을 부인해서 국제적 고립을 초래할 것이 아니라 국민운동으로 국제여론을 환기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바꾸는 게 현명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단순히 삼상회의의 당사자라 하여 미국을 적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국의 손으로 신탁통치의 결정을 뒤엎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7.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신동아 2003년 12월호, 400~413쪽.


     강원용 목사: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토론이 시작된 것은 1945년 12월 29일 밤 김구 선생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큰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어요.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으니까. 남로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어요. 다들 아주 격해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우리가 왜 서양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어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어요. 송진우 선생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지만. 이 박사는 그날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당시 그는 신탁통치에 대해 담화를 낸 일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나서서 뭘 하자고 한 적이 없어요. 그분의 정치적 판단으로는 신탁통치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던 듯합니다. 제가 보건대 반탁운동이 고양되던 상황에서 누구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을 읽어보거나 면밀하게 검토한 사람이 없었어요. 방송만 들은 겁니다. 그저 다들 격해 있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자세히 알게 되면서부터 달라진 겁니다. 남로당과 좌익에서는 3상회의를 지지하고 나섰고, 온건세력은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어요. 이들이 3상회의 결정안에 반대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에 어떻게 통일정부를 세울 것이냐를 논의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를 해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해서 하자는 것이었어요. 김규식 박사 계열이나 안재홍 씨, 그리고 한국민주당까지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탁통치 반대세력이 매우 강했던 거죠. 경교장 모임 이틀 후인 1945년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궐기대회를 했어요. 그때 저도 강연 등을 했는데, 그때까지는 여론이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1월 초에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에서 3상회의를 지지하고 나왔어요. 여기에서 지지 세력과 반대세력이 부딪쳤는데, 그때부터 5월 사이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세력들이 차츰 내용을 알게 되면서 운동의 강도가 약해졌습니다. 5월 초순에는 양측이 남산과 서울운동장으로 나뉘어 모였는데, 저는 아무 데도 안 갔어요.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경교장 모임으로 다시 돌아가서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날 송진우 선생이 반탁이 주조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했다고 하셨는데, 그는 경교장 모임에서 귀가한 직후 암살당했습니다. 암살자는 이전에 송진우 선생의 경호원을 하다가 그만둔 사람으로 밝혀졌죠. 그런데 나중에 장택상 씨가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사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 “경교장에서 모인 날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겁니다(로빈슨 저 ‘미국의 배반’ 참조). 당시 그런 소문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강: 김구 선생과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송진우 선생을 죽인 한현우가 법정에서 한 얘기가 있습니다. “왜 송진우 선생을 죽였냐.”고 물으니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했어요. 둘 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먼저 여운형 선생을 죽이려고 따라다녔답니다. 그러다 종로3가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여운형 선생이 걸어오는 걸 보고 죽이려 했는데, 그가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아, 현우군! 오랜만일세” 하고 다가와서는 어깨를 탁탁 두드리니 차마 못 죽이겠더라는 거예요. 한현우가 두 사람을 다 죽이고자 했다면 김구 선생이 개입됐을 리는 없습니다. 김구 선생은 1947년 장덕수 선생 암살 배후로도 의심받아서 미군정이 그를 법정에 불러내 조사하려 한 일이 있죠. 미국 사람들이 송진우 선생을 죽인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다고 봤다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을 겁니다. 미 군정은 김구 선생을 싫어했으니까. 그를 테러리스트로 봤거든요(송진우, 장덕수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박태균 저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도진순저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참조).


     박: 지금의 시각으로 모스크바 3상협정을 돌아본다면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강: 저는 송진우 선생이 당시 정치가로서는 가장 머리를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밤 그는 “3상회의 결의문도 읽지 않고 방송만 듣고 떠들어선 안 된다”며 “길어야 5년 이내에 끝나는 신탁통치를 하고 결국엔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의논해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운다고 하는데, 이대로라면 우리가 5년을 왜 못 견딘다는 말이냐”고 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 끼어들지 않고 우리끼리 정부를 세우라고 하면 과연 우리가 5년 안에 통일정부를 세울 자신이 있느냐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저는 ‘저 사람이 무슨 저 따위 소리를 하고 있냐’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역시 송진우 선생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때 우리가 3상회의 결과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쉽게 통일정부가 섰으리라곤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3상회의 자체를 결사반대한 것은 잘못이었어요. 미소공동위원회에 들어가 당당히 우리 입장을 내세우다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몰라도 미리부터 반대한 건 옳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누군가가 좌익이냐 우익이냐, 정통이냐 비 정통이냐를 평가하는 데 있어 신탁통치에 반대했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아요. 이건 옳지 못해요. 물론 제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모임에 적극 참여하며 연설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신중하지 못한 판단이었습니다.


     박: 이승만 박사가 반탁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셨는데, 이 박사가 종교를 이용했다고 볼 여지는 없습니까. 시간적으로 조금 뒤의 일이지만, 장면 박사도 그렇게 이용당한 측면이 있지 않나요.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사로서 말입니다.


     강: 장면 박사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저와 기독교 모임에서 종종 만났어요. 그런데 제가 평가하건대 그분은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집안이 독실한 가톨릭인데, 이 박사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끌어들이려 했어요. 개신교에서는 이윤영 목사를 끌어넣었어요. 이윤영 목사는 1948년 첫 국회가 열릴 때 개회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당시 가톨릭 지도자들이 중간파와 백범을 지지하니까 장면 씨를 끌어간 겁니다. 이 박사는 장면 박사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죠. 당시 국회는 제헌국회였습니다. 제헌국회 의장은 이 박사 본인 아닙니까. 그런데 이 박사가 사회를 보다 말고 단하로 내려와서는 장면 박사 곁에 가서 귀에 대고 무슨 얘긴가를 속삭이는 척하는 거예요. 장 박사를 키우기 위해 ‘나와 이렇게 하는 사이다’는 걸 보여준 거죠. 하지만 한마디로 장면 박사는 기본적으로 이승만, 조병옥 같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분을 해방 후의 여느 정치가들과는 다르게 봅니다. 대단히 선량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마침내 이 박사, 자유당과 갈라지게 됐죠.


  8. 김구 주석의 중대발언-독립운동 새로 출발, 1945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


     탁치제 반대에 대한 긴급조치안 4항과 연합국에 발송할 전문과 그 이유 4항을 결의한 후 임정에서는 각 정당에 대표 2인씩과 6대 종교단체의 대표와 각 신문사 기자의 참집을 요청하야 지난 28일 오후 8시에 약 70명의 애국 동지의 모임을 열게 되었다. 8시 반에 김구 주석 이시영 원로를 중심하야 좌우는 요인이 열석한 후 각 당 각계의 대표 70여명이 일당에 모여 흥분과 울분 속에서 연합회의를 열었다.

     긴장된 가운데 김구 주석으로부터 해외에서 30년 동안 싸우다가 고국의 강토를 밟게 되어 삼천만 동포를 해후케 될 때에 이 사람은 삼천만 동포와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언명한 바 있었다. 불행히도 이 사람의 말이 들어맞아서 지금부터 새 출발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우리가 기대치 않던 탁치라는 문제가 삼천만의 머리위에 덮어씌워졌다. 우리가 이것을 물리치기 위하야 덮어씌우려는 탁치의 보자기를 벗어날 운동을 전개하여야 하겠는데 오늘밤 모인 각 대표의 이 모임으로 만족한 회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일이 급하므로 우선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만하면 우리 정부의 결정적 의사를 발표하여도 좋겠다하여 발표하는 바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9.  국제정의와 민족보존 위해 불합작운동 전개, 임정 지휘로 국민총동원위원회 설치, 1945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


     임시정부에서도 사태의 중대성을 느끼고 28일 오후 4시경부터 긴급국무위원회를 개최한 후 바로 각 정당(2인) 각 종교단체(1인) 각 언론기관 대표자를 초청하야 비상대책회의를 동일(同日) 오후 8시 반부터 개최 심경에 이르기까지 백척간두에 서 있는 국운을 구출하고자 백열적 논의를 거듭한 결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금후 임정 국무위원회 지시 하에 일대 민족적 불합작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0. 각계 대표소집, 반대운동 토의, 1945년 12월 30일자 조선일보


     이 결의에 의하여 임시정부에서는 28일 밤 8시에 시내 각 정당대표 종교대표와 각 신문사 대표를 소집하고 김구 주석이하 요인 전원이 출석하여 먼저 김구 주석으로부터 신탁통치 반대에 대한 정부의 결의를 말하고 다음에 조소앙 외무부장으로부터 최근의 국제관계와 신탁통치에 대한 설명을 하여 모인 사람들의 주의를 더욱 일으키게 하고….

  11.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독립을 향한 집념-고하송진우전기, 동아일보사, 1990년

  12. 즉시 주권행사 간망, 좌우 양익(兩翼) 임정에 건의,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지난 29일 오후 2시부터 경교동 임정 숙사에서 김구 주석이하 국무위원 전원과 각 정당 각단체 대표가 집합하야 신탁관리 절대반대운동에 관한 중대회의가 있고 신탁관리 절대반대운동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함에 관하야 임정 측에서 참가할 9명의 지도위원에게 90명의 좌우익과 각계 각층을 총망라한 중앙위원을 선정하야 삼십일에 발표하기로 결정되었다.

     중앙위원을 선정하기 위하여 오후 5시에 임정요인이 퇴장한 후 계속하야 신탁관리절대반대에 관한 토의가 있었다. 안재홍 씨를 임시의장으로 장시간 열렬히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건의안이 가결되어 임시정부에 건의하기로 되었다.


  13. 이상돈 전 국회의원,  ‘광복(光復) 주역(主役)-8.15 전후 고하 송진우’, 신동아 1977년 8월호, 120~126쪽


     일본제국주의가 중국대륙까지 침략하여 중일전쟁이 한창인 때였고, 일본 군벌의 화신인 조선총독 남차랑(南次郞)은 1936년에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공석 상에서 조선말 사용을 엄금하고 일본어만 쓰게 함은 물론, 조선 사람에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강요하였다.   그리고 각 급 학교를 비롯하여 각종 직장 단체소속 조선 사람들에게 강제로 일본 신궁 신사에 참배시킬 뿐만 아니라 전국 기독교 목사 장로 신부 교구장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불응하는 기독교인과 신자는 가차 없이 구속 투옥하였다. 이와 같은 식민지 폭정과 암흑시대에 고하는 철두철미 반일독립주의자이고 총독부정치에 거부하는 반골인물이었다.   남 총독이 동아, 조선 두 신문을 강제 폐간할 때만 보더라도 당시 동아일보사 고문인 고하는 비밀리에 일본 동경에 건너가서 평소 고하와 친분이 있는 일본귀족원 의원과 중의원의원을 만나 동아일보 강제폐간의 부당성을 역설하여 정치 문제화시켜 총독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하였다. 그러나 역불급(力不及)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돌아오자 서울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로경찰서 형사에 의하여 연행, 구속당했다가(1940년 5월초) 3개월 후에 동아일보 폐간이 결정되자 석방되었다.

     그 당시 필자도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신문이 폐간되는 바람에 실직자가 되어 간혹 원서동 고하 자택을 찾아가면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반드시 패망할 것이니 낙심 말고 적당한 직장에 가서 은신하고 있다가 재기를 도모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하 말에 따라 보신책으로 나의 개성과는 거리가 먼 천일약방에 취직하여 2년간을 보냈다. 국민총동원, 내전일체, 황국신민화 등의 구호 밑에 그 당시의 지도급인사와 지식인 등을 강제로 동원하고 협력하게 만들었다.   본의 아니든 간에 많은 교육자 언론인 문인 종교인 등이 일제에 아부하는 연설을 하고 글을 쓰는 시를 쓰는 등 추잡한 세류(世流)가 우리 사회를 뒤덮게 되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민족의 지도급 인사가 변절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일제에 충성을 다하는 표정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여 설치고 다니는 판이었다. 물론 일제의 간흉한 정략에 의한 위협과 협박, 회유 등으로 본의 아닌 변절을 한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시국에 대한 오판으로 자기의 지조와 정치신조를 헐값으로 팔아버린 사람이 많았다.

     일제는 고하에게도 전쟁에 협력하라고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다. 그러나 고하는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회유와 협박을 지혜스럽고 슬기롭게 회피하는 것이었다. 고하는 별당 넓은 방에서 모시 고이적삼을 입고 혼자서 골패 짝을 맞추고 있다가 나를 반가이 맞아주는데, 풍로(風爐)에 약탕반이 놓여 있기에 나는 어디가 편치 않으시냐고 물었다. 고하는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요사이 달갑지 않은 손님이 자꾸 찾아와서 졸라대는 것이 있어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때 유행하던 국민복을 입고 머리도 까까머리로 깎은 손님이 찾아왔다. 명함을 보니 조선 사람으로 총독부 과장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자리를 피하여 옆 대청마루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전국(戰局)이 점점 심각하게 되니 송 선생께서 나오셔서 협력해주셔야겠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고하는 “보시다시피 나는 신병이 있어서 현재 한약을 장기 복용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나보다는 더 역량과 기량이 있는 분이 많은데 굳이 나 같은 인간이 나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라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아무쪼록 복약하시고 몸조심 잘 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풍로에 한약을 다리는 것이 고하의 위장전술인 것을 깨닫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944년 봄이라고 기억된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당시 지도급 인사로서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 글을 한 번도 쓰지 않은 사람은 한용운과 고하와 조병옥, 홍명희 등 몇 사람뿐인 줄 안다. 고하는 여러 가지 협박과 회유도 물리치고 전쟁을 찬양하는 본의 아닌 글을 끝내 쓰지 않았다. 그런데 총독부 당국에서 고하에게 너무도 집요하게 방송을 하라고 강요하자 고하는 하는 수 없이 방송국에 나갔다. 10분 이내로 방송시간이 제한된 것을 기회로 해서 고하는 마이크 앞에서 “전국의 동포 여러분! 시국이 날로 중차대하고 전쟁의 양상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여러분은 각자 생업에 충실하고 생산력증강에 가일층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화목 단결하고 보건위생에 주의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유언과 비어에 조심하여 법망에 걸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기 바랍니다.”라고 간략하고도 의미심장한 몇 마디 말로 방송을 끝맺고 말았다. 이 방송을 듣고 나서 일본인 모 고관은 “송진우란 자는 참으로 상대하기 곤란한 자다. 간단히 다룰 수 없는 인간이다.” 고 말하더라는 것을 그 당시 매일신보  총독부 출입기자인 곽복산에게 들었다.

     일본 총독부에 의해서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된 후에도 고하는 동아일보사실(室)을 일본 기업체에 매각하라는 총독부의 권유를 일축하고 인촌 김성수와 상의 후에 동본사라는 간판을 붙이고 일본인 대기업체에 임대해주어 임대료를 매월 또박 또박 받았다. 고하는 미구불원(未久不遠)해서 일본이 패전하면 조선이 독립될 것이고, 그 때에는 동아일보도 복간되고 동아일보사실(室)도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선견의 명과 확신을 가지고 김우성(전 동아일보사 경리사원)에게 동본사의 관리책임을 맡겼다. 고하 자신도 유서 깊은 동아일보 건물 한 귀퉁이 동본사 사무실에 간혹 나와서 친구도 만나고 저녁에는 옛날 동아일보 관계자들과 만나 요리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실의를 달래기도 했다. 고하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민족의 정기가 사라지고 정(正)과 사(邪)가 혼란된 암당하기 비할 데 없는 식민지 암흑 폭정 하에서 정치적 신념과 지조를 변치 않고 호방한 기개와 불굴의 투혼으로 날이 갈수록 패색이 농후해가는 전국을 응시하고 있었다. 때로는 상경하는 옛날 동아일보 지방지국장들과 저녁에 술을 나누며 서로 위로도 하고, 때로는 인촌 김성수, 백관수, 김병로, 김용무, 김준연, 정인보 등과 서울 교외 창동(倉洞)에 나가 동아일보사 주주이고 친우인 장현중 자택에서 술을 마시고 그 특유의 고담준론으로 울분을 달래기도 했다.

     8.15해방 직후 국내 정국은 혼란의 극에 달했다. 고하는 국민대회준비위원회 각 지방조직을 결성하는 동시에 인공반대 세력인 민족주의 정당 한국민주당을 결성(9.16)하고 수석총무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8.15해방 후 미군정 초기에는 방송국과 신문사에는 공산좌익계가 침투하여 사상적 혼란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다가 11월 23일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개제 속간되자 그 사설과 논조가 좌경화되고 우후죽순 같이 발행되는 공산당기관지 인민일보, 해방일보가 판을 쳐 세상이 온통 공산당 천하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때에 고하가 동아일보의 복간을 서둘러 12월 1일에 동아일보사 간판을 서울공인사(公印社)에 붙이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공산당의 최대의 적인 한국민주당 수석총무가 되고 반공 신문인 동아일보 사장이 되고 미군정고문이 된 고하를 비난 공격하는 공산당의 모략중상 벽보와 전단이 서울 시내에 범람하게 된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해외에서 돌아온 임정파에서까지도 고하를 질시하고 중상하는 것은 참으로 의외의 사태로, 임정 절대 지지를 위해서 분골쇄신하며 공산당과 투쟁한 고하로서는 정치무상과 냉혹한 현실을 개탄치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기야 해외파가 국내에 돌아와서 고하의 탁월한 식견과 그의 폭넓은 정략가로서의 역량과, 그리고 강대한 정치적 기반 등을 종합해볼 때 미구에 전개될 정권쟁취에 가장 무시 못 할 적수라고 보았을 것만은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하의 기개는 북악(北岳)과 한강수를 삼킬 큰 야망과 불타는 의욕을 갖추었다. 격동하는 정세를 예의 응시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정치적 기반을 정지(整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기의 영도 하에 있는 한국민주당의 지방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초대집권자로 공인된 이승만 측근에 고하 자기사람을 배치하고 미군정요직에 한국민주당 간부를 추천하는 등 빈틈없는 정치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판국에 고하에 대한 정적도 많고 고하에 대한 질시와 중상모략도 심하였다. 거목일수록 강풍에 닿는 면이 많은 것과 같이 정치적 거인일수록 정적의 중상과 모해가 큰 것이다. 고하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 5개년 신탁통치안이 결정 발표되자 정국은 극도의 혼란 상태로 들어갔다. 전국 각지에서 신탁통치반대의 파고가 높게 치솟았다. 이때에 고하가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중상과 모략이 해외파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고하는 앞에서 말한 중국 ‘대공보’ 기자와의 회견내용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신탁통치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신탁통치를 반대 투쟁하는 그 방법과 수단에 있어서 해외파와 의견을 달리할 뿐이었다. 임정파에서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방법으로 미군정을 반대하고 임정기구가 미군정을 접수하여 임정이 곧 신생대한민국의 정식정부로 그 주권행사를 하자고 주장하는데 반해서, 고하는 어디까지나 미군정과 협력해서 공산당을 타도하고 신탁통치를 반대하자는 현실론을 앞세웠던 것이다.

     고하는 본디 성격이 호방하여 측근들이 신변보호를 권고하였지만 청이불문(廳而不聞)하고 침실의 덧문도 잠그지 않고 자는 습성이었다. “앙천부지(仰天俯地)해서 민족과 조국에 죄를 짓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나를 죽이겠는가!” 이와 같은 신념과 자신이 고하로 하여금 자기생명을 무방비상태로 방치하여 정치테러의 희생이 되고 만 것이다.

     고하가 원서동 자택 별당에서 한현우의 흉탄에 쓰러지던 날 즉 12월 30일(고하 송진우가 12월 30일 새벽에 저격을 당했기 때문에 29일의 착각-인용자 주) 밤 8시쯤 나는 종로 YMCA 강당에서 고하를 만났다. 그때 각 정당 사회단체연합으로 시급한 식량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고하가 뒤늦게 한복에 인바네스 외투를 입고 참석하였다. 내가 인사를 하니까 임정요인들과 경교장(京橋莊)에서 신탁반대 대책회의를 끝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말하고 중도에 퇴장하였다. 그것이 내가 고하를 만난 마지막이었다.

     만일에 고하가 음험한 정치테러에 희생이 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수립 전후의 우리나라 정치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고하는 확실히 정치적 거인이었다. 정치에서 잔꾀와 술수를 배제하고 ‘무인의 대책’이라는 정치 신조와 철학을 과감하게 실천하다가 경륜을 펴보지도 못하고 55세를 일기로 아깝게 쓰러진 거목이다.


  14.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고하송진우선생전, 1965년

     

     마침 여러 날 묵고 있던 외종(外從) 양중묵이 출타중이어서 고하는 홀로 저녁상을 받았다. 저녁 7시경 원세훈에게서 고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고하와 임정간에 의견이 달라졌다는데 사실이오.”

    “글쎄 임정에서는 모두 짚신감발을 하고 걸어다니면서라도 반탁을 한다 합디다. 반탁이 문제가 아니라 군정과 충돌을 일으켜놓고 임정이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나도 알 수가 없소.”

     고하와 원세훈간의 전화가 있은지 얼마 후에 양중묵이 돌아오고 강병순이 찾아왔다.

    고하는 밤 10시께 취침했다.


  15. 사설-일주(一柱)를 잃다,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조조(早朝) 고하 송진우 선생은 원서동 자택에서 흉탄을 밧고 홀연히 작고하였다. 해방의 서광이 요운(妖雲)에 싸인 채 저물어가는 이 해의 마지막 전 날이오 망국의 통분을 풀지 못한 채 탁치의 비보를 듣게 된 다음의 다음날 독립전선에 뿌려질 허다한 생혈의 선두를 가로 맡아 엄연히 순국하였다.

     희(噫)라! 이 하등(何等)의 비보인가? 이 하등의 통사(痛事)인가? 그러나 비보라 하여서 통사라 하여서 곡지통지(哭之痛之)만 하기에는 이 거인의 최후가 빚어놓은 국가적 표정이 너무나 장엄하고 너무나 존귀한 바 있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수자가 그 누구임을 사색(査索)할 필요가 없으리라. 암해(暗害)의 목적이 그 어디에 있음을 추궁할 필요도 없으리라. 다만 민족의 갱생을 위하여 진운하는 우리의 도정에 피를 보았다! 하면 그만일 것이다. 3천만 민중이 다 같이 그 피를 뚜렷이 보았다! 함으로 족하다 할 것이다. 광복의 거역(巨役)을 위하여 분투하려는 우리의 건설이 한 개의 기둥을 잃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응시하고 투시하고 헛그러고 이로써 민족적 정기를 다시금 다듬어 권토중래의 진운을 그대로 단속한다고 하면 선생의 일사(一死)는 단순한 비보가 아니라 경보(警報)다. 우국의 경보요 애국의 신호다. 선생의 본회(本懷, 본디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가 진실로 여기에 있었거니 생생한 이 혈사(血史)의 일행(一行)을 읽는 자─다 같이 신지(信地)의 일점에 응집되어 자주의 독립을 완성한다면 선생의 낙(樂)이 오히려 무궁할 것이다.

     선생의 풍도(風度)와 선생의 평생을 여기에 서술할 여유 없음을 한(恨)하거니와 일언으로 빠지면 선생은 철두철미 의지의 인(人)이며 신념의 인(人)이었다.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을 사랑하되 소신을 부동하고 고절(苦節)을 고수하는 강혁(强革)의 인(人)이었다. 육영(育英)의 기(基)를 닦았으나 낙(樂)이 있을 수 없었고 보필(報筆)의 책(責)을 마쳤으나 쾌(快)를 얻은 바 없었으니 위정(僞政)의 제압 하에 영일(寧日)이 없었든 까닭이었다. 이리하여 혹은 옥창(獄窓)의 고(苦)를 겪고 혹은 속박을 당하되 일념은 오로지 국가 민족의 재생에 있었고 세도민심(世道民心)의 쇄신에 있었다.

     때도 때인 이 때 조국은 광복 말년에 선생을 중도에 잃게 되니 동지의 한은 얼마나 깊은 것이며 민족의 손(損)은 얼마나 클 것인가? 선생을 위하야 곡함이 아니라 선생의 사(死)를 위하야 곡함이 아니라 이 겨레의 금일을 위하야, 이 겨레의 명일을 위하야 우리는 일곡(一哭)을 금할 수 없으니 3천만 형제여 이 거인의 흉변을 기연(機緣, 기회와 인연)삼아 다 같이 시일에 방성대곡하자! 그리고 명일부터 다 같이 방성대호(放聲大呼)하자! ‘각 길로 한 신지(信地) 완전한 자주독립!’


  16.  KBS 다큐멘터리극장 ‘정치암살의 희생자들-제1부 고하 송진우’, 1994년 2월 6일 방송 


     해설(고원정, 작가): 안녕하십니까. 고원정입니다. 다큐멘터리극장에서는 오늘부터 4회에 걸쳐서 한국 현대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정국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역사적 현실의 뿌리가 바로 거기에 있고, 아직 미해결로 남겨진 민족의 과제를 풀어나갈 지혜 또한 바로 그 해방공간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주독립국가 건설, 비록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그 길로 매진하고 있을 때 네 사람의 정치지도자가 희생됩니다. 작은 힘이라도 서로 모아야만 했을 그 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암살이라는 방법이 서슴없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희생자들의 당시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해볼 때 그 암살 행위는 우리 역사 그 자체에 대한 테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한민당 수석총무 고하 송진우.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 몽양 여운형, 한민당 정치부장 설산 장덕수, 그리고 백범 김구가 그 희생자들입니다. 다큐멘터리극장은 이 네 사람이 왜, 무슨 이유로 희생되어야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가면서 해방공간의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고하 송진우 편입니다.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둔 해방 직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중략)


     마지막 멘트: 어떤 이유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무조건적인 반탁운동은 송진우 암살사건 이후에 점차적으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됩니다. 임정을 주축으로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펼쳤던 상황이 조선공산당 측의 갑작스런 태도 돌변으로 양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로소 신탁통치 문제는 좌우익의 분열과 대립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반탁의 회오리 속에서 쓰러진 고하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에 따르면 송진우는 찬탁을 주장했고, 그래서 암살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송진우가 찬탁을 주장했다는 분명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는 단지 하루빨리 자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른바 ‘훈정론’ 입니다. 그는 또한 신탁통치에는 반대하지만, 그 방법에서 미군정과의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같은 그의 정치노선이 당시의 반탁 분위기에서는 찬탁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송진우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문제해결방식은 무모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앞뒤를 가리지 않던 명분론자, 이상주의자들에게는 대세를 따르지 않는 송진우는 어떤 방법으로든 제거해야할 대상이었고, 그것이 곧 애국행위라는 극단적인 흑백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정치테러의 첫 번째 희생자인 고하 송진우. 그의 죽음의 원인은 소영웅주의자의 도발적인 테러라기보다는 해방정국의 분열과 대립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타협과 협력은 사라지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해방정국의 분열된 재단 위에 고하는 쓰러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정치풍토 또한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17. 이완범,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7) 송진우’, 주간조선 1923호 2006.9.25


     1945년 12월 30일 밤, 고하는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고하를 암살했던 세력은 “고하가 찬탁론자이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사후적으로 합리화하려 했다. 반대파 암살을 사후적으로 호도하려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12월 30일은 아직 찬탁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찬탁과 반탁의 첨예한 대립 구도는 이듬해인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의 모스크바결정 지지노선 전환 이후에 등장했다. 따라서 그의 성장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암살한 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찬탁론자로 덮어씌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송진우는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자에 실린 ‘최후까지 투쟁하자’라는 글을 통해 “국제신의를 무시하고 세계사적 발전을 저해하는 조선의 탁치(託治) 운운은 단연코 배격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남녀노유(男女老幼)를 막론하고 삼천만이 일인도 빠짐없이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위하여 이 강토 위에 있는 동지는 피 한 방울이 남지 않도록 결사적 용투로써 우리가 당당히 가져야 할 민족주권을 찾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그의 입장은 찬탁은 아니었지만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배타적 반탁론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 점도 있어 후일 암살자들이 찬탁이라고 호도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임시정부가 미국과 정면적으로 대립하려 했을 때 국제정세를 의식했던 고하는 다소 다른 입장을 보였다. 임정의 ‘감정적 반탁’과 미 군정의 ‘질서 교란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라는 대립구조 속에서 고하는 중재를 하려 했다. 고하는 “국민운동을 통해 반탁을 부르짖되 과격한 반탁운동을 하여 미 군정과 충돌하는 불상사는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하의 연합국에 대한 타협적 노선은 식민지 시대 이래의 실력양성론, 독립준비론, 세계대세에 대한 분석과 연장선상에 있었다. 미군 상륙 후 고하는 정치훈련, 이른바 ‘훈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그러면서도 훈정을 짧게 끝내자는 토를 달았다) 이에 입각하여 군정에 적극 협력하기로 당론을 결정했으며 미 군정의 여당 격이 되었던 것이다.

     후일 탁치(托治) 문제가 제기되자 암살을 지시한 세력은 그의 훈정론을 찬탁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고하는 탁치에 찬성한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단지 감정적 반탁운동에 대해 방법론상의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매국적 연설을 했다”고 후일 매도당했다. 실제로 지지 연설을 한 적은 없으며 그럴 시간도 없었다. 요인들 간의 토론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훈정론을 공개적으로 역설한 적은 없었으며 반탁의 방법을 신중하게 하자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의 노선은 ‘신중한 반탁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 상황인식 아래 보다 합리적·이성적인 반탁운동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던 고하의 노선이 감정적 민족주의자의 눈에는 용인될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 고하는 식민지 시대부터 암살당할 때까지 정치적 훈련(교육)을 강조하는 준비론자(훈정론자)로 일관했다. 그는 “5년간의 신탁통치가 훈정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미군정에 대한 정면적 반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그의 실력배양론과 준비론은 즉시 독립을 원했던 당시의 국민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성적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하 암살 후 김구(金九)의 임시정부는 미 군정에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미군정으로부터 ‘쿠데타 기도’라고 간주되었다. 또한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이 1946년 1월 2일 모스크바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 지지노선으로 전환한 이후 고착화된 찬·반탁의 양극화된 대립구도 속에서 고하의 신중한 입장은 더욱 더 설 땅을 잃었다.

     그러나 1946년 봄 이후 미·소공동위원회(공위로 약칭)가 개최되면서 공위 참여를 둘러싸고 반탁의 분위기는 다소 진정되면서 한민당과 이승만(李承晩)의 신중한 반탁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종국적으로는 탁치 문제를 포함한 모든 정치적 문제를 경직되지 않고 융통성 있게 바라봤던 한민당과 이승만의 노선이 승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하의 이성론은 현실적 대안이 되었고 김구의 감성론은 이상론으로 남았다. 미국을 의식한 현실주의와 분단을 극복하려는 이상주의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대립했으며 현재까지도 현대사 해석의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18. 동아방송(DBS) 정계야화, 경무대 비화-제10회 정치 테러, 1965년 1월 26일 방송


    “오늘은 열 번째 시간으로 정치 테러 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대담에는 당시 경무대 초대 비서관이었던 박용만 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 씨 입니다.”


    -네. 해방직후 좌우익 대립이 한창이던 때에 정치 테러가 참 많았습니다. 특히 당시의 그 민족 지도자였던 여러 요인들이 45년서부터 한두 해 사이에 거의 그냥 요원의 불길처럼 테러에 쓸려서 말이죠 사라져 갔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참 허황하기도 한 이야기였습니다만 그 때 그 요인들 여러분들 암살 사건 같은 거 오늘은 그런 얘기를 좀 말씀을 들려주시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해방 후에 말이죠. 정치테러 말하자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정치테러에 제1호는 역시 1945년 12월 30일 날 있었던 그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 송진우 선생을 암살한 거, 이것이 아마 제일 처음인 것 같아요.


    -그렇죠.


    -근데 이 송진우 선생님은 그 때 한국민주당의 당수죠. 수석 총무로 계셨는데 그 때 죽인 사람이 누구냐면은 한현우라고 그 때 암살할 적에 이 한현우라는 사람은 29살 이었어요.

    이 사람이 결국 송진우 씨 댁까지 가 가지고 29일 날 그러니까 1945년 12월 29일 새벽에 그 송진우 선생을 암살을 했습니다.


    -해방되던 8·15 지나고 나서 한두 달밖에 안됐죠. 연말 첫 연말 때 그랬죠.

    그 때 아마 집에선가 그런…


    -네. 집에서 암살을 당했어요. 근데 이 한현우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할거 같으면 옛날부터 테러를 그 이 업으로 삼다시피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한현우라는 사람은 그 일본에 그 말렵에 일제 말렵에 그 유명한 정치가였던 나카노 세이고, 나카노 세이고라는 사람이 주제하던 동방회의 회원이었고 또 이 뿐 만아니라 이 자가 그 일본의 수상 겸 육상이었던 도조 히데키 이것을 갖다가 암살을 기도했다가 징역 10개월을 언도 받은 일이 있었어요. 그와 같이 이 전력이 말하자면 이 테러를 상습으로 늘 정치 테러를 하는 그와 같은 경력을 가졌던 사람이었죠.


    -그때 그 단독범이었죠 아마.


    -네. 그 때 그 단독범이었어요. 그리고 그 때 무긴가 뭔가 아마 받았지만은 지금은 뭐 나가가지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거예요.


    -그저 한현우 그 범인 말이죠. 그 동기는 그 때 뭐라고 나타났었죠?


    -그 때 밝혀진 동기로써는 말하자면 그 때 당시에 상당히 혼란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 씨를 암살함으로 인해가지고 그 여러 가지 일들이 잘 풀려 나갈 거다 하는 자기 착각에 사로잡혀가지고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에서 그냥 그대로 단순히 참 암살을 했어요.


    -그 후에 재판도 여러 번 있었고 그랬습니다만 말이죠. 뭐 단독범이다 이랬는데 그 배후 같은 게 역시 지내놓고 이제 보면 뭐 확실하게 드러났다고 볼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지금 그렇죠. 아직까지도 그 배후라는 것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우야무야로 그냥 넘어가고 말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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